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15
3부 2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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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이 보낸 사절단이 타고 오는 배는 참 괴이했다. 크기는 대충 3백 톤급인데, 돛대가 없었다. 돛대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게, 갑판 위에다 사람 키보다 높은 시커먼 지붕을 씌워 놓았다. 갑판 전체를 그런 지붕으로 덮었으니 돛대를 세울 공간이 있을 리 없다.
돛대 대신 배를 움직이는 건 양현에 달린 두 개의 수차였다. 덮개를 씌운 커다란 수차 두 개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힘차게 돌아가고, 그 힘으로 뱃머리가 파도를 갈랐다. 지붕 위에 불룩 튀어나온 굴뚝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것이 그 증기선이라는 것인가….”
스페인인들 중에도 조선에 오가는 이들은 제물포 항구에서 증기선을 보고 온 적이 있다. 하지만 데 에체바리 총독은 그런 경험이 없었다. 조선에 여러 번 다녀온 적이 있는 부관이 자기가 아는 선에서 설명했다.
“예, 각하. 선내에 화로를 만들어 석탄을 태워서 물을 끓이고, 그 김이 끓어오르는 힘으로 수차를 움직인다고 합니다.”
“김이 끓어오르는 힘을 이용한다고…작은 풍차를 배 안에 싣고 다니는 모양이로군.”
데 에체바리는 증기기관의 구조를 다소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본 적도 없고 그 구조에 관해 정확한 설명을 들은 적도 없으니, 이 정도 오해가 생기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증기선이 다 저렇게 생겼나? 사방이 막혀 있는데 사람과 짐은 어떻게 싣지? 무장은 없고?”
“소관이 조선에서 본 증기선은 돛대가 없는 걸 제외하면 갑판이 있는 보통 배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저런 배는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다. 하지만 선수에 세운 깃대에 백기를 달고 있는 걸 보면 교섭하러 왔다는 것 하나는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데 에체바리 총독이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귀관이 해변에 내려가서 조선 측 사자를 맞이하도록 하게. 정중하게 대하도록.”
“예, 각하.”
부관이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바다에 면한 보루 중에 몇 개는 아래쪽에 쪽문이 만들어져 있어서 요새 쪽 해변에서 바로 요새로 들어올 수 있었다.
“각하, 조선 함대가 남쪽 해변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게 되는군.”
조선군은 역시 항구가 있는 카비테 쪽으로 움직였다. 이제 두 성채는 완전히 떨어져 서로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데 에체바리 총독이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조선군 함대 규모로 보건대 우리 수비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싣고 오지는 않았을 거다. 지금 바로 산 펠리페 요새에 사자를 보내 사전 계획에 따른 야습을 준비하게 하라.”
“예, 각하.”
마닐라를 지키는 산티아고 요새와 카비테를 지키는 산 펠리페 요새는 지척이다. 그 사이 구역에 조선군이 아직 제대로 포진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연락원을 보낼 수 있다. 설마 포진 첫날에 야습을 당하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으리라.
검게 칠해놓아서 언뜻 보기에는 목제로 보였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조선군이 기선에 덮은 지붕은 철판이었다. 제법 튼튼해 보이는 모양이 소총뿐만이 아니라 웬만한 대포에 맞더라도 부서지지 않을 듯했다.
위에 덮은 지붕 때문에 마치 상자처럼 보이는 조선 함선은 바다에 보트를 내리는 모습도 특이했다. 여닫이로 된 문을 열고 거기서 밀어내듯이 보트를 내려놓았다. 사람도 그 문으로 나와서 줄사다리를 타고 보트에 내려섰다.
“참으로 불편해 보이는 배로군요.”
“탄환을 막으려고 만든 구조물이니, 어느 정도 불편한 건 감수하는 수밖에 없소이다.”
두 젊은 장교는 해변에 서서 웃으며 악수를 교환했다. 한 사람은 보트에서 내린 조선인, 다른 한 사람은 요새에서 나온 스페인인이었다. 나이는 비슷했으나 직급은 달랐다.
“대한국 육군 권훤 중령이오.”
“스페인 왕국 필리핀 총독부 소속 에스테반 데 라 쿠에바 대위입니다. 데 에체바리 총독 각하의 부관을 맡고 있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상황은 명백했다. 두 사람 모두 쓸데없는 인사를 주고받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권훤은 상대의 안내를 받아 산티아고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데려온 수하 중 그 뒤를 따라 함께 성으로 들어간 이의 수는 넷이었다.
– 19 –
격식을 차린 회담 같은 것은 없었다. 스페인 총독은 조선 함대가 빤히 바라다보이는 보루 위에 탁자 하나와 의자 몇 개를 가져다 놓았을 뿐이었다. 권훤 역시 잡다한 의전 같은 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중요한 이야기만으로도 시간은 얼마든지 끌 수 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총독 각하. 저희 사령관께서 내리신 명령에 따라 각하께 항복을 권고하러 왔습니다.”
