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06
3부 2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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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 톤급 대선 진명(眞明)은 대남수영의 좌선이다. 진명의 뒷갑판에 선 대남수사 홍하명 참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텅 빈 바다를 바라보았다. 동쪽에도, 서쪽에도 스페인 국기를 단 전함은 없었다.
눈에 보이는 배는 대남도에서 선발대 병력을 싣고 온 대한 상선 열두 척, 그리고 이들을 호송하는 대남수영 소속 전선 아홉 척이 전부였다. 홍하명 본인이 타고 있는 진명까지 하면 호송함대만 열 척이다.
수송선단에는 선발대로 싣고 온 대남도 군사 4천 명이 타고 있다. 이들은 루손 북해안에 상륙해서 스페인군을 축출하고 한인 백성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각 마을에 서반아군 주둔병이 있다 하였던가?”
해안에 접근한 수송선들이 단정을 내려 말과 사람, 치중, 화포, 수레 등을 양륙하고 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홍하명이 질문을 던지자 좌선에 동승하고 있던 대남병영 8연대장 이상원 정령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수사또 나리. 하지만 제대로 싸울 일도 없을 겁니다.”
이상원은 대남도에서도 홍하명과 꽤 가깝게 지낸 사이다. 필리핀에 첫발을 디딜 선봉장을 맡았기에 한껏 기세가 올라 있었다.
“서반아 총독부는 우리 한인들이 사는 마을마다 서반아 사관 한 명과 토민병 스무 명씩을 두어 우리 백성들이 함부로 반항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수도 적고 우리 군사가 나타나리라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 쉬이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스페인군 배치 상황에 대한 정보는 최근에 탈출한 난민으로부터 얻었다. 스페인 총독부는 한인촌을 확고히 장악하기 위해 마을마다 군사를 주둔하게 해서 통제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에 들어온 필리핀 토민병들은 당연히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한인을 통역으로 한 명씩 배정했다지만,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데다 마치 점령군외 된 것처럼 구는 토민병들의 횡포가 극심하다는 전언이었다.
“부러우이. 이번 싸움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활을 당기고 싶었는데, 결국 그 기회가 그대들 손으로 넘어갔구먼.”
본래 대남에서 루손으로 직행하는 항로에는 스페인 해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스페인군을 피해 대남도로 도망치는 한인 피난민들을 붙잡기 위해서다. 홍하명은 그동안 소선 두 척을 풀어 이들의 동태를 살폈었다.
하지만 그 함대는 두 달 전에 임무를 종료하고 마닐라로 돌아갔다. 한인 거주지역 평정이 마무리되어 마을마다 군사를 두었으니 굳이 이 한적한 해역에 함대를 놓아둘 필요가 없어진 탓이다. 덕분에 도망치는 백성들이 일단 바다까지 나오기만 하면 건너기는 더 쉬워졌다.
“내가 서반아 수사라고 해도 여기 배를 두지는 않았을 걸세. 조만간 전쟁이 벌어지리라고 내다본 상태라면 더더욱. 육전이라면 안 그렇겠는가?”
“수전에서 통하는 법칙이 어찌 육전에서라고 다르겠습니까. 말이 좋아 길목이라고는 하나, 여기처럼 사방이 트인 길목이라면 지키는 의미가 없지요.”
여기 루손섬 북해안은 사방이 트인 바다다. 육지라고 하면 나무 한 그루도 없이 사방으로 펼쳐진 평원이나 다를 게 없다. 이런 곳에서 적은 병력으로 길목을 지키겠다고 죽치고 있어 봐야 별 의미가 없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에게 포위될 뿐이다.
서반아 해군이 보유한 전선 숫자는 대남수영이 가진 것보다 더 적다. 홍하명은 물론이고, 서반아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지켜야 할 길목이라면 육지에서는 죽령이나 단밀현이고, 바다에서는 울돌목이나 견내량 같은 곳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일세. 적이 도저히 우회할 수 없는 좁은 길목이라야 결사의 각오로 군사를 두어 지키는 게 의미가 있지.”
단밀현과 견내량은 모두 경인왜란 당시 왜군을 대파한 전장이다. 양쪽 모두 길목을 막고 기다리다가 방심한 왜군을 함정으로 끌어들여 격파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수적으로 아군이 열세였다는 점도 같다.
