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28
3부 2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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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년 10월 16일. 조선 함대가 바타비아 앞바다에 도착한 지 1달하고 1주일이 되던 날, 봉쇄를 시작하고는 23일째 되는 날이다. 봉쇄가 시작됐을 때는 고슴도치처럼 곤두서 있던 수비병들의 태도도 처음보다 아주 느슨해졌다.
조선 함대가 처음 몰려왔을 때만 해도 네덜란드인과 스페인인들은 긴장감에 마음을 놓지 못했다. 언제 저들이 항구와 함대를 공격해올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록 조선인들은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항구를 봉쇄한 직후에는 잠시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무력으로 충돌하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측에서 힘으로 봉쇄를 돌파하려고 하지 않았고, 조선인들도 이쪽 배나 항구를 직접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 상태로 계속 시간이 가며 네덜란드인들과 스페인인들도 차츰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역시 아무리 조선인들이라고 해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선제공격할 리는 없었다. 이대로 조금 더 버티면 저들이 물러가거나, 봉쇄를 뚫을 지원함대가 오리라.
이날 바타비아 요새 망루 위에서 망을 보던 파수병들도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망원경을 들고 만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조선 함대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37일 동안 항구 안으로 들어오지 않던 그 함대가 닻을 올리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선인들이 봉쇄를 중단하고 떠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기대는 삽시간에 무너졌다. 순풍을 받으며 대형을 편성한 조선 함대는 1천 5백 톤급 대형선 세 척을 선두에 세워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조선 함대가 항구로 진입합니다!”
“저놈들, 허가도 없이!”
깜짝 놀란 파수병들이 고함을 쳤다. 스무 척에 달하는 조선 함대가 정오의 햇빛을 받으며 정박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총독은 조선 함대가 바타비아 항구에 입항하지 못하게 했다. 조선군도 그 금지를 존중해서 억지로 입항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끝난 것이다.
“조선군이 항구 동쪽에 있는 스페인 함대 정박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총독께 알려라!”
아우토른 총독은 스페인 함대 외곽에다가 동인도회사 소속 소형선 네 척을 배치해두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울타리로 삼은 것인데, 과연 그 배들이 조선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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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앙헬레스 호 갑판에서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조선 함대가 뱃머리를 돌렸는데, 거기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놈들은 우리를 노리는 게 분명하다. 즉시 전투를 준비하라!”
곤살레스는 네덜란드인들이 자신들을 끝까지 지켜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래서 휘하에 있는 수병들에게 절대 긴장을 풀지 말라고 지시해두었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다.
덕분에 그가 명령을 내리자마자 선원들이 잽싸게 움직였다. 닻줄이 감겨 올라가고 활대에 매달린 돛이 바람을 받아 부풀었다. 포수들은 급히 대포에 화약과 탄환을 쟀다.
“함장님! 아직 네덜란드 측에서 연락이 없습니다.”
“그 이단자 놈들 연락을 기다리다가 죽을 수는 없지 않나!”
사령관 후안 마르틴 제독은 항해에 나설 수 있을 만큼 상태가 호전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육지에 머무르면서 상황을 살피고 있다. 네덜란드 측에서 출격을 말린다는 이유였다.
물론 지금 출항을 시도한다면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한 조선 함대가 앞을 막아설 거고, 그 싸움은 참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곤살레스도 속으로는 지금 상황에 분노하면서도 항구에서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린다는 제독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어쩌면 조선인들은 그저 위협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쩌겠는가. 닻을 내린 채 우물거리고 아무것도 안 하다 보면 조선 전함들이 코앞에 와서 포격을 퍼부어댈지도 모른다. 그건 죽여 달라고 목을 내미는 꼴이다.
“네덜란드 함대가 지켜주지 않을까요? 단 4척이긴 하지만, 경계를 맡을 소함대도 배치해 주지 않았습니까.”
휘하 장교 중에는 섣부른 출격을 망설이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사령관이 육지에서 내린 지시대로 최대한 여기서 버티며 네덜란드 측의 지원을 기다리자고 했다. 하지만 곤살레스는 이제는 싸우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래서 단호하게 내뱉었다.
“이젠 다 끝났네. 이 정박지에서 버티는 건 사형대 앞에 서는 것밖에 안 돼!”
조선 함대가 코앞에 다가오는 이 시점에서 이미 네덜란드 측의 보호는 끝났다. 네덜란드 함대 쪽에서도 소동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경계 태세가 느슨해져 있던 네덜란드인들이 지금 당장 출격해서 조선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을 수 있을 리도 없다.
