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50
3부 1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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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흉갑이 제법 무거웠다. 예왕은 육중한 무게를 견디면서 주변을 슬며시 둘러보았다. 한성판윤 심영준, 금화도감 제조 박정호, 백의종군 상태인 수어청 총관 서이혁 등 반정군 수뇌부 전부가 명례방에 설치한 군막 안에 모여 있었다.
모두 초조한 기분으로 보고를 기다렸다. 성친왕을 바로 붙잡아야 반정을 조기에 끝낼 수 있건만, 성친왕저를 습격하러 간 군사들에게서 보고가 오지 않고 있었다.
“성친왕의 루스인 가정들이 아무리 용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군사 5백이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성친왕저에서 궁궐로 가는 길도 다 막았으니, 전하께서도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진드근히 기다려 보십시오.”
박정호가 예왕을 다독였다. 예왕이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오는 압박감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티가 너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왕에게 장수로서의 모습을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별문제는 아니다.
이들은 성친왕이 혹시라도 포위를 뚫는다면 창경궁으로 가서 태후에게 도움을 청하리라고 확신했다. 어떤 예고도 없이 변고를 당했으니, 당연히 자기를 보호해줄 ‘엄마’를 찾아갈 게 아닌가. 성품이 옛날 그대로인 걸 보면 행동 방식도 빤했다.
“우리 군사 중 가장 정예인 수어청군 5백이 역도의 거처를 포위했고, 한성부 군사 1천이 궁궐로 가는 길을 겹겹이 차단했습니다. 그만하면 충분히 역도를 잡아 목을 베었을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예왕은 도성 내에서 약 1만에 달하는 병력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러 복구 현장인 남촌 한가운데 백성들을 구휼하는 천막을 쳐서 특별한 의심의 눈길을 받지 않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이들과 접촉하고, 오늘 저녁에 격문을 날려 일시에 기의하게 만들었다.
“역도 이현이 그리 광포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벌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폐하께서는 이미 건강이 무척 좋지 않으신 게 분명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혼군(昏君)이 즉위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 게 분명하니, 우리 충신들이 나라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박정호가 좌중을 격려하려는 듯 애써 열변을 토했다. 그 자신 마음을 다져야겠지만, 그가 내놓은 금화군 2천은 수도 적고 무장도 빈약해서 반정군 내 최약체 전력이라는 점이 크다.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하려면 입이라도 열심히 놀리는 수밖에 없다.
현재 예왕이 확보한 군사 중 가장 규모가 큰 전력은 한성부 병력 5천이다. 실제 전투력을 고려한다면 수어청 군사 3천이 실질적인 주력이라고 할 수 있다.
“호위청도 확실히 가담할 겁니다. 장 총관은 전하의 처남이 아닙니까.”
호위청 군사 4천은 태평로 일대에 주둔하면서 그 일대를 정리하고 있다. 이들이 반정에 동참하면 황궁에 있는 금군이 도성 거리로 나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원각사 자리에 주둔하는 총융청군 2천을 붙잡아둘 수 있다.
총융청군을 지휘하는 장수는 정호찬이다. 그자는 성친왕의 심복이니 절대 넘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친왕의 목을 보면 그놈도 투항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동안 김희준이 친분을 두둑이 쌓아둔 용호청 총관 윤승묵은 격문을 받고서 솔깃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훈련도감도 동참하면 일이 확실해지겠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다. 성친왕을 처치할 동안 두 군영이 향방을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기만 해주면 충분하다.
“역도 이현의 처남이 훈련도감 중군인데, 과연 가만히 있겠습니까?”
“중군 혼자 어찌 군영을 이끌 수 있겠소? 더구나 우리가 역괴를 처단하면 저들은 무리를 이끌 구심점이 없으니 바로 손을 들 거요.”
혹시나 저들의 반항이 길어질 때를 대비해서 남한산성에 있는 수어청 본영에 남은 병력도 모두 불러들여 놓았다. 이들이 내일 새벽녘에 광희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용호청이 돌아서면 훈련도감을 세 방향에서 포위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역도 이현만 잘 처리하면 정난은 금방 끝납니다. 그러니까 차분하게 기다립시다.”
심영준이 동의를 표했다. 그는 예왕처럼 갑옷을 입지는 않았으나, 박정호와 마찬가지로 융복을 입어서 지금이 활을 들 때임을 잊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헌데 그 옆에 판갑을 입고 선 수어청 총관 서이혁이 망설이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좀 늦은 이야기지만, 소장은 수어청보다 한성부 군사를 동원하는 편이 더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여전히 듭니다. 아무래도 싸우는 장소가….”
“우리 군사 중 수어청 군사가 가장 정예인데, 그게 무슨 말이오?”
