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66
3부 184화
– 1 –
형황은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에 고명(顧命)을 남겨 나를 후계자로 확정했다.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내 손을 잡고, 희미하게 웃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남겨놓고 가는 일이 많구나. 이 대한의 앞날을 잘 부탁한다. 끊긴 대를 잇고 난적을 쳐서 이미 두 번이나 이 나라의 사직과 백성을 구한 네가 내 뒤를 이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형황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그저 자기 동생 이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당에서 내가 한 고백은 내가 병석에 있는 형을 즐겁게 하려고 지어낸 재담으로 치부했다.
나로서도 이런 태도가 낫기는 했다. 형황이 진지하게 내가 무종의 환생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찌 달라질지 모르고, 그 광경을 본 신하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임종을 앞둔 형황이 총기가 흐려지면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정도면 그래도 낫다. 형황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내 머리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좀 곤란해진다.
물론 선황의 적자라는 혈통에 형황에게 정식으로 태제로 책봉되었으며, 갑주를 착용하고 손수 반란군을 때려잡기까지 한 내게 대놓고 정신이 이상하신 것 같으니 보위를 내려놓으라 말할 미친놈은 없을 거다. 하지만 뭔가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지기만 해도 거북한 건 맞다.
그 뒤에 이어진 고명은 평범했다. 김세룡 이하 중신들에게 앞으로도 나를 받들어 대한을 번영하게 하는 일에 매진하라고 당부하고, 태후에게는 자식으로서 부모보다 먼저 저승길을 가는 불효에 대해 사죄했다.
“소자가 너무 젊고 미숙한 탓에 한때 어마마마께 큰 아픔을 드리는 불효를 저질렀나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지금 현이가 이토록 훌륭한 군주의 재목이 되었으니, 부디 어마마마께서 용서해주시기를 간구하나이다.”
“어미가 자식을 대함에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상은 언제나 이 늙은 어미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십니다.”
태후는 그래도 눈물을 참으면서 앉아 있었지만, 황후는 눈물을 참지도 못했다. 입을 열지 못하고 흐느끼는 황후의 무릎에 손을 얹은 형황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울지 마시오. 먼저 떠난 태자와 경친왕이 그립겠지만, 아직 그대 곁에는 영선공주가 있잖소? 그리고 태제에게도 자녀가 있으니, 그 아이들이 잘 자라도록 황실의 웃어른으로서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시오. 내 부탁하리다.”
“예, 폐하.”
황후가 눈물을 글썽이며 겨우 대답했다. 바라던 답을 들은 형황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혼수상태에 빠지더니 하루 뒤에 숨이 멎었다.
형황의 죽음은 내가 치르는 세 번째 국상이었다. 첫 번째 국상은 55년 전 무종으로 처음 각성했을 때였다. 마침 ‘부왕’인 성종이 승하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고, 덕분에 나는 생판 다른 세상에 떨어져 받은 충격을 부왕의 상 때문에 받은 것처럼 위장할 수 있었다.
‘그런 얼뜨기가 또 없었지.’
그때는 조선에 전혀 적응이 안 된 상태라서 몸가짐이 온통 실수투성이였다. 상을 치르는 예법도 제대로 몰라 실수를 연발했다. 그나마 상중이었으니 넘어갔지만, 그때 내가 저지른 실수들 때문에 신하들이 더 나를 얕보고 함부로 대들었을 거다.
두 번째 국상은 ‘할머니’인 인수대비였다. 그때는 조선에서 사는 데도 익숙해졌고, 국상도 두 번째라 좀 나았다. 그 뒤 장조 때는 대비도 이미 죽은 뒤여서 상을 치를 일이 없었다.
세 번째로 국상을 치르니 당연히 모든 예법이 익숙할 수밖에 없다. 부황이 붕어했을 때는 제법 많은 실수를 저지른 ‘내’가 이번에는 흠잡을 부분 없이 만사를 처리해 나가자, 주변에 있는 신하들 사이에서 내 평가는 더 올라갔다.
