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09
1부 109화
– 1 –
전쟁을 시작하는 만큼이나 끝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마도 원정군이 짐을 챙겨 철수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 동래에 도착한 뒤에 해산하여 출신지인 각 고을로 돌아가는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준비했다가 남은 군량은 귀향하는 군사들에게 귀가비조로 몇 말씩 들려서 보냈다.
죽거나 다친 이들에게는 저화로 보상금을 지급했다. 현대라면 유족연금이나 유공자연금 같은 게 나가야겠지만 아무래도 이 시대 행정력으로는 그것까진 무리라서….
헌데, 아무래도 아전이란 놈들이 중간에 좀 떼먹은 듯하다. 금위사에 지시해서 색출하게 한 다음, 잡혀 들어온 놈들은 모조리 쳐 죽여 버릴 테다. 세상에 떼먹을 돈이 따로 있지, 전사자 보상금이랑 부상자 치료비를 떼먹는단 말이냐!
사실 조선시대 이전까지 내려오던 관습대로 하자면 군인전을 지급하면 된다. 하지만 그거야 군인호가 따로 있던 고려 때까지나 통할 방식이고, 나름 국민개병제인 조선에서는 곤란하다. 땅도 모자라고 말이다. 세금 걷어야지.
어쨌든 개선식을 치르고, 도성으로 귀환한 경군 장병들에게 거나하게 잔치를 베풀어주면서 논공행상을 하고, 대마도 포로들을 끝까지 다 돌려보내고 하는데 대충 한 달은 걸렸다. 원정 마무리가 완전히 끝난 시점은 거의 추석이 지나서였다.
전과 및 피해 집계도 이때쯤에 마무리되었다. 내 생각보다도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일단 전과. 대마도에서는 수급 347개를 거두었고 포로로 3,219명을 잡았다. 우리가 대마도 전체 면적에서 ⅓정도인 남부 지방에서만 작전을 펼쳤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작전구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인들을 죽이거나 붙잡은 셈이다.
수군도 만만찮은 공을 세웠다. 수군은 쇼니 씨가 보낸 함대와의 결전에서 적선 57척을 부수거나 불태웠고, 수급 178개와 포로 1,123명을 거둬들였다. 육군이 잡은 포로는 아녀자가 많았지만 수군이 잡은 포로는 대개 배를 젓던 격군들이었다.
여기에 덤으로 전공을 세운 이들이 동래 일대에서 대기하던 군사들이다. 왜관에서 일어난 폭동에 대처하면서 거둔 수급이 781개고, 1192명을 붙들었다. 가장 큰 전과지만, 대마도에서 산과 골짜기를 누비며 왜적을 찾던 이들에 비하면 사실 좀 쉽게 거둔 전과다.
다만 우리 피해도 동래 일원에서 가장 컸다. 전사자 325명, 부상자 812명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폭동 초기에 초동진압에 실패한 탓이 크긴 했다.
대마도 원정군에서는 사고사 및 전사자 138명, 실종자 52명, 병자 및 부상자 535명이고 수군에서는 사망자 47명에 부상자 187명으로 끝났다. 선박 손실은 전투에서는 없었지만 풍랑을 만나거나 좌초해서 잃은 배가 11척. 전과에 비하면 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규모다.
노획한 무기와 물자도 상당한 양이었지만 뭐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다만 노획한 일본도, 아니 왜도가 적어도 2천여 점은 되었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삼남 지방 각 군영에 나눠주었다. 가장 좋은 것 몇 개는 도성으로 가져와 내금위에서 장비하게 했고.
소모한 군량과 무기 등 전쟁비용 문제는…그냥 문서 첫 장을 읽다가 그냥 한숨 한번 쉬고 덮어 버렸다. 뭐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내가 이걸 읽는다고 이미 쓴 돈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다만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던 건 분명하다.
이 모든 사항은 병조에서 편찬중인 《신유동정록(辛酉東征錄)》에 철저하게 수록될 예정이다. 이번 원정이 어떻게 준비되고 실행되었는지,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작전 실행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사건 및 전투경과도 기록해서 후세에 전할 작정이다. 후세 밀덕들이 좋아하겠지?
그러고 보니 이번 전쟁을 치르면서 새로이 깨달은 점이 한 가지 있다. 대마도주가 미치는 영향력이 생각보다 작다는 점이었다.
대마도 인구 중 절반 가까이는 섬 중부 및 북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남부에 있는 대마도주를 거의 돕지 않았다. 병력도, 물자도 내려오지 않았다. 지협에 목책을 치고 남북 간의 교통을 봉쇄하는 임무를 맡은 우군이 거의 전투를 겪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 연유가 매우 궁금했는데, 이극균이 보내온 포로 심문 기록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마도가 ‘중앙집권이 안 된’ 탓이었다.
