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54
3부 2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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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마르틴 제독이 비판했듯이, ‘아무 계획도 없이 멍하니 서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만 기다렸’는데 그 ‘무슨 일’이 일어나서 상황을 바꿔놓았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조선 해군 주력으로 보이는 대함대가 남쪽에서 나타난 거다.
두 제독은 바로 보트를 타고 각자의 기함으로 돌아갔다. 회의 때문에 돛을 내리고 정지해있던 배들이 모두 급히 돛을 올리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저놈들이 지금 우리를 들이친다면 제대로 돛도 못 올려보고 당할지도 모르겠군.”
알몬데 제독이 못마땅한 태도로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바람은 조선 함대 쪽에서 이쪽으로 불고 있다. 그리고 해전에서는 언제나 바람을 등진 쪽이 유리하다. 전투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도 바람을 등진 쪽이고,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바람을 등진 쪽이다.
물론 바람을 안게 되는 쪽에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전장을 이탈하려고 하면 바람을 타고 그냥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추격하는 적 함대보다 빠른 배와 숙련된 선원을 갖추어 적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신호를 보내라. 전열함대가 선두에 선다. 프리깃함은 단종진 후방으로 보내도록.”
단종진을 형성할 때는 기함이 선두에 선다. 그러므로 그로테 아에올루스가 네덜란드 함대 선두에 자리를 잡았고, 그 뒤에 나머지 전열함 세 척이 붙었다. 그 뒤에는 잉글랜드 배들이 늘어서서 2진을 구성했다. 2진 선두에는 잉글랜드 기함 아소시에이션이 섰다. 총 10척이다.
원래대로라면 단종진은 여기서 끝이겠지만, 적함이 너무 많아서 프리깃함들도 단종진에 참가하도록 했다. 잉글랜드 프리깃함 4척이 잉글랜드 전열함들 바로 뒤를 따르고, 네덜란드 프리깃함 2척이 단종진 최후미를 형성했다.
어차피 조선 함대도 프리깃함과 갈레온이니까, 이런 형태로 단종진을 구성해도 문제가 될 건 없다. 적이 무슨 짓을 해도 아군 전열함을 이길 수는 없을 터였다.
갈레온 4척뿐인 스페인 함대에는 북쪽, 즉 함열 왼편에 대기하면서 예비대 역할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만약에 조선 함대 일부가 측면으로 크게 우회해서, 혹은 호위함들의 방어를 어떻게든 돌파하고 전열함들을 포위하려고 들면 이를 막으라는 지시였다.
드디어 조선군과 싸우게 됐다면서 신이 나서 자기 배로 달려간 후안 마르틴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2천 톤짜리 갈레온 딱 1척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전열에 설 만한 배도 없는 스페인 함대를 전열에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후안 마르틴 제독은 노발대발할 테지만, 어쩔 수 없다. 지휘권은 내게 있으니까 명령에는 꼭 따르라고 전하라. 동인도회사 배들도 그쪽에 합세시키도록.”
“예, 각하.”
각 함대가 따로 움직일 때라면야 당연히 각 제독이 알아서 자기 함대를 통제한다. 하지만 한곳에 모여서 연합함대를 구성할 때는 잉글랜드-네덜란드 함대 사령관인 알몬데 제독이 총사령관 역할을 맡기로 되어있었다.
만사 불평이 많은 스페인인도 여기에는 동의했다. 하나의 함대가 되어 움직이는 이상, 그 지휘권을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후안 마르틴보다 더 강한 전력을 거느린 알몬데 제독이 지휘권을 쥐는 건 당연했다.
알몬데 제독은 아직 대열을 채 정비하지 못한 예하 함장들에게 서둘러 움직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망원경을 들고 적진을 살폈다. 분명히 조선인들도 연합함대와의 갑작스러운 조우에 놀랐을 터, 지금쯤 전투태세를 갖추느라 바쁘리라.
