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60
3부 178화
– 8 –
형황을 따라 도착한 곳은 향원정이었다. 형황은 내관들에게 다리 건너에 있으라고 하고 나 하나만 데리고 연못 안 정자로 들어갔다. 내관들이 구들에다 미리 불을 때 놓아서, 정자 안은 훈훈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향원정은 밀담을 나누기에 좋은 곳이다. 잡인들은 다리 건너 육지에 놓아두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만 건너오면 되기 때문이다. 역시 형황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역당들에 대한 처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을 줄로 안다.”
무슨 이유인지, 형황이 이번 사태 마무리에 관해 내게 양해를 구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수어청 2대대 일로 내가 해야 할 판이 아닌가.
“아니옵니다, 폐하. 성상께서 정하신 바에 이 이우가 어찌 불만을 품겠나이까.”
“최가의 부추김이 있었다 하나, 환이 그놈이 너를 두 번이나 죽이려고 꾸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번에는 네 처자까지 불태워 죽이려 했으니 그 죄가 말로 형용하지 못할 정도인데, 나라에 법도가 있으니 지금 정한 이상으로 중벌을 내릴 수는 없다. 네가 양해하여라.”
예왕은 이진원에 대해서는 자백하지 않았다. 죄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자신이 확인한 김종건에 대해서만 자백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두 번’이다. 그 모사 최가라는 놈도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고. 내가 터트리기에는 나도 켕기는 구석이 있으니 조용히 있어야지.
“소제가 어찌 형황께서 정하신 일에 토를 달겠나이까. 죄인들은 각자가 지은 죄에 맞춰서 합당한 벌을 받았으니, 소제는 전혀 불만이 없습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현재 조선에서 법으로 규정된 사형 방법은 독살형, 교살형, 참수형 세 가지뿐이다. 능지형과 책형, 심지어 거열형조차 장조 이후로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쌓인 화를 터뜨리고 싶어도 예왕은 물론 그 모사놈조차 태워죽일 수는 없다는 거다.
거열형에 처한다고 판정한 두 놈도 마찬가지다. 거열형이 거열형이 아니다. 내가 옛날에 했던 것처럼 실제로 팔다리를 소에 묶고 끌어당겨 사람을 산 채로 조각내는 대신, 참수한 뒤에 팔다리를 칼로 자른다. 다만 최가는 사지부터 자르고 목을 치기로 했을 뿐이다.
“국법으로 혹형을 시행하지 않은 지 백여 년이다. 한순간의 분을 참지 못해 법에도 없는 형을 가한다면 나라 질서가 어지러워지는 단초가 될 것이니, 어찌 함부로 혹형을 시행하여 훗날 안 좋은 선례를 남기겠느냐.”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형황이 주먹을 꾹 쥐는 모습이 보였다. 창백한 손등에 순간적으로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 움직임이 드러내는 감정을 읽는 순간 형황이 다시 손을 풀었다. 그리고 잠시 멈췄던 대화를 다시 시작했다.
“이번 난리는 그렇다 치고, 환이 그놈이 견서사 안에다 자객을 심었는데도 아무도 몰랐다. 이는 변명할 수 없는 실책이니, 너를 수행하던 금위사 탐보꾼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겠다.”
“과연…분명히 있으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사옵니다. 그런데 누가 탐보꾼이었사옵니까?”
“통변이었다.”
형황은 딱히 숨기려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솔직히 곧 내가 제위에 오르면 금위사에 있는 모든 자료를 볼 수 있게 되니, 감시원이 누구였는지도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숨겨 봐야 아무 의미가 없긴 하다.
그나저나 역시 이홍석이었구나. 하기야 통변이라면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살필 수밖에 없으니, 감시자 노릇을 하기에는 최적이다. 이홍석이 보낸 보고서 덕분에 형황이 내가 정말 개과천선했다고 믿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고맙게 여길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아.”
“예, 폐하.”
왜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고 그러나, 사람 불안하게. 안 그래도 형황한테 자객 건을 숨긴 일은 꼼짝없는 기군망상이라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왜 환이가 자객을 보내 너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내게 고하지 않았느냐? 나는 네 형이 아니냐.”
뜻밖에도 형황은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그 목소리에는 서운함과 슬픔이 드러나 있었다. 아우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형으로서 느끼는 유감스러운 태도가 완연했다. 기군망상의 죄를 다스리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배후에 관한 심증은 있으나 확증이 전혀 없었기에, 믿지 않으실까 두려웠습니다.”
성친왕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고를 저지른 악동이었던가. 그걸 생각하면 내가 예왕을 고발했을 때 주변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증거를 더 모을 때까지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추가 증거는 얻지 못했지만 말이다.