예왕은 물론, 문관 출신인 반정군 수뇌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문했다. 이들이 생각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국면에 가장 강한 군사를 투입하는 게 당연했다. 공연히 병력을 아끼다가 적괴 성친왕을 놓친다면 그게 더 큰 일 아닌가.
“좁은 도성 거리에서 밤중에 사람을 잡는 일에는 연사할 수도 없는 총포로 무장한 수어청 군사들보다 창검을 든 한성부 군사들 쪽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이혁이 다시 설명을 시도했지만 죄다 문관 출신인 반정군 수뇌부는 ‘총이 창보다 세지 않으냐’라고 반응할 뿐, 여전히 설득되지 않았다. 한숨을 쉰 서이혁은 입을 다물었다. 설마 대비도 안 한 상대를 5백 명으로 급습했는데 실패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2대대에서 급보입니다!”
“오! 성공했느냐?”
급히 군막으로 뛰어 들어온 전령을 본 예왕이 반색했다. 하지만 숨을 몰아쉬던 전령이 입 밖에 낸 소식은 실망스러웠다.
“역도 이현이 갑주를 입고 칼을 휘두르며 포위를 돌파, 훈련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뒤를 쫓던 2대대는 동대문을 지키던 용호청 군사들이 맞서는 바람에 교전을 벌이다가, 도감군이 용호청에 합세해서 치고 나오는 바람에 밀려났습니다.”
“무엇이라!”
예상 밖의 결과에 지도부 전체가 망연자실했다. 수어청 군사 5백 명으로 구성한 포위망을 뚫었다고? 성친왕과 그 수하들의 무용이 그 정도였단 말인가?
동대문에 있던 용호청 군사들이 저항한 거야 수문장이 권훤이니 그럴 수도 있다. 그보다 큰 문제는 도감군 본영이 확실히 성친왕 편에 붙었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성친왕저에서 번진 불과 용호청, 훈련도감과 교전하다 붙은 불이 번지고 있어서 동촌에서는 더 이상 교전이 어렵습니다. 원군을 대규모로 보내주시거나, 본영으로 물러나게 해주십시오. 급합니다.”
지난번 화재를 겨우 피한 동촌에 지금 불이 붙었다는 말에, 박정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 불을 꺼야 하는 금화도감 군사들이 죄다 여기 명례방에 와있는 것이다.
“반적들이 지른 불이 번진 것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전령은 즉시 2대대장에게 본영으로 물러나라고 전하라! 본진과 합세한 후 반적들을 토멸한다.”
“예, 총관 나리!”
서이혁이 급히 상황을 정리한 후 전령을 내보냈다. 지금 2천이나 되는 금화도감 군사들을 불 끄라고 동촌으로 보낼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더 많은 군세가 역적과 합세하기 전에 어서 쳐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믐이라 너무 어둡습니다. 암중에 전투를 벌이면 자칫 수가 더 많은 아군 간에 싸움이 벌어질 수 있으니, 새벽이 되기를 기다리시지요.”
“서 총관의 말이 옳소. 서둘러 움직이되, 해가 뜰 때까지는 굳이 싸움을 시작하지 않는 게 낫겠소. 우리 군사가 더 많다는 점을 드러내 반적들을 위압하기에도 해가 뜬 뒤가 좋겠지.”
이미 사경(四更, 01~03시)이 다 끝나간다. 굳이 일부러 시간을 끌지 않아도, 군사를 모두 움직여 포진을 다 마칠 때쯤에는 해가 뜨리라.
“전하, 동촌에 붙었다는 불은….”
“박 제조는 안심하시오. 우리는 지금 대업을 이루려는 참이고, 그대는 정난공신 1등이 될 것인데 누가 오늘의 일로 그대에게 죄를 묻겠소?”
예왕은 박정호를 다독여 진정시켰다. 성친왕을 없애고 정권을 쥐기만 하면 동촌이 불타는 것쯤은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었다. 이미 도성 절반이 타버렸는데, 까짓 동촌까지 타버린들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는가.
– 7 –
“용호청은 당장 이쪽에 합류하지 않아도 좋으니, 동촌에 번진 불부터 끄라고 명하라!”
“예. 전하!”
남촌이야 이미 폐허가 되었으니 반군과의 전장이 되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아직 멀쩡하던 동촌이 타버리면 전체 도성 면적의 20%, 열흘 전 대화재에서 타고 남은 면적의 ⅓이 불타 없어지는 거다. 그 끔찍한 피해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동촌 쪽은 금화군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민보대도 많이 있다. 남촌과 달리 훈련도 잘되어 있으니, 괜히 충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진화작업에 나서라!”
