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49
3부 2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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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싸움 경험이 없는 건 아니다. 스페인에 있던 시절에 자신을 사생아라고 모욕한 건방진 귀족에게 결투를 걸어 들것에 실려 나가게 해준 적도 여러 번이다. 하지만 발밑이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칼을 휘두르며 싸운 건 처음이었다.
“처음치고는 솜씨가 쓸만하시군요.”
부황이 붙여 준 두 슬라브인 경호원, 이영선과 배실이는 디에고를 칭찬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옛날 실력이 안 나온다고 투덜거렸지만, 말이 그럴 뿐 막상 싸움에 임하는 태도는 능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대들은 말 타고 싸우는 데만 능한 줄 알았는데.”
이영선(이고르)이 웃으면서 칼을 닦았다. 일부만 남기고 머리카락을 싹 밀어버린 머리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소싯적에는 쪽배를 타고 해적질도 했었지요. 돌궐 놈들 마을을 급습해서 재물과 사람을 노략질하거나, 방심하는 화물선을 습격해서 털어버리면서 얼마나 온몸에 전율이 넘쳐났는지 모릅니다.”
이 슬라브인들 ? 본래 속한 종족은 ‘카자크’라 한다지만, 대한에서는 그냥 러시아인으로 통하고 있었다 ? 은 배고 말이고 못 타는 게 없었다. 수십 톤도 안 나가는 쪽배로 해적질을 하고 다닌 전력이 있어서인지, 이 정도 배 갑판에서는 마치 육지 돌아다니듯 했다.
“너무 일이 간단해서 싸운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제대로 된 배를 터는 것도 아니고, 이거 입맛만 버렸습니다.”
배실이(바실리)는 툴툴거리며 칼을 휘둘러 칼날에 묻은 피를 떨어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스페인 선원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모두 스페인인은 아니고, 혼혈인이나 흑인들도 꽤 있었다.
“이렇게 쉬운 상대니까 프랑스 놈들이 우리한테 양보했겠지.”
공으로 삼을 만한 싸움이 아니었던지라 디에고도 별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저쪽에 있는 안용복은 아군의 손실이 없이 적의 배를 얻어서인지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함대는 육지에서 보일 듯 말 듯 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해안선과 떨어져 남하하고 있었다. 그러면 혹시 난바다에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같은 이유로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스페인 상선을 포착해서 약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스 앙헬레스, 그리고 산 디에고도 미리 논의한 대로 건드리지 않고 멀찍이 지나쳤다. 하지만 프랑수아는 바다에서 만날 스페인 상선들은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못 박아 두었다. 전리품도 전리품이지만, 함대의 존재를 숨겨야 한다는 이유였다.
“서반아 상선 발견!”
그리고 처음 마주친 적선이 이 4백 톤쯤 되어 보이는 상선이었다. 안용복은 꽤 오랫동안 실전을 치르지 않은 자기 부하들을 시험할 겸, 혼자 나서서 이 배를 공격하겠다고 프랑수아 측에 신호를 보냈다. 기함인 프랑수아의 배 롤랑에서도 긍정적인 답이 왔다.
선두에 있던 동현이 돛을 모두 올리고 추격하자 상대는 잠시 어리둥절한 태도를 보였다. 평소 이쪽, ‘바하 칼리포르니아’ 연안에는 한국 배들이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이쪽 뱃전에 무기를 든 선원들이 늘어선 모습을 보더니, 위험을 깨달았는지 급히 속도를 올려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작은 상선은 돛의 크기와 숫자에서 모두 동현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동현은 곧 스페인 상선을 따라잡았다. 스페인인들은 바로 항복하지 않고 싣고 있던 포를 발사하면서 저항을 시도했다. 안용복이 호령했다.
“조란탄을 쏘아라!”
적은 이미 따라잡혔으니 돛과 삭구를 부수는 봉탄이나 쇄탄은 필요 없다. 공연히 선체를 파괴해서 전리품의 가치를 떨어트릴 뿐이다.