“역도 이환이 폐하께 소제를 험담한 일로 소제가 이환에게 원한을 품고, 서형을 모함하려 거짓을 고하였다고 여기실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잠자코 있으려고 하였습니다. 김종건을 은밀히 데려온 것은 그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였습니다.”
언젠가 들켰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답을 내놓았다. 그런데 형황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네가 변하였구나.”
“예…예?”
변해? 뭐가 변했는데? 이건 대놓고 캐물을 수도 없는 문제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싶어 망설이는데, 다행히 형황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는 다른 이들에게는 밥 먹듯 거짓말을 했지만, 내게는 단 한 번도 거짓으로 고한 적이 없다. 사고를 저지른 뒤에 내가 불러 추궁하면 모두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얼마 못 가서 또 똑같은 짓을 해서 문제였지.”
하긴 이형준도 ‘내’ 거짓말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했었다. 정호찬은 그냥 ‘내’가 하는 말은 다 허위라는 전제를 두고 행동했다고 했고. 그런 성친왕이 형황에게는 절대로 거짓말을 안 했다고? 그거, 아무래도 나중에 들켰을 때 수습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랬을 것 같은데.
“네가 행동을 바꾸고 새사람이 된 건 참으로 다행이다만, 이 형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득실을 따지는 성품으로 변한 것은 아쉽구나. 하기야 길흉화복은 언제나 함께 온다고 했으니, 어찌 모든 일이 좋게만 바뀌겠느냐만.”
“송구하옵니다.”
만사를 솔직하게 밝힐 수도 없으니 고개만 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형황은 내가 이제는 옛날처럼 순진한 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임금 자리는 예와 덕으로만 해나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때에 따라서 죽이고 벌하며 속이는 일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옛날 요순시대에는 덕으로만 천하를 다스렸다고 하나, 그 시절 천자가 다스리던 천하가 넓어 봐야 얼마나 넓었겠느냐?”
“진짜 천하의 한 조각밖에 되지 않았겠지요.”
“그러니 옛날 방식으로는 천하를 제대로 다스릴 수도 없다. 임금 노릇을 하기에도 지금 성품이 더 나을 거다.”
칭찬해주는 건 고맙다만, ‘옛날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는 화제는 나한테 건드리기 가장 거북한 주제다. 뭔가 다른 이야깃거리를 빨리 꺼내야겠다.
“역도는 마포나루에서 어주를 타고 어디로 갈 계획이었다 자복하였는지요?”
역적 혐의로 처벌하는 데는 난을 모의하고 일으킨 부분까지만 있으면 충분하다. 관군에게 패하고 도망친 역적이 어디로 도망칠 계획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따라서 조금 전 형황이 발표한 부분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궁금하냐?”
“약간 호기심이 생기옵니다.”
잠시 쓴웃음을 지은 형황이 순순히 알려주었다.
“벽란도로 가서 외선을 타고 도주하려 했다 하였다. 돈만 내면 탈 수 있는 밀선(密船)이 있을 터이니, 그걸 타고 추적대를 피해 도망치려 했다 하더구나.”
“그 뒤에는 어디로 가려 하였답니까? 받아줄 나라가 어디에도 없을 터인데….”
청나라에 갔다가는 당장 붙잡혀서 송환될 거다. 조선에서 행방을 파악하는 즉시 수배서를 보내 송환을 요구할 테니까.
그보다는 후송으로 가려고 했을 것 같기는 한데…내가 후송 황제라면 절대로 반기지 않을 거다. 요즘 후송은 청나라를 상대로 단단히 벼르는 중이고,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런 화근덩어리를 받아들여서 우리하고 척을 지고 싶지는 않을 거다. 자칫 전쟁이 날 일 아닌가.
“유주로 가려고 했다더구나, 너처럼.”
“유주 말이옵니까?”
“네 복수에서 벗어나려면 세상 반대편으로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하더구나. 나루까지 가는 동안 급하게 세운 계획이라 막연하기 짝이 없었다만.”
예왕이 과거의 성친왕에게 트라우마가 강하긴 했던 모양이다. 살려고 유럽까지 튈 생각을 했다는 것도 그렇고, 김종건이 살아있는 걸 보고 내가 나중에 복수할 증거로 감춰둔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바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니 말이다. 반란에 동참한 다른 신하들도….
“그것도 이제는 끝내야 한다. 아무리 덕으로만 세상을 다스릴 수는 없다지만, 천하 만민이 네 이름을 듣고 두려움부터 떠올린다면야 어찌 좋은 임금이라 하겠느냐. 너도 그걸 알기에 동촌 일대를 불태운 수어청 군사들을 따로 벌하지 않으려 했겠지만 말이다.”
