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24
3부 2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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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잘 풀린다고 해서 모두가 기뻐하는 건 아니다. 그 승전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이 중에는 불만을, 아니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신도 명색이 수군 장수입니다. 그런데 전장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치기만 하니 제 마음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폐하, 송구하오나 신에게도 나가 싸우도록 출진 명령을 내려 주실 수는 없으시온지요.”
동현 함장 안용복이 그런 경우다. 올해 45세가 된 안용복은 장 바르에 이어서 10년 이상 동현을 몰고 우리 바다를 누볐다. 하지만 그동안 그가 주로 수행한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수송과 탐사였다.
내가 미주에 있을 때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고 싶어도 부여할 수가 없었다. 형황이나 그 주변 신하들이 의심할 만한 임무를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근까지 겹쳤으니, 그때는 열심히 태평양을 왕복하면서 식량이나 나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보위에 오르면서 동현의 처지도 달라졌다. 법적인 위치도 내 사선(私船)에서 ‘태황의 어승선(御乘船)’이 되었고, 안용복도 수군으로 복직해서 부령 품계를 받았다. 내가 수군의 수조(水操)를 참관한다거나 할 때는 기함 역할도 맡았다.
하지만 인천 앞바다에 둥둥 떠서 요트 노릇이나 하라고 비싼 돈을 주고 그 배를 건조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수군에 편입하게 해서 전선으로 쓰자니 그건 조금 아까웠다. 어쨌든 내 돈으로 건조한 내 배인데, 수군에 넣으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를 못하잖는가.
그동안 추가로 건조한 대형선이 늘면서 미주를 왕복하는 수송 임무에 굳이 동현을 투입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래서 동현은 지난 4년 동안 북태평양 각지를 자유롭게 항해하며 측량과 지도 제작을 주로 맡았다. 수군이 해도 되는 임무지만 뭐 어떤가.
동현이 수행한 독특한 임무는 지도 제작 말고도 또 있었다. 귀국하면서 미주에 남겨두고 왔던 내 그림과 책을 가져왔다. 그리고 홍제원에 집어넣을 북극곰과 회색곰, 들소, 코뿔소, 치타나 사자를 반입하는 일도 맡았다. 갈라파고스에 들러 거북이도 가져왔다.
물론 대한에서 지도에도 없는 이 섬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스페인인들에게 신기한 거북이들이 사는 섬에 관해 들었다’라고 하며 지도 위를 짚고, 가서 몇 마리 붙잡아 오라고 했더니 정말로 거기까지 가서 거북이를 잡아 온 안용복도 대단한 사람이다.
홍제원이 국가사업이었다면 관선을 써도 상관없었을 거다. 하지만 홍제원은 어디까지나 내가 취미로 개설한 동물원이다. 그런데 거기 전시할 동물들을 구해오라고 관선이나 외수사 배를 보내기는 좀 그랬다. 아무리 운반비를 내가 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동현은 이런 임무를 수행하기에도 참 좋은 배였다. 선체가 커서 항해 기간이 길고 공간이 넉넉할뿐더러, 작은 배보다 흔들리기도 덜 흔들린다. 그러니 장기간 탐사 항해에도 유리할뿐더러 이런 희귀동물을 무사히 실어 오기에도 참으로 유용한 셈이다.
“하지만 폐하, 동현은 겨우 그런 용도로 쓰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그동안은 별다른 사건 없이 천하가 평화로웠으니 그랬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짐이나 운반하고 있을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바타비아로 가서 정남수군통제사와 합류하게 윤허하소서.”
안용복도 이제 제대로 된 공을 세우고 싶을 때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사정이 곤란하다.
“그대가 하는 말이 옳기는 하지만, 동현은 당장 전열에 들어가 싸울 수가 없지 않은가.”
사실 동현은 충분히 전함으로 써도 될 배다. 덩치는 1천 2백 톤에, 18근 포를 포함해서 함포도 40문 이상 탑재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프랑스에서 그 배를 건조할 때 여차하면 해적으로라도 나설 밑천으로 삼겠다고 돈을 퍼부어 무장을 과도하게 갖춘 탓이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고 보니, 함대에 넣어 전장에 투입하기에는 조금 난감했다. 처음 건조한 뒤로 20여 년 동안 제대로 된 수군 전선으로 활동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다. 전열을 이루어 움직이고 전투를 하는 훈련이 하나도 안 되어있었다.
과거 동현이 가끔 군함기를 달고 어승선 노릇을 하긴 했다. 하지만 어승선은 대열을 짜고 적 함대와 싸우는 훈련을 하지는 않는다. 내가 수군 훈련을 참관할 때 타고 다니는 전망대 역할을 맡을 뿐이다.