총독 앞에 도착한 권훤은 대한식으로 군례를 올리고 자기소개를 한 뒤, 항복을 요구했다. 인상을 확 찌푸린 데 에체바리 총독이 날카롭게 응수했다.
“대뜸 용건부터 꺼내는 거요.”
“그게 낫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서 총독 각하께서 범하신 과오에 대해서 추궁이 들어가는 걸 원하시지는 않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권훤은 전혀 긴장한 티를 내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노골적인 무례를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적이 위해를 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는 정도까지는 안전하다.
“개전 사유에 관해서는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귀측은 루손 북부, 카가얀강 유역에 몰래 건너와 거주하던 우리 한인들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살상을 저질렀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미 귀국 임금께서 보내신 선전포고문을 받았으니 그 부분은 반복하지 않아도 좋소.”
“그러시다면 서로 수고를 덜게 되었으니 다행이군요.”
권훤이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을 보던 데 에체바리 총독은 냉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대들의 목표는 뭐요? 그 책임자인 본관을 잡아다가 귀국의 관습에 따라 살을 저며 소금에 절일 생각이오? 아니면 입에 소금물병을 물려 햇볕에 바짝 말릴 건가? 그것도 아니면 사지를 소에 묶어 갈가리 찢거나, 머리를 잘라 시가지를 순회할 거요?”
“아…그게 다 역사적으로 실행한 적이 있었던 처형 방법이긴 합니다만.”
태연하던 권훤도 잠시 말문이 막혔다. 경인란록과 을미동정록이 유럽으로 흘러간 덕분에 유럽인들도 대한에 좀 관심이 있으면 이런 잔혹한 형벌이 시행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런 혹형은 장조 시절에만 있었다. 그때는 나라가 위태로울 만한 큰 전란이 연달아 있었고, 이를 일으킨 자들에 대한 합당한 징벌로서 중형을 가할 필요가 있기는 했다. 다만 장조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혹형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럽에서는 대한에서 그런 형벌이 일상적으로 시행되는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한에 상관을 둔 세 나라에서도, 직접 조선을 오가면서 확실한 정보를 얻은 게 아니라면 엉뚱하게 알고 있는 자들이 숱하다. 이런 건 꼭 형벌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각하께서는 그 명령을 직접 내리셨습니까? 개종 거부자를 화형에 처하고, 우리 백성들이 건립한 사당에 방화하며 위패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말입니다. 문서로는 확인했으나, 한 번 더 여쭙고 싶습니다.”
질문을 받은 데 에체바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본관은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소. 순순히 따르지 않는 조선인 정착촌을 제압하기 위해 전투를 벌여도 좋다는 명령은 분명히 내가 내렸소. 하지만 개종을 거부한 조선인을 화형에 처하라거나 조선 임금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소각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소.”
애초에 총독은 조선인들이 마을마다 사당을 차려 놓고 임금의 위패를 모신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존재 여부도 알지 못하는 물건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어떻게 내릴 수 있겠는가.
“무리한 명령을 내린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청과 현장에서 폭주한 일부 성직자들, 그리고 병사들 탓이라 그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수하들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신 부분은 각하께도 잘못이 있다고 보실 수밖에 없겠습니다.”
휘하 장교들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데 에체바리 총독은 딱히 표정에 변화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책임을 묻는 방법은 무엇이오?”
“각하께 부당한 지시를 내린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의 파직, 그리고 명령도 받지 않았는데 멋대로 악행을 저지른 자들의 인도 정도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배상금도 있어야겠지요. 그 액수는 소관이 임의로 정할 수는 없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본관에게는 아무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말이오? 이곳 필리핀은 그대로 놓아두고?”
질문을 받은 권훤이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참으로 좋겠습니다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각하께서는 총독직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셔야겠지요. 그리고 필리핀 총독령은 배상이 전부 이루어질 때까지 담보로 저희가 점령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 개인적인 추측일 뿐임을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알겠소. 하지만 꽤 합리적인 요구이긴 하군. 헌데 그 정도 요구라면 굳이 군대를 보내지 않고 귀국 임금께서 우리 국왕 폐하께 특사를 보내 항의해도 되지 않았소?”
“너무 큰 책임이 걸린 질문은 하지 말아 주시지요. 저는 단지 각하께 항복을 권고하러 온 사절일 뿐이니, 제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 질문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질문은 일단 각하께서 항복하신 뒤에 저희 사령관께 하시지요.”
“알겠소. 내가 성급했군. 그럼 그대가 대답할 수 있을 조건에 관해 묻겠소. 항복 조건은?”
한참 돌고 돈 끝에 비로소 가장 중요한 용건으로 화제가 넘어갔다. 권훤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장희재가 일러준 항복 조건을 제시했다.
“총독께서 산티아고 요새와 산 펠리페 요새의 성문을 열어 항복하신다면, 수비대 장병의 생명과 재산은 전적으로 보장합니다. 다만 카가얀 지방에서 우리 백성들을 학살하고 사당을 방화하는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물색하여 우리 법에 따라 처벌하겠습니다.”