지적받은 부분에 대해서는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다. 옳은 말이니까.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 9 –
심문도 재판도 다 끝났으니 집행을 미룰 이유가 없다. 형황은 예전부터 처형장으로 많이 쓰였던 양화나루 옆 모래밭에서 대역죄인들을 처형한다고 선언했다. 옛날 무오사화 때 내가 김일손 이하 5명을 처형하고 정호찬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자리다.
형황 옆에 서서 보니, 묶인 채로 끌려 나온 죄수 17명은 제대로 걸음도 걷지 못했고 입은 옷은 말라붙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겨우 스무날 남짓밖에 옥에 갇히지 않았는데 다들 사람 꼴이 아니었다.
‘웬만큼 큰 죄를 지었어야지….’
그래도 저들은 형황에게 처벌받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리라. 만약 내가 즉위한 뒤에 난을 일으켰다면, 참수형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임해군처럼 능지형을 당해 죽지야 않았겠지만, 참수형보다는 더 센 형벌이 나갔을 거다. 분명히.
“죄인들을 끌어내라!”
집행을 맡은 금부도사가 호령했다. 음, 옛날 정호찬을 처음 만났을 때 정호찬이 맡았던 역할이 저거였지.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잠시 옛 회상에 빠진 사이 죄인들이 모래밭에 무릎을 꿇었다. 나장들이 죄인들의 손을 등 뒤로 돌려 묶고 화살로 양쪽 귓불을 뚫었다. 머리가 굴러가지 않게 하는 장치다.
“역적들을 죽여라!”
“이놈들, 불도 너희가 질렀지!”
“이 천하의 불한당 놈들!”
처형장 주변에는 화재와 뒤이은 변란 때문에 격분한 도성 백성 수천 명이 몰려나와 격한 함성을 질렀다. 화살에 양쪽 귀를 꿰인 죄인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도성 백성들의 지탄을 받았다. 웃옷을 헤쳐 맨몸을 드러내고 있지만, 추위 따위는 아마 의식도 못 하리라.
“거열형부터 집행하여라.”
“거열형부터 집행하랍신다!”
내 집을 덮쳤던 수어청 2대대장, 차씨라고 하던 그 정령이 웃통을 벌거벗겨진 채 무릎을 꿇었다. 상투를 묶은 끈을 기둥에 묶고, 멍석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형리들이 목 밑에다 목침을 괴었다. 그러고 보니 김일손 처형 때도 거열형부터 집행했었다.
“베어라!”
집행관이 호령하자 묵직한 참도(斬刀)가 쿵 하고 내리쳐졌다. 칼날이 목침에 내리꽂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핏줄기가 앞으로 좍 내뿜어졌다. 경동맥에서 피를 뿜던 시체는 곧바로 결박이 풀리고 모래사장에 큰대자로 눕혀졌다. 사지를 자르기 위해서였다.
다음 차례인 예왕의 모사는 처음부터 사지를 쭉 뻗고 바닥에 눕혀졌다. 다만 버둥거리지 못하도록 사지에다 밧줄을 묶고, 이 밧줄을 힘센 형리 4명이 하나씩 잡고 사방에서 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피떡이 된 그 몰골을 보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사지를 하나씩 잘라라!”
팔다리가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최가라는 예왕의 모사가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움직임이 그렇게까지 격하지 않은 걸 보면…아편을 먹였구나. 목을 칠 때까지 살아있도록. 안 그러면 다리 두 개쯤 잘랐을 때 쇼크사할지도 모르니까.
참도가 한번 내리쳐질 때마다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거열형에 처하는 두 명의 형 집행이 끝나고, 이미 죽어 움직이지 않는 김희준도 토막이 났다. 매번 환성이 커졌다. 이제 목만 자를 대상인 15명 차례가 되었다.
“베어라!”
내리쳐진 참도가 목침에 박혀 둔탁한 소리를 내고, 머리 하나가 기둥 위에 매달릴 때마다 주변에서는 함성이 올랐다. 마침내 마지막 사형수인 금화군 대대장의 목이 잘리면서 처형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환궁한다. 창덕궁으로 돌아가자.”
“예, 폐하.”
나를 위해 앞길을 청소해준 형황이 피곤한 표정으로 수레에 올랐다. 오늘 형황의 수레는 조선 천지에 단 한 대뿐인 상거(象車), 코끼리가 끄는 수레다. 내가 심심하면 가끔 타던 걸, 연이가 아예 법제화했다. 저 코끼리도 겨울에 고생이다.