“아마 서반아 함대는 마닐라를 지키러 갔을 걸세. 우리 수군이 이런 시골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닐라를 칠 수도 있으니, 그 점을 경계하고 있겠지.”
경인왜란 때 일본군도 양선으로 서해를 멀리 우회해 개전과 동시에 벽란도를 들이치려고 시도했었다. 한강 하구의 수로가 퍽 복잡한 데다 경기수영이 잘 대비하고 있었기에 초장에 격멸했지만, 만약 첫 싸움에서 놈들을 모두 붙잡지 못했다면 심히 곤란을 겪었으리라.
그때 잡힌 서양인 선원들은 조선 수군으로 편입했지만, 선장들은 해적으로 간주하여 모두 처형했고 동행했던 왜장은 옥에서 죽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한 수군임을 명백히 드러내고 싸우는 것이니 그럴 일은 없다.
지금 대한 수군은 대남도에서 곧바로 마닐라를 공격할 능력이 충분히 있다. 스페인 측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이곳 루손 북부에서 함대를 뺀 거다.
“병력을 다 양륙하고 나면 대남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내려올 걸세. 본국에서 원군을 받아 돌아오면 그때는 수전을 치를 기회가 있겠지. 저들이 우리 도착을 알고 뒤늦게 항구 밖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고.”
홍하명이 다시 시선을 해안 쪽으로 돌렸다. 수십 척이나 되는 종선들이 열심히 배와 해안 사이를 왕복하며 사람과 짐을 내리고 있었다. 양륙을 마치면 내륙으로 진격을 시작하리라. 스페인 함대가 이들의 보급선을 끊으려고 출격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기왕이면 본국에서 원군이 오기 전에 우리 함대만으로 한번 수전을 치러보고 싶군. 우리 수군은 여태 양선 대 양선으로 제대로 수전을 치러본 적이 없으니 말일세. 우리 대남수영도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유하고 있거늘.”
대남수영은 서도수군통제영에 속한다. 대남도 남단에 있는 대남성(大南城)에 본영을 두고 대남도 각 포구에 전선을 배치하고 있다.
본국에서는 아무래도 한강 입구를 지키는 경기수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후송을 견제하면서 남만으로 가는 항로를 지키는 여기 대남수영이야말로 대한 수군의 최전선이다. 홍하명은 그에 크나큰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해적선 한두 척 때려잡는 정도가 아니라 함대와 함대 간에 벌어지는 대규모 수전…예전 을미동정 때 충무대왕께서 치르신 대판만(오사카만) 싸움 이후 처음 아닌가. 수군 장수라면 누구나 욕심낼 만한 공적이지.”
그동안 수군에게는 적다운 적이 없었다. 일본은 도전을 포기했고 후송은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 시절부터 내려온 전훈에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고문관들에게 배운 최신 유럽 전술까지 익힌 홍하명으로서는 아는 바를 실전에 적용해볼 기회가 기다려질 수밖에 없었다.
“저도 이만 하선해야겠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이상원이 머리를 숙였다. 홍하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건투를 비네. 모기 조심하게나.”
“감사합니다, 수사 영감.”
옛날에는 외부의 열기나 장기, 서기가 들어와 몸의 맥을 흩트려놓으면서 학질이 생긴다고 믿었다. 하지만 장조 시기 상빈 이씨가 학질의 원인은 모기에 물리는 것이라고 기술했고, 그 주장은 수십 년간 논란의 중심에 놓였다.
‘그럼, 직접 확인해 보면 알 게 아닌가.’
뜻밖에 경조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경조는 학질이 성한 대남도에 도형수 마흔 명을 보낸 뒤 절반은 모기장 안에서 지내게 하고 절반은 모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통나무 뇌옥 안에서 지내도록 했다. 이들에게는 실험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사면을 약속했다.
그 결과, 모기장 안에서 지내던 이들은 모두 별일이 없었으나 통나무 뇌옥 안에서 지내던 자 중 절반이 학질에 걸렸다. 이로써 학질을 퍼뜨리는 원인이 열기나 장기가 아닌 모기임이 분명해졌고, 아직 생존해 있던 상빈 이씨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
이제는 학질을 피하고 싶으면 모기장을 치고 자라는 게 상식이 되었다. 지금 함대에 싣고 온 물자 중에도 모기장 수천 장이 들어있다. 대남도보다 학질이 더 만연한 곳인 필리핀에서 군사들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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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 명이나 되는 원정군을 한꺼번에 필리핀으로 수송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그만한 인원과 그에 수반한 물자를 일시에 운반할 만큼 많은 배를 구할 수도 없고, 그 많은 배가 동시에 드나들 항구를 찾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1차로 출발할 군사들은 모두 잘 떠났으니, 2진의 출발 준비를 조속히 마치도록 하라.”
