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4
1부 104화
– 9 –
“다 똑같구먼.”
내륙으로 진입해서 싸움을 시작한지 사흘째가 되었다. 그동안 보고가 들어온 왜적들의 저항 사례는 양상이 거의 비슷했다. 매복해 있던 소수가 활을 쏘아 아군 선두를 교란하고, 주의가 그리로 쏠린 사이 주력이 후미를 기습했다.
다행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기해동정 때 박실이 당했을 때처럼, 적이 제대로 방벽을 만들고 맞싸우려 한다는 보고는 아직까지 없었다.
“저들은 아직까지도 내륙에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군.”
이극균이 앞에 쌓인 보고서를 읽고 나서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섬 안을 계속 휩쓸면서 눈에 띄는 마을이란 마을은 모두 불태우도록 하세. 왜적이 기습할 우려가 있으니 군사들을 절대 300명 밑으로는 편성하지 않도록 하고, 후위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게. 좌군에도 파발을 보내 주의하라 명하도록.”
“예, 대감.”
좌군이 자리를 잡은 두지포와는 아직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우군이 차단한 지협까지 가는 도로는 개통했지만 거기서 두지포까지 가는 길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아 이용할 수 없었다. 명령을 전하자면 우군 주둔지에서부터 배를 타고 가는 수밖에 없다.
“산속에 숨어 있는 잔당들은 제쳐두고 마을부터 불태운다. 포수군은 몰라도 우리 관군은 산에서 적도들을 쫓아다니는 데는 영 솜씨가 없으니, 적도들의 부락이나 태우도록 하세.”
지시를 내리면서도 이극균은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가능하면 포수군 따위가 아니라 정규 관군이 공을 세우게 하고 싶건만, 여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여진을 상대하는 게 일상인 북도 병사라면 포수군에 뒤지지 않게 싸울 것이다. 임금이 요즘 심혈을 다해 조련 중인 경군 병사들도 웬만큼은 잘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왜구도 소규모로 나타날 뿐인 요즘, 남도 쪽 병사들은 아무래도 전력이 약했다.
“시간은 넉넉하네. 여차하면 이 섬을 통째로 불태워도 우리가 아까울 건 없으니까.”
“뭐, 어차피 우리 땅도 아니니 말이지요.”
유순정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분명 대마도는 이들에게 있어서 ‘우리 땅’이 아니었다. 아예 없었으면 더 좋을, 도적의 소굴인 척박한 섬일 뿐이었다.
“참, 잡아둔 왜인 사내들이 근 2백이 되지 않았나? 놈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혹시 난동을 일으킬 조짐은 없나?”
“그 점은 염려치 마십시오. 아주 대마도 놈들답습니다.”
“여기 밥 좀 더 주시오.”
“뱃속에 돼지 새끼가 들어앉았냐! 밥 없어!”
“사람을 가두었으면 밥은 먹을 만큼 줘야 할 것 아니오? 아니면 풀어주든가.”
“본래 그 성품이 간교하기 이를 데 없는 놈들이라, 우리 군량을 축내어서 피해를 줄 작정인 모양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는데도 계속 더 달라고 난리라 합니다. 우리말을 구사할 줄 아는 자가 많아 우리말로 조르니 더 처치곤란입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이극균이 웃음을 터트렸다. 보고하던 유순정은 얼굴을 찌푸렸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마을에서 잡혀온 이들은 대부분 노인들이고, 싸움에서 잡은 포로들은 대개 몸을 다친 상태라 난동을 일으킬 우려는 적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치지 않음을 알자 두 무리 모두 방자하게 굴면서 온종일 밥이 적다고 독촉하니 관리하기가 아주 까다롭습니다.”
“그냥 무시하라 하게. 그대 말마따나 난동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됐네.”
이극균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어차피 갇힌 거, 그 김에 공밥 한번 제대로 먹겠다는 대마도 왜인들의 심보가 재미있었다.
