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67
3부 1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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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황이 죽었을 때, 가장 먼저 조문 사절을 보낸 주변국은 유구였다. 이는 유구가 조선 내 동향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강력한 방증이기도 하다.
대한에서는 황실에 변고가 발생했다고 굳이 사방에 회람을 돌리지는 않는다. 그저 조보에 실어 공지할 뿐이다. 조보는 조선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관들에게도 제공되므로,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리는 셈이 되기는 한다.
도성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은 당연히 현대처럼 많지는 않다. 서평관(西平館)이라고 해서 청나라와 후금에서 보낸 관원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고, 일본 관원이 머무는 동평관(東平館)과 유구 관원이 머무는 유구관(琉球館)이 있다. 이 셋이 도성에 주재하는 외교관 전부다.
과거에는 일본 외교관이 조선에 상주하지 않았다. 경인왜란의 전력 탓으로 을미조약에서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오사카에 주재하는 조선관을 통해서 행한다’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차례 기근 등으로 대일관계 유지 필요성이 커졌다. 그러다 보니 일본 사신이 방문했을 때 이용하는 숙소였던 동평관이 자연스럽게 상주 공관으로 바뀌었고, 건주나 유구 같은 나라들처럼 일본도 상주 외교부를 두게 되었다.
이들 이외에 잉글랜드?프랑스?네덜란드 등은 정식으로 외교사절을 상주시키지는 않는다. 그 대신 벽란도에 주재하는 각국 동인도회사 상관장들이 일종의 총영사 역할을 맡고 있다. 벽란도에 있으니 장사에는 유리하지만, 조정 소식을 입수하는 건 아무래도 한발 늦다.
다만 일본 측은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던 동평관이 지난번 대화재로 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주재하던 관원들이 제물포로 옮겼고, 국상이 터졌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외국 축에는 들지 못했다.
거리로만 보자면 청나라가 좀 더 가깝다. 하지만 유구인들은 제물포에 쾌속선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당장 배를 띄웠다. 유구 본국에서도 언제든 조문 사절단이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 준비의 결과 형황이 사망한 지 20일도 안 되어서 유구 본국에서 조문하는 사절단이 왔다. 우리도 놀랄 수밖에 없었고, 비록 칭신은 하지 않는다고 해도 유구가 우리 대한 앞에 납작 엎드려 충성을 다 하는 그 태도에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청, 후금, 일본, 아모국 등지에서 조문 사절이 들어왔다. 아모국은 우리와 일본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지대로서 평소 교역 이외에는 별다른 통제가 없지만, 태황 교체와 같은 경조사가 있을 때는 꼬박꼬박 사자를 보낸다.
아모국이 독특한 점은, 대한에 사절을 보낼 때는 조복을 입혀 보내고 일본에 사절을 보낼 때는 화복(和服)을 입혀 보낸다는 점이다. 늘 자기네 전통 복장을 하고 오는 유구와도 약간 다른 부분이다.
여기에 벽란도에 주재하는 각국 상관장들의 조문까지 받아 가며 ? 다만 이들은 빈소에서 바닥에 엎드려서 절하지는 않고 허리만 숙였다 ? 국장 절차는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교동도에 있는 서도수군통제영에서 참으로 해괴하고 놀라운 장계가 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대들은 우리 선대를 모욕하였으며 우리와 몇 차례나 싸움을 치렀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인가?”
“자고로 상을 당했을 때는 전쟁을 하던 중이라도 멈추고 화의를 맺음이 옳다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 두 나라는 싸우고 있지도 않으니, 어찌 임금께서 겪고 계신 슬픔을 감히 위로하러 찾아뵙지 않겠습니까?”
나는 물론 조정 전체가 생각도 안 했던 일, 후송 조문단이 왔다. 고용한 포르투갈 상선을 타고 장강을 빠져나와 기세 좋게 벽란도 방면으로 오다가 순시하던 우리 수군에게 걸렸다.