물론 동현이 수군 전력 강화에 한몫하기는 했다. 동현 자체는 전선으로 활동하지 않지만, 알렉상드르가 동현의 설계를 참고하여 크기만 조금 축소해서 새로 건조한 전선이 바로 1천 톤급 신형 대선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군이 전선으로 쓰던 기존 양선들은 본래 화물선인 갈레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수군에서 전선과 상선을 구분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용도에 따른 분류였을 뿐인지라 구조는 거의 같다. 선체 측면에 포문을 잔뜩 뚫었느냐 뚫지 않았느냐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동현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해적으로 나설 경우를 대비해서 화물을 많이 실을 수 있는 능력보다는 전투력에 중점을 두고 건조했다. 이 설계를 기본으로 했으니 새 전선은 순수한 전투용 함선이 될 수 있었다. 대남수영이 이미 그 배로 훌륭히 첫 실전을 치렀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수졸들의 훈련 문제로 동현은 단종진을 이루어 제대로 해전을 치르기 힘들다. 게다가 지금 안용복이 희망하는 것처럼 바타비아에 보내봐야, 동인도회사랑 싸우러 간 것도 아니니 닻을 내리고 멍하니 허송세월하다가 돌아올 뿐이다.
그런고로 당장 써먹자면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임무를 줘야 한다. 원래 동현을 건조한 목적대로 혼자 돌아다니면서 해적질(통상파괴전) – 인도양을 오갈 때 해적선은 이미 몇 번 사냥해 보았다 ? 을 하거나, 단독으로 칠 만한 목표를 따로 주거나.
“도총사. 동현에 등선군 1개 중대쯤 싣고 구도(寇島, 괌)를 비롯한 서반아령 도서(島嶼)를 치게 하면 어떻겠는가?”
삼군부 도총사 김원중은 시큰둥한 태도였다. 애초에 그런 계획을 준비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는데 굳이 해야겠느냐는 반응이었다.
“그 섬들은 필리핀 본도(本島)를 장악하면 절로 손에 들어올 것이기에 애초에 칠 계획을 세우지 않았었습니다. 지금이라 하여 상황이 바뀌지도 않았는데, 굳이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섬 하나만 치고 말 거라면 나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서반아에서 오는 마닐라 갈레온이 있지 않은가? 혹시 신서반아 부왕이 보내는 원군을 싣고 올지도 모르는데, 동현이 구도에서 대기하다가 영격한다면 필시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필리핀에서 도망친 스페인 배 중에 한 척쯤은 괌에 가서 소식을 알렸을 수도 있다. 그럼 괌에서는 필리핀을 구하기엔 이미 늦었다며 신서반아에서 온 원군을 눌러 앉힐 게 아닌가. 그대로 수비를 굳히면 스페인령 동인도는 스페인이 계속 쥐고 있게 될 수도 있다.
“그때 가서 놈들을 토벌하자고 대병을 새로 동원하기보다, 지금 배 한 척과 군사 약간을 보내 정벌을 마무리해 두는 편이 훨씬 간단하고 수고도 적지 않겠는가.”
“듣고 보니 폐하의 말씀도 옳습니다. 지금 루손에 있는 정남군 본군, 별군 모두 당장 맡은 일만 가지고도 바쁘니 말입니다.”
언급한 것 같지만, 마닐라에 있는 장희재의 본군은 그동안 벌인 교전으로 파괴된 마닐라 시가지와 요새를 재건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수도가 정비되지 않으면 우리가 필리핀을 통치하는 일도 곤란하니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우기에 원정을 나갈 수도 없고.
카가얀강 유역에 있는 대남주 병마절도사 김원계의 별군 역시 마찬가지다. 이쪽은 원주민 부락 토벌과 천주교도 한인촌 보호 등으로 정신이 없다. 그리고 우기를 맞은 건 이들 역시 같은 상황이다. 굳이 비를 맞으며 병력을 빼내는 것도 우습다.
“동현 정도 되는 전선이 나타나면, 토인들은 물론이고 서반아 관헌들도 쉽게 무릎을 꿇을 거다. 마침 그 일대 섬들의 위치를 가장 잘 아는 배도 동현이니 이 임무가 적당할 듯하다.”
“예, 폐하.”
안용복은 이 임무가 마땅치 않은 듯했다. 하지만 자기 배가 함대전을 치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는 건 자기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익힌 바도 함대전보다는 단독 활동에 더 알맞았다. 그래서인지 별 불만 없이 고개를 숙였다.
“황은에 감사드립니다.”
“그래, 됐으니 나가 보고, 출발 준비가 되거든 삼군부에 보고하라. 그리고 도승지는 가서 공부대신 최석정을 들라 하라.”