스페인 함대 외곽에 이미 배치해 놓은 네덜란드 함선도 믿을 수 없다. 1백 톤도 안 되는 소형 범선 4척 따위, 조선군이 밀어붙이면 그대로 도망갈 게 분명했다. 어떤 네덜란드인이 네덜란드 국기를 위해서도 아니고 스페인인들을 위해 목숨을 걸겠는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공격을 받는다면 제대로 배를 움직여보지도 못하고 만사가 끝난다. 앉은 채로 죽을 생각이 없다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거나, 나가서 적과 싸우다가 죽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들은 적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필리핀을 포기했었다. 아무리 데 에체바리 총독이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적에게서 도망쳐 놓고 마음이 편할 수는 없다.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을 이제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곤살레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스페인 국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싸운다! 출항!”
“국왕 폐하 만세!”
곤살레스의 지휘에 따라 로스 앙헬레스 호가 바다로 나갔다. 맞바람이 불고 있기는 해도 적을 맞으러 나가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네덜란드인들이 급히 앞길을 막으려고 했지만, 로스 앙헬레스는 간단히 그 옆으로 피해 지나갔다.
혹시 네덜란드인들이 함께 싸울 생각이 있다면 뒤를 따라오리라.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저 가진 힘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적의 움직임에 맞춰서 선회한다.”
로스 앙헬레스 호가 선두에 서서 나가자 조선 함대가 동쪽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로스 앙헬레스도 동쪽으로 뱃머리를 돌렸고, 양쪽 함선들 측면에 설치된 포문이 일제히 열렸다. 이제 양쪽이 나란히 움직이며 포화를 퍼부을 차례였다.
배 숫자가 이쪽보다 두 배나 되는 조선군은 1천 톤을 넘어가는 대형함 8척으로만 전열을 구성해서 들이밀었다. 두 배나 되는 배를 가지고 있으니 함열을 둘로 나누어 스페인 함대를 그사이에 넣고 난타할 수도 있으련만, 나머지 12척은 따로 전열을 구성해서 후방에 남겼다.
“네덜란드 함대를 저지하는 예비대로 쓸 작정인가. 여유가 넘치는군.”
자기가 거느린 배들의 열세를 잘 알고 있는 곤살레스가 허탈감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스페인 함대 숫자는 적과 같은 8척이어도 크기가 너무 다르다. 로스 앙헬레스 호는 2천 톤이지만 1척은 8백 톤, 1척은 6백 톤, 5척은 3백 톤이다.
조선 함대는 스페인 함대보다 숫자는 2.5배지만 전력은 4배는 되리라. 이 정도 열세라면 아무리 분투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스페인 국기 아래 선 기사라면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돌격해야 할 때가 있지 않겠는가.
로크루아 전투에서 테르시오를 구성한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포탄이 정면에서 날아들어도, 옆에 선 동료가 총탄에 맞고 쓰러져도 자리에 서서 대형을 유지하며 버텼다. 그것이야말로 스페인의 정신이었다.
“국왕 폐하 만세! 스페인이여, 산티아고와 함께 돌격하라(¡Santiago y cierra, Espana)!”
산티아고(성 야고보)는 스페인을 지키는 수호성인이다. 정복과 군사를 상징하는 성인이며 중세에 무어인과의 전투에 직접 강림하여 5천 명이나 되는 무어인 병사들을 직접 죽였다는 전설까지 있다. 이교도와 싸울 때 산티아고를 부르며 돌격하는 것은 스페인군의 전통이다.
양쪽 함대의 함열이 가까워지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쇳덩이 포탄에 맞은 선체에 구멍이 뚫리고 나뭇조각과 사람의 피와 살이 사방으로 튀었다. 분노와 절망을 담은 함성이 포성과 어우러졌다.
– 8 –
뒤늦게 요새 위로 뛰어 올라온 아우토른 총독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조선 함대와 스페인 함대 간의 교전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그렇게 싸움을 피하려고 노력했건만, 결국은 전투가 시작되고 말았다.
“차라리 얼른 떠나보낼 것을….”
치료가 필요한 후안 마르틴 제독 한 사람만 남겨두고, 함대는 일찌감치 스페인 본국이건 신대륙이건 방향을 잡아 떠나라고 했어야만 했다. 그랬으면 바타비아에서 저들이 조선군과 대치하지도 않았을 거고, 조선군이 바타비아를 압박하지도 않았으리라.
“저 멍청이들은 왜 출항한 건가! 차라리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오르기라도 할 것이지!”
