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26
3부 244화
– 1 –
적도의 태양은 참으로 뜨거웠다. 바타비아 외곽에 진을 친 정남수군 예하 전선들은 심한 더위로 인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여기 도착하고 벌써 근 보름 가까이 흘렀다.
“나리,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요?”
“통제사께서 명하실 때까지.”
마닐라를 함락하고 필리핀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다들 사기가 충천했다. 필리핀에 모였던 스페인 함대는 대한군과의 충돌을 두려워하여 줄행랑을 쳤고, 그 뒤에 남은 요새는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수군 장졸들은 신이 나서 배를 몰았다. 통제사가 약속했다. 적이 남쪽으로 도망갔고, 뒤를 쫓아 잡으면 막대한 보상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본국에서 함대가 내려오기 전에 먼저 적과 교전했던 대남수영의 사례가 있으니 다들 그 말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대남수영은 적에게 중선 한 척, 소선 한 척을 잡았을 뿐인데 금은 10만 냥을 빼앗았지. 여기서 절반, 그리고 배 두 척 값으로 산정한 은 3천 냥까지 해서 5만 냥을 받지 않았느냐. 너희에게도 그만한 포상이 있을 테니 조금만 더 참아라.”
대한 수군이 적선을 나포한 군사들에게 포상을 지급한 건 장조 시절부터다. 일본과 벅찬 싸움을 치르면서 지친 수군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적선에 실린 쌀과 병장기, 붙잡은 포로, 배 자체 가격 등을 쌀로 환산해서 쌀이나 저화로 나눠준 데서 시작했다.
당시 수군 군사들 상당수가 말 그대로 돈벼락, 아니 쌀벼락을 맞았다. 일본은 배를 몰아 나가는데 며칠 걸리지도 않을 만큼 가깝고, 조선과 마찬가지로 주요 물품 수송을 죄다 배로 했기 때문이다. 작은 배라고 해도 쌀 몇십 석은 기본으로 실려 있었다.
을미동정이 을미화약으로 막을 내리면서 모든 수군이 횡재를 할 수 있던 시절은 끝났다. 하지만 천축으로 가는 항로가 열리면서 새로운 길이 생겼다. 물론 멀쩡하게 지나가는 배나 항구를 멋대로 노략질하는 해적질은 절대 금지되어 있었지만, ‘해적을 터는’ 건 합법이었다.
그 모범을 확실하게 보인 사람이 바로 정남수군통제사 이홍권의 증조부인 이기빈이었다. 이기빈은 모카 약탈과 정상적인 상거래로 얻은 부 말고도 해적을 잡는 일로도 막대한 돈을 벌었다. 그리고 천축행 항로는 수군 군사들에게 꿈의 뱃길이 되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후송이 들어서자 수군 군사들에게는 더 많은 돈줄이 열렸다. 후송 태조 조승복이 보낸 방자한 국서 때문에 후송과는 계속 전쟁을 하는 중이나 마찬가지였고, 후송 선박이라면 군선이건 관선이건 사선이건 죄다 나포 대상이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명나라가 무너지면서 치안을 유지할 중앙권력이 사라지자 중국과 안남 해안은 해적과 잠상들이 설치는 천국이 되었다. 후송은 대한을 괴롭히려고 의도적으로 해적을 키웠고 서나라는 그 중심이 내륙이다 보니 바다에 큰 관심이 없었다.
서나라는 내륙에서 수륙으로 후송과 대처하는 것만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바다는 직접 살피는 대신 해적들에게 벼슬을 주어서 지키게 하고, 세금을 상납받는 것 외에는 이들에게 어떤 통제도 가하지 않았다. 어차피 후송 수군이 바다로 쳐들어올 것도 아니었으니까.
대한 수군으로서는 사방에 먹잇감이 널린 셈이었다. 적선을 나포해서 받는 포상금만 있는 게 아니라 잠상들을 통과시켜주고 받는 통과세도 있었다. 이렇게 매년 수십만 냥이나 되는 큰돈이 수군 금고와 장졸들의 주머니로 굴러들어왔다.
하지만 이런 것도 주산진이나 대남수영 소속 군사들이나 누릴 수 있는 열매였다. 본국에 있는 각 수영에서는 남쪽에서 복무하는 동료들이 횡재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부러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우리도 겨우 한몫 잡게 되나 했는데….”
“언제 우리가 또 여기까지 오겠습니까, 나리.”
이홍권이 본국에서 데려온 전선과 수졸들은 대부분 남방에 와본 경험이 없었다. 각 수영 소속 전선들은 자기들이 담당하는 구역에서 활동할 뿐, 다른 수영 구역으로는 잘 건너가지 않기 때문이다. 기근이 터졌을 때 식량 수송에 차출되는 정도가 예외다.
이번 원정 때문에 본국 수영에서 차출된 수졸들은 이 기회에 한몫 단단히 잡을 각오였다. 대남수영이 초전부터 대박을 터트렸다는 소문은 이들의 욕망을 한층 크게 부추겼다. 그런데 막상 싸움에 나서니 붙잡아야 할 서반아 함선은 죄다 도망가고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추격에 나서 바타비아 항구에 가득한 배들을 발견하기는 했다. 하지만 통제사는 자기가 거느린 장졸들이 얼마나 적의 재물에 목말라 있는지를 잘 알면서도 적선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게 벌써 열나흘째다.