나는 황태자 전용인 팔두마차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도성 안에 들어온 뒤에 따로 길을 틀어 경복궁을 향했다. 아직 참관해야 할 마지막 집행이 남아 있었다.
예왕은 부들부들 떨면서 멍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예왕을 한강 기슭 처형장에 끌어내지 않고, 보는 눈이 없는 경복궁에서 죽게 해주는 건 형황의 마지막 자비였다. 내가 도착하자 금부도사가 집행을 시작하기 위해 약사발을 꺼내오라고 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예, 전하.”
내가 금부도사를 물러나게 하자 예왕이 고개를 들었다. 나름대로는 결의를 다진 듯, 이를 악물더니 내게 호소했다.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태, 태제 전하, 부, 부디 죄 없으신 혜비와 제 처자는 사, 살려 주시옵소서. 모든 것은 이 요, 욕심 많은 못난 놈이 지었지, 느, 늙으신 모친과 아, 아이들은 죄, 죄가 없사옵니다.”
“역적의 일가라는 것만으로도 죄요. 그 정도는 그대도 알고 있을 터인데. 그러니 그대가 보낸 군사들이 내 처자가 있는 집에 불을 지르지 않았소.”
덕분에 엉뚱한 사람들이 날벼락을 맞았지. 하지만 예왕은 체념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자기 자식들을 살릴 명분을 찾아내려고 했다. 딸들이야 죽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는지, 아들들을 살리려고 필사적이었다.
“경, 경평공은 혼인하여 분가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는….”
“폐하께서 이혼을 명하셔서 심씨가 본가로 돌아간 사실을 모르시오? 더구나 그대가 벌인 거사가 성공했다면 황태자가 되었을 아이를 어찌 무죄 방면하라는 말이오.”
할 말이 없어진 예왕은 마침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머리를 내려다보려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훈련원 앞에서는 꼭 내 손으로 죽이고야 말겠다고 눈이 벌게서 쫓아다녔는데, 오늘은 왜 이리 감상적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서 화가 식었나, 승자의 여유인가.
“그대의 일가는 모두 목숨은 건졌소. 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그대 한 사람만 처형하실 것이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편안히 가시오. 어쨌거나 형제인데 이리 끝나게 되니 내 마음도 즐겁지는 않소이다.”
예왕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소리 없이 흐느끼며 흘리는 눈물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손을 뻗자 내 뒤에 있던 시종이 앞으로 나서서는 품에 안고 있던 꾸러미를 펼쳤다. 그리고 아직 따뜻한 놋합을 사약을 놓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것이 무엇이온지…?”
눈이 벌개진 예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심하게 답했다.
“팥죽이오. 마지막 정이니 한술 드시고 가시오.”
예왕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내 시종이 놋합 뚜껑을 열고 예왕의 손에 수저를 쥐여주기까지 했지만, 예왕은 팥죽을 뜨지 못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잊으셨소? 내일이 동지잖소. 동지 잔치에 나를 초대한 건 기억하시리다. 비록 그 잔치는 열릴 수 없게 되었으나, 초대에 응한 바가 있기에 내가 팥죽을 마련해왔소. 형제의 정으로, 부디 한술이라도 뜨시고 가시구려.”
예왕이 숟가락을 든 채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죽합 위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차라리 그대에게 대놓고 경고를 할 걸 그랬소. 두 번은 참았지만 세 번은 참지 않겠다고. 내게 세 번째로 해를 끼치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형제로서 우애를 누리고 싶다고. 내가 만약 그렇게 했다면 우리 의도 지켜졌을 테고 그대도 이런 처참한 꼴이 되지 않았을 텐데.”
꿇어앉은 예왕의 얼굴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다. 나도 왠지 낯이 뜨거워져서 그만두기로 했다.
“어서 드시오. 죽이 식겠소.”
마침내 예왕이 숟가락으로 팥죽을 떠서 입에 넣었다. 몇 숟가락을 입에 넣는 모습을 보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내 눈치를 살피던 금부도사가 조용히 다가가서 죽합 옆에다 약사발을 내려놓았다. 멈칫하던 예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덕궁 방향으로 절을 네 번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절을 마친 예왕은 부들부들 떨면서 약그릇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약을 들이켠 예왕이 잠시 자리에 앉아있나 싶더니 갑자기 구토를 시작했다.
“끅! 우웨에엑….”
먹자마자 바로 구토가 시작된 걸 보니, 마시고 바로 죽으라고 비상을 아주 무지막지하게 때려 넣은 모양이다. 정말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상대지만, 저렇게 괴롭게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니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부디 다음 생에는 편안히 살기를….’
나장들이 시신을 가마니로 덮어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명복을 빌었다. 어쨌든 내 후손은 후손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