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45
3부 163화
– 9 –
조정 중신들은 화재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를 거의 보지 않았다. 이들은 대개 동촌, 서촌, 북촌에 살았고 불길은 남촌을 주로 휩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마가 자기 집을 스쳐 가지 않았다고 기뻐하기에는 피해가 너무 컸다. 그래서 이들은 태황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해 보라. 피해를 본 구역이 얼마나 된다고?”
한성판윤 심영준은 태황 앞에 엎드린 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한성판윤은 도성인 한양 전체의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로 각부 대신과 같은 정2품이지만, 그만큼 책임질 일도 많다. 하지만 이번 대화재로 인한 피해는 심영준이 책임지고 말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왜 말을 못 하느냐!”
태황이 벽력 같은 고함을 쳤다. 새벽에 불이 났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일어나서 정오가 된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태황의 눈에는 온통 핏발이 서 있었다.
“죽여 주시옵소서!”
최근 몇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모습에, 이제껏 서 있던 중신들까지 모조리 공포에 질려서 바닥에 엎드렸다. 더 젊을 때는 태황도 종종 화를 냈지만, 나이가 들면서 되도록 평정심을 유지하고 거의 화를 내지 않았다. 기껏해야 차갑게 냉소하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말 그대로 대노하는 태황의 모습에, 조정 전체가 바싹 얼어붙었다. 심영준이 부들부들 떨면서 보고를 시작했다.
“나, 나, 남부 11방 중 7, 7개 방이 전소되었으며 주, 중부에서는 2개 방이….”
도성 성벽이 불길을 가두었고, 성벽 바로 바깥에는 들어선 건물이 거의 없었기에 화재가 도성 바깥으로 퍼지지는 않았다. 만약 도성 바깥까지 화재가 번져서 강변에 늘어선 조창에 불이 붙기라도 했다면 끔찍한 대재앙이 벌어졌으리라.
“금, 금화군과 한성부 관원들, 오군영 군사들이 총동원되어 불과 싸웠으니, 그, 그 덕으로 사대문이 모두 무, 무사하였고 대궐과 종묘가 화, 화를 피할 수 있었사옵니다.”
오군영 군사들이 본격적으로 투입된 건 거의 오경(五更)이 되어서였다. 타오르던 불길이 뻗어갈 수 있는 한계까지 타오른 뒤에 막 기세가 수그러들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래도 이 군사들 덕분에 남산으로 도망친 백성들이 떼죽음을 면했다. 남대문 쪽에 있던 수어청 군사들이 남산 밑에다 진을 치고 전력으로 싸워 불길을 막아내지 않았다면, 남산이 통째로 타버릴 뻔했다.
“그렇다 하여 남대문에서 벌어진 참상을 묵인할 수는 없다. 그 책임을 물어 총관은 직을 면해야 마땅하나, 당장 사정이 급하니 백의종군에 처한다! 그리고 남대문 수문장은 당장에 파직하고, 북변으로 유배한다!”
수문장이 잘못을 저지른 건 사태 초기에 판단을 잘못한 점이었다. 화재에 몰린 남촌 백성 다수가 성 밖으로 피하려고 남대문으로 몰려들었는데, 융통성이 부족한 수문장이 얼른 문을 열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 바람에 사고가 터졌다.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며 망설이던 수문장은 남대문 앞이 사람으로 미어터지고 다급해진 백성들이 성벽 안쪽을 기어오르는 지경이 되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불길에 쫓긴 난민들이 성문으로 빠져나가려고 일시에 몰리면서 짓밟혀 죽은 숫자만 수백 명이나 되었다.
“정확한 숫자를 고하여라!”
“하, 하, 하, 한성부 관원들이 남대문 앞에서 수, 수습한 남녀노유의 시신만 4, 4백여 구가 되옵고, 다, 다친 자가 2, 2천여 명은 넘사옵니다.”
“하!”
당장이라도 뭐가 날아들 것 같았다. 하지만 태황은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 뿐, 주변에 있는 물건을 움켜쥐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화인(火因)은 무엇이냐. 알아내었느냐?”