후송 조정이 임차하여 관선으로 삼은 셈이니, 평소 수군에서 하던 대로라면 당장 나포해 후송 측 인원과 재보를 포획하고 배만 풀어줬을 일이다. 하지만 국상을 조문하는 사절이라 하는 말에 함부로 처리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한 함장이 일단 제물포로 호송한 참이었다.
당연히 이들을 어찌 처우할지를 두고서 조정에서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 하지만 분명히 황제의 명을 받아 조문하러 왔다고 하고, 딱히 무장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으니 대처하기가 상당히 애매했다.
이틀 동안 이 문제로 갑론을박을 벌인 끝에 일단은 저들의 조문을 받자는 결론을 내렸다. 후송 사절단은 예를 갖추겠다고 찾아왔는데, 이자들을 문전 박대하면 우리가 예를 차릴 줄 모르는 무뢰한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 의도도 궁금했다.
“그대들이 순전히 좋은 뜻으로 찾아왔다면야 대견한 일이다. 하지만 귀국의 초대 국주는 우리 부황께 감히 말로 옮기지 못할 만큼 무례한 언사를 글로 보내 모욕한 바가 있다. 그런 과거를 짐이 분명히 기억하는데 어찌 그대들을 곱게 받아들이겠는가?”
청군을 격퇴하면서 한껏 기가 오른 조승복이 예전 명나라 시절처럼 모두 입조하여 충성을 맹세하라고 주변국에 대대적으로 국서를 보낸 게 선황 연가제 시절이다. 당연히 비웃음만 샀고 국서는 반송당했다.
그 뒤로 후송과 우리가 전면전을 벌이지는 않았다. 습격과 약탈, 서로 간의 선박 나포만 이어졌을 뿐이다. 대개는 우리가 덮치는 쪽이었지만, 간혹 후송 해적들이 우리 배를 덮치는 사례도 아예 없지는 않다.
어쨌든 두 나라 사이가 그동안 적대적이었던 건 분명하다. 우리 쪽도 16년 전 후송 영종 조광훈이 죽었을 때 조문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 조문을 하겠다고 왔는지, 참으로 궁금할 따름이었다.
“우리 성상께서도 과거에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다소 불미스러운 일에 관해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하오나 옛일에 얽매여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니, 장차 우리 대송과 귀국 사이에 좋은 관계를 만들고자 합니다.”
후송에서 온 사자 ? 이름은 송정경(宋廷敬)이라고 했다 ? 는 매우 정중하게 자기 군주가 보낸 위로의 뜻을 전했다. 서로를 거북하게 할 만한 표현 같은 것은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 말이다.
송정경은 내 앞에서 중국어를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 어떻게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유창한 조선말을 구사했다. 나를 부를 때는 꼬박꼬박 ‘임금께서는’이라고 하면서 ‘폐하’라는 호칭은 피했다.
“비록 생각하는 바에서 다소 다른 점이 있었다 하나, 우리 대송과 대한은 모두 옛 대명의 뜻을 따르는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과거에 다소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해도, 추후로 좋은 관계를 수립했으면 좋겠다는 게 저희 폐하께서 보내시는 뜻입니다.”
국상이 있었다는 소식은 주산진을 통해 들었다고 했다. 주산에서 후송을 오가는 밀수선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서로 잘 알고 있고 ? 우리 조정에서도 염초 같은 전략물자만 아니라면 후송으로 흘러나가도 놓아둔다 ? 저들도 딱히 숨기려 하지 않았다.
“저희 태조께서 북적을 격퇴하시며 다소 감정이 격해지신 탓으로 약간의 실수를 범하시긴 하였으나, 본래 귀국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부디 저희 폐하께서 평화를 원하시는 마음을 새로 즉위하신 임금께서 자애로우신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사옵니다.”
장례가 끝날 때까지 머무른 다른 나라 사신들과는 달리, 후송 사신은 도성에서 딱 엿새만 머무르고 제물포로 돌아가 배에 올랐다. 자기들이 경계 대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도성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배정받은 숙소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송주가 조만간 북벌을 결행하리라는 점은 자명합니다. 그때 우리가 청을 도와 개입하지 못하게 막을 의도에서 관계를 증진하고자 사신을 보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예부대신 윤시현이 의견을 냈다. 주변국 중 후송 하나만 빼고 다 다녀와 본 외교 업무의 베테랑이다. 준가르, 서나라, 벵골까지 다녀왔다.
