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39
3부 1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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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태자를 책봉하는 문제로 편전에서 격론이 벌어진 4월 18일(양력 5월 27일)은 죽은 태자의 제삿날로부터 사흘 뒤였다. 그 논의 내용은 삽시간에 도성 전역으로 퍼졌다.
“민 학사, 자네는 어떤가. 자네는 그 일과 직접 관련된 당사자가 아닌가. 그러니까 당연히 조카가 태자가 되기를 바라겠지? 자네 동료들도 자네 덕 좀 보려나?”
“글쎄. 어디까지나 폐하의 뜻에 따를 일이지. 난 그저 자네와 같은 정5품 학사일 뿐이고, 우리 동료들도 내게 별 관심이 없네.”
애초에 한림원은 담당하는 업무가 학문이다. 그것도 문화, 예술, 철학 등이 주력 분야이니 여기서 일하는 관원들도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관인 집현전과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태자 책봉 문제는 지금 세간을 시끄럽게 만드는 가장 큰 화제지만, 이 사안과 관련해서 갖는 관심도 다들 호기심 수준이다. 물론 유력한 태자 후보인 성친왕의 장자 이은의 외숙인 민지원에게 관심이 없을 수는 없다. 그건 민지원이 그냥 둘러댄 거짓말이다.
“나야 애초에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건 자유롭게 입 밖에 낼 수 없는 처지야.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지 않나? 그보다 자네들 쪽은 어떤가? 집현전은 조용할 수가 없을 텐데.”
“다들 어수선하긴 하지. 어느 쪽이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으니까.”
민지원의 20년 지기 친구인 신윤성은 가배를 홀짝거리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수시로 밤을 새우는 집현전에서 일하려면 진한 가배 없이는 버틸 수가 없기에, 그도 역시 다른 학사들처럼 가배를 입에 달고 살았다.
“여기 가배 한 잔 더 다오.”
“예, 나리.”
점복(店服)인 서양식 치마저고리를 갖춰 입은 다녀가 쪼르르 달려와서 흰색 주전자에 든 가배를 따라주었다. 혈통이 섞여 머리카락은 갈색이고 두 눈은 파란색이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도성 토박이 억양 그대로였다.
“오늘도 예쁘구나. 헌데 아네타 너는 시집 안 가느냐? 내 좋은 혼처 좀 알아봐 주랴?”
집현전 학사들은 반촌다점을 워낙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다녀들 얼굴을 전부 알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 정도 수작은 다녀들도 다들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흘려넘겼다.
“희롱하지 마시어요. 혹시 과자는 더 안 필요하신가요?”
“되었다. 필요하거든 부르마.”
석묵필로 전표에다 가배 잔수를 기록한 다녀는 가배를 더 달라는 다른 손님 쪽으로 갔다. 그 경쾌한 뒷모습을 슬쩍 훔쳐보며 헤헤거리는 신윤성을 보고 민지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 쳐다보게, 닳겠네.”
“내가 저 아이를 옆에 앉히고 머리를 얹어주겠다고 덤비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러나. 그저 보기만이라도 마음껏 하게 내버려 두게.”
반촌다점에서는 다녀가 절대 손님과 동석하지 않는다. 백 년 전부터 이어지는 전통이다.
하지만 반촌다점을 모방해서 생겨난 다른 다점의 경우에는 동석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한 수작까지 가능한 곳도 있다. 당연히 그런 다점들은 색주가와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게다가 술도 팔기 때문에, 간판만 다점이지 실은 주점에 가깝다.
“뭐 어쨌든…양쪽 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다른 이야기가 아닐세. 양쪽 다 하나씩 흠이 있다는 말이지.”
“흠이라.”
민지원이 중얼거렸다. 근처 좌석에서 들리지 않도록, 가배잔을 입가에 갖다 댄 신윤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잖나. 경평공은 정통성이 부족하고, 성친왕 전하의 장자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태제를 두신다는 이야기도 나온 모양인데, 예왕 전하는 후보가 아닐 거야. 아닌 말로, 예왕 전하를 태제로 정하실 거였으면 굳이 성친왕 전하를 불러들이지도 않으셨을 게 아닌가.”
예왕이 정말 사대부의 모범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만천하가 알고 있다. 만약 예왕이 원래 황태자였다면 누구도 다음 제위에 관해 어떤 걱정도 하지 않았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태황은 굳이 성친왕을 불러들였다. 그럼 생각할 것도 없는 것 아닌가.
