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7
1부 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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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는 요즘 대마도 정벌에만 너무 신경을 쏟고 계셔서 걱정이오.”
“대마도뿐이겠소? 이제 두만강 쪽 야인들이 또 소란을 피우고 있지 않소. 대마도 정벌군이 돌아오면 또 야인 정벌군이 나가야 할 판이오.”
왜 수군을 격멸했다는 소식이 도성에 들어올 무렵, 서울 한구석에서는 퍽 은밀한 이야기가 오갔다. 나이 지긋한 중신들 중 서넛이 남몰래 모여 국정에 대한 염려를 나누는 중이었다.
“성종께서는 야인 토벌을 하시려다가 준비를 거의 다 마치시고도 조정에서 동의하지 않자 취소하신 바가 있소. 헌데 금상께서는 어떻게든 군사를 일으킬 기회만 노리고 계시지 않소? 그동안 매년 흉년이 든 것이 차라리 다행이오. 그러지 않았으면 매년 군사를 내셨을 거요.”
이미 권력을 잡은, 지위가 있는 이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나라 살림에 무리를 주는 점도 문제지만, 영웅과 야심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도 전쟁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김종서와 최윤덕이 떠올랐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면서 구성군 이준과 남이가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남이가 먼저, 그 다음은 구성군 이준이 역모 혐의를 쓰고 숙청되면서 힘을 잃었다. 하지만 새 전쟁은 새 영웅을 낳을지 모른다.
“그나마 이번 대마도 정벌은 우상 대감이 지휘했으니 큰 문제가 없소. 하지만 야인 정벌은 누가 나가게 될지 모르오. 행여 공명심 때문에 전하를 부추겨 일을 크게 만들 이가 나선다면 어찌 되겠소? 가뜩이나 주상께서는 무위를 뽐낼 궁리만 하고 계시건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정말로 모든 게 마땅치 않았다. 임금은 즉위한지 3년쯤 되었을 때부터 이상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총을 만들지 않나, 염초 생산에 부쩍 신경을 쓰지 않나? 그전보다 훨씬 혹독하게 군사를 조련하지 않나?
딱히 야인이나 왜인들이 그전보다 많이 설치는 것도 아니었다. 국경에서야 자기들 일이니까 늘 호들갑을 떨지만, 도성에서 보기에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소소한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임금은 그 별 것 아닌 사건들을 핑계로 자꾸만 군사를 일으키려고 궁리를 했다.
“자고로, 군주가 무위를 떨치는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나라가 흔들리게 되어 있소. 옛날 그 강성하던 한나라가 왜 흔들리기 시작했소? 한무제가 무리한 흉노 토벌 원정으로 국고와 인명을 낭비하면서부터가 아니었소?”
“한나라뿐만이 아닙니다. 수나라 역시 고구려 원정에 진력하다가 아직 단단히 다지지 못한 나라의 기틀이 흔들려 망했습니다. 수양제가 무리하게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어찌 수나라가 그리 빨리 무너졌겠습니까.”
일일이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역사에는 무리하게 전쟁을 벌이다가 나라를 무너뜨린 군주가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도 아니고, 얼마든지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는데도 굳이 군사를 일으킨 이들이 말이다.
“주상께서 무위를 과시한다는 헛된 꿈을 갖는 건 아직 너무 젊으신 탓이 아니겠소? 자고로 젊은이란 칼을 들어 자기 이름을 떨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법이오. 게다가 주상께선 경연에도 제대로 임하지 않으시니, 그만큼 삿된 길로 빠지기도 쉽소.”
경연에 제대로 임하지 않는 임금의 무성의는 노신들 사이에서 해묵은 걱정거리였다. 올해도 벌써 절반이 흘렀건만, 경연이 열린 날은 30일도 되지 않았다. 기껏 나와도 무성의한 태도로 딴생각만 하고 있기 일쑤였다. 한 사람이 탄식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서자일지언정 견성군 같은 분이 보위에 앉으시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오. 덕이 있고 학식이 깊은 분이니, 군사를 내어 대마도를 치네 여진을 정벌하네 하면서 허황된 계획을 세우시지는 않았을 게요.”