최석정이 공부대신 자리에 앉은 지도 벌써 4년인가. 그동안 꽤 많이 부려먹었다만, 아직 시킬 일은 얼마든지 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전비 지출도 줄어들 테고, 공사를 중단한 용산 별궁 건설도 재개할 수 있다. 경인운하 굴착도 속도를 올릴 수 있다.
어디 내정뿐인가. 끊어진 교역이 재개되면 영란(잉글랜드, 네덜란드) 양국과도 다시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애초에 우리는 별 충돌도 없었으니까. 나하고 윌리엄 3세도 얼굴을 보면 웃으면서 인사를 나눌 정도는 되지 않는가. 표트르나 도팽처럼 친하지는 않지만.
‘그러고 보니, 유럽 쪽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려나?’
– 8 –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두 나라 동인도회사가 상관을 폐쇄하면서 유럽에서 들어오는 최신 소식도 당연히 끊겼다. 프랑스 동인도회사 상관은 닫지 않았지만, 대신 이쪽은 해로가 막혀 배가 안 온다. 오던 배도 전부 중간에 잉글랜드나 네덜란드에 붙잡혔겠지 싶다.
하지만 소식이 끊긴 기간이라고 해 봐야 이제 겨우 4개월이다. 애초에 오는데 1년 반에서 2년 이상은 걸린다는 부분을 고려하면, 유럽에서 새 뉴스가 들어오는데 지장을 초래할 만큼 오래 끊어지지는 않은 셈이다.
게다가 애초에 소식이 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내가 아는 유럽 상황은 대략 2년 전 사정이다. 프랑스가 전 유럽을 상대로 해서 사방으로 공세를 걸고 있다는.
과연 프랑스군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을까. 스페인 귀족들은 자기네 왕을 자기 손자로 바꾸라는 루이 14세의 요구를 받아들였을까.
필리핀을 쳐서 스페인을 흔들어 놓았으니 나는 루이 14세와 맺은 밀약의 내 몫을 이행한 셈이다. 물론 이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려면 내년 연말은 되어야 할 테지만 말이다.
“사실 프랑스 국왕께서 요구하신 바는 필리핀이 아니라 누에바 에스파냐를 공격해달라는 거였지만, 거기까지 끼어들면 판이 너무 커지니까 말일세. 우리 사정으로는 감당하기 조금 벅차네.”
내 변명 아닌 변명을 들은 드 포르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조선이 처한 상황이 상황이니, 폐하께서 미주보다 필리핀에서 공세를 취하신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충분한 군대를 보내기도 힘든 바다 건너 미주에서는 효과적인 성과를 얻기도 힘들고, 얻더라도 유지가 어렵지 않습니까.”
드 포르토는 프랑스 정부가 파견한 정식 고문관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언제나 내 입장을 먼저 살펴서 조언하곤 했다.
“제가 포르뱅 백작처럼 정식으로 파견된 고문관이었다면 어떻게든 전하를 부추겨 누에바 에스파냐 공격을 감행하시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폐하와의 우정 때문에 여기 왔으니, 그런 활동을 할 필요가 없지요.”
“고맙네.”
드 포르토는 대한에 건너와서 법률 관련 자문을 주로 맡았다. 여전히 성직자로서 직무에 열중하는 아라미츠나 세 사람 중 최연장자이면서도 전장에 나가서 땀을 흘리는 다토스와는 달리, 가장 유유자적하고 느긋한 삶을 산다.
“폐하를 알게 된 지도 벌써 20년, 이 먼 나라까지 와서 폐하를 위해 일하고 있는데 이런 소소한 즐거움 정도는 허락해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지. 함께 지낸 세월이 있는데 어찌 그 정도 대우를 아끼겠는가.”
매일 쌓이는 국사에 정신이 없기는 하다만, 가끔은 나도 ‘친구’를 불러들여 편히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스트레스를 푸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금 우리 두 나라 전쟁 상대인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3세 쪽으로 화제가 옮겨갔다. 윌리엄이 죽고 앤 공주가 왕위에 오른 때가 대충 지금쯤일 텐데, 아직 살아있기는 할지도 조금 궁금하지만 그런 걸 알고 있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윌리엄 3세의 사인이 뭐였더라? 이제 갓 50대에 접어들었으니 노환은 아닐 듯하다. 암살은 분명히 아니고, 병이었던가?
“그대는 잉글랜드 국왕이 죽으면 그 뒤는 누가 이으리라고 보는가?”
윌리엄의 공동통치자였던 아내 메리 2세는 천연두에 걸려 죽은 지 꽤 됐다. 자식은 없고 윌리엄은 재혼하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드 포르토가 간단히 대답했다.
“프랑스에 있는 조카가 계승하지 않겠습니까?”