“개조(開祖)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건 실로 대역죄를 받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송주가 보낸 사자가 우리 조정에 와서 초주(初主)의 잘못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 건, 현주(現主)가 지시한 바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후송 현주, 즉 현재 황제인 조형서는 청나라를 쳐서 몇 년 전의 침공에 대해 복수하면서 자신의 위업을 세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다. 서쪽에 있는 서나라는 수비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니, 북벌을 방해할 존재는 대한뿐인 셈이다.
“그러니 저들은 조문 사절을 보내서 예를 차림으로써 저들에 대해 우리가 품은 적대감을 낮추고, 또한 청에게 우리가 후송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암시를 줌으로써 이간질을 시도할 생각인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럴 수 있겠구나.”
눈앞의 이익만 따진다면 청나라보다 후송을 동맹 대상으로 택할 수도 있다. 청나라보다는 후송 쪽이 훨씬 큰 이득을 거둘 수 있는 상대니까 말이다.
국혼으로 피가 섞였다고 하지만, 그것도 벌써 4대 전 일이다. 군주 사이에 8촌이라 하면 솔직히 남이나 마찬가지다. 나랑 예왕도 형제간이면서 칼을 들고 맞붙지 않았는가.
하지만 나는 돈 몇 푼 때문에 후송과 손을 잡을 생각이 없고, 청나라 황실도 내 눈에는 다 내 후손들이다. 문제는 주변에서는 그런 내 속사정을 알 수가 없다는 점이지만.
“송주가 보낸 사신들을 보고 서평관에 있는 건주 사신들이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었지?”
“물론이옵니다. 아무리 후송이 저들의 적이라 하나, 상국에 조문하러 온 터에 그런 무도한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형황과 다른 정책을 채택해서 후송을 지원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기분을 없애지 못하리라. 후송 쪽에서 바로 그러한 의도로 찾아온 사절을 보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약간 안심시킬 필요가 있겠다.
“조문하러 온 여러 나라 사신들을 궁으로 불러라. 저들이 본국에 돌아가기 전에, 수륙으로 먼 길을 오가느라 들인 수고를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어 치하해야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랫것들 단속 한 번 할 겸, 제대로 한 상 차려서 거하게 한 번 먹이는 것도 좋겠지. 새 조정에 들어온 중신들에게도.
– 5 –
20년하고도 몇 년 만에 경회루에서 잔치를 열었다. 그래, 경회루야말로 대궐에서 잔치를 열기 가장 좋은 곳이다. 이 웅장한 3층 누각만큼 멋진 장소가 어디 또 있단 말인가. 과거에 여기서 숱한 잔치를 열었던 무종 때, 장조 때가 떠오른다.
“이게 진짜 대궐에서 여는 잔치지.”
자연스럽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용상을 다시 차지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지내면서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감상이다. 용포를 입고 보위에 오르니 여기가 내 집이고 내 자리라는 생각이 다시 강하게 든다.
“그대들이 형황의 은혜를 잊지 않고 모임이 실로 기특하다. 이에 한잔 술로 내 고마움을 표하려 하니, 편안히 즐기기 바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누각 위에는 조정 중신들은 물론, 일찌감치 돌아간 후송을 제외하고 다른 주변국 사신들 전부와 벽란도에 있는 세 동인도회사 상관장 전원이 임석했다. 마닐라에서 스페인 총독이 보낸 사자와 소식이 늦어 장례가 다 끝나기 직전에 비로소 도착한 서나라 사신도 초대했다.
사간원에서 아직 형황의 3년 상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잔치를 열어도 되겠냐면서 이의를 제기하긴 했다. 물론 내가 놀려고 잔치를 열면 문제가 되겠지.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짐이 악공과 무희를 불러들여 질펀하게 놀겠다는 것도 아니고, 먼 나라에서 조문하러 온 이들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술 한 잔 내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못 한다면 그대들이 중시하는 그놈의 예의는 대체 어디에 쓰는 것인가?’