“예, 파악하였습니다.”
금화도감 제조 박정호가 급히 나서서 답했다. 금화도감은 산하에 금화군을 거느리고 직접 화재에 대처하는 이외에 화재의 원인을 조사하고 재발을 막는 대책을 세우는 일도 맡는다. 금화도감 제조도 각부 대신과 같은 정2품이다.
“반촌극장 지붕 위 망루에서 처음 불이 솟은 곳을 발견한 파수꾼의 보고와 처음 화재가 발원한 현장 일대에서 생존한 주민의 진술을 종합해 처음 불이 난 화원(火源)이 피맛골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피맛골은 본래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이나 가마 행렬을 피해서 일반 백성들이 다니는 길이었다. 요즘이야 그런 대피로로서의 의미는 없어졌지만, 주점이나 밥집이 가득 들어차서 성업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화재가 발생한 시각은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였는데, 어쩌다 불이 난 것인가?”
“인정이 울린 뒤에도 문을 닫아걸고 손님을 상대하던 주점에서, 튀김 요리를 조리하다가 실화로 기름 솥이 폭발한 것이 근원이었사옵니다.”
튀김집은 무종 시절에 고래기름이 싼값에 식용으로 공급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튀김은 ‘혁혜(革鞋, 가죽신)도 튀기면 맛있다’라는 소리가 돌 만큼 대중에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일반 민가에서 대량으로 기름을 구하고 다루는 건 아무래도 좀 까다로운 일이다. 그래서 대개는 저자에 있는 전문 튀김집에서 사다 먹는다.
“일이 제대로 되었으면 기름 솥에서 불이 나도 불꽃 위에 준비해둔 모래를 끼얹고 모포를 덮어 바로 수습했겠으나, 밤중이라 주방에 사람이 많지 않고 술청에 남은 이들도 죄다 취해 있어서 제대로 처치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지한 사환이 불을 끄겠다고 물을 끼얹었다가 불이 더 퍼지고, 그 상황에 북풍까지 거세게 부는 바람에….”
“자기들은 살겠다고 도망을 쳤다는 말이겠지!”
움찔한 박정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엎드렸다. 한성부 관아가 재수 좋게도 붙잡아둔 술꾼들을 심문했을 때, 그 역시 그놈들을 패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화재 때문에 입은 전체적인 피해도 어서 조사해서 보고하라. 짐은 도저히 더 앉아있을 수가 없으니 회의는 여기서 파하겠다.”
태황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심영준이 여전히 부들부들 떨면서 그 발을 붙들었다.
“아, 아, 아뢰옵기 화, 황공하오나, 서, 서, 성친왕 전하께서 화재를 수습하는 관리를 포, 포, 폭행하셨사옵니다. 그, 그 죄, 죄를 물어 주시옵소서.”
“뭐? 성친왕이 짐의 관리를 폭행했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태황이 다시 용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심영준이 더듬거리며 주워섬기는 보고를 들었다.
“그러니까, 화재 현장을 돌면서 도적을 잡던 한성부 판관을 성친왕이 막무가내로 말에서 끌어내려 짓밟고, 나졸들을 위압해서 제지하지도 못하게 하였다는 말이냐?”
“그, 그, 그렇사옵니다.”
감히 임금의 관리를 폭행한 죄는 역모에 준해서 다스릴 수 있다. 그것도 질서를 유지하는 판관을 폭행했다면 보통 큰 죄가 아니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짚고, 그 위에 턱을 괸 태황이 잠시 눈을 감았다.
예전 같았으면 누군가는 분명히 입을 열었으리라. 하지만 모두가 태황의 눈치만 살폈다. 워낙 큰 사건이 터진 뒤라 누구도 섣불리 태황 앞에서 아우의 죄를 논하지 못했다. 잠시 후 태황이 눈을 떴다.
“이런 일에서는 어느 일방의 말만 듣고 판단할 수 없다. 도승지는 당장 선전관을 보내서 성친왕에게 즉시 입궐하라고 명하라.”
