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14
3부 2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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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위 흉장(胸墻)을 짚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새까맣게 탄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져 올라왔다. 하지만 데 에체바리 총독이 할 수 있는 대응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조선 함대가 유유히 마닐라만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각하,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함대가 남아 있었다고 해도 저만한 숫자로 몰려오는 적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알고 있다.”
그동안 총독부에서는 조선군의 목표가 중부 산맥 이북, 카가얀강 유역 점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마닐라를 공격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점, 그쪽에 10만에 달하는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조선군이 그쪽을 목표로 할 개연성은 충분했다.
실제 조선군의 진격 상황도 이를 입증했다. 조선군은 조선인들이 대부분 거주하는 구역인 카가얀강 중류까지 진격한 이후로는 진격을 거의 중단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확고하게 통제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전부터 조선인들과 분쟁 관계에 있었던 원주민 부락이 잇달아 공격을 받고 파괴당했다. 주민들은 죽거나 산악지대로 도피했다. 혹은 조선인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전락했다.
조선인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던 몇몇 부락이 맞이한 운명도 큰 차이가 없었다. 조선인들은 이들에게 스페인 국왕 대신 조선 임금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면 역시 공격해서 궤멸시켰다.
총독부로서는 구원을 청하는 원주민들을 도와줄 수도 없었고 조선군에게 전면적인 반격을 가할 수도 없었다. 곧 닥칠 우기를 맞아 진격을 멈춘 조선군이 낯선 풍토를 견디지 못하고 질병에 걸려 주저앉기를 바라며 시간을 끌고 있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치른 해전에서 패하면서 카가얀으로 건너오는 조선군의 증원을 차단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도 얼마나 많은 조선군이 더 건너오는지 파악이라도 하려고 내보낸 정찰선은 40척 가까운 대함대가 마닐라 쪽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끔찍한 소식을 가져왔다.
놈들이 동쪽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이미 카가얀에 상륙한 포모사 주둔부대를 지원하러 온 부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함대의 진행 방향은 남쪽이었다. 마닐라로 오는 항로 말이다.
사령관이 중상을 입은 데다가 숫자도 십여 척밖에 안 되는 함대로는 도저히 조선 함대에 맞설 수가 없었다. 총독은 고민 끝에 사령관 대리인 곤살레스 함장에게 함대를 전부 이끌고 바타비아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대가 안 되는 전력이니 어쩔 수 없었지 않습니까. 그대로 모조리 불타거나 조선군에게 나포당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습니다.”
40척 대 10척으로는 마닐라만을 지키기만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조선군이 육군 병력을 수송해 왔다면 만 입구를 막아도 육지를 지나 만으로 들어와 마닐라를 직접 공격할 수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남은 함선으로는 마닐라를 지킬 수 없었다.
“우리가 그 더러운 이단자들에게 자비를 청해야 한다니….”
본국이 이미 잉글랜드, 네덜란드와 협력해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는 소식만 받지 않았어도 이런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 두 놈이라니!
그 두 나라와 싸우면서 스페인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생각하면 이를 갈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하지만 지금 총독은 조선군이 우기를 맞아 진군을 멈춘 사이에 그토록 혐오스러운 그 이단자들에게 지원을 받으면서 버텨야만 하는 처지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부왕청에서 얼마라도 원군을 보내줄 터였다. 그리고 조선 정부와 외교적으로 협상을 진행할 특사를 보내거나, 총독부에서 직접 협상을 진행하게 훈령이라도 내려 줄 터였다. 데 에체바리가 기대할 수 있는 도움은 거기까지였다.
“잉글랜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측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도 같은 유럽인에 기독교도가 아닙니까.”
“그 이단자 해적 놈들이 우리와 같은 기독교도라고?”
두 나라 모두 사악한 이단들이 지배한 지 오래다. 같은 신앙을 가진 프랑스도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전쟁을 걸어오는 판에, 이교도 해적들 따위가 곤궁에 처한 스페인을 진심으로 도울 리 없었다. 바타비아로 피난한 함대를 나포하지 않고 받아들여 주기만 해도 다행이다.
유럽에서 전쟁을 치를 때만 적으로 싸운 게 아니다. 백여 년 전, 그 두 나라가 향신료를 구하러 동방에 처음 왔을 때, 얼마나 난폭하게 굴었던가? 먼저 여기 와 있던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들을 상대로 온갖 무법한 행동을 저지른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놈들이 마닐라 방어를 도와주면 우리는 놈들에게 큰 빚을 진 셈이 되고, 본국 정부도 섭섭지 않게 보상할 겁니다. 그 장사꾼 놈들이 그런 기회를 놓칠 리가요.”
데 에체바리가 이를 악물고 만 안을 채운 조선 함대를 노려보았다. 자기 한 사람 목숨만 걸린 일이라면 이단자들의 도움 따위 바라지도 않겠지만, 국왕께서 맡기신 필리핀을 지켜야 했다. 이단자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굴욕 따위는 그도 참을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놈들이 도우러 와준다면 상황이 좀 나아지기는 하겠지.”