“소인들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통제사또께서 왜 저놈들을 전부 공격해 불태워버리라고 명하지 않으시는지 말입니다. 역적을 돕는 자는 당연히 역적일진대, 저 양놈들이 우리 적을 돕고 있으니 당연히 저놈들도 때려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바타비아 항구 안에는 스페인 함대 8척 외에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배가 9척이나 더 있었다. 숫자는 분명 꽤 많지만, 배 크기까지 보면 1천 5백 톤급 전선만 3척, 1천 톤급 전선을 5척이나 끌고 온 대한군 함대가 훨씬 우세했다.
더구나 스페인 배건 네덜란드 배건 죄다 상선이라 대한 수군 배들보다 무장도 적다. 여기 있는 수졸들이야 싸움에 걸리적거리는 존재들을 싹 쓸어버리고 재물을 챙겨서 돌아가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는 통제사가 이해가 안 갈 뿐이었다.
“다들 조금만 더 참아라. 조만간 선창에 재물을 가득 싣고 돌아갈 수 있으리라.”
이 배, 저 배 할 것 없이 군관들은 수졸들의 불만을 다독이고 질서를 유지하느라 바빴다. 1년 내내 더워 죽을 지경인 이곳 적도에서, 육지에 내려 회포도 풀지 못하고 배에 갇힌 채 불만만 쌓여 가는 군사들을 달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 2 –
“선창에 재물을 가득 싣고 돌아가야 할 터인데.”
정남수군통제사 이홍권이 입에 문 석묵필을 잘근잘근 씹었다. 붓이라면 이빨 자국이 계속 남을까 봐 못할 일이지만, 어차피 칼로 깎아서 없앨 석묵필이라면 좀 깨물어도 상관없었다.
“어떻게 해야 저 서반아놈들을 바깥 바다로 끌어낼 수 있겠나?”
질문을 받은 참모들이 살짝 움츠러들며 대답했다.
“소인들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사또.”
“바타비아를 포기하고 떠나는 척 유인책을 써 볼까….”
이홍권이 인상을 찌푸렸다. 놓친 줄 알았던 표적이 눈앞에 있는데, 붙잡으러 들어갈 수가 없었다, 스페인 함대가 바타비아 항구 안에 머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측 관할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홍권이 마닐라에서 출발한 날은 7월 6일, 양력으로는 8월 18일이었다. 장희재가 정말로 4진이 도착할 때까지 출항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진은 7월 4일이 되서야 마닐라에 도착했고, 이홍권은 그보다 이틀 뒤에 남쪽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장희재는 만약을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이홍권이 보기에는 장희재 자신이 공을 독점할 생각으로 수군을 붙잡아놓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결과론적이기는 해도 그동안 스페인 함대가 나타나 아군을 습격하지도 않았고, 풍랑으로 난파한 배도 없었기 때문이다.
교전이 없었던 거야 그렇다고 치자. 난파한 배라도 있었다면 물에 빠진 사람이라도 찾아 건지러 나갔으리라. 하지만 그런 일조차 없었다. 이홍권이 지휘하는 정남수군 전선 23척은 그저 마닐라만 주변을 순찰하며 허송세월했을 뿐이었다.
이번 원정에서 장희재와 권훤을 비롯한 육군 장수들은 숱하게 전공을 세웠다. 수군에서도 대남수사 홍하명이 첫 승전과 함께 막대한 재물을 얻었다. 그런데 명색이 통제사인 자신이 육전을 구경하고 수송선이나 호송하다가 그대로 얌전히 돌아갈 수 있겠는가.
남쪽을 향해 돛을 올리면서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으니 나섰다. 스페인 함대는 이미 바타비아를 떠났을 공산이 크지만, 서둘러 내려가 보면 뭔가 생기는 게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횡재수를 만났다. 한참 전에 마닐라를 떠났다던 스페인 함대가 아직도 바타비아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그놈들이 떠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이홍권 자신이 스페인 수군 장수였다고 해도 바타비아에서 죽치고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잠시 몸을 추스르고 함대를 정비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눌러앉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었다면 스페인 영토도 아닌 바타비아에 머무르는 대신 신서반아로 떠났을 것이다. 부녀자들을 대피시키거나 재물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는 그게 가장 나은 방법이다. 인도양을 통해 스페인 본국으로 갈 수도 있지만, 신서반아 쪽이 훨씬 가깝고 빠르다.
“원군이 오기로 되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서반아 본국이나, 신서반아 중 어느 한쪽에서 전선과 군사가 건너오면 합세해서 필리핀을 탈환할 속셈일 겁니다.”
“그럴 법한 이야기로군.”
적이 반격을 시도할 생각이라면 바타비아에 머물러 있는 게 말이 된다. 남만해 일대에서 필리핀 탈환을 시도하는 스페인 함대가 원군을 기다릴 만한 항구로는 바타비아 이상 가는 곳이 없었다.