“예, 폐하.”
– 10 –
감히 나한테 도적놈 운운한 관원은 걷어차서 쫓아버리고, 반나절 가까이 구조작업을 계속 이어갔다. 우리가 수습한 시신만 백여 구는 족히 되었고, 기적적으로 살아있는 생존자들을 찾아낸 게 스물한 명이었다.
주변이 완전히 밝아지면서 훈련도감 군사들이 동대문을 통해 대규모로 들어왔다. 이들이 수색과 주변 정리에 투입되는 모습을 보니, 우리는 이만 물러나야 할 것 같았다. 군사들만 들어오는 게 아니고, 피난했던 주민들도 그 뒤를 따라 울부짖으며 몰려오고 있었다.
“전하, 다들 이제는 돌아가서 동촌에 있는 자기 집과 가족을 챙기고 싶어 합니다. 저들이 일하는 바가 마땅치 않으셔도 이만 물러나심이….”
수습한 사람과 물건 등을 기록하던 서기 조경신이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조선에 돌아와서 새로 고용한 수하로, 일 처리가 꼼꼼하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서얼 출신 젊은이다.
“당연한 일이다. 관병과 부딪쳐 혼란스러워지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니, 우리는 동촌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오늘 우리가 일한 바에 대하여 나중에 한성부에 제출해야 할 수 있으니, 그대는 오늘 기록한 바를 잘 챙기도록 하라.”
긴급상황이라면야 군사들에게 닥치고 내 말 들으라고 호령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현장 정리차 투입되는 군사들은 제대로 지휘를 받으면서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내가 나서서 저들에게 명령을 내리려고 하면 명백한 월권이다.
게다가 자기 집, 자기 가족을 찾겠다고 몰려올 주민들과 뒤섞이면 또 도둑놈 취급을 받을 위험이 매우 크다. 그래서 내가 지휘하던 의용소방대는 아까처럼 오해를 받지 않도록 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면서 현장을 떠났다.
우리가 수습한 시신은 일단 가까운 훈련원으로 가져가게 했다. 훈련원 마당에 늘어놓고, 서기 조경신에게 맡겨두었다. 그리고 급히 구한 말뚝과 널빤지에 방을 써서 붙였다. 어디 구역에서 나온 시신을 훈련원에 모아뒀으니 가족의 시신을 못 찾은 이들은 찾으러 오라고.
여기까지 일을 마친 뒤 카자크들만 내 옆에 남기고 나머지는 다 해산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동대문에 들렀다.
“그대가 아주 큰 공을 세웠네. 그대가 때맞춰 동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불을 피하려고 아우성을 치다가 수천 백성이 짓밟혀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설마 그러기야 했겠습니까. 북촌으로 가는 길이 있으니 그쪽으로들 빠졌겠지요. 백성들도 눈이 있는데 훤히 뚫린 길을 그냥 넘기겠습니까.”
권훤이 짐짓 겸양을 보였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권훤이 내린 결정이 현명했다.
“그랬으면 길이 막혀 북쪽에서 화재를 진압하러 오는 사람과 물자가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했을 걸세. 그리고 만에 하나 북촌까지 불이 번졌으면 어떻게 되었겠나? 이재민들을 성문 밖으로 내보낸 건 자네가 참으로 적절하게 행한 바일세. 꼭 폐하께 잘 아뢰어 주겠네.”
“감사합니다, 전하.”
자기가 바라던 말을 들은 탓인지 권훤이 빙긋 웃었다. 그 속에 어린 야심을 알기에, 나도 씩 웃어주었다.
“고생하셨사옵니다. 크게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난 괜찮소. 그나저나 내가 왕비에게 일거리를 많이 넘겼구려.”
집에 돌아가서 보니 바깥채는 내가 보낸 이재민들로 가득했다. 안채와 사랑채 마당까지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고, 옷을 주고 따뜻한 물과 죽그릇을 나눠주며 이재민들을 돌보느라 상희부터 한갓 계집종들에 이르기까지 다들 정신이 없었다.