내 뒤를 쫓던 수어청군 ? 포로의 진술로 확인했다 ? 병력을 격퇴한 뒤 동대문에서 권훤이 전령을 보내 보고하기를, 도성 일원에 산재한 용호청 병력 3천 중에 2천 명을 즉시 모을 수 있다고 했다. 그 2천 명이면 어떻게든 동촌이 쑥대밭이 되지 않게는 만들 수 있을 거다.
“반군은 아직 별 움직임이 없습니다. 저들의 계획이 실패하여 전하께서 이쪽에 합류하신 걸 보았으니, 앞으로 어찌 움직여야 할지 혼란스러운 모양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광희문을 지키고 있던 수어청 군사들을 포박하고 문을 닫았으니, 배후를 당할 염려도 없어졌습니다.”
“서 총관도 나름대로 경험 많은 장수요. 군사를 움직이는 것도 정석대로 할 테니, 새벽이 되면 일제히 공격해올 거요. 그전에 우리도 군사를 모아야 하는데.”
김용상이 밖에서 군사를 정비하는 사이, 민지상은 내 옆으로 달려와서 보좌 역할을 했다. 아파치 토벌 때 이미 호흡을 한 번 맞춰본 사이인지라, 손발이 척척 맞았다.
“적이 1만 명이라고 해도 절반 이상이 오합지졸이니, 도감군 4천이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총융청이 원군으로 달려와 주기만 한다면, 격퇴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흩어져서 다 모이지 못한 본영 군사 1천 명이 아쉽기는 합니다만.”
“옳은 말이오. 한성부 나졸들 따위가 적이라는 사실을 알리면 우리 군사들이 기가 막혀 코웃음을 치겠지.”
족친위가 저쪽에 붙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지금 훈련도감은 화재 현장에서 수거한 폐자재를 쌓아서 적이 돌격하지 못하도록 방책을 만들고, 그 뒤에서 사격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기병 5백 기로 돌입해 봐야 화력에 제압될 뿐이다.
“총관인 윤 부장이 전하를 별로 좋게 보지 않는 사람인 게 마음에 좀 걸리긴 합니다만, 동촌에서 불을 끄고 나면 용호청도 내려올 겁니다. 우리 병력이 더 늘어나겠지요.”
도감군 4천 명이 모루 역할을 하면서 적의 공세를 버티는 동안 반군의 좌측을 용호청이, 배후를 총융청이 공격하면 적은 무너질 게 분명하다. 제대로 된 정예군은 수어청밖에 없는 예왕은 세 방향에서 공격을 받으면 도저히 대처할 수 없다.
“예왕 본인도 군사를 다룬 경험이 전혀 없으니까 말이오.”
내가 예왕이었다면, 이따위 어설픈 반란은 절대 일으키지 않는다. 내가 약한 부분이니까. 고로 어떻게든 정치의 영역에서 승부를 보려고 노력했을 거다. 예왕이 이렇게 성급하게 군 이유는…역시 김종건의 존재를 알아챘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김종건의 가족이 무사하기에 들키지 않은 줄로만 알았었다. 지금 보니, 아마 예왕은 내가 정권을 쥐는 즉시 자기를 족칠 때 쓰려고 김종건을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눈이 뒤집혀서 김종건의 가족에게 복수하는 일 따위는 안중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반군의 실질적인 대장은 서 총관일 겁니다. 모험을 즐기지 않는 견실한 장수지요. 어쩌다 제정신을 잃고 반적의 편에 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민지상은 서이혁의 성격 탓에 공격을 망설이는 거라며, 자신이라면 야음을 틈타 훈련원을 들이쳤을 거라고 했다. 질이 떨어지는 병력으로 승리하려면 수적 우세를 이용한 난전으로 몰고 가는 수밖에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서 총관은 난전 중에 자기편끼리 싸우는 게 두려울 겁니다. 그래서 당장 공격을 시작하지 않는 거고 말입니다. 일단 천하를 걸고 싸울 결심을 했다면, 그 정도쯤은 희생할 각오가 되어야 하는 것을요.”
“본왕도 그리 생각하오.”
아침에 개전하면 반군은 해를 정면으로 보면서 돌입해야 한다. 게다가, 적은 화포도 없다. 하지만 훈련원에는 군사들 훈련용으로 사용하던 화포가 여러 문 있고, 탄약 역시 쓸 만큼은 있다. 아마 반군은 화약도 넉넉하지 않을 거다. 애초에 도성에 전투하러 온 게 아니니까.
“잠시 여유가 생겼으니 그대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야겠다. 예왕, 아니 역도 이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난을 일으켰느냐? 그리고 뭐, 내가 시역을 도모했다고? 증거는 어디 있고?”