빈전인 창덕궁 선정전에 들러 형황의 재궁(梓宮, 관)을 앞에 두고 있으면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오만가지 상념에 시달리다 보면 종착점은 늘 같았다. 과연 이번 생은 어떤 목적을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
무종 때는 조선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지 않아도 될 만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장조 때는 곧 벌어질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면서 개항을 이루어 세계사의 흐름에서 뒤처지지 않는다는 목표가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목표를 잡아야 할까.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시점은 예왕을 제거하고 내 계승권을 완전히 굳히고 난 뒤다. 그전에는 예왕을 경계하고 형황의 눈치를 보느라 미래까지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좀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제약하던 모든 요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계획을 세우고 대비하는 일 자체가 내 책임으로 돌아왔다. 이번 생에 조선…아니 대한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게 되었다. 그렇게 5개월을 보냈다. 국장이 끝날 때까지.
– 2 –
“이 자리는 본래 짐이 앉을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 움직이는 바는 사람이 감히 가늠할 수 없으니, 형황께서 결정하심에 따라 짐이 이 용상에 앉게 되었다. 그대들은 형황께서 남기신 뜻을 따라 나를 충실히 보좌하기 바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근정전 앞에 늘어선 신하들이 일제히 내 앞에 엎드렸다. 그래, 역시 여기가 진짜 임금의 궁궐이지.
국장을 치르는 5개월 동안은 나도 창덕궁에 계속 머물렀다. 빈전이 창덕궁에 있으니 다른 곳에 가 있기도 곤란했다.
하지만 형황의 재궁을 태릉(泰陵)에 모심으로써 모든 국장 절차를 마치고 난 뒤에는 내가 지내는 궁궐을 경복궁으로 바꿨다. 아무래도 나한테는 정궁(正宮)이라고 하면 경복궁이라서 말이다.
다만 경복궁으로 옮긴 건 나와 내 일가붙이들뿐이었다. 태후는 창경궁에, 형수인 황후는 창덕궁에 계속 남았다. 태후는 창경궁을 좋아했고, 형수도 형황이 생전에 좋아한 창덕궁에 계속 머무르고 싶어 했다. 형황이 거느리던 세 후궁도 모두 창덕궁에 남았다.
그 과정은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짧기는 해도 논란이라고 할 만한 게 벌어졌던 건 이제 ‘선대’ 황후가 된 형수 순현황후를 어떻게 칭하느냐 하는 점뿐이었다.
“본래 법도대로 하자면 마땅히 황태후로 칭하셔야 하겠으나, 폐하께서는 선황의 아우로서 제위를 이으셨으며 또한 모후이신 태후마마께서 엄연히 생존하셨으니 황태후라고 칭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황후라고 칭하셔야 합니다.”
“선황의 중궁을 그저 황후라고만 칭한다면 언뜻 보기에 지금 있는 중궁과 잘 구분이 되지 않아 실례를 범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마땅히 격을 올린 칭호를 올림이 가하다. 태후라 칭하도록 하라.”
이쪽 세상에서는 사례가 없지만, 본래 조선에서는 형제간 계승이 이루어진 사례가 두 번 있었다. 인종-명종, 경종-영조다.
인종이 죽고 이복동생인 명종이 즉위했을 때 인종의 왕비였던 인성왕후는 대비가 되었고, 경종의 왕비였던 선의왕후도 이복동생인 영조가 즉위하고 곧바로 대비가 되었다. 그러면 내 형수인 순현황후도 태후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폐하, 폐하의 모후이신 진성황태후께서 엄연히 생존해 계시는데 어찌 순현황후께 태후라는 존호를 올리시겠사옵니까? 만약 황태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야 태후라고 칭하셔도 되겠사옵니다만….”
“그야 어마마마를 태황태후로 올리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냐. 복잡하게 논할 것도 없다.”
영조가 경종의 뒤를 이었을 때도 그랬다. 선의왕후가 대비가 되고, 경종 시기에 대비였던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영조가 한 일이라면 내가 못할 게 뭔가.