“다만 한 가지는 유의해야 할 것이야. 몇몇이 밥 따위 잡담으로 감시하는 우리 군사들을 현혹하는 사이 다른 자들이 탈출하려고 하든가, 바깥에 있는 자들과 연락하려고 할 수도 있네.”
“적도들이 우리 본영을 암습할 때를 기다려 일시에 탈출하여 내응할 수도 있다 보십니까?”
“그렇지. 우리 진영을 혼란에 빠트리려고 말일세.”
“소관이 보기에는 설마 싶습니다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충분히 유의토록 하겠습니다.”
– 10 –
“도체찰사 대감께서 꼭 떼를 지어 다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날도 저무는데….”
“우린 척후병일세. 절제사 대감 지시가 아니더라도, 척후가 무리로 다닐 수는 없지 않나?”
내금위 군사 6명이 조용히 숲속 길을 헤쳐 나가는 중이었다. 이들은 산중에 있을 대마도 주민들을 잡아내기 위해 나선 중군 우영 병력 중 선두였다. 오장(伍長. 졸병 5명을 거느리는 오의 대장, 분대장 격) 강석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절제사 대감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으니 할 수 없지. 완전히 어둡기 전에 좀 더 찾아보세.”
전투 첫날 후미 병력이 기습당해 1개 여를 통째로 잃은 박원종은 꼬리에 불이 붙은 소처럼 날뛰었다. 300명 이하로는 움직이지 말라는 도체찰사의 명령 따위는 무시하고, 그 이하로 병력을 흩어서 산속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그 자신도 마을에 머무르지 않고 군사를 이끌었다.
“그동안은 왜적들이 우리 기세에 겁을 먹었는지 꼬리도 비치지 않아 아무 일 없었지만, 좀 불안합니다. 그새 태세를 정비하고 또 복병을 심으면 어떻게 하지요.”
박원종 휘하에 있는 중군 우영은 지난 엿새 동안 산을 뒤져 300에 달하는 왜인 포로를 잡았다. 다만 이들은 모두 해안가 마을에서 도망친 피난민으로, 거의 다 부녀자와 어린아이였다. 싸울 만한 청장년 남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야…싸우면 되지. 칼 들어.”
속삭이던 대화가 멈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 수 있었다. 네 사람은 천천히 환도를 들었고 둘은 그 뒤에 몸을 숨긴 채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낌새는 느꼈지만 적이 어느 쪽에 있는지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기에 활을 들어 올리지는 않았다.
“여덟 명, 상대할 만한 숫자다. 괜히 겁먹지 마라.”
심호흡을 두 번 하는 사이 적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왜인들은 적당한 조선군이 지나가면 기습하려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사방을 둘러싼 적들 중 세 명은 창을, 나머지는 모두 장도를 들고 있었다. 활을 가진 이는 하나뿐인데, 자신의 키만큼 기다란 대궁이었다.
“혼자서 우릴 다 쓰러트릴 수는 없으니, 대신 패거리가 싸울 때 옆에서 돕겠다는 거군.”
백병전 상황이라도 적군에 궁수가 하나라도 있으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숙련된 궁수라면 코앞에 있는 적이라 해도 쉽게 해치울 수 있으니까. 칼을 막느라 몸을 움직이는데 화살이 날아든다면, 제대로 피하지도 못한다.
“저놈부터 쏴버려!”
다행히도 왜인 궁수는 이쪽에 궁수가 두 사람이나 있음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주변이 워낙 어두운데다, 두 사람 모두 활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었기에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수들이 번개같이 활을 들어 목표를 겨냥했다. 왼팔은 단단히 뻗었고 오른팔은 귀에 닿도록 시위를 당겼다. 당황한 왜인 궁수가 그제야 그들을 겨냥했으나 이미 화살은 활을 떠나고 있었다. 가슴과 배에 화살을 맞은 왜인 궁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자빠졌다.
