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35
3부 2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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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 섞인 겨울바람이 차다. 하지만 말 그대로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오르니, 휘날리는 눈송이가 얼굴에 닿아도 차갑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하는 친국이지.
“네놈의 죄를 네가 알렸다?”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나도 내 반응을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뜻밖에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 예상보다 훨씬 차분했다.
“주, 죽여주시옵소서.”
겉옷 없이 바지저고리만 걸친 이홍권이 사정전 앞마당 돌바닥에 엎드려 부들부들 떨었다. 풀어헤친 백발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흘러내려 얼굴을 덮었다.
이홍원이 마닐라에 도착한 건 11월 9일, 양력 12월 17일이었다. 도착해서 보니 정남수군 본대 및 별군인 대남수영 전선들까지 총 34척에 달하는 배가 마닐라만에 집결해 있었다.
남사군도에 있다고 하던 정남수군 본대가 마닐라에 들어와 있는 건, 패전 소식에 격노한 정남대장군 장희재가 군령을 발한 까닭이었다.
“적을 쫓는 데 그치지 않고, 이번 전쟁과 상관없는 타국의 인민을 겁박하여 도리어 적을 늘렸으니 어찌 그 잘못이 작다 하겠는가? 내 명하니, 군기대장은 당장 전선을 타고 나가서 통제사와 그 참모들을 추포하라! 반항하면 현장에서 참해도 좋다.”
이홍권이 조정에 보내는 장계는 상관인 장희재도 당연히 읽어볼 수 있었다. 그래야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울 게 아닌가. 보니 실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황이었지만,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어 한시라도 빨리 지시를 청한다는 내용만 덧붙여 올려보냈다.
하지만 장계를 실은 배가 북으로 떠나고 나자 장희재의 화가 본격적으로 폭발했다. 본래 법도를 따지면 수군 작전에 대해서는 이홍권에게 지휘권이 있다지만,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뒀더니 이따위 사태를 초래했다. 그러니 상급자로서 분노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통제사가 귀진(歸陣)하지 않고 바다에 머무름은 문책을 피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당장 잡아다 벌함이 당연하니, 군기대장은 즉시 출영하라! 그리고 본국에서 영이 내려올 때까지 수군 지휘는 대남수사 홍하명이 대행하도록 하라!”
장희재는 당장이라도 이홍권을 쳐죽일 듯이 날뛰었다. 하지만 수하 장수들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해도 이홍권은 일단 종2품 부장인데, 태황의 칙명도 없이 당상관을 임의로 벌했다가는 장희재에게 무슨 불똥이 튈지 몰랐기 때문이다.
“대장군 대감, 고정하소서!”
“대감께서 진노하시는 것도 당연하나, 처벌은 폐하께서 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하 참모와 지휘관들이 한참을 뜯어말린 끝에 겨우 장희재가 노기를 약간 가라앉혔다. 하지만 당장 이홍권과 그 예하 참모들을 체포하라는 명은 거두지 않았다.
“그자는 멋대로 군사를 움직여 나라에 해를 입혔으니, 장수라 할 수도 없다! 그런 죄인이 군권을 쥔 채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놓아둔다면 나뿐만 아니라 너희 모두 똑같은 죄를 짓는 것이니, 어찌 폐하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있겠느냐? 놈들을 당장 추포하라!”
명에 따라 정남군 군기대장이 홍하명이 모는 배를 타고 당장 남사군도로 달려갔다. 혹시 이미 달아났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지만, 뜻밖에도 이홍권은 남사군도에 그대로 있었다. 예하 함선 17척도 모두 집결해 있었다. 2척은 싸움에서 잃었고 1척은 마닐라에 왔다.
홍하명과 군기대장을 맞이한 이홍권은 아무 말 못 하고 한숨만 쉬다가 투구를 벗고 칼을 끌러 내려놓았다. 패전으로 크게 기가 꺾인 수하들도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지휘권을 인계받은 홍하명은 함대에 마닐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벌써 3개월이나 바다에 있다 보니 배에 실은 물과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었고, 지친 군사들도 육지에 올라 쉬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홍원이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 이홍권 본인은 물론이고 그 밑에 있던 정남군 수군 본대도 전부 마닐라에 들어와서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칙서를 가지고 도착한 이홍원은 곧바로 지휘권을 넘겨받고 이홍권을 잡아 본국으로 압송하기만 하면 되었다.
“네놈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기는 하느냐?”
오늘은 12월 2일, 양력으로는 1704년 1월 8일이다. 이놈이 보낸 패전 장계를 받은 지도 무려 46일이나 되었다. 일을 저지른 당사자를 보자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다시 치솟았지만, 그동안 진정이 된 탓인지 흥분 때문에 이성을 상실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
“주…죽여 주시옵소서!”