사위에게 쫓겨난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2세는 재작년 9월에 프랑스에서 죽었다. 지금은 15세인 그 외아들 제임스 3세 ? 태어나는 모습을 내가 본 그 아이 ? 가 프랑스에 머물면서 정통 잉글랜드 국왕을 자처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소식을 받았다.
“처제인 공주 앤이 더 가깝지 않나?”
“그야 그렇지만, 앤 공주 역시 자식이 없는 건 지금 국왕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차피 대를 잇지 못할 거라면 일찌감치 조카를 왕위에 앉히는 게 낫지요.”
하지만 제임스는 가톨릭에 친프랑스파다. 잉글랜드 의회가 그의 아버지를 쫓아낸 이유가 바로 그 두 가지였다. 그래서 제임스가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재작년에 잉글랜드 의회가 왕위계승법을 새로 제정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그것도 제임스 2세가 죽기 몇 달 전에.
이제 가톨릭 신자는 잉글랜드 국왕이 될 수 없다. 그래서 50명은 넘는 선순위 계승권자가 몽땅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제임스 1세의 외손녀인 하노버의 조피 하나만 남았다. 그 여자 아들이 하노버 선제후 조지 1세, 제임스 1세의 손녀 메리의 아들인 윌리엄과는 6촌 관계다.
그러고 보니 내가 폴란드군에 있을 때 조지 1세를 만났었구나. 빈 전투 이후에 하노버도 뒤늦게 군대를 보냈는데, 그때 지휘관으로 왔었다. 나도 분주했던 데다가 워낙 짧게 스치고 지나갔던 터라 별다른 인연을 쌓지는 못했고, 지금은 얼굴도 기억 안 난다.
“이번 전쟁에서 하노버가 참패한다면 하노버 선제후가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뭐…지금 상황을 보면 좀 어려울 것 같기는 합니다만.”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들어온 소식을 보면, 프랑스군은 플랑드르 전선에서는 답보 상태고 바이에른은 절반쯤 점령했다. 스페인령 밀라노를 대부분 장악했고 스페인 본토 전선에서는 바르셀로나 함락을 목전에 두었다. 우리 관전무관이 도착하면 더 상세한 소식이 오겠지.
“하지만 하노버는 라인강을 건너 독일 안으로 깊숙이 진격해야 하니 루이 왕께서 아무리 승전을 거두어도 직접 손대기 힘들 텐데.”
“예, 그래서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어디 하노버뿐이랴. 지금 루이 14세가 총을 겨눈 상대 중에 만만한 상대는 하나도 없다. 잉글랜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페인…과연 이 전쟁을 어떻게 끝낼 심산인지 걱정스러울 뿐이다. 원래 역사랑 비슷한 결말을 맞을 가능성이 크겠지 싶긴 하다만.
“다라미츠 신부에게 들었습니다만, 러시아 차레비치는 여전히 교회에서 본 미모의 공주를 잊지 못한다면서요?”
“그렇다고 하더군. 부모의 죄로 인해 수도원에 감금된 공주에게 반해서 그녀를 구출하는 정의의 기사랄까, 그런 위치에 자기를 놓고 혼자 그 감정에 취해 있는 게 아닐까 싶네. 뭐, 어린애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겠지만.”
알렉세이와 은이는 이제 11세다. 현대라면 그냥 초등학생이겠지만, 시대가 시대고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그에 비하면 조숙한 편이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순진한 구석이 있는, 뭐라고 표현하기 참 애매한 그런 나이다.
알렉세이는 내 앞에서는 연수(예왕의 큰딸)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은이에게는 자기 고민을 토로했다. 은이가 내게 그 이야기를 직접 해준 건 아니지만, 내가 그 둘의 대화 내용을 입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튼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아무래도 알렉세이는 표트르의 체격과 힘은 닮았어도 성격은 전혀 닮지 않은 모양이었다. 표트르는 전혀 저런 낭만적인 성격이 아니니까 말이다.
“어차피 그 반란 사건이 끝난 지도 5년이나 되지 않았습니까. 차레비치가 그토록 공녀를 원한다면 죄를 사면해주시고 차레비치에게 내주셔서 러시아 황실과의 인연을 더 다지는 데 활용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네.”
인간적인 정만 따진다면야 그래도 상관없다만, 이래저래 골치가 아플 걸 생각하면 내키지 않는다. 그 자매야 요즘도 온종일 기도만 드리면서 하루를 보낸다지만, 가슴 속에다 원한을 전혀 품지 않았다고 확인할 방법도 없지 않은가.
전쟁 때문에 유럽에 보내지도 못하는데, 그냥 대한에서 정식 수녀가 되라고 할까 보다. 그러면 알렉세이도 더 달라붙지 않을 테고, 이대로 조용히 잊힐 테니까. 지금도 알렉세이만 달라붙지 않으면 아무도 신경 안 쓸 자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