둘러앉은 이들 모두 한숨을 쉬었다. 금상은 선왕의 적장자로서 분명 최고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에 걸맞을 만큼 성군으로서 행동하는가? 이미 질릴 만큼 논의했다. 금상은 기껏해야 범군이 될 재목이다. 그리고 제때 막지 않으면 암군이 될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주상께서 후사가 없으시다는 거요. 만약 어떤 이유에서건 보위가 지금 비게 되면, 여러 왕자들 중에서 덕이 높은 이가 그 자리를 잇게 되오.”
잠시 이야기가 멈췄다. 나직한 목소리가 동석한 이들의 귀에 속삭였다.
“이미 전례는 있소. 공정왕께서는 스스로 그 부족함을 알고 동생인 태종대왕께 양위하셨소. 또한 노산군이 결국 보위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세조대왕께 선양한 바도 있지 않소? 지금 그 일들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소?”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쉽게 답할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니오. 다만 전하께서 계속 무위를 떨치는 데만 주력하며, 학식을 쌓고 덕을 베푸는데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일개 무부(武夫)나 다름없소. 어찌 군주가 될 재목이라 하겠소?”
맞은편에 있던 이가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답했다.
“완원군, 회산군 두 왕자들께서는 건강히 잘 계신다 합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특히 갑산부사는 우리와 선이 닿는 사람이니, 알아서 잘 모실 거요. 완원군께서는 견성군만큼은 아니라도 덕이 높고 학식이 깊으시니, 명군이 되실 수 있소.”
마주앉은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변하던 목소리가 천천히 자기 말을 마무리했다.
“내가 역모를 제안하는 건 아니오. 단지, 주상께서 도저히 임금 자리를 유지할 재목이 아니구나…하는 확신이 들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생각해 보자는 것뿐이오. 적어도 우상 대감이 대마도에서 돌아올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지 않겠소.”
– 17 –
“벌써 사흘째인데 수확이 없네. 벌써 오늘도 다 저물어 가는데.”
“혹시 이 산줄기에 왜놈들 씨가 벌써 다 말랐나?”
“설마. 그래도 내세울 만큼은 잡아야 돌아갈 면이 서는데 말이야.”
다지와 목금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산줄기를 탔다. 이들은 도체찰사에게 허가를 받아 포수군 안에서 별도로 편성한 낭자대(娘子隊) 네 명과 함께 하고 있었다.
본래 포수군에는 이들 두 사람을 포함해서 여자가 10여 명 있었다. 도체찰사 이극균은 어찌 싸움에서 여자를 쓰겠느냐며 이들을 뒤로 돌렸다. 기껏 온 전쟁터에서 이들이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포로로 잡은 왜인 여자들을 감시하거나 물자 적치장에서 파수를 서는 정도였다.
그런데 밤에 파수를 서던 다지가 대공을 세웠다. 십 보 앞에 서있는 사람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어두운 밤에, 치중에 불을 지르러 들어온 왜인 간자 네 명을 조총 단 네 발을 쏘아 모두 사살한 것이다. 상을 줄 테니 무엇이든 원하는 걸 말해보라고 하자 다지는 이렇게 답했다.
“대마도주를 잡으러 가고 싶습니다.”
뭐든 말해보라고 한 사람은 도체찰사 자신이었다. 답이 궁해진 이극균은 약속대로 다지를 비롯, 싸우고 싶다는 여자 포수군들을 낭자대라고 이름 붙여 따로 내보냈다. 이들은 그동안 왜적 여덟 명을 잡아서 목을 베고, 아녀자 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배가 고픈데. 슬슬 배나 좀 채우는 게 어때? 밤 보낼 준비도 해야 하고.”