이홍권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자기가 무리한 짓을 한 건 알고 내 분노도 알았으니 용서를 바랄 수 없다는 건 그 자신도 알고 있는 거다.
이놈이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잡힌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이홍권이 도망간다면, 가문 전체가 그 화를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순순히 오라를 받고 처벌을 받는다면 피해를 보는 건 이홍권 본인 혼자로 끝난다.
게다가 이홍권에게는 연좌가 걸릴 자식도 없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자녀들이 모두 출가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본처도 죽었고, 연좌에 걸릴 상대라고 하면 첩 둘밖에 없다. 그나마 원균의 전례에 따라 첩도 이혼하면 그만이다. 고로 벌은 자기 혼자만 받으면 된다.
“네놈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기는 하느냐고 물었다!”
“싸…싸움에 패하였습니다.”
“네가 그저 패하였다고 지금 끌려온 줄 아느냐?”
이홍권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이홍원에게 분명히 밝혔다. 이홍원이 그 이야기를 당사자 이홍권에게 전하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 저놈이 지금 저러는 건 어떻게든 죄를 줄여 보려고 그러는 게 분명했다.
“저 늙은 놈의 입에서 자백이 나올 때까지 매를 쳐라!”
이홍권을 끌고 온 군기대 형리들이 뒤에 놓아둔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형부대신 김회정이 매를 때리지 말자며 제지하고 나섰다.
“폐하. 죄인 이홍권은 건원 13년(1644)생으로, 나이가 올해 예순이옵니다. 아직은 일흔이 되지 않아 심문하면서 형문을 가할 수는 있사오나, 젊은이라 할 수는 없사오니 형문 도중에 매를 치지 마소서.”
조선에서 70세는 신체형을 가할 수 있는 기준 나이다. 태종 때는 70세가 된 노인에게는 태형을 가하지 말라고 했고, 세종대왕 때는 죄인이라는 표시로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넣는 자자(刺字)를 70세 이상 남자와 15세 이하 아이에게 금지했다. 임산부도 노인 취급이다.
80세 이상 남자와 60세 이상 여자는 폐질자(廢疾者)와 더불어 연좌에서도 제외다. 노인 공경이 중요한 조선 사회에서는 형벌을 가하는 데서도 노인에 대한 배려가 확실하다.
“매를 치지 말라니? 그럼 죄인을 어찌 심문하라는 말인가?”
그동안 김회정은 이홍권을 어떻게 처분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입도 뻥끗한 적이 없었다. 확실한 증거를 두고 법에 따라서 판정하기 전에는 절대 의견을 안 밝히는 그 성격을 알기에 그냥 놔뒀는데, 혹시 이 작자가 조용한 이홍권 옹호자였던 건가?
“폐하, 부디 다스려 주시옵소서. 폐하께서는 지금 죄인에게 크게 노하여 계십니다. 그러니 어찌 매를 든 형리들에게 손에 사정을 두라 하시겠습니까? 있는 힘껏 치라고 하실 터인데, 그리하면 죄인이 어찌 단매에 죽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가 그것입니까?”
김회정은 애초에 대쪽 같은 양반이다. 콜카타 총관 조기철이 벌 받은 이야기를 할 때도 그랬지만, 그 뒤로도 형부대신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문제는 그런 태도가 이럴 때도 철저하게 발휘된다는 점이다.
이홍권은 군인이므로 그 처벌은 병부 예하 군기대 소관이다. 하지만 재판과 형벌에 관한 사무에 형부대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설사 진짜로 내 의도가 이홍권을 장살(杖殺)하는 거라도 대놓고 공언할 수도 없다. 내가 그건 아니라고 하자 김회정이 이렇게 말했다.
“정의를 밝히려면 죄인이 끝까지 살아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맞다가 죽을 수 있는 매질 대신 다른 방법으로 형문을 이어가심이 좋겠습니다. 죄인이 자백하도록 고통을 줄 수는 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형문 방법이 얼마든지 있지 않사옵니까.”
갑자기 안도의 한숨이 확 나왔다. 그럼 그렇지, 김회정 성격에 이홍권 편을 들 리가 있나.
“그대의 말이 맞는다. 내 생각이 짧아 실수를 범할 뻔하였다. 저 큰 죄인을 어찌 단매에 때려죽여 편히 죽게 하겠는가. 마땅히 형문이 끝날 때까지는 살려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크게 고함을 쳤다.