“갈고리 던져!”
대기하고 있던 선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갈고리를 단 밧줄을 던졌다. 질긴 밧줄이 두 배 사이를 연결하자 양쪽 뱃전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등선하라!”
등선군 40여 명이 일제히 뛰어들었다. 입으로는 등선이라고 크게 외쳤지만, 선체 크기가 두 배 이상 차가 나다 보니 실제로는 뛰어내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디에고와 두 카자크도 그 안에 있었고, 서기 조경신은 뒤에 서서 화살을 겨누며 엄호했다.
스페인 선원 셋 중 하나는 이미 조란탄과 총탄을 맞아 갑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남은 인원들이 칼과 창, 총을 들고 용감하게도 맞섰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숫자도 훨씬 적고 무기를 다루는 솜씨도 훨씬 뒤떨어졌다.
육박전은 5분도 채 가지 않았다. 스페인 선원 여섯 명이 쓰러지고,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갑판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청했다. 정말 싸움 같지도 않은 싸움이었다.
“시체를 모두 침망으로 싸서 바다에 던져라. 붙잡은 놈들보고 하라고 해.”
안용복이 갑판 위에 쓰러진 스페인인들의 시체를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죽은 자들을 맨몸으로 바다에 던지는 대신에 침망(寢網, 그물침대)으로 감싸라는 건, 저들과 같이 배를 타는 사람으로서 해주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아군 사망 2명, 부상 7명에 죽인 적이 16명, 포로가 22명. 그리고 손상 없는 배 한 척. 이만하면 괜찮은 전과로군. 그것도 정남군이 놓친 배라니.”
산 페드로는 마닐라에서 탈출했다가 연락 임무를 맡아 누에바 에스파냐로 보내진 바로 그 배였다. 왜 태극기를 보고 그렇게 부리나케 도망쳤고 조그만 상선 주제에 죽도록 저항했나 했더니, 이미 대한 수군에게 혼이 한번 난 터라 그랬던 모양이었다.
“제천대성이 뛰어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더니, 정말 그 짝이 되었군. 그래, 짐은 뭐가 실려 있는가?”
그새 선창 안을 뒤져보고 올라온 군관이 보고했다.
“밀과 목화를 실었는데, 3천 냥 어치쯤 될 것 같습니다. 금이나 은은 없었습니다.”
“나쁘지는 않군. 일단 정리를 마치면 포로들은 선창에 처넣고, 우리 인원들을 서른 명쯤 옮겨 태워서 북쪽으로 보내세.”
나포한 배를 계속 끌고 다닐 필요는 없다. 도망이라도 치기 전에 지선성으로 보내버리는 편이 확실히 편할 터였다. 그런데 디에고가 다가와서는 부탁했다.
“함장 나리, 이 배를 제게 맡겨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때 말씀드린 제 계획을 이루는 데 딱 좋은 수단일 것 같습니다.”
“그거, 정말 할 생각이십니까? 제법 위험할 텐데….”
배 한 척이 아까운 게 아니다. 황자인 디에고의 목숨을 함부로 다뤘다가는 안용복 자신이 위태롭다. 아무리 디에고가 자청한 일이라고 해도, 적절히 제지하지 않고 위험하게 굴도록 놓아둔 것도 죄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수백께서 세우신 계획은 비수백께서만 이루실 수 있는 일이긴 하니…말씀대로 해드리겠습니다. 유능한 사관과 수졸들을 골라서 딸려 드리지요. 김은어도 데려가십시오.”
“감사합니다, 함장 나리.”
디에고에게는 스페인인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스페인 항구에 입항할 수 있는 배가 꼭 필요했다. 오늘 나포한 상선, 산 페드로호는 그 목적에 딱 맞는 배였다.
안용복과 디에고가 계획에 대해 잠시 의논을 나누는 동안 프랑수아 바르의 기함에서 어서 움직이라는 연락이 왔다. 동현이 전투를 벌이는 사이 프랑스 함대가 먼저 남쪽으로 움직여 한참 앞서가고 있었다.