목금이 제안하자 다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성격도 그런 데다, 세운 공도 있다 보니 다지는 은연중에 낭자대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잠깐 앉아 쉬자. 배를 채워야 또 궁리를 해서 왜놈들을 쫓지.”
“이 미친년아, 밤엔 자자 좀.”
보름 가까이 돌아다닌 덕분에 적어도 이 일대 산길은 완전히 익혔다. 물론 동굴이나 샛길 같은 것까지 다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산속에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난 사흘 동안 수확이 없었다.
“정말 이 산에 숨은 왜놈은 다 잡았나봐. 다른 산으로 옮겨 볼까.”
“그래도 뭔가 큰 놈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야.”
다지는 중얼거리며 찐쌀을 씹었다. 이들이 가져온 식량은 찐쌀과 소금뿐이었다.
“뭔가 놓쳤다는 생각…야, 우리 고기 굽자. 아까 낮에 잡은 꿩이랑 토끼, 지금 구워 봐.”
“고기 먹으려고? 냄새 잘못 피우면 누가 찾아올지 모르잖아. 차라리 내일 낮에 먹자.”
“바로 그 누가 찾아오길 바라는 거야.”
깨끗하게 손질해서 꼬챙이에 꿴 토끼 한 마리와 꿩 두 마리가 모닥불 위에 걸렸다. 고기가 천천히 익어가는 맛있는 냄새가 주변 숲속으로 퍼져나갔다. 모닥불 앞에 앉은 젊은 여자는 고기가 타지 않도록 열심히 꼬챙이를 돌리고 있었다.
고기가 타지 않도록 잘 굽는 데 여념이 없는 여자 뒤쪽으로 갖가지 복색을 한 남자 다섯이 홀연히 나타났다. 한 발 앞서서 소리 없이 다가간 남자 하나가 조용히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남자가 예상한 바와 전혀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상대가 굽실거리며 어쩔 줄 모르리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절을 하기는커녕 굽던 고기를 놓아두고 그대로 숲으로 줄달음질을 쳤다. 깜짝 놀란 남자와 그 일행은 어리둥절해서 그 뒤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모닥불 위에 걸린 토끼고기를 꼬챙이채로 집어 들더니 한 조각 잘라 맛을 보았다. 독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자기 동료들에게 들고 돌아가서는 무리 가운데 있는 젊은 남자에게 공손히 바쳤다. 그리고 꿩 두 마리는 넷이서 반 마리씩 나눴다.
조선군이 섬을 봉쇄한 이래 근 40일, 산으로 들어올 때 가져온 식량은 떨어진지 오래고 산중에서 만난 피난민들에게 식량을 얻어내는 것도 거의 한계에 달했다. 피난민들이 가진 식량이라고 화수분도 아니고, 이젠 피난민 자체가 없었다. 죄다 조선군에게 들켜 끌려갔으니까.
근 나흘째 굶던 참에 손에 넣은 꿩과 토끼는 정말 진미였다. 젊은 여자가 혼자 산속에서 이 짐승들을 굽고 있는 상황을 수상하게 느낄 여유도 없었다. 다섯 사람은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고기를 이로 찢어 삼켰다.
몇 입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꿩과 토끼가 모두 뼈만 남고 사라졌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던 그들의 눈앞에 아까 도망쳤던 여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도, 누구냐는 추궁도 할 수 없었다. 그 손에 들린 작은 포가 이쪽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쫓기는 동안 저 포를 들고 다니는 조선군을 여러 번 보았다. 포를 쏘면 수백 보나 떨어져 있는 사람이 한 방에 피를 토하며 죽곤 했다. 제길, 피난민이 아니고 조선군이었나!
슬며시 주변을 둘러보니 그 여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섯 명이나 되는 조선 군인들이 더 있었다. 역시 다 여자였고, 모두 손에 활과 쇠뇌를 들고 이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칼 버려. 항복해.”
포를 손에 든 조선 여자가 짧게 말했다. 포 끝에 달린 창날이 번쩍이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조선 놈들은 여자도 전쟁에 내보내나? 싸울 사람이 없는 모양이지? 지독한 놈들 같으니.