‘저놈들이 처음부터 우리가 여기에 있는 줄 알고 계획적으로 찾아왔을 리는 없으니까.’
특정 항구 주변의 바다라면야 작정하고 일부러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는 주변에 육지 하나 없는 망망대해다. 절대로 우연한 조우라고밖에 볼 수 없다.
“당연히 스페인 놈들 때문에 나왔겠지.”
기함 아소시에이션에 오른 페어본 제독이 뒷갑판으로 가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동안 그놈들이 닥치는 대로 포모사와 필리핀을 잇는 항로에서 조선 상선을 습격했으니 조선 해군이 뛰어나올 수밖에 없지. 저놈들, 분명히 이쪽 방면에는 스페인 놈들이 움직이는 사략선 두어 척 정도 있을 줄 알고 나왔을 거네.”
유럽인들은 여전히 대남도를 포모사라고 부른다. 부장이 급히 따라오며 질문했다.
“겨우 사략선 두어 척을 상대하기에는 조선 함대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우리와 정면으로 결전을 벌여 보려고 출격한 게 아닐지요.”
“아니. 우리 함대에 전열함이 있다는 것 정도는 저놈들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알면서 덤빌 리가 없지 않나. 우연한 조우야. 저놈들도 이런 식으로 충돌하는 건 바라지 않았을 걸세.”
바삐 뛰어다니는 수병들 사이를 지나 뒷갑판에 오른 페어본 제독이 망원경을 들고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아까 그로테 아에올루스에서 보고하던 네덜란드군 사관은 조선 함대 숫자가 22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세어보니 24척이었다. 그새 2척이 늘었다.
“44문 프리깃 8척, 1천 5백 톤에서 1천 톤급 갈레온 8척, 3백 톤에서 5백 톤급 갈레온이 8척인가.”
이쪽은 알몬데 제독의 지시에 따라 전열함 10척과 프리깃함 6척으로 단종진을 구성했다. 조선 함대도 주력함은 같은 숫자다. 하지만 과연 저들도 단종진을 펴고 정면으로 대결하려 할지는 알 수 없다.
“정면으로 붙으면 당연히 우리가 이길 겁니다.”
“알 수 없네, 부장. 그나마 거북선은 없는 것 같군.”
동급인 전열함끼리라면 한쪽이 무력화될 때까지 몇 시간씩 포화를 주고받는 일도 흔하다. 하지만 조선 함대는 배가 작다. 포격전을 시작하면 순식간에 연합군이 이길 게 분명하고, 조선 함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뭔가 다른 술책을 부릴 위험성이 높다.
“스페인 함대와 동인도회사 함대까지 단종진에 합류시키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적이 정공법으로 공격하오면 우리 전열이 너무 짧아집니다.”
단종진 함대가 싸우는 표준 전투법은 양 함대가 나란히 움직이면서 포화를 퍼붓는 거다. 당연히 함열이 길면 더 유리하다. 즉, 수가 많은 편이 유리하다.
“스페인 함대는 열의가 넘쳐서 단종진을 깨고 자기 멋대로 적진에 뛰어들 우려가 있네. 그런 바보짓을 벌이지 못하게 할 겸, 대열을 돌파하거나 우회한 적이 우리 본진을 협격하지 못하도록 좌측에 예비대로 두는 게 낫지. 동인도회사 함선들은 작아도 너무 작고.”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조선 갈레온들은 같은 크기의 유럽 갈레온보다 포문이 훨씬 많았다. 측면에 뚫린 포문 숫자만 해도 적어도 40문은 되었다. 저렇게 화포를 많이 실었다면 함선의 안정성에도 지장이 있을 거다. 하지만 다소 불안정해도 전투에 나설 수는 있다.
한쪽 현측에만 40문이나 되는 화포를 실었다면, 그 화력만은 70문함과 비슷하다는 말이 된다. 이런 배들이 양쪽에서 포화를 가하면 전열함도 무사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한 줄로 움직이는 함대를 양 측면에서 협격하는 전술을 더블링(doubling)이라고 한다.