“예순이면 적은 나이는 아니니, 맞다가 죽지 않도록 매질은 가하지 않겠다. 하지만 죄인이 그 죄상을 순순히 밝히지 않으니, 형문을 아예 가하지 않을 수는 없다. 형리는 당장 가서 집게를 가져와 죄인의 조갑(爪甲, 손발톱)을 쪼개도록 하라!”
매질은 맞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손톱을 뽑는다고 죽지는 않는다. 게다가 자자는 새겨진 글자를 평생 지울 수 없으나 손발톱은 몇 달이면 다시 난다. 복구 가능한 신체형이다.
“폐, 폐하! 살려주시옵소서!”
이홍권이 새파래진 얼굴로 엎드려 빌었다. 하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살고 싶다는 생각은 드느냐? 가소롭도다!”
군기대 형리들이 이홍권을 형틀에 잡아맸다. 곧 장도칼과 집게가 등장했고, 예리한 칼이 손톱에 금을 새겼다. 그리고 집게가 손톱 한 조각을 잡아 뒤로 찢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비명이 편전 앞마당을 채웠다.
형문은 당일로 끝나지 않았다. 통나무로 대충 지은, 바깥바람이 그대로 들이치는 감옥에 거적 한 장 던져주고 처넣었다가 새벽같이 다시 끌어내 손톱을 째며 심문했다. 내가 국사로 자리를 비우면 군기대 관원들이 맡았다. 고통에 정신을 잃으면 찬 우물물을 퍼부었다.
물론 양력 1월, 이 엄동설한에 노인에게 냉수를 퍼붓는 게 매질보다 몸에 부담을 적게 줄 리는 없다. 이홍권은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이홍권의 참모들 쪽은 군기대 관원들에게 심문을 전적으로 맡겼고, 내가 직접 가보지는 않았다.
– 11 –
“일거에 전세를 2할 5푼이나 올린다고 하면 민생에 심대한 타격을 줄 것이 분명하옵니다. 나라에서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 하여도 이는 너무 급격한 인상이니, 그 반만 올리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중추원에서는 전세를 인상하는 조치 자체는 동의하되 그 비율을 조금 낮추자는 조정안을 제시했다. 조정에서 나온 초안은 현재 16%인 전세를 옛날 세율인 20%로 되돌리자는 건데, 중추원에서는 18%로 하자고 한 거다.
“그동안 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신 덕분에 백성들이 더 윤택하게 지낸 것은 사실이옵니다. 허나 나라가 누란지위에 처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세가 그리 오르면 백성들이 충격을 받아 곤란해지기 쉬우니, 부디 자애로운 결정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 마지않사옵니다.”
중추원 영사 윤예성이 중추원 전체의 의견이라며 들고 온 안은 그럭저럭 괜찮은 타협이 될 만했다. 농민들만 상대하는 정책안이라면 말이다.
농민들이야 유럽으로 가는 무역이 끊어져도 직접적으로 당장 큰 타격은 안 받는다. 허나 상공업계는 난리가 난다. 당연히 그쪽 세수도 감소한다. 그런데 중추원에서는 자기들이 다 지주다 보니 농업계 쪽 입장만 신경을 쓰고 있는 티가 훤히 났다.
‘얼른 상공업 쪽 목소리도 중추원에 반영을 시켜야 하는데….’
당장이야 부족한 전비를 국채로 조달할 생각이니 추가로 징수할 전세가 약간 줄어든다고 해서 큰 타격은 안 된다. 하지만 장래 균형 잡힌 정책 수립 방향을 잡으려면 중추원에 다른 목소리가 들어올 환경을 조성하기는 해야 한다.
‘전비 조달 겸, 공명첩을 발행할까…?’
아주 막대한 금액으로 국방헌금을 하는 이들에게 중추원 의석을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개인 자격으로 감당하기 힘든 액수로 기준을 잡으면, 유력 상단 같은 곳에서 돈을 내고 자기네 대표를 내보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문제는 공론화하기 전에 측근들과 먼저 한번 의논해 볼 만하겠다. 매관매직이라고 할 수도 있기는 있는데, 이건 그저 내가 돈을 모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국가 행정에 상공업계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계기로 만들고자 하는 거니 경우가 다르다고 본다.
‘나라에 돈 바치는 것도 공적은 분명한 공적이고….’
이 문제를 누구를 불러 논할까 생각하는데 선전관이 급히 달려왔다.
“폐하, 죄인이 자복할 기색이 있다 하옵니다.”
“알겠다. 가보도록 하자.”
이홍권 그놈이 사흘 만에 드디어 자백할 생각이 든 모양이다. 살펴보던 정무를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국하러 간다.
“소, 소인이…증조부와 같은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그만 과욕을 부렸사옵니다. 수하에 거느린 군사들이 이번 남정을 공도 세우지 못하면서 고생만 하는 고역으로만 여기기에 이를 진정시키려는 생각도 하였고….”