“기라졸에게 일러 곧 따라간다고 신호하게 하라.”
“예, 나리.”
목표로 삼은 항구까지는 아직 한참 더 남았다. 그동안 노략질할 배를 또 만나면 이번에는 프랑스인들이 멈춰 설 터, 따라잡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 7 –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연합함대는 스페인 선박 7척을 더 만났다. 다들 산 페드로처럼 별로 크지 않은 상선이어서 프랑스 쾌속선들이 따라잡기는 어렵지 않았다. 무장도 다들 허술하게 갖춘 탓에 나포하기도 쉬웠다.
프랑수아 바르는 나포한 배에서 귀금속과 탄약만 옮겨 싣고 배는 불태워버렸다. 한 척만 남겨서 포로를 태웠다. 산 페드로에서 붙잡은 포로들도 그쪽으로 옮겨졌다.
“우리는 국왕 폐하의 명을 받아 전쟁을 치르는 중이지, 해적질하러 여기에 온 게 아니오. 그러니 해적들처럼 포로를 몽땅 바다에 던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물론입니다, 제독.”
프랑수아 바르가 작년 습격에서 잡은 포로들에게도 이런 자비를 베풀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안용복이 보기에는 한인들에게 자기는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보여주기만 할 작정인 게 아닌가 싶었다.
“자, 이제 첫 목표가 코앞입니다. 실컷 두들긴 다음 이동합시다.”
안용복을 포함, 함장 7명 전원이 프랑수아 바르의 기함 롤랑에 모였다. 누에바 에스파냐 공격을 앞두고 벌이는 최종 회의였다.
프랑수아가 지정한 첫 목표는 푸에르토 바야르타(Puerto Vallarta)였다. 마닐라 갈레온이 들르는 보급거점이면서, 밀수꾼들이 마닐라 갈레온에 싣고 온 화물을 세관 몰래 빼돌리는 밀수 창구이기도 했다.
“밀수꾼들의 거점 같은 곳에 털 만한 재물이 있겠습니까? 마닐라 갈레온이 안 들어오는데 말입니다. 물건이 들어와야 장사꾼들이 돈을 가지고 모여들지요.”
안용복의 질문을 받은 바르가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내려서 터는 거요. 나름 돈깨나 만진다는 항구인데, 뭐가 얼마나 있을지는 뒤져봐야 아는 것 아니겠소? 게다가 그 항구에는 항구를 방어할 요새가 없소. 정식 항구가 아니니까. 고로 여흥 삼아 공격해도 부담이 없지.”
마닐라 갈레온의 기착지인 아카풀코만 해도 항구를 방어하기 위한 견고한 요새가 들어서 있다. 산 디에고 요새라고 한다. 하지만 교역선이 잠깐씩 들르는 포구인 푸에르토 바야르타 같은 곳에 제대로 된 방어설비가 있을 리 없었다.
“포격도 필요 없을 거요. 새벽녘에 함대를 돌입시켜 강습하고, 병사들을 상륙시켜 항구에 은화 한 닢 남기지 않고 싹 터는 겁니다.”
안용복이 수긍하자 바르가 곧바로 자기 휘하 함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동현을 포함해서 여섯 척은 항구로 돌입하고, 소형 프리깃 한 척과 포로들을 실은 배는 포구 밖에서 대기할 예정이었다.
최대한 신속하게 습격을 마친 뒤에는 항구와 항구 안에 있는 모든 배를 불태우고 반격을 피해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가장 큰 표적인 아카풀코를 향한다.
“그런데 안 함장. 비수 백작은 혼자 보내도 괜찮은 겁니까? 그래도 조선 왕자 아닙니까.”
“종친이라 해서 자신의 안전만 찾지 않는 게 우리 대한의 법도입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하시는 일이니, 준비를 돕는 정도로 거들기를 마쳐야지요.”