이극균이 포로들을 심문해 보고한 바에 따르면 대마도에 있는 각 촌은 상당히 큰 자율권을 가지고 있고, 촌민들이 스스로 무장까지 갖췄기에 여차하면 도주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다고 한다. 과거 왜구가 성하던 시절에는 각 촌이 자체적으로 해적질을 다니기도 했다고 했다.
이건 좀 고려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도주 종재성, 아니 소 소키모리는 도민들에게 권위를 잃었을 뿐 아니라 각 촌을 억제할 무력도 잃었다. 소키모리가 직접 거느린 병력과 그나마 그에게 우호적인 남부 마을들이 보유한 병력 다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소키모리가 무력을 잃었으니, 원래부터 말을 잘 듣지 않던 북부지역 촌락들은 이제 대놓고 멋대로 놀아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들이 벌일 방종 중에는 조선 연안에 대한 해적질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아마 자기들 나름대로는 조선에 대한 반격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여기까지 알게 되자 불안감이 차올랐다. 왜구 잡는다는 핑계로 원정을 벌였는데, 엉뚱하게 왜구가 더 성하게 만드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기껏 대군으로 원정을 감행하고도 자칫하면 내 정치적 입장만 더 난처해질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 되면 다른 수가 있겠사옵니까? 북부를 한 번 더 치시는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아 이런 신박한 수가 있나! 유자광이 별 생각 없이 던진 이 한 마디가 내 머릿속에 새로운 문을 열었다. 그래! 대마도 북부에서 나온 왜구가 설친다면, 대마도 북부도 쓸어버리면 되지!
이번 원정에서 타격을 입지 않은 북부까지 쓸어내면 대마도는 정말로 버틸 힘이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대마도를 지켜준다는 구실로 조선군을 주둔시킬 수도 있고, 부족한 인구를 채운다는 핑계로 조선인을 이주시켜도 된다,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는 거지.
물론 왜구가 그전보다 설치는 잠깐 동안은 내 체면이 망가지게 된다. 하지만 대마도를 아주 흡수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히 감수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체면이라는 살을 내주고 영토라는 뼈를 얻는다, 충분히 남는 장사 아닌가?
좋다. 한번 날뛰어 보라지. 물론 호구처럼 그냥 털릴 수는 없으니까, 수군 전력을 강화해서 왜구에 대한 대처 준비는 철저히 시켜 두겠다. 이번 원정에서 파악한 판옥선의 위력은 충분히 강하지만, 속도 면에서 갖는 단점도 확인했으니 균형을 잘 맞춰서.
– 2 –
“북방이 안정되었다 하니 참으로 다행이오.”
일본 원정군이 돌아온 뒤, 그 후속 조치에 바빠서 곧바로 북정을 진행하지는 못했다. 물론 대마도로 갔던 그 병력을 그대로 두만강으로 보낼 건 아니지만(교통사정상 절대 불가능하다), 준비를 제대로 진행하려면 대마도 원정군 쪽 사무를 마무리해야 했다.
“함경남도 절도사 권중개의 공이 컸사옵니다.”
좌의정 성준이 보고했다. 성준은 장차 진행할 북정을 위한 기반작업으로, 압록강 및 두만강 이북에 거주하는 모든 야인부족에 대한 기록을 집대성해 정리하는 과업을 맡고 있었다. 원래 이극균과 함께 진행했지만 이극균이 대마도에 출정하면서 그동안은 혼자 수행해 왔다.
“영의정과 신이 함께 보고를 드렸지만, 올해 함경도에서는 누리가 내습했기에 곡식을 많이 거둘 수가 없사옵니다. 따라서 대군을 파견하여 적을 막아낼 수가 없게 되었사온데, 절도사가 가진 군병만으로 적을 물리치고 국경을 안정시켰으니 이 어찌 칭찬할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누리란 대규모로 발생한 메뚜기를 말한다. 난 메뚜기 떼가 농토를 덮치는 건 대평원이 있는 저기 아프리카나 중국, 미국 같은 데서나 터지는 사건이고, 한반도 같은 데서는 안 일어나는 줄로만 알았었다. 그래서 함경도에 누리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정말로 깜짝 놀랐다.