“어마마마를 태황태후로 올리고, 순현황후께는 태후 존호를 올리겠다는 짐의 뜻에 끝까지 반대할 이는 나서서 말해 보라.”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예왕의 난과 관련해서 털릴 구석이 단 하나도 없는 사람은 조정에서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형황의 와병 때문에 전면 개각도 계속 연기됐다. 내가 그동안 주의하면서 ‘본성을 드러낼’ 일이 없었지만,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서는 제위 계승이 완전히 끝난 지금 내가 본성을 뒤늦게 드러낼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내 요구는 관철됐다. 모후는 태황태후로 격이 올랐고, 형수인 황후는 태후가 되었다. 내 권위가 신하들 위에 있음도 확실해졌다.
2차전이었던 형황의 묘호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도 몇 가지 의견이 충돌했다.
“선황께서는 이미 지난 잘못을 능히 고치시고(기과능개, 旣過能改), 자리에 올라서 마음을 놓지 않으시고(불해우위, 不懈于位), 마음가짐이 굳고 단단하셨으니(집심견고, 執心堅固), 공종(恭宗)이라 하심이 가할 줄 아뢰옵니다.”
“모든 일이 훌륭하고 법도에 맞으셨으며(선합법도, 善合法度),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손히 국가대사를 처리하셨고(숙야공사, 夙夜恭事), 훌륭하게 법을 집행하셨으니(영선전법, 令善典法) 경(敬)으로 하심이 더 좋겠습니다.”
“강직하고 덕스럽게 앞으로 나가셨으며(강덕극취, 剛德克就), 법도를 세우고 주변을 밝게 비추셨고(법도수명, 法度修明), 자기를 바로잡아 아랫사람을 이끄시고(정기섭하, 正己攝下), 마음을 굳게 가져 일을 결단하셨으니(집심결단, 執心決斷) 숙(肅)이 좋을 듯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시호가 선택지로 나왔다. 비록 재위 말년에 몇 차례 횡재(橫災)를 당하긴 했으나, 형황이 20년 동안 재위하면서 나라를 이끈 업적이 워낙 대단하고 보니, 깎아내리는 시호를 올리려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숙(肅)’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선황께는 종(宗)이 아니라 조(祖)를 올려 모심이 가하다고 본다.”
부황인 열조가 ‘조’를 받을 수 있었던 명분이 경신대기근 극복이다. 형황 역시 그 끔찍한 을병대기근을 견뎌냈다. 그렇다면 형황도 조를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도 한동안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든 주제였지만, 결국 내 뜻대로 형황은 숙조(肅祖)로 시호를 받았다. 나는 즉위하자마자 조정 신하들에게 2연승을 거둔 셈이었다.
그 기세를 몰아 마침내 근정전으로 돌아왔다. 딱 17년 만에 말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라고 그대들에게 높은 지위와 녹봉을 내리는 것이다. 장차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면, 그대들 모두 죽을 각오로 전력을 다해야 하리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동안 미루던 개각도 국상을 끝내고 경복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싹 해치웠다. 이제 정말 ‘내 신하들’과 함께 ‘내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할 때다.
– 3 –
국장을 마무리하고 나니, 어느새 달력은 양력 9월로 접어들었다. 올해는 가뭄도, 홍수도 일어나지 않아서 농사도 잘되었다. 그래서 도성 재건에만 관심을 쏟을 수 있었다.
“올해 풍년이 든 덕분에 난민들이 줄어들어 덕을 크게 보았습니다. 풍년이 든 것을 알고 도성에서 본향으로 귀환한 이와 미주로 떠난 이가 대략 10만이라, 새로이 머물 곳을 마련할 수고가 크게 줄었습니다.”
내각승상 남구만이 보고했듯, 도성 인구는 70만에서 60만으로 10만 명이나 줄어들었다. 대기근 때문에 도성으로 난민들이 몰려오기 전 인구가 55만 명 정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전히 많은 숫자지만, 그래도 성공적인 인구 감소였다.