“예, 폐하.”
필리핀 원정군 절반은 대남도에서, 절반은 본국에서 나간다. 고로 병력을 수송할 선단이 출발하는 장소도 두 곳이다.
본국에서 출정하는 본군은 일단 대남성 ? 원래 세계의 타이난 ? 인근에 1차로 집결한다. 잠시 쉬다 별군인 대남주군이 먼저 다 건너가면 다시 배에 올라 마닐라로 간다. 마닐라까지 곧바로 가자면 아무래도 병사들 피로도 심하고, 도중에 사고가 날 위험도 커서다.
별군으로 움직일 대남도 병력 2만 5천은 목적지가 본군과 다르다. 대남성에서 루손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루손 북부를 장악한다. 마닐라보다 북부 루손부터 먼저 공격하려는 건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이동할 거리가 짧다. 수송선단이 닷새면 왕복할 수 있으니 피스톤 수송으로 한 달 안에 별군 전체가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 배가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
하지만 본국에서 출발할 함대는 병력이 모이는 곳에 따라 인천, 목포, 동래, 구주 등에서 떠난다. 게다가 배도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수송선도, 호위함도 말이다.
둘째, 개전 명분에 부합한다. 개전 명분 중 한인 학살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음을 잊으면 안 된다. 위패야 이미 타버렸으니 더 어떻게 해볼 게 없지만, 아직 살아있는 우리 백성들은 위해를 더 당하지 않게 지켜야 한다. 고로 군사를 보내 구출해야 하는 거다.
셋째, 마닐라에 집중해 있을 스페인 주력군을 끌어낸다. 스페인군 지휘부가 우리 원정군 규모와 방향을 오판하고 북부 루손 점령이 우리 목표라고 판단한다면, 주력군을 북상시켜서 루손 북부를 탈환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해군과 함께 말이다.
별군인 대남주 병력만 해도 필리핀에 있는 스페인군 전체와 버금가므로, 이들과 싸우려면 스페인군도 가용병력을 다 동원해야 한다. 그러면 당연히 마닐라 방어가 허술해진다.
“고로 본군이 마닐라를 공략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삼군부 도총사 김원중이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삼군부에 속한 유능한 장령들이 머리를 맞대고 다듬고 또 다듬은 전략 구상이다. 나도 동의했다.
“저들이 우리 의도대로 낚여 준다면야 빈집털이를 할 수 있겠지.”
스페인인들도 뇌가 있으니 우리 생각대로만 움직이지는 않으리라. 별군이 루손에 상륙한 사실을 알고도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본군 병력으로 마닐라에 정면 공세를 가할 따름이다.
“행여 우리 군사들이 바다 위에서 변을 당하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할 것이다.”
“염려 놓으시옵소서. 수군이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사옵니다.”
스페인 해군은 우리와 비교하면 확실한 열세다. 열세인 해군력을 가지고 방어전을 펼치려 한다면, 함대전보다는 통상파괴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해상에서 우리 수송선단을 습격, 최대한 공격을 늦추는 거다.
해군력 전체는 우리가 더 많다. 하지만 함대 하나하나로 따지면 한군데로 집결한 스페인 해군보다 수가 적을 수도 있다. 만약 스페인 해군 제독이 과감한 성품이라면, 조선 해군을 각개격파하려고 시도하는 데 운명을 걸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하오나 폐하, 서반아가 그렇게 나올 위험성은 적을 듯합니다. 대남수영이 대남도 인근에 펼친 초계선에서 들키지 않고 북으로 올라오기도 어려울뿐더러, 올라온다고 해도 마닐라를 방치하는 결과가 됩니다. 우리 함대 한둘이 당하는 대신 마닐라가 불바다가 되는 것이지요.”
이세진이 차분히 진언했다. 이세진은 스페인 함대가 소극적으로 움직이리라 보았다.
“서반아인들은 대남도에서 보낸 선전포고를 받았고, 우리 군사들이 루손 북부에 건너가고 있음을 파악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본국에서 내려가는 항로를 공격하러 오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대남도를 공격하려 기도할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게 아니면 마닐라 항구에 틀어박힌 채 현존함대 전략을 시도할 수도 있다. 우리 함대가 마닐라를 직접 공격하리라고 예상한다면, 요새와 연계해서 항구를 지키기 위해 마닐라에서 움직이지 않는 거다.