“권중개에게 품계를 올려 주고, 저화를 상으로 내리도록 하라. 주기에 적절한 품계와 저화 액수는 묘당에서 논의하여 정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함경도가 이렇게 자체적으로 여진족 문제를 해결해버릴 줄 알았다면, 대마도에서 여유를 좀 더 가지고 전후처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도주에게 반항적이라고 하는 북부 지방 촌락들을 마저 공격해서 항복하게 만든다던가 말이다.
“전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만약 신이 대마도 북부까지 정벌하여 모든 추장들을 굴복시키려 들었다면 올해 말까지도 싸움이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 오래 싸운다면 군사들도 심히 지쳤을 것이고, 그 전비는 감당하기 힘들었으리라고 사료되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워서 이극균을 따로 불러 치하하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짧게 아쉬움을 표했다. 그랬더니 이극균이 보인 반응은 완곡하지만 확실한 부정이었다.
“또한 이미 태풍이 오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제때 배를 띄워 치중을 보낼 수 없는데, 어찌 바다 사정이 좋아질 때까지 군사들이 사기를 유지하겠사옵니까.”
듣고 보니 이극균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원정 시기를 기해동정 때보다 당긴 이유가 태풍이 오기 전에 작전을 끝내기 위해서였는데, 태풍철 내내 보급도 없이 군사를 대마도에 고립시켜놓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대마도로 가는 뱃길이 가깝다지만, 위험한 건 위험한 거니까.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치게 될 군사들 처지에도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모내기철에 소집한 군사들을 겨울까지 붙잡아두면, 한 해 농사를 그대로 폐농하는 거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여러 요인들을 생각해 보면 이극균이 딱 좋은 시점에 원정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온 셈이었다.
“우상이 한 말이 맞소. 과인이 잠시 과욕을 부린 듯하오. 연륜이 짧은 탓이라 이해하시오.”
“아니옵니다. 신이 지나치게 무엄한 언사를 드리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옵니다.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하소서.”
“괜찮소. 다 충정에서 비롯된 진언이 아니오.”
나이든 중신들이 내게 조금 ‘무엄한’ 언사를 해도 크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왕으로 지낸 세월이 6년이긴 하지만, 그 전에 어린이나 청년으로 살아왔던 시간이 27년이었으니 말이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뻘로 나이든 이들이 내게 굽실대는 건 아무래도 좀 어색하다.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한 10년 더 있으면 실질적으로 내 나이는 40대 중반이 된다. 몸으로 40세가 될 때면 근 50세. 그때쯤 되면 머리 허연 정승들을 대하는 시각도 달라질까? 아무래도 지금처럼 굴지는 않을 것 같다. 계속 젊은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는 없어지겠지. 나이를 먹었으니까.
“어쨌든 북방에서 상황이 안정되었으니 당장 군사를 낼 필요는 없어졌소. 우상은 좌상과 함께 진행하던 《북방제번기(北方諸蕃記)》와 《북방지도(北方地圖)》 사업에 다시 합류하여 결과를 내 주기 바라오.”
“전하의 뜻을 받들어 신명을 다하겠나이다.”
전쟁과 지배를 위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가 지리정보다. 괜히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인들이 미개척지를 만나면 탐험가와 지도 제작자부터 파견한 게 아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 정복도 하고 지배도 하지 않겠는가.
가능한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면 위도와 경도도 측정해서 반영해야 한다. 세조 때 만들어서 현재 존재하는 가장 최신 지도라고 할 수 있는 《동국지도》는 상당히 정확하지만, 이 점에서는 약간 아쉬운 점이 있었다.
두 기준 중에 경도는 측정이 힘들다. 하지만 위도는 상대적으로 훨씬 쉽다. 극단적으로는 작대기 하나만 있어도 잴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집현전에서는 내 지도에 따라 측위의(測緯儀)를 만들어 위도를 측정하면서 동국지도를 보정한 《신동국지도》를 제작하고 있다.
물론 조선에 위도를 잴 수 있는 장비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간의나 인지의 같은, 본래는 천문 관측에 사용되는 도구지만 위도를 재는데 쓸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도 제작에는 활용하지 않았던 듯했다. 그래서 측위의를 만들게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땅이 아닌 북방 지역 지도를 만들면서 한가하게 위도나 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쪽은 일단 옛 방식대로 만들고, 추후 북정에 나서게 되면 그때 가서 좀 더 정확하게 보정사업을 할 작정이다.
음, 그러고 보니 군제개편도 해야 한다. 이번에 전쟁을 실제로 치러 보고 나니, 확실히 손을 봐야 할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북쪽 국경이 안정되면서 최소한 올해 안에는 나가 싸울 일이 없게 되었으니, 그동안 이 문제를 좀 고쳐야겠다. 물론 반대가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