프랑수아 바르는 걱정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조선 임금의 서자가 모험을 벌이다 죽든지 말든지 어차피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간단히 마무리를 지었다.
“알겠소이다. 그럼 우리 왕자님의 모험에 성과가 있기를 빌기로 합시다.”
“감사합니다, 각하.”
– 8 –
누에바 에스파냐 해안을 휩쓸 예정인 연합함대 본대는 칼리포르니아 반도 남단에서 동쪽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산 페드로는 곧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디에고가 계획한 독자적인 목표 때문이다.
“이대로 곧장 앞으로 가면 거북섬이라고 했나?”
“예, 백작 나리.”
뱃길 안내는 김은어가 맡는다. 선장은 안용복이 동현 승무원 중에 골라 넘겨준 프랑스인 사관 가브리엘이 맡기로 했다. 선원도 프랑스인 23명, 한인 16명으로 프랑스인을 더 많이 받았다.
동현은 애초에 프랑스인 선원들이 유럽에서 대한까지 몰고 왔다. 당연히 승무원 전원이 프랑스인이었다. 선장이던 장 바르가 돌아가면서 절반 가까운 부하들을 데려갔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계속 동현에 남아서 두둑한 봉급을 받으며 일했다.
디에고는 자기 부하들이 산 페드로호의 원래 선원인 척하면서 페루 부왕령에 있는 항구인 과야킬(Guayaquil)에 숨어들 생각이었다. 선장실에서 뒤져낸 서류를 살펴보니 이 배가 원래 가려던 행선지는 아카풀코였지만, 그거야 상관없는 일이다.
“각하. 우리 선원들이 스페인인인 척하기는 무립니다. 차라리 네덜란드 배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다행히 가브리엘은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선원 중에서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이는 여섯 명밖에 없었다.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아는 자의 수는 그 두 배다. 한인 중에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자의 수가 도리어 더 많았다.
“서류가 없어서 안 되오. 이 배에 있는 서류는 몽땅 스페인어인데, 그걸 다 네덜란드어로 다시 작성할 재간이 없잖소.”
‘선장’과 ‘간부 선원’ 몇 명만 스페인인으로 통하면 된다. 디에고는 산 페드로 호 선장실을 뒤져 발견한 항해일지를 적당히 조작해서 이 배가 동인도에 있을 때 선원을 보충한 것으로 했다. 현지에서 채용한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으로 말이다.
“적당한 거래 상대를 골라 화물을 매각하고, 상황을 살피며 항구에서 기다리시오. 그리고 내가 돌아오거든 바로 출항할 수 있게 준비해 두는 거요.”
“알겠습니다, 각하.”
디에고는 과야킬에 도착하면 본국에서 데려온 세 사람과 김은어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면 대한에서 정말 필요로 하는 물건인 키니네를 구할 수 있으리라. 키니네 종자와 재배법을 획득한다면 전장에서 세운 전공보다 더 큰 공적이 될 터였다.
‘과거 모카에서 커피나무 종자를 가져왔다는 어느 제독은 대한 제일의 부호가 되어 가문 대대로 떵떵거리며 산다지.’
자금은 넉넉히 가져왔다. 의모(義母)인 폴란드 출신 둘째 황비가 쥐여준 비상금이 있고, 처가인 이씨 가문에서도 혹시 모른다며 출항 전에 돈을 보내왔다. 부황도 ‘같이 있는 군사들에게 가끔 술이라도 사라’라면서 돈을 주었다. 그만하면 과야킬에서 쓸 돈은 충분하다.
“이보게, 은어. 거북섬까지는 얼마나 걸리겠나?”
“다른 육지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가면 한 달쯤 걸릴 겁니다.”
“따분한 한 달이 되겠군.”
디에고는 김은어를 붙들고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목적지인 남아메리카에 대해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이 인디오이니, 앞으로 한 달 동안 들을 수 있는 정보는 다 들어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