무기라고는 허리에 찬 칼 밖에 없지만, 반격하려면 할 수 있다. 일제히 달려들어 저 방자한 계집애들을 쓰러트린 뒤 흩어져 도주하면 된다. 아니, 그냥 빠르게 달리기만 해도 된다. 어떤 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잔데 저년들이 활을 쏜들 얼마나 정확히 쏘겠는가?
포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그 반동과 충격을 저런 가냘픈 계집이 이겨낼 리가 없다. 고기를 집어 들었던 왜인이 슬며시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이미 어두워지고 있다. 저년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단도를 던져 포를 든 계집을 처치하고, 그 틈을 이용해 도망치자.
다지는 매캐한 초연 속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가능하면 총을 쓰지 않고 싶었는데, 저 왜놈이 엉뚱한 짓을 하는 바람에 총을 쏴 버렸다.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면 비수를 던지려는 몸짓이 안 보일 줄 알았나?
굉음에 놀란 나머지 왜인들은 모두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저걸 다 죽여 버리고 수급만 잘라서 가져갈까, 산 채로 본진까지 끌고 갈까 잠깐 생각하던 다지는 후자로 하기로 했다. 어떤 보고도 없이 사흘이 지났으니, 슬슬 본진으로 돌아갈 때도 됐다.
“엎드려 있어. 일어나면 죽인다. 저놈처럼.”
포로들에게 배운 짧은 왜말을 건넸다. 왜인들이 움직이지 않음을 확인한 다지가 손짓하자, 활과 쇠뇌를 겨누고 있던 목금과 다른 동료들이 천천히 다가가 왜인들을 결박했다. 이제 반격당할 염려가 없어졌으니 다지는 안심하고 총에 다시 탄환을 쟀다.
먼저 총을 세우고, 종이로 된 탄포를 이로 찢어 그 안에 든 화약을 총구에 붓는다. 탄환과 종이를 총구에 쑤셔 넣고 다진다. 통에 든 점화약을 화약접시에 붓는 건 쏠 상황이 닥쳤을 때 하기로 했다. 돌아다니다 괜히 쏟아질지도 모르니까.
“다지야, 다 묶었다.”
“그럼 돌아가자.”
어린애나 여자들도 아니고 싸울 수 있는 장성한 남자 다섯을 잡았다. 이만하면 그만 진영에 돌아가 자랑하기에 충분한 전과가 될 것 같다.
“그대와 낭자대의 재주는 정말 놀랍군! 도주의 아들을 생포하다니!”
“뭐, 뭐라 하셨습니까?”
군관들에게 수급과 포로를 넘기고 숙사로 돌아와 있는데 도체찰사가 보낸 비장이 찾아왔다. 호출을 받아 가보니 도체찰사가 잔뜩 흥분해서 신나게 웃고 있었다. 다지가 어리둥절했다.
“그대가 아까 데려온 포로들 중에 도주 종재성의 아들이 있는 걸 몰랐는가? 올해 스물다섯인데, 측근 신하와 무사 몇을 거느리고 애비와 따로 숨어 다녔던 모양이네. 그걸 잡아서 데려오다니, 정말 큰 공이야!”
도주 아들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죄다 목을 잘라버리려고 했던 일이 생각나서 등에 진땀이 솟았다. 다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도체찰사가 계속 칭찬을 퍼부었다.
“지난번 일도 그렇고, 네 공이 정말 크다. 도주의 아들까지 잡았으니, 이제 싸움이 정말 곧 끝날 게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내 상감께 청을 드려 네게 정말 큰 상이 돌아오도록 하겠다!”
“감사하옵니다.”
상을 준다는 약속은 고맙지만, 전쟁이 끝난다는 말은 약간 아쉬웠다. 다지는 가능하면 총을 계속 쏘고 싶었다. 백정 계집이 아닌 인정받는 전사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