도성에서 줄어든 인구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다수는 미주로 갔다. 그 덕으로 작년에 잠시 증가세가 주춤했던 미주 이주는 올해 격증해서 전국에서 20만에 달했고, 미주 인구는 드디어 백만을 돌파했다. 그중에 토인 숫자는 20만이 안 되고, 대부분이 이주민이다.
물론 지금 중요한 문제는 이게 아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도성 재건이고, 그 과업을 이루려면 인구관리는 필수였다. 지금 도성 환경을 생각하면 70만이라는 인구를 붙들어 놓고 안정적으로 관리할 여건이 도저히 안 된다. 어디든 보내야 한다.
“남촌 일대 민가는 대다수가 중건을 마쳤습니다. 새로 집을 얻은 백성들이 하나같이 소리 높여 폐하의 덕을 칭송하고 있사오니, 실로 은혜를 안다고 하겠습니다.”
신임 공부대신이자 도성재건도감 제조 최석정이 복구 상황에 관하여 보고했다. 최석정은 장조 때 내 밑에서 일한 최명길의 손자로, 산학과 서학에 뛰어난 중견 관리였다. 다만 별로 관운은 없었는지, 쉰이 되어가는 나이에도 군수를 지낸 게 고작이었다.
헌데 이미 선황에게 사직한다고 표를 올렸는데 자기만 남을 수는 없다면서 다른 대신들과 함께 조정에서 물러난 장성준이 최석정을 자기 후임으로 추천했다. 지금은 산학원에서 수학 교수를 하고 있다기에 불러 확인해 보니 능력은 정말 뛰어났다.
큰맘 먹고 대신으로 앉혔더니 과연 성과도 만족스러웠다. 공부 행정을 장악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고, 도성재건도감에서 도로를 설계하고 주택을 새롭게 지어 배분하는 과업도 수월하게 해치웠다.
“5월부터 가옥 재건에 들어가서 현재까지 1만 5천 호를 지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5천 호를 더 지어서 2만 호를 달성하겠으며, 이로써 두 차례 화재로 인해 불탄 가옥 숫자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습니다.”
완성된 1만 5천 호 중에서 4천 호는 방화대를 형성하기 위한 벽돌집, 1만 1천 호는 일단 한옥이되 규격화된 한옥이다. 규격을 맞춘 자재를 준비한 덕분에 빠르게 시공할 수 있었다.
내 치하를 받은 최석정은 이게 다 장성준 덕분이라며 전임자에게 공을 돌렸다. 장성준이 한양 재건에 관한 기본 설계를 이미 구상해 놓았으며, 인력을 동원하고 자재를 조달할 준비 역시 마쳐두었으니 자신에게는 공이 없다는 거였다.
“아무리 준비가 잘 되어있어도 실행을 제대로 못 하면 의미가 없다. 장성준이 세운 공은 장성준의 공이고, 그대가 세운 공은 그대의 공이다.”
일단 모양새도 있고 해서 일괄 사표로 모두 집에 보내긴 했지만, 장성준은 적당히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불러서 뭐라도 시킬까 보다. 그만한 능력과 열의라면 뭘 시켜도 제대로 할 테니 말이다.
이맹전이나 이완도 잠시 자숙하는 기간을 거친 뒤에는 괜찮은 자리를 줘서 어디든 써먹을 사람들이다. 하지만 박종훈이나 남지원 같은 자들은 영원히 안녕이다. 예왕 편에 달라붙어 꼬리를 흔든 과거를 뻔히 아는데 출세 따위 시켜줄 줄 아냐.
일단 중추원에 한 자리씩 주긴 했다만, 그거야 퇴임한 대신이니 형식상 주는 거다. 예왕 일파라고 치도곤을 맞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 줄 알아야 하고, 조정 복귀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도성 재건사업이 잘 진행되어 겨울이 오기 전에 백성들이 모두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다 하니 실로 다행이다. 이제 송주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만 알면 올해는 더 이상 마음을 쓸 일이 없을 듯하다.”
후송 문제는 조정에서도 꽤 논란이 된 상태다. 이놈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조문 사절을 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