왜적들은 궁수가 먼저 제압되자 당황했다. 하지만 이쪽이 소수라는 점에 기대를 걸었는지 물러나지 않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행여 위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함성도 지르지 않았다.
“쳐라!”
적이 장창을 가진 이상, 제자리에서 막기만 하다가는 찔린다. 강석현은 찔러오는 창을 몸을 젖혀 피했다. 그리고 앞으로 발을 내밀면서 왼손을 뻗어 창대를 낚아채 끌어당겼다. 당황한 왜인이 몸을 뒤로 젖히자 그대로 앞으로 나가면서 오른손을 뻗어 환도로 상대의 목을 찔렀다.
“나리! 숙이십쇼!”
경고하는 소리를 듣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생각할 틈도 없이 고개를 숙이자 방금 전까지 머리가 있던 위치를 가르고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앞에 나타나 칼을 휘두르려던 왜적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졌다. 화살이 인중에 꽂혀 있었다.
“고맙네!”
붙들고 있던 창대와 시체를 바닥에 던졌다. 이 시체 때문에 시야가 가려 그 뒤에서 달려드는 살수를 놓칠 뻔했다. 옆을 돌아보니 창을 들고 달려들던 다른 왜적들은 이미 화살에 맞고 둘 다 죽었고, 칼을 든 왜적 셋은 부하들과 하나씩 붙어서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강석현은 그대로 가장 가까이 있는 왜인의 등을 내리쳐서 쓰러트렸다. 둥이 베인 적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지자, 남은 둘이 당황했다. 8:6이라고 생각하고 덤볐는데, 싸우다 보니 어느새 2:6이 되어버렸다.
“놈들은 도망칠 때를 놓쳤다. 모두 베어라!”
강석현이 호령하자 남은 둘을 상대하던 칼날이 더 매서워졌다. 도망치려 하던 두 왜인은 사방이 포위되고, 활 두 자루까지 자신들을 겨누자 발을 멈췄다. 강석현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두 왜인이 들고 있던 칼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두 무릎을 꿇었다.
“살려만 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도주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능숙한 조선말로 구명하는 상대를 선뜻 베자니 그것도 힘든 노릇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강석현이 부하들을 보니 전부 비슷한 생각인 듯 했다. 아마 피해 없이 적을 모두 쓰러트린 덕에 다들 관대해진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자신도 포함해서.
“좋다, 살려주겠다. 허나 묶기는 해야겠다. 자네들 둘은 수급을 거두도록.”
사졸 하나가 가지고 있던 포승줄을 허리춤에서 풀었다. 세 명이 포로를 묶는 사이 나머지 둘은 쓰러트린 왜적 여섯의 목을 베었다. 오원 여섯이 수급 하나씩 나누고도 포로 두 명은 덤으로 남는 셈이니, 충분한 전과라 할 수 있었다. 강석현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 11 –
어둠이 깔린 시각. 이즈하라 바닷가에 위치한 조선군 본영에는 인적이 없었다. 파수를 서는 일부 군사들을 제외하면, 본영 내에는 탄약과 궁시, 식량 같은 치중물자만 쌓여 있을 뿐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극균의 지휘부도 도주 저택 안에 있었다.
조선군 지휘부는 애초에 군막을 치고 군막에 군사들을 머무르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상륙하니 사방에 널린 게 빈집이었다. 왜인들이 모조리 산으로 도망쳐 버린 탓이다.
빈집을 그대로 비워 두면 도주 측이 나중에 병사를 매복시킨다거나 할 수도 있다. 싹 다 태워 버리는 편이 가장 뒤탈 없이 후련하겠지만, 섬에서 가장 큰 고을을 태워버린다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논의를 거듭하다가 간단한 해결책이 나왔다. 숙사로 삼는 것이다.
집에 남겨두었던 여자들도 모두 끌어내서 남자들을 가둬둔 옆에 따로 수용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군사들을 십여 명씩 두어 각자 머무르는 집을 담당토록 했다. 이로써 군막을 쳐서 관리하는 수고를 덜고, 군사들이 괜찮은 지붕 밑에서 지내도록 할 수 있었다.