상기한 범죄와 관련이 없다고 판명된 이들은 전쟁이 끝나는 즉시 석방할 것이고, 그동안 필요한 의식주는 모두 대한 측에서 책임지고 제공하겠다고 했다.
“전투와 무관한 부녀자들은 그전에라도 석방하지요. 귀측은 지금 배가 없으니, 우리 배로 마카오나 바타비아, 아니면 누에바 에스파냐까지라도 송환해 드리겠습니다.”
권훤은 중국인 학살 문제에 관해서는 알고는 있으나 거론하지 않았다. 아직 본국에서 그 문제에 관한 훈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골치 아픈 문제를 잘못 언급했다가는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당연히 스페인 총독도 그 문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호의는 고마우나, 그럴 필요는 없소. 그대들이 도착하기 전에 부녀자들은 모두 배를 타고 필리핀을 탈출했으니까. 지금은 안전한 곳으로 가고 있을 거요.”
총독은 탈출한 함대의 목적지에 관해서는 발설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시 내에 있던 일반 원주민들도 모두 내보냈음을 알려주었다.
“이제 요새 내에는 순전히 전투원밖에 없소. 민간인을 배려할 필요 없이 우리가 싸우고 싶은 만큼 싸울 수 있다는 이야기지.”
“그 말씀 덕분에 저희가 더 편하게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걱정은 안 하십니까?”
“그럼 부녀자들을 남겨두었으면 그대들이 우리 성에 대포도 쏘지 않고, 봉쇄하지도 않을 계획이었소? 그럴 리는 없는 듯한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씁쓸한 표정을 지은 데 에체바리 총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교섭이 결렬되었음을 선언했다.
“어쨌든, 나는 국왕 폐하께 임명장을 받은 필리핀 총독이오. 지키려고 노력해보지도 않고 내가 맡은 임지를 선뜻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귀관이 막무가내로 우리를 위협하는 대신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설득하려 한 데에는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권훤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각하. 혹시 생각이 바뀌시거든 언제든 성벽 위에 백기를 올려주십시오. 저희 사령관께서는 언제든 귀측의 명예로운 항복을 받아들이실 겁니다.”
‘명예로운 항복’이라 해도, 유럽에서처럼 항복한 장병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해줄 수는 없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특정 지역에 모아두고서 자유롭게 지내게 해주는 정도가 한계다. 물론 무장은 모조리 해제한다. 권훤은 그에 대해서도 분명히 전달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보루 위에 백기를 올리시면 소관이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나도 귀관의 무운을 빌도록 하리다.”
“흠, 알겠네. 역시나 곧바로 투항할 리는 없었지.”
교섭이 실패했는데도 장희재는 권훤을 질책하지 않았다. 사실 조선군 수뇌부에서 스페인 총독이 항복 권고를 받고 바로 항복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사들과 치중을 양륙하고 진영을 구축할 동안 여흥 삼아 벌인 교섭일 뿐이다.
스페인군이 곧바로 항복했다면 도리어 그 저의를 의심했으리라. 비록 함대는 없다 하나, 든든한 성채 안에 수천 명이나 되는 군사를 가지고 들어앉아 있으면서 포 한 발 쏘지 않고 항복했다고 말이다. 분명 항복한 척하다가 나중에 반기를 들 속셈이라고 의심했을 거다.
“참모장, 진채 구축이 완료되려면 며칠이나 걸리겠는가?”
“군사들은 배에서 다 내렸습니다만, 치중까지 다 내리려면 이틀 정도 더 필요할 듯합니다. 진채 구축이 완료되는데도 그쯤 걸립니다.”
1진은 포병도, 공병도, 기병도 거의 없다. 마닐라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보병과 주변 정찰을 위한 경기병 소수가 왔을 뿐이다. 공성전을 직접 수행할 공병은 2진으로, 장기전이 될 때를 대비한 공성포병대는 3진으로 온다. 4진은 병력보다 물자 운반이 중심이다.
“본격적인 전투는 2진이 도착한 다음에야 시작할 테니, 그때까지는 서반아군의 불안감을 자극하면서 적의 사기를 꺾는 데 주력하도록 하세. 음, 남쪽에 있는 산 펠리페 요새 정도는 먼저 공략하는 것도 좋겠지.”
“예, 대감.”
산 펠리페 요새는 바다로 튀어나온 좁은 반도 위에 있다. 어차피 공성포를 제대로 전개할 공간도 없으므로, 반도 입구를 육군으로 봉쇄한 뒤에 함대를 동원해 포격을 가한다면 능히 함락할 수 있다.
“차라리 육전이었으면 지성(枝城)인 산 펠리페 요새는 포위만 해 두고, 본성인 산티아고 요새 공격에 집중할 텐데 말입니다.”
“항구를 써야 하니 어쩔 수 없지.”
산 펠리페 요새를 함락해야만 카비테 항구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마닐라 공성전을 수행하려면 필수적인 조건이다. 장희재는 내일 날씨가 좋다면 바로 비승군을 띄울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이제 을미동정 이후 외지에서 처음으로 비승군을 띄우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