“이 나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전하의 상처도 돌봐야겠으니, 잠시 안으로 드시지요.”
상희는 나를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투구와 갑옷을 벗기고 의자에 앉힌 다음에 피가 흐르는 이마를 더운물과 화주로 깨끗이 닦고, 자기가 약초 가루를 꿀에 개어서 만들었다는 화상 치료용 연고를 꼼꼼하게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속삭였다.
“다른 데는 다치지 않았어?”
“응. 몸은 갑옷 덕분에 무사했고, 얼굴 아래쪽은 젖은 수건으로 가렸으니까. 위쪽도 막을 수 있으려면 투구에 눈 부분을 가리는 철망을 붙여야겠어. 하는 김에 가죽 마스크도 달고.”
옛날 전경들이 쓰던 방석모같은 디자인이 되겠다. 착용자를 화염에서 보호하려면 그편이 가장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이마만 다치고 눈은 안 다쳐서 다행이야. 눈에 뭐 잘못 들어갔으면 실명했을지도 모르는데.”
붕대를 다 감은 상희가 내 머리를 끌어당겨서 자기 품에 꼭 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편안한 촉감에 절로 눈이 감겼다.
“데려간 식구 중에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지? 그런데 김종건이 없어졌다면서?”
“응. 아무래도 남촌에 사는 자기 가족 찾으러 간 것 같아. 그런데 이 와중에 쫓아갈 수도 없고….”
남촌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으니 김종건의 집도 당연히 탔을 거다. 가족들은 무사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피난했을 테니 당장 찾기는 어려울 거다. 지금쯤 성벽 바깥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다. 얼마나 헤매야 찾을 수 있을지.
“조 서기하고 박변 시켜서 찾아보라고 해야지. 그런 일 시키려고 고용한 사람들이니.”
상희와 둘이 대화할 때는 대서인 박수원을 박변이라고 부른다. ‘변’은 당연히 변호사라는 의미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우리 집으로 끌고 와서 식구로 들였을 텐데.”
“그걸 알 수 있으면 우리가 천녀게. 아마 그년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한테는 말 안 해줬을 거야.”
나나 상희나, 천녀에게 좋은 감정을 갖기는 무리였다. 그동안 당한 게 있지 않은가.
“다음 생에는 그년이 우리한테 어떤 엿을 먹일까?”
상희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리자 상희가 생긋 웃었다.
“모르지. 어쩌면 4회차는 없을지도 모르고. 난 그래도 지금 정도만 해도 만족이야. 우리가 함께 있고, 하고 싶은 거 하는데 별다른 장애도 없잖아.”
“그렇긴 해.”
상희와 재회하는 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는 했지만, 이번 생 정도면 그래도 무난하기는 했다. 심리적으로 좀 힘들었을 뿐이지, 적어도 각성하자마자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전쟁 치르고 이러진 않았으니까.
“전하! 궁궐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폐하께서 선전관을 보내셨는데, 바로 입궐하라는 명을 내리셨사옵니다!”
“뭐? 바로 입궐하라고?”
갑자기 밖에서 박종선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내가 오늘 새벽에 한 일을 벌써 표창할 생각은 아니지 싶은데. 그런 걸 할 타이밍이 아니잖아.
그런데 어리둥절해 하는 내 모습을 본 상희가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폐하가 쓰러지신 거 아닐까?”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이번 화재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형황이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당장에 대궐로 달려가야 한다.
“바로 사랑채로 뛰어가서 조복으로 갈아입어야겠어. 다녀올게.”
머리에 두른 붕대를 풀려고 하자 상희가 제지했다.
“아니, 풀지 마. 그냥 가.”
“아 그래. 안 푸는 게 낫겠다.”
지금 내가 두른 붕대는 훈장이나 마찬가지다. 서둘러 의관을 갖추고 말을 불러오게 시킨 뒤, 창덕궁을 향했다. 지금처럼 시내에 난리가 났는데 육두마차 따위를 끌고 나갈 여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