과연 조선군은 여기 마닐라와 약간 남쪽에 있는 카비테 중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할까. 데 에체바리는 수비대로 마닐라에 4천, 카비테에 2천, 교외에 8천 명을 배치했다. 카가얀강을 따라서 남하하는 조선군을 저지하려고 북쪽에 보내둔 병력은 불러올 틈이 없었다.
어쩌면 카비테 방어를 포기하고 마닐라로 수비대를 집결하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잘 만들어진 항구 하나를 조선군에게 그대로 헌납하는 결과만 빚어졌을 것이고, 공격도 일찌감치 마닐라에 집중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카비테와 우리, 교외에 있는 부대까지 3자가 서로 지원하면 적도 그만큼 공략이 어려울 겁니다. 그동안 부왕청에서든, 바타비아에서든 지원이 온다면 다행이고요.”
“그러기를 바라네.”
우기가 끝날 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희망이 있다. 데 에체바리가 한숨을 쉬었다. 차마 동양인 따위에게 최초로 성을 빼앗긴 스페인 사령관이 되고 싶지 않았다.
– 18 –
전선 15척, 수송선 20척이 유유히 마닐라만 안에 닻을 내렸다. 5백 톤급 전선 3척은 만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입구를 막았다. 혹시 스페인 함대가 만 바깥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나서 급습해올 때를 대비해서다.
좌선인 혜원의 갑판에 선 대한군 지휘부는 천리경을 들고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정찰에 나선 척후선들이 보고한 대로, 정말 스페인 함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만에 남은 스페인 측 함선은 정찰에 내보내는 게 고작일 작은 배들밖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정말 안타깝겠소, 통제사.”
위로의 말을 들은 이홍권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제 복이 이게 끝인 것을 어쩌겠습니까?”
말투는 무심했으나 눈동자에는 짜증이 타오르고 있었다. 자기 휘하 장수인 홍하명도 이미 적을 무찔러 전공을 세웠건만, 그 두 배나 되는 전선을 거느리고 헛걸음만 하고 만 셈이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보다 대감, 상륙지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본래 계획에서는 수빅만이 상륙지였다. 현지에 와보지 않은 삼군부 장령들이 지도만 보고 세운 계획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걸 바꾸기로 한 이상, 어디를 상륙지로 할지는 장희재가 내리는 결단에 달려 있었다.
판단할 자료는 충분했다. 지도가 있고, 마닐라에 8년이나 머무른 이제원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직접 천리경을 든 장희재 자신의 눈이 있었다.
“소관이 보기에는 마닐라 북쪽 해안이 어떨까 합니다. 일단 진채를 세워서 거점을 만들고 2진이 오기를 기다리려면 저기가 좋지 않겠습니까?”
마닐라에 있는 스페인군 병력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한군 1진보다는 많을 게 분명하다. 적의 역습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진채를 세우자는 참모들의 의견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닐라 북쪽에 진채를 세우면 파식강이라 하는 큰 강이 있어 적이 역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유를 가지고 공략을 준비할 수 있으니, 그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소관도 같은 생각입니다. 어차피 서반아군은 함대가 없어 우리가 어디에 군사를 내리건 막지 못합니다.”
참모들 몇몇이 제안했다. 하지만 장희재는 고개를 저었다.
“큰 강이 있다 함은 우리가 그 강을 건너느라 애를 먹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방어가 목적이라면 마땅히 강을 의지해야겠으나, 공격할 생각이면서 강을 두고 숨는 행동은 적절치 않다고 보네. 그보다는 마닐라와 카비테? 그 두 항구 사이가 적절해 보이는군.”
장희재가 손에 쥔 등채를 들어 자기가 원하는 방향을 가리켰다.
“서로를 지원하는 두 성채 중에 작은 쪽을 먼저 공략함이 유리함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저쪽에 진을 쳐서 두 성채 사이의 연락을 끊고, 카비테를 먼저 쳐서 그 항구를 손에 넣으면 2진, 3진이 입항하기 한층 더 쉬울 것이네. 북쪽 해변보다 저기가 훨씬 좋은 항구이니.”
더구나 마닐라 남쪽에는 도시 북쪽과 달리 진격을 막는 파시그강과 같은 장애물이 없다. 고로 순조롭게 진군해서 마닐라를 포위하고 공성을 개시할 수 있다.
“서반아군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성을 나와 역습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실로 큰 부담이 아니겠습니까?”
대한군 장수들에게는 스페인군과 싸운다는 게 아무래도 좀 꺼려지는 부분이 있었다. 비록 지금의 대한군이 동양 최강을 달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스페인과 크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군은 장조 시절 개편한 도감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경인왜란을 치르면서 대한 군대의 중핵이 도감군으로 바뀌었고, 그 도감군이 오군영으로 개편되고 각 지방군도 도감군 체제를 따르게 된 것이 지금의 대한군이다. 그리고 그 뿌리에 스페인의 영향이 닿았다.