“폐하께서 후계자 문제에 관해 워낙 함구하신 탓에 그동안 평이 좋았고 세력도 많이 넓힌 예왕 전하 쪽을 지지하는 사람이 제법 많긴 했지. 성친왕 전하가 귀국하신 뒤에도 아직 그 미련들을 못 버렸고.”
“추방이 워낙 길지 않았나.”
“그래, 그래서 다들 성친왕 전하는 황적에서 파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지. 느닷없이 귀국령이 내렸을 때도 설마 하는 분위기였고. 그랬으니까 그동안 친분을 쌓은 예왕 전하가 등극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란 것 아닌가.”
집현전에는 예왕을 지지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예왕은 학식과 인품에서는 나무랄 부분이 없을지 몰라도 실무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탓이다. 갓 출사한 관리들이 얼마나 많은 삽질을 저지르는지 빤히 아는 집현전이니, 이미 경험이 충만한 성친왕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옛날 버릇만 다시 튀어나오지 않으신다면 성친왕 전하도 참 좋은 태제감이신데 말이지.”
신윤성은 궁궐에서 빠져나온 성친왕이 우물가에 숨어있다가 물 길으러 나오는 아낙네들이 머리에 인 물항아리를 십여 개나 활로 쏴 깨트린 사건을 끄집어냈다. 한숨을 내쉰 민지원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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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다음 태자가, 혹은 태제가 되느냐 하는 문제는 위로부터는 육조거리에서 아래로는 종로거리 상점 뒷방에서까지 모두 심각한 화제다. 어느 쪽이 등극하느냐에 따라 조정 세력 전체가 뒤흔들리고 여기에 줄을 대고 있던 상단들의 사업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조정에서도 조심스럽게 주고받아야 할 이야기들이 시중에 소문이 되어 나돌다니요. 참으로 망측한 일입니다.”
김창균의 지시에 따라 들고 온 문서 더미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신입 금부도사 박중헌이 불만을 토로했다. 박중헌은 김창균이 포도청에서 차출해온 유능한 수사관이면서 김창균을 보좌하는 임무도 더불어 수행하고 있다.
김창균은 석묵필을 돌리며 문서를 집어들었다. 시중에서 압수한 참보 견본들이다.
“그 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높으신 조정 양반들이 자기 집에 가서 퍼뜨렸지. 게다가 눈 달리고 입 달린 사람들이 참보를 보고 멋대로 떠드는 걸 어찌 다 막겠는가.”
그날 편전에서 오간 논의가 조보에 공식적으로 게재되지는 않았다. 태자가 책봉되었다고 알리는 기사라면 모를까, 누구를 태자로 혹은 태제로 책봉할지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다는 기사 따위가 조보에 실릴 리가 없으니 말이다.
물론 시보라고 해서 그런 기사를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건 아니다. 감히 백성 주제에 이런 국가 중대사에 관해 함부로 입을 놀리면 치도곤을 맞고 전가사변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참보는 괜히 참보가 아니다. 벌써 1년이나 태자가 없는 상태고 보니, 과연 태자가 될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멋대로 가늠한 참보가 숱하게 돌았다. 신고도 안 한 발행자들이 많아서 대체 누가 찍어내는지도 다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래도 벽서(壁書)가 돌던 시절보다는 나은 거지. 적어도 대놓고 길가에 붙이진 않으니.”
김창균이 참보 무더기를 하나하나 훑었다. 한동안 점검을 미뤄놨더니 그동안 정말 많이도 쌓였다.
“관가나 민간에서 도는 풍문은 그렇다 치고, 각 군영 내 분위기는 어떤가? 영장들이 어느 한쪽에 줄을 대고 변란을 일으키려고 들거나 하는 움직임은 없겠지?”
영장(營將)은 각 군영을 지휘하는 장수를 뜻하는 통칭이다. 오군영에 속하는 각 군영에서 가장 높은 총관도, 각 도 군영에 속한 연대장이나 대대장 등 장수들도 모두 영장이다.