적이 쳐들어올 때까지 시간이 있다고 판단되어 잠시 김희권을 심문했다. 서기 조경신에게 옆에 앉아 심문 내용을 기록하라고 하고, 훈련대장 김용상과 민지상을 대동했다. 김용상이 나를 따르는 정당성을 확인하게 해주고, 증인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동석할 필요가 있었다.
“전하를 없앤 뒤라면 전하께서 감히 시역을 도모했다는 증거와 증인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요. 게다가 전하를 없애고, 두 분 왕자도 처단하면 다른 계승자가 없으므로 폐하께서는 정난(靖難)을 인정하고 자신을 후계자로 선택하실 수밖에 없으리라는 겁니다.”
“현왕과 그 아들 셋이 있지 않으냐.”
“현왕 전하의 저택도 표적입니다. 이환은 근래에 현왕 전하를 가리켜 ‘꼭 못난 강아지처럼 성친왕에게 꼬리를 흔든다’라고 평하였으며, 기필코 처단하고 말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예왕, 그놈이 현왕하고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마 죽인다고 결정한 뒤에 죽여야 할 이유를 갖다 붙인 거겠지. 아무튼, 김희권에 따르면 예왕은 현왕 외에 내 장인인 민성윤 역시 죽일 계획이라고 했다. 호위청 병력을 그쪽으로 보낼 거라고.
“아직 포섭하지는 않았으나, 당연히 동조하리라는 게 부친을 통해서 전해 들은 제 아우의 말이었습니다. 장 총관과 역도 이환 사이는 보통이 아니라면서 말입니다.”
“둘이 사이가 가깝다고? 민 중군, 우리가 아는 바와는 좀 다르구려.”
장희재는 미주에 오기 전까지도 예왕과 말 한 번 섞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과연 지난 한 달 사이 얼마나 많은 친분을 쌓았기에 저런 자신감이 생긴 걸까.
“그래서, 나만 죽이면 끝이라는 거냐?”
“예, 전하를 역적이라는 명분으로 처단하고 나면 조정 안에 있는 저희 부친과 좌승상께서 ‘예왕께서 참으로 큰일을 하셨다’라며 바람을 잡고, 분위기를 본 다른 신하들도 따르게 하면 폐하께서도 도리가 없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무도하게도….”
말을 멈춘 김희권이 다시 입을 열도록 재촉해서 마침내 들은 대답에 내 어이가 가출했다.
“뭐? 폐하께서 화병 발작으로 돌아가셨으면 하고 바랐다고?!”
“예. 폐하는 이미 화병으로 쓰러지신 전력이 있으니까요. 변란 때문에 분개하신 폐하께서 쓰러져 돌아가시거나 혼절하여 일어나지 못하신다면, 황태제가 될 것도 없이 그냥 제위에 오를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태후께서도 어쩌실 수 없을 것이라면서요.”
기가 막힌 이야기다. 저게 정말로 그 군자연하던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아니다. 이건 예왕이 한 말이 아니다. 김세룡이 ‘전하는’ 말이지. 어느 정도 에누리할 필요는 있다.
“그럼 그대의 부친은 왜 그대를 시켜 내게 그 말을 전하게 하였는가?”
“역도 이환은 사사롭게는 부친의 사위이며, 그 재주를 아쉽게 여긴 건 사실입니다. 아우 역시 귀한 친아들입니다. 허나 역심을 품은 것을 알았으니 아들이고 사위라 한들 어찌 계속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전하께 고변함이 이 나라의 신하로서 취할 도리입니다.”
참으로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대의 부친은 역모를 고변한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가?”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를 지킬 뿐인데 어찌 대가를 바라겠습니까?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누이와 조카들의 목숨만 건지게 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난이 끝난 뒤에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김세룡이 성공할 가망 없는 반란에 동참하는 대신 가문의 존속을 택했음은 명백하다. 그 대가로 자기 차남 일가와 사위 정도는 내놓을 수 있다는 거겠지.
생각 같아서는 X까라고 하고 싶은데, 그 타이밍에라도 고변한 건 분명한 공적은 공적이니 역적 일당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김세룡이 바라는 대로 해주게 될 듯하다.
“훈련대장, 이자는 나중에 폐하 앞에서 증언할 증인이니 엄중히 지켜 주시오.”
“예, 전하.”
김희권을 두고 밖으로 나오니 6시, 아직 사방은 어둡고 적이 들이치려면 시간이 있었다. 잠깐의 여유 정도는 찾아도 될 것 같았다.
“잠시 내실에 가서 왕비를 달래주고 오리다. 1각 정도면 될 거요.”
“염려 말고 다녀오시옵소서. 바깥쪽 일은 소장이 잘 맡고 있겠습니다.”
민지상이 애틋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상희는 민지상에게도 소중한 동생이다. 이런 일을 겪은 동생에게 안쓰러운 심정을 갖는 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