적에게 배를 넘겨주기 싫다면 하선하면서 화약고에 불을 지르면 그만이다. 그러면 적에게 배를 빼앗길 염려도 없이 전원 무사히 탈출할 수 있다.
“총독 각하, 저들은 스페인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배를 버리고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헐떡이면서 총독의 뒤를 따라 올라온 보좌관이 스페인인들이 멋대로 싸우러 나간 이유를 간단히 줄였다. 사실 총독도 알고 있기는 했다.
스페인인들은 자존심이 세다.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면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허리에 찬 칼을 뽑아 결투를 신청할 정도다. 그런 자들이 지난 40여 일 동안 참은 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다.
“그래도 그렇지,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버리다니…!”
네덜란드인, 그것도 이곳 동인도 태생 ? 동인도회사 직원이던 부친이 동인도에 체류하던 중에 태어났다 ? 네덜란드인인 총독으로서는 이해하기는 해도 공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일단 살아남아야 다음 기회를 노릴 게 아닌가. 도망치든, 복수하든 말이다.
“각하, 원군은 오지 않았습니다만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보좌관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총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이라도 출격하면 조선군을 저지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저들이 지금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고는 하나, 우리 함대를 향해 정면으로 발포하지는 못할 겁니다.”
네덜란드와 조선은 지금까지 전쟁 상태가 아니었다. 조선 함대 사령관이 국왕에게서 어느 정도 재량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쟁을 시작할 권한까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40일 가까이나 시간을 허비하면서 스페인 함대를 인도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미 공격을 시작했겠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조선 사령관은 철저하게 계산해서 도발했다. 스페인인들이 네덜란드 함대가 보호해주는 정박지를 스스로 뛰쳐나오도록 말이다. 그리고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승패는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총독이 결단을 내렸다. 지금 그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다.
“출격은 없다. 원군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전력이 부족하다. 우리 함대는 계속 제자리에서 대기하라. 다만 소형선들을 내보내서 바다에 뛰어든 스페인인들은 건지도록 하라.”
지금 출격한다고 해서 조선 함대가 순순히 물러나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도리어 이쪽 함대를 향해 발포할지도 모른다. 그 경우, 함선 숫자에서 확실히 밀리는 이쪽이 불리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함대 전체를 상실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지켜줄 테니까 출항하지 말라는 당부를 어긴 건 스페인인들 아닌가?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을 구해주기 위해 동인도회사가 배와 사람을 희생할 의무는 없었다.
“조선군이 구조선을 공격하면 어떻게 합니까?”
“인도적인 배려를 베푸는 우리 인원들에게 그런 무도한 짓을 한다면 즉시 함대를 내보내 막아야지.”
함대를 내보내면 조선군이 ‘공격하려는 줄 알았다’라면서 포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은 보트나 거룻배 수준 배들이 나가면 그런 변명은 할 수 없으리라. 포탄 한 발이라도 구조선 쪽으로 날아와 위협을 가한다면, 전쟁을 시작한 건 조선인들이 될 것이다.
“아, 구조선에는 네덜란드인 말고 원주민들을 주로 태워서 내보내도록.”
“예, 각하.”
– 9 –
총탄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귀가 먹먹했지만, 이홍권은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계속 쏘아라! 얼마 안 남았다.”
“예, 사또!”
이홍권이 타고 있는 통제사 좌선 혜원은 40문에 달하는 포로 스페인 함대 선두에 있는 대선을 맹공격했다. 스페인 대선도 대포 30여 문으로 응사했다. 이쪽에는 자모포가 많아서 전체 위력은 엇비슷했다.
“생각보다 저항이 심합니다.”
“우리 배보다 크니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얼마 안 남았다. 곧 뒤에서도 올라올 거다.”
스페인 대선은 그나마 혜원과 호각으로 싸우고 있다. 하지만 뒤를 따르던 중선, 소선들은 말 그대로 묵사발이 나고 있다. 돛은 걸레짝이 된 데다가 돛대가 꺾이고, 선체 측면은 포탄 구멍이 잔뜩 뚫려 벌집이 되어있었다. 당연히 갑판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대한군 쪽도 피해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배 크기와 화력에서 원체 격차가 벌어지다 보니 사상자 수는 훨씬 적었다.
“뒤쪽에서 등선군을 투입하고 싶다고 합니다!”
기라졸이 뒤에서 가쁜 목소리로 보고했다. 기라졸도 전투를 보고 흥분이 된 모양이었다.
“알아서 하라고 해라. 이까짓 싸움, 크게 지시를 내릴 것도 없다.”