“군기대에서 받은 통보에 따르면 각 군영 내에서는 아직 불온한 분위기가 없습니다. 예왕 전하와 친분이 있는 장수들이 꽤 있긴 하지만, 딱히 거병하려 한다거나 하는 움직임은 전혀 없답니다. 그것 외에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금위사가 조선 천지에 감시하지 않는 대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군대 내는 군기대가 감시를 맡아서 금위사와 병립하고 있다. 전국에 있는 군기대를 총괄하는 군기총관 역시 금위사장과 같은 종2품이고, 무관이지만 같이 의금부 동지사를 겸임하고 있다.
보고를 마치고 잠시 머뭇거리던 박중헌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이런 참보, 읽는 놈들까지 몽땅 잡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재주로? 이런 참보를 가져오는 놈에게 포상금을 준다고 했더니 포상금을 받으려고 직접 참보를 만들어서 가져오는 놈도 있는 세상인데. 그리고 일단 읽어야 고변을 할 텐데, 읽기만 한 놈도 추포한다면 누가 고발을 한단 말인가.”
박중헌에게 핀잔을 준 김창균이 눈앞에 쌓인 참보들을 빠르게 둘로 분류했다. 한 종류는 단순히 누가 다음 황태자가 되리라고 예상하기만 하는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한쪽을 심하게 비방하며 깎아내리는 것들이었다.
“이쪽 놈들은 찾아내면 함부로 국사를 논한 죄로 곤장을 치고 인쇄기와 활자를 몰수하게. 하지만 이쪽 놈들은 황실을 능멸한 죄가 추가되니 의금부에 넘겨서 가산을 몽땅 몰수하고 전가사변에 처하게 조치하도록.”
“예, 영감.”
금위사장은 대역죄를 수사할 권한과 수사를 진행하기 위해서 죄인을 심문할 권한은 쥐고 있으나 처벌할 권한은 없다. 다만 수사를 중단할 권한은 있으므로, 죄가 가볍다고 판단했을 경우 심문을 진행하다 말고 풀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영감께서는 과연 어느 분이 태자가 되실 것 같으시옵니까?”
“자네도 곤장 맛 좀 보고 싶은가?”
“아, 아닙니다.”
잠시 호기심을 드러냈던 박중헌이 얼른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김창균은 조용히 서랍에서 담배통을 꺼내 궐련 한 대를 피워물었다.
‘제 놈들도 역시 보위의 향방이 궁금한 건 어쩔 수 없겠지.’
금위사 관원이라고 해도 사람이다. 게다가 예왕에게 줄을 댄 관원들만 10여 명쯤은 되니, 그놈들은 지금 손이 발이 되도록 천지신명에게 빌고 있으리라. 보위가 예왕이나 경평공에게 넘어간다면 자기들이 벼락출세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과연 예왕 전하는 어쩌고 있으려나.’
지금 예왕저 내에서 신뢰할 수 있는 탐보꾼이 어린 계집애 하나뿐이라니, 실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새로 탐보꾼을 집어넣으려도 예왕저는 사람을 허술하게 들이지 않아서 어려웠다.
김창균이 피식 웃고는 꽁초를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뭘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태평하게 글이나 읽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 18 –
예왕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은밀하게 예왕저를 방문한 김세룡이 사위의 얼굴을 보고 잠시 섬?한 기분을 느꼈을 정도였다.
“승상께서는 어서 말해 보시오. 보름 전 대궐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소식은 다 들었으니, 망설일 것 없소.”
조정 전체의 일치된 의견을 바탕으로 태황이 별 고민 없이 성친왕의 장자 이은을 태자로 봉하리라던 예측은 일순간에 엎어졌다. 태황은 1년 동안 기다린 신하들 앞에서 새로 황자를 낳아 후계자로 삼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선언을 했고, 이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예왕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미쳐 날뛰지도 못했다. 도대체 형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서 하시오. 할 말이 있어서 오지 않았소? 혹시 배포가 모자라 입을 열기 어려우면 술기운으로라도 원기를 북돋우시구려.”
예왕은 이미 잔뜩 마신 듯 입에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술에 취했다고 넋이 나가거나 해롱거리지는 않았다. 도리어 무섭게 날이 선 날카로운 태도였다.
“전하!”
옆에 있던 예왕비가 장인에게 불손한 태도를 드러내는 예왕을 향해서 나지막하게 외쳤다. 잠시 아내를 돌아본 예왕이 입을 다물었다. 김세룡이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상황을 알고 계시니, 구차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절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째서?”