장조 시절 도감군 개편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보내준 남만별기 무관 스무 명에서 시작했다. 이들이 가르친 스페인식 전기(戰技)는 도감군 개편의 밑바탕이 되었고,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도감군은 여진과 일본을 연파했다. 충무대왕조차 이들에게 지도를 받았었다.
이로써 스페인은 무관들에게 있어서 스승의 나라로 인식이 되었다. 그 뒤에 네덜란드에서 고문관이 새로 들어왔고 이들에게도 배운 것이 많았지만, 돈을 주고 고용한 이들과 스스로 가르치러 찾아온 이들에 대한 취급이 같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네덜란드인 교관들도 소통 문제 때문에 네덜란드어가 아니라 스페인어를 사용해서 교습을 진행했다. 그래서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장졸들은 그들 역시 스페인인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많았고, 지금까지도 군내에서 스페인에 대한 인식이 좋게 유지되는 데 한몫했다.
“서반아가 비록 세가 밀려 약해졌다 하나, 그 군병들의 싸우는 힘은 아직 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굳이 아군이 열세인 채로 싸울 필요가 있을지요.”
“저들이 모두 서반아인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여기 있는 군사는 태반이 필리핀 토병이 아닌가? 저들이 출성하여 싸우려 든다면 도리어 환영할 일일세. 우리가 방어하는 자리에서 포화를 퍼부어 섬멸할 수 있을 터이니, 얼마나 유리한가?”
장희재는 미주에서 아파치 토벌 때 스페인군과 만나본 경험이 있다. 제대로 전투를 치른 건 아니고 그저 연락을 약간 주고받으며 협력한 것뿐이지만, 아군이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병이라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더구나 필리핀 주둔군은 신서반아 주둔군보다 더 약체다.
중요한 건 성채다. 저들이 ‘산티아고 요새’라 하는 마닐라를 지키는 성채는 허술한 성채가 아니었다. 보루와 성벽, 해자가 몇 겹으로 둘러쳐진 강력한 요새다. 스페인 수비대를 거기서 끌어낼 수 있다면, 장희재는 1진을 미끼로 내놓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가 군사를 양륙하고 진채를 구축하는 데 들어갈 시간은 확보해야겠지. 권 부령, 정말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대감.”
권훤이 당당하게 군례를 올렸다. 명문가의 후손이면서도 무과를 보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순전히 자기 공적으로 지금 자리에 올라온, 노력과 행운의 표상 같은 사람이다.
권훤은 무과를 보지 않고도 미주에서 세운 공적으로 참위가 되었다. 그리고 무인지변 때 공을 세워 평난공신 2등을 받았고, 품계를 단번에 3단계나 뛰어올라 정5품 참령이 되었다. 말 그대로 출셋길이 열린 거다.
그 뒤에 금상이 등극하면서 강무관에 들어가라고 명을 내려 강무관 2년과에 편입, 강무관 교육도 받고 나자 거칠 것이 없게 되었다. 가문도 좋고 공적도 있고 임금의 총애까지 받는 장수이니 관직 생활도 순조로워서 지금은 벌써 부령이 되었다.
“소관도 미주에서 서반아인들과 만나본 바가 있고, 서반아어도 능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자로 가기에는 가장 적당한 재목이라고 자부합니다.”
장희재는 권훤을 보내 서반아 총독에게 항복을 권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그자가 선뜻 항복할 리는 없겠지만, 항복한다면 쓸데없는 출혈을 줄일 수 있으니 서로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항복 권고를 받고 적이 항복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군이 해변에 진채를 구축할 시간은 벌 수 있다.
“귀관과 협상하는 동안은 저들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최선을 다해 오래 머물다 오겠습니다.”
권훤이 군례를 올리며 다짐하자 장희재가 농을 건넸다.
“거기서 잘해준다고 눌러앉지는 말게.”
“제 여편네만 한 미인도 없을 텐데 눌러앉으면 뭐 하겠습니까, 하하.”
폭소를 터트린 장희재가 잘 다녀오라고 권훤의 어깨를 다독였다. 다른 장수들이 복잡한 표정을 짓는 사이를 당당하게 지나, 권훤은 뱃전에 걸린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단정을 이용해 옆에 있는 기갑선으로 옮겨탔다. 그가 타자 깃대 위에 백기가 올랐다.
“출발하라!”
권훤이 타고 갈 배를 하필 기갑선으로 고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스페인 수비대가 백기를 무시하고 발포할지 모른다는 위험성도 있고, 범선은 바람이 안 불면 제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를 권훤이 자기 입으로 중얼거렸다.
“단정 따위를 타고 가면 위세가 안 살잖아?”
기갑선은 그동안 본국 밖으로 나온 적이 없으니 스페인인들이 본 적도 없다. 크기는 별로 크지 않으나 전체를 둘러싼 철갑은 그 위광을 비교할 상대가 없다. 대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저들을 크게 위협하지도 않을 것이다.
권훤이 선체 전면에 있는 창을 열고 점점 가까워지는 산티아고 요새를 바라보았다. 아직 스페인군 수비대가 발포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