“자, 함열을 정비하면서 조선인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고.”
페어본 제독이 팔짱을 끼었다. 어차피 조선인들도 전면전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기왕 마주쳤으니, 의례적인 포격이나 한두 번쯤 교환해서 싸웠다는 명분이나 세운 뒤에 갈라져서 서로 갈 길을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조선과 싸우라는 본국의 훈령도 없었다. 공연히 열을 내서 싸우다가 조선과 계속 험악한 사이가 되고, 지나치게 전력이 손실되어 정작 원래 임무인 프랑스 사략함대 소탕에 실패하면 그게 더 큰 문제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리라. 조일전쟁 이전부터 조선 해군 지휘관들은 호전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열 배가 넘는 적 함대가 밀려오는데도 물러나지 않고 뛰어드는 자들이 조선 해군이었다. 오늘 싸움도 그렇게 싱겁게 끝나지는 않을 듯하다.
– 9 –
이홍원은 전선 24척을 거느리고 마닐라에서 출발했다. 신형 프리깃함 8척, 구형인 갈레온 8척, 이렇게 대선 16척을 주력으로 하고 주변 정찰 및 연락을 위한 5백 톤급 갈레온 8척을 따로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루손섬이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함대가 곧 대남도에 닿게 될 지점까지 왔어도 우리 상선을 공격하는 유럽 함선들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출전한 군사들은 긴장이 물리고 맥이 빠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양적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안 보입니다, 통제사또 나리.”
“그래도 최선을 다해 찾아라. 대남성에 도착할 때까지 적을 찾지 못한다면, 그때는 후송 해안을 따라 광동까지 가면서 수색을 계속한다.”
이번 출정 목적은 상선대에 위해를 끼친 유럽 함대를 잡을 겸, 사기를 올릴 겸 해서였다. 붙잡은 적선이 단 한 척이라고 해도 좋았다. 최대한 많은 수졸들이 싸움에 참여해서 자기도 승리에 한몫했다고 인식하는 게 중요했다.
더불어서 후송 및 서나라에 대한 무력시위도 이홍원이 계획한 목적 중 하나였다. 대규모 대한 수군 함대가 해안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위용을 과시한다면, 두 나라 모두 대한 수군이 건재함을 알고 행동을 조심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통제사또. 그런데 양적들 말입니다, 혹시 우리가 나설 줄 알고는 겁을 먹고 모조리 도망친 게 아닐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끝까지 찾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예, 사또.”
그렇게 주변을 살피면서 북쪽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항해를 시작한 지 26일 만에 마침내 유럽 연합함대를 만났다. 하지만 애초에 상정한 습격함 한두 척이 아니라 대함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잉글랜드, 네덜란드, 심지어 스페인 함대까지 모두 집결해 있었다.
본래 이홍원의 계획은 소수의 적을 대함대로 위압하여 쫓아버리거나 포위해서 섬멸하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유럽 연합함대는 그 수가 이홍원 휘하 전선들과 거의 비슷했다. 게다가 선체 크기는 저쪽이 훨씬 크다. 당연히 대포도 아군보다 훨씬 많이 실었다.
“어떡할까요, 통제사또 나리? 함대를 물리시겠습니까?”
이홍원이 승함한 좌선인 신형 군선 해명(解明)의 갑판 위가 크게 술렁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참모장 김홍진 참장이 낯빛이 창백해져서 물었다.
“단종진을 펴고 공격할 수는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저들이 몰고 온 전선이 훨씬 큽니다. 정면으로 싸우면….”
이홍원은 군기대원들이 즐겨 쓰는 색경(色鏡)을 쓰고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김홍진은 상관의 눈치를 살피느라 말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잠시 얼버무렸다.
“우리 전선으로는 유주 전열함을 상대하기가 버겁습니다. 배 크기도 작고 싣고 있는 화포 숫자도 적습