예왕이 아무리 사태를 희망적으로 생각해도 자기가 태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형황이 태제를 언급했다는 건 성친왕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폐하께서 은이 그놈을 태자로 봉하지 않으시면? 인제 와서 경평군을 태자로 봉하기라도 하신단 말이오?”
“네, 그러실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예왕이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김세룡은 불신에 찬 사위의 눈길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자기가 생각한 바를 설명했다.
“지금 폐하께서는 성친왕께서 과거에 저지른 온갖 잘못에 특사를 내리신 셈입니다. 조정 중신 전원이 폐하 앞에 엎드려서 성친왕 전하의 죄가 크지 않다고 하였으니, 옛날에 저지른 수많은 과오는 모두 어리기에 저지른 실수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친왕 전하가 옛날 같은 망나니라면 미주왕으로 봉할 수도 없습니다. 미주를 점한 채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알 수 없는데 어찌 그 중대한 자리를 내리겠습니까? 좌승상이 폐하께 뒤늦게 아뢴 것도, 성친왕께 그만한 자격이 있음을 먼저 공론화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왕이 역정을 냈다.
“그게 거기서 끝이 난 게 아니잖소. 그대가 말했듯, 폐하께서 성친왕을 미주왕으로 봉하여 내보내실 생각이었다면 태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잖소! 성친왕의 장자를 태자로 봉하고, 성친왕은 미주로 보내면 그만 아니오? 태제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요?”
“그건 폐하의 진심이 아닐 겁니다. 중신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날 논의를 적당히 끝내려 아무렇게나 던진 말씀이시지요.”
김세룡은 보름 동안 머리를 싸쥐고 드러나지 않은 태황의 진의와 자신이 앞으로 움직여야 할 바를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만 사위나 외손자를 제위에 올리고 가문이 권세를 누리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폐하께서 성친왕 전하를 태제로 봉하신다면, 17년 동안 추방된 원한을 풀겠다고 조정에 피바람을 몰고 올 위험을 생각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성친왕께서 지금 점잖게 행동하시는 건, 그 원한을 드러냈다가는 또다시 추방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금상은 일단 죄를 지은 데 대해서는 용서가 없는 사람이다. 아우가 사고를 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눈감아줄 사람이라면 애초에 18년 전에 견서사로 삼아 서방으로 추방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면 역시 다음 태자가 될 분은 경평공이십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이제까지 해오신 것처럼 언행을 주의하시고 두루 덕을 쌓으며 주요 인사들과의 친분을 유지하십시오. 그러면 여차하는 순간에도 다들 전하를 지지해줄 겁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소리 아니오. 그러다가 성친왕이 태제가 되면 어쩔 거요?”
“반대해 봐야지요. 그리고 태제가 되신다고 해도 기회가 있습니다. 성친왕께서는 태제로 책봉된다면 분명히 긴장이 풀어져서 무도하게 굴기 시작하실 테고, 옛 버릇이 되살아나면서 온갖 소란을 일으킬 겁니다. 복수심도 드러내겠지요. 그럼 어찌 되겠습니까?”
“폐…태제가 되는 건가?”
금상은 자기 친아들이라고 해도 군주로서 자질이 없다면 서슴없이 태자 자리에서 내쫓을 사람이다. 동생이라고 해도 암군이 될 것 같다면 걷어차 버릴 게 분명하다.
“그리고 기근이라고 해서 그동안 미뤄왔던 경평공의 혼사도 서두르십시오. 지금은 확실한 우리 편이 하나라도 더 필요합니다.”
“승상께서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니 부디 포기하지 마시고 마음을 다잡으십시오.”
최신원이 옆에서 거들었다. 예왕비 역시 동조하자 예왕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술.”
“예, 전하.”
예왕은 장옥정이 따르는 술을 마시며 오늘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들을 때는 가슴 속에서 불꽃이 치솟았지만, 다시 생각하니 그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안 한다면, 성친왕이 나를 칠 명분도 없는 게 아닌가.’
성친왕이 제위에 올라도 형황 시대의 분위기가 남아있다면 증거도 없이 예왕을 쳐내기는 곤란할 거다. 그러니 계속 조용히 있으면 예왕에게 손을 대지 않고 조용히 살게 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숨을 쉰 예왕이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자신이 왜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더 속이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