올해가 흉년이라 식량을 아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간원에서도 진심으로 반대하려던 건 아니고 그냥 한번 찔러본 거였는지, 내가 한 번 비아냥거리자 바로 조용해졌다.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도 한참 바뀐 지 오래다 보니 이제는 사간원, 사헌부라고 해도 옛날 사림 같은 이들은 별로 없다. 하지만 ‘옛날 사림’ 같지 않다 뿐이지, 원칙과 도리를 따지는 이들이 주로 모인 건 여전하다. 그래야 하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건흥제 폐하의 만수무강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저희 모두 축배를 들고자 합니다!”
인사를 나눴을 때쯤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상관장, 로버트 헌팅턴이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눈치 없는 놈, 아무리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도 그렇지! 형황의 장례식을 마무리하는 자리니 오늘은 공연히 건배하고 그러지 말라고 사전에 분명히 안내했을 텐데.
건흥(建興)은 내 연호다. 나라를 좀 더 흥하게 하고 싶다는 뜻을 담아, 너무 야단스럽지 않고 무난한 것으로 골랐다.
“뜻은 고맙지만, 오늘은 그런 자리가 아니다. 짐에게 올리는 그대의 축배는 다른 자리에서 다시 받기로 하겠다.”
“소, 송구하옵니다.”
얼굴이 벌게진 헌팅턴이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 있는 네덜란드, 프랑스 상관장들이 피식 웃는 모습이 보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우리한테 모직물을 주로 수출한다. 수입품으로는 본국보다는 대남에서 생산하는 차와 커피 교역으로 수익을 내고 있지만, 네덜란드나 프랑스보다는 좀 뒤지는 게 사실이다. 그걸 앞질러 보려다가 조급해져 실수를 범한 듯했다.
유럽에서 조선과 주로 교역하는 이들 세 나라 중에 수위를 달리는 나라라고 하면 당연히 네덜란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동남아시아를 제패하면서 향료 제도를 차지했고, 향료 수출과 연계해서 인삼 거래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여기에 일찌감치 내달상단과 연계해서 기계로 짠 우리 면포도 대량으로 사들여가고 있다. 목화에서 기계로 실을 뽑고 짜기까지 마친 면포는 아무래도 아직 품질이 우수하지는 못해서 B급으로 취급을 받는데, 가격은 수공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싸다.
네덜란드인들은 이 천을 사다가 신대륙에 있는 대농장 노예들에게 입힐 싸구려 옷감으로 판다. 유럽에서도 면직물이 상당히 유행하고 있기는 한데, 그쪽은 잉글랜드인들이 유통하는 인도산 캘리코가 압도적으로 시장을 장악해버렸다. 우리 제품이 파고들기는 좀 어렵다.
어쨌든 유럽인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내가 예왕을 물리치고 제위를 획득한 것을 환영했다. 예왕도 상인들과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국내파 자본인 송방과 가까웠기 때문에 자기들은 별 이득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본의가 아니긴 해도 유럽에 10년 가까이 체류했고, 유럽 언어에도 능통하며 유럽 사정도 잘 알고 있다. 미주에 있는 동안 내달상단과도 가까워졌다. 앞으로 자기들에게 훨씬 유리한 사정이 펼쳐지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상황이 조금 진정된 뒤에 대신들, 그리고 사신들을 차례로 내 앞에 줄을 세웠다. 그리고 국상을 치르느라 수고했다는 의미로 어주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내 신하들에게는 당연히 앞으로 내 보좌에 최선을 다해 달라는 당부의 말이 붙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조문 사절들에게는 상대 국가와 앞으로도 잘 지내고 싶다는 희망의 말을 술과 함께 건넸다. 당연히 대한과 상대국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짧은 대화도 오갔다.
물론 그중에서 내 눈치를 가장 보는 자는 예상대로 청나라 사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