사실상 마을 전체가 조선군 군영이 되면서 육지 쪽은 철저하게 경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다 쪽은 아무래도 허술했다. 수군 전선들이 있다고 해도 수졸들은 모두 육지에서 자고 있으니 말이다. 탐망선이 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규슈 방면 바다를 주로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이용해 조각배 한 척이 천천히 포구 안을 파고들었다. 사람 여섯 명이 겨우 탈 만한 작은 배에 네 명이 타고, 나무통 너덧 개를 싣고 있었다. 배에 탄 이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두건을 썼으며 검은 복면으로 눈 밑을 가렸다. 배와 통도 검은 색으로 칠해놓았다.
네 사람은 배 바닥에 바짝 붙어서 물소리 하나 나지 않을 만큼 조용히 노를 저었다. 정박해 있는 조선군 전선과 조운선 사이를 지나면서도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뱃전 위에서 수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지만, 누구도 이들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마침내 배 바닥이 모래톱에 닿았다. 육지로 올라가 조금만 이동하면 조선군이 물자를 쌓아놓은 적치장이었다. 조심스럽게 배를 해안에 댄 네 사람이 각자 나무통을 하나씩 짊어졌다.
뭍에 올라선 네 사람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주변에 빛이라곤 조선군이 군데군데 피워놓은 화톳불뿐이었다. 파수병이 있었지만 검은 옷을 입고 어둠 속을 움직이는 이들을 보지 못했다.
마침내 조선군이 항구 한편 공터에 만들어놓은 적치장까지 도착했다. 멍석과 유포(油布)로 덮어놓은 무더기들이 각각 무엇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씩 불태우면 적에게는 큰 타격이 될 것이다. 뜨거운 맛을 보여줄 시간이었다.
선두에 있던 검은 옷이 조심스럽게 목책을 타고 올랐다. 사람 가슴 정도 높이인 목책을 넘은 그가 막 적치장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갑자기 불꽃 하나가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그 불꽃이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본 물건이었다.
주변을 살피며 차례를 기다리던 나머지 세 명은 느닷없이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울리고, 자신들에게 피와 뇌수가 튀자 깜짝 놀랐다. 급히 뒤돌아보자 대장이 목책에 기댄 채 천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머리는 날아가고 없었다.
깜짝 놀란 검은 옷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이 누군지, 어디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또 한 번 폭음이 울리고 한 명이 배를 움켜잡으며 쓰러졌다. 확실했다. 누군가가 이들에게 탄환을 날리고 있었다.
이미 불은 지를 수 없게 되었다. 사방에서 고함소리가 나고, 징을 치며 조선군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임무를 포기하고 배를 향해 줄달음치면 혹시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남은 두 명은 메고 있던 기름통을 벗어던지며 일시에 땅바닥을 박찼다.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포성이 울렸다. 이번에도 딱 한 발, 한 사람이 그대로 등을 맞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잠시 파르르 떨던 사지가 곧 움직임을 멈췄다.
마지막 한 명은 동료가 쓰러진 모습을 보고도 필사적으로 뛰었다. 아무리 명포수라도 포를 재장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이면 충분히 물가까지 갈 수 있다. 배에 탈 필요도 없다. 물속에 뛰어들 수만 있다면, 자맥질로 멀어질 수만 있다면….
다지는 천천히 파수대 밑으로 내려왔다. 총을 네 발이나 연속으로 쏘았더니 몸에서 화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네 번째 침입자는 조금 힘들었다. 어두운데다, 멀어져가는 표적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맞힌 걸 보면 그동안의 연습이 헛되지 않았다.
이번 공의 절반은 옆에 있으면서 장전한 총을 때맞춰 건네준 친우 목금의 몫이다. 상급이 나오거든 목금과 반씩 나누어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