이홍권은 의기양양했다. 역시나 스페인인들은 화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정박지에서 나오지 않고 그냥 웅크리고 있었다면 이렇게 마음껏 공격하지는 못했으리라.
물론 저놈들이 움직이지 않고 정박지에 계속 머물렀어도 공격하기는 했을 것이다. 빗나간 포탄이 네덜란드인들에게 날아가 외교적으로 충돌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주 코앞에다 배를 대고 일제사격을 퍼부은 뒤 등선군으로 육박전을 벌여서.
“난 분명 군령을 지켰다. 누구도 내가 군령을 어겼다고는 못할 거다.”
스페인 함대를 쫓되 네덜란드인들과 절대 충돌하지 말라는 게 장희재가 내린 군령이었다. 그리고 이홍권은 그 지시를 지켰다. 끈질기게 기다린 끝에 스페인 함대만 끌어내 공격했다. 네덜란드인들에게는 포를 쏘지 않았다.
네덜란드인들은 사실상 대놓고 스페인 편을 들었다. 성급한 장수였다면 진즉에 네덜란드 함대고 요새고 전부 때려 부수겠다고 덤볐을 거다. 하지만 자신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고 기다렸다. 그러니 군령은 지켰다.
“그럼, 그렇고말고.”
이홍권이 히죽 웃었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리라. 스페인 함대가 전멸당하는 꼴을 보고도 네덜란드 함대가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저들이 뛰쳐나와서 공격하면 선제공격을 받았다는 명분으로 응전한다. 그러면 또 막대한 재물이 추가로 들어온다.
다만 바타비아 공략은 포기해야 하리라. 여기 머물면서 천천히 살펴보니, 기갑선도 없고 유력한 육군도 없이 저 요새를 공격하기는 좀 무리라는 판단이 나왔다. 하지만 해전을 치러 네덜란드 배만 전부 나포하더라도 엄청난 수입이다.
혹시 네덜란드인들이 스페인인들을 버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애초 목적대로 스페인 선단만 나포해서 돌아간다. 여기서 얻을 노획물만 해도 한 재산 만들고도 남을 테니까.
“계속 쏘아라! 갑판이 제압되면 배를 붙이고 올라탄다!”
사전에 지시한 대로, 중신기전을 쏘는 배는 하나도 없었다. 적선을 통째로 불태우지 않고 송두리째 노획한다는 목표를 다들 잊지 않은 게다.
이대로 한 시진(2시간)만 더 싸운다면 스페인 함대를 송두리째 나포할 수 있다. 이홍권이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리는데, 주돛대 위에서 파수병이 고함을 쳤다.
“사또! 북쪽에 배가 나타났습니다! 대선입니다!”
이홍권이 고개를 돌려 왼손에 든 천리경을 눈에 댔다. 과연 돛대 꼭대기가 몇 개 보였다. 어떤 깃발을 달고 있는지는 아직 잘 보이지 않았다.
“내달국 상선이겠지. 괘념치 마라.”
유럽에서 온 배일 수도 있고, 남만 다른 곳에서 왔을 수도 있다. 바타비아가 봉쇄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들어온 배들이 수시로 나타났었다. 이제까지는 다른 항구로 회항하게 했지만, 오늘은 그냥 입항하게 놔두면 된다.
“한 척이 아닙니다!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뭐라고?”
파수병의 고함에 놀란 이홍권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수평선 위로 줄줄이 나타나는 돛대가 보였다. 한두 척이 아니었다.
“내달국인들이 우리 봉쇄를 뚫으려고 남만 전역에 흩어진 배를 긁어모았나…?”
아무리 무장상선이라고 해도 네덜란드 측이 작심하고 배를 모아서 함대를 편성했다면 좀 까다롭다. 이곳 남만, 네덜란드인들이 부르는 호칭대로 하자면 ‘동인도’ 지역에는 수십 개가 넘는 요새가 있고 함대가 있다. 그게 다 모였다면 상대하기 벅차다.
‘자칫하면 우리가 역으로 이 만 안에 갇힐 수도 있겠는데….’
어쩌면 그게 아니라 본국에서 원군이 왔을 수도 있다. 연락선을 보내서 원군을 청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원군이 왔다면…바타비아 공략이 가능할지도.’
혹시 기갑선이 왔을지도 모른다. 보병과 공성포를 싣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만한 전력이 증원된다면 바타비아 공략도 꿈이 아니다. 네덜란드 쪽에서 명분을 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홍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천리경 초점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저 함대가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깃발을 식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