김회정이 막은 때문에 매를 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톱 10개가 모두 조각나서 뽑힌 데다 전신이 동상으로 푸르딩딩한 상태가 되니 이홍권도 도저히 더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단 사흘 동안 심문이 이어졌을 뿐인데 자기 ‘죄상’을 자백했다.
놈이 한 진술에 정말 진실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는 하늘이나 알리라. 하지만 내게는 지금 받아낸 진술만으로도 충분했다.
“네놈의 그 욕심 때문에 이 나라가 얼마나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는지 알겠느냐! 네놈을 오마분시하여 전국에 내돌려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헌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조정에서 이홍권의 처벌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멋대로 움직여 사태를 악화시킨 잘못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나, 그 의도가 ‘도망친 서반아 함대를 붙잡는다’라는 데 있으니만큼 정상을 참작하자는 이들이 없지 않았던 탓이다.
‘분란을 일으킨 것은 분명 죄인이 범한 잘못입니다. 하지만 그 본의는 적을 격파하는 데 있었고, 끝까지 내달인들에게 직접 포를 쏘지는 않았으니 부디 벌을 낮춰 주소서.’
‘내달인들은 우리가 서반아와 전쟁을 치르는 줄 뻔히 알면서 적을 숨겨주었습니다. 이는 곧 저들이 먼저 법도를 어긴 것입니다. 이홍권은 그에 대응했을 뿐이니, 죄를 줄여 주소서.’
이런 소리를 하는 놈들이 의외로 꽤 있었다. 세상을 순전히 적과 아군으로 나누어 간단히 생각하는 이 순진한 사고방식을 접하려니, 짜증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역으로 가정해서, 영란함대가 제물포에 나타나 프랑스인들을 내놓으라고 하면 순순히 내줄 작정인가?
자백을 받은 뒤에도 조정 내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죄를 범한 건 맞지만 어쨌든 ‘잘해 보려다가’ 저지른 실수이니만큼 가급적 관대하게 처분하자는 의견이 상당했다. 더구나 아직 영란 측과 교섭을 통한 화해의 여지가 있지 않으냐는 소리도 또 나왔다.
“잉내 양국은 전선은커녕 상선 한 척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 수군만 배 두 척을 잃었는데, 별 피해를 보지도 않은 잉내 양국이 일부러 더 크게 사태를 확대하리라 보기 어렵습니다.”
“지금 강화하면 우리에게 심대한 굴욕이니 최소한 한 번 이길 때까지는 싸워야 한다고 내 경들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폐하. 하지만 신이 말하는 바는 다르옵니다. 별 피해를 본 바가 없는 잉내 양국이 먼저 강화를 청할 수도 있으니, 저들이 먼저 강화를 청하거든 굳이 거절하지 말고 짐짓 받아들이자는 뜻이옵니다.”
이홍권의 진술을 통해서 우리 수군이 영란 측에 입힌 피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었다는 게 명확해지니 화친을 하자는 의견이 더 강해졌다. 수전에 패한 건 분명 굴욕이지만, 바타비아 원정은 이홍권의 독단이었고 공식 원정도 아니었으니 없었던 셈 치고 넘기자는 거였다.
다만 이 문제는 이홍권의 처벌 수위와는 별개였다. 화의를 맺자는 이들 중에도 이홍권은 중형에 처하자는 사람과 최대한 낮은 벌을 내려야 한다는 사람이 공존했다. 내버려 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은 이 논쟁에 지쳐 그만 닥치라고 하고 처벌 수위를 정하려는데 제물포에서 파발이 날아왔다.
“폐하께 아룁니다! 남방에서 잉란 양국 연합함대를 이끄는 내달국 제독이 폐하께 올리는 서한을 지참한 사자를 보내었사옵니다. 폐하를 직접 알현하고 바치겠다 하는데, 어찌하면 좋을지요?”
보고를 들으니, 영란 측 사자는 마닐라에 들러 장희재를 만난 뒤 안내를 빙자한 우리 쪽 전함의 감시를 받으며 제물포까지 왔다고 했다. 하기야 영란 측에도 이미 제물포를 수시로 항해한 선원들이 잔뜩 있는데 굳이 안내자와 함께 움직일 건 없었으리라.
이홍권을 압송한 지 겨우 사흘 만에 뒤쫓듯 나타난 걸 보면 저놈들도 상당히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곧바로 답을 내렸다.
“만나보겠다. 엄중히 호송하여 올려보내도록 하라.”
영란 측에서 과연 어떤 조건을 들고 왔을지 한번 들어나 보자. 혹시라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할지도 모르긴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