물론 바타비아는 개신교도들의 나라인 네덜란드가 지배하는 땅이고, 스페인인들은 이들을 이단자라고 하여 증오한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네덜란드는 스페인 편에 서 있다. 지금은 종교적인 감정 때문에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리라.
“내달국 당국에 세 번째 사자를 보내 보시겠습니까?”
“일단은 그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홍권은 스페인 함대가 항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환호하며 바타비아 기지를 지키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독에게 사자를 보내 그들을 항구 밖으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지금 대한과 스페인은 전쟁 중이니, 끼어들어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측은 이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네덜란드 본국과 스페인은 프랑스와 싸우느라 협력하는 중이고, 당연히 아시아에서도 서로를 도울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수하 군관과 수졸들이 육지에 올라가 여독을 풀게 허가해 달라는 요구도 거절했다. 상륙한 대한 수군 수졸들이 육지에서 스페인인들과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모조리 까부술 수도 없고….”
항구를 공격할 수도 없고, 스페인인들이 항구 밖으로 나오기를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다. 이홍권이 지휘하는 정남군 주력함대는 항구 밖에 닻을 내린 채 자기들 사이를 지나 항구를 출입하는 네덜란드 교역선들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13일이 지났다.
이제 사흘만 있으면 추석이다. 수확을 기리는 날이 다가오는 가운데, 수졸들이 적을 돕는 놈들도 전부 적 아니냐고 툴툴대는 건 이홍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홍권은 연륜 있는 무관이었고, 그렇게 단순하게 일을 판단하지 않았다.
“멋대로 내달인들을 공격해서 사건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대장군께서 엄명하셨다.”
네덜란드 측이 먼저 포를 쏘기라도 하면 당연히 반격해야 한다.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쏠 수는 없다. 그건 무종대왕 이래로 굳게 지켜진 국시이자 정남대장군 장희재가 분명히 내린 지엄한 군령이었다.
“참모장, 사자를 보내 내달인들에게 전하시오. 사자를 세 번이나 보냈으니 우리가 갖춰야 할 예의는 다 갖춘 것 같다고. 이후에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고 말이오.”
“예, 통제사 영감.”
이홍권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충돌하지 않고 스페인 함대를 칠 방법을 다시 처음부터 구상하기 시작했다. 참모들이 한 사람씩 차례로 의견을 내놓았다. 이들 역시 장희재가 공을 독점하려고 수군을 풀어주지 않았다고 여기는 건 마찬가지였다.
– 3 –
항구 밖에 진을 친 조선 함대는 도저히 싸워 물리칠 수 없는 상대였다. 숫자만 해도 20척, 스페인 함대의 2배가 넘는다. 게다가 스페인 측은 1천 톤을 넘는 배가 로스 앙헬레스 호 1척뿐인데 반해, 적은 8척이나 된다.
이래서야 아무리 네덜란드인들이 도와주더라도 일단 해전이 벌어지면 참패를 면할 도리가 없다. 곤살레스 함장은 그저 하늘을 보고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함장님, 제독 각하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여전하시네. 자리에서 일어나시지 못하더군.”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 함대를 맞아 큰 친절을 베풀었다. 극히 최근까지도 향료 교역권을 놓고 죽어라 싸우던 상대였건만, 일단 지금은 같은 편이라는 입장에 충실했다.
총에 맞은 상처가 더운 날씨 때문에 덧나서 썩어가던 후안 마르틴 제독도 네덜란드인들이 육지에 만들어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여자와 아이들도 육지에 올라가 휴식을 취했다. 사령관이 항해에 나설 수 있을 만큼 회복되면 인도양을 거쳐 본국으로 귀환할 참이었다.
물론 거리는 누에바 에스파냐가 훨씬 가깝다. 하지만 그쪽으로 가려면 아무래도 필리핀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필리핀은 조선군이 장악했으므로,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 놈들이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조선 함대는 스페인 함대가 바타비아에 도착하고 정확히 60일이 지난 뒤에 나타났다. 적이 곧바로 쫓아오지 않자 곤살레스를 비롯해서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던 스페인인들은 이런 예상치 못한 사태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곤살레스는 닻을 내린 조선 전함들을 보며 혀를 찼다. 자기가 조선 해군 사령관이었다면, 스페인 함대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확인한 즉시 쫓아왔든가 아니면 아예 추격을 포기했든가 둘 중 하나였다. 적이 과연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뒤를 쫓겠는가.
그런데 조선인들은 두 달이나 지나서 뒤를 쫓아온 것이다. 쫓아와 봤자 아무도 없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사령관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하지만 않았어도 곤살레스는 이미 인도양을 지나 서쪽으로 가고 있을 터였다.
“그랬으면 저놈들은 닭 쫓던 개가 되어서 멀거니 서쪽 수평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겠지. 아니, 설마 우리 뒤를 쫓아서 스페인까지 따라왔으려나.”
“모를 일입니다, 함장.”
곤살레스는 한숨을 쉬며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제독이 아직 완쾌하지 못해 지휘를 맡을 상황도 아니고, 지휘봉을 잡는다고 해도 뚫고 나갈 힘도 없다. 네덜란드 측에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약속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