“어느 쪽이든 대처는 어렵지 않습니다. 적들이 먼저 나온다면 대남수영 단독으로도 능히 맞서 싸울 수 있고, 붙박여있다면 그대로 항구 안에서 모두 불태우면 됩니다.”
“그래, 잘 되리라.”
항공기나 인공위성으로 정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스페인군은 우리 움직임을 탐지하기 어려울 거다. 과연 저들이 어찌 움직일지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 11 –
조선에서 선전포고가 날아든 지 17일째인 1703년 4월 10일, 마닐라에서는 산처럼 쌓인 중국인들의 시체를 모두 처리하고 들이닥칠 조선군을 막기 위해서 방어를 강화하고 있었다. 헌데 총독부에서는 드 에체바리 총독이 허탈감에 젖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인제 와서 이런 지시가 내려오면 뭘 어쩌란 말인가?”
“각하….”
보좌관들도 어떻게 상관을 위로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들 자신도 당황해서 할 말을 찾지 못할 지경이었던 탓이다. 필리핀 총독부를 뒤흔들어놓은 존재는 태평양 건너에서 급히 날아온 편지 한 통이었다.
『…임시로 부왕 대리를 맡았던 오르테가 주교가 내린 지시를 철회할 것을 명한다. 조선 국왕과 충돌할 위험이 있는 어떤 무력조치도 실행하지 말라. 무단으로 루손 북부에 들어와 거주하는 조선인들에 대해서도 현재까지 해왔듯이 무시하는 전략을 취하라.
만약 조선이 프랑스 편에서 참전한다 해도, 루손 북부의 조선인들은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조선군은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마닐라를 공격할 수 있으며, 조선인들을 탄압하면 도리어 아군이 될 수 있던 자들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현재 본국은 국경에서 프랑스군의 침입을 막고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 주둔한 수비대를 지원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으며, 필리핀을 지원할 여력이 없다. 최선을 다해 조선과 평화를 유지하라.
내 친서를 동봉하니, 조선 국왕에게 우호를 청하는 사절을 보내서 백여 년 전 펠리페 2세 폐하 때부터 우리가 조선을 얼마나 호의적으로 대했는지 강조하고, 앞으로도 서로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는 뜻을 표명하라. 조선을 자주 왕래했고 잘 아는 관원을 사자로 고르라.
조선인들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을 경우 대대로 기억하며 꼭 갚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윤리관을 가지고 있으니, 이러한 조치의 효과가 클 것이다. 조선과 불화가 생기면 필리핀을 유지하기 극히 어려워진다는 점을 상기할 것이며….』
이 편지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임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 알부케르케 공작이 원군 대신 보낸 것이었다. 알부케르케 공작은 본국으로 소환된 드 발라다레스 부왕 대신 작년 11월에 누에바 에스파냐에 부임했다.
멕시코에 도착한 알부케르케 공작은 오르테가 주교가 필리핀 내 조선인 불법 거주자들을 모조리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알고 경악해서 취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새 부왕이 취소 명령에 서명할 때 이미 필리핀에서는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어떡하지요, 총독 각하?”
“이건 우리가 보낸 보고가 도착하기 전에 내린 지시가 아닌가. 이미 저들이 선전포고까지 날렸는데, 지금 전쟁을 피하려면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 그럴 수는 없지 않나.”
드 에체바리는 지금 필리핀 상황을 알리는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이때 전령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각하! 조선군 수천 명이 루손 북부에 상륙했습니다. 조선인 마을마다 배치해두었던 우리 병사들은 그 소식을 듣고 급히 후퇴하는 중입니다.”
보고를 들은 총독부 관리들은 빗나간 예상에 깜짝 놀랐다. 드 에체바리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부왕청에서 내려온 지시는 늦어도 한참 늦었군! 그런데 루손 북부라고? 마닐라가 아니고?”
드 에체바리는 원주민 병사 4천 명을 조선인 마을 곳곳에 주둔시켜 조선인들을 통제하게 했다. 하지만 이는 조선인 이주민들은 제압할 수 있어도 전면적인 침공에 맞서기에 유리한 배치는 아니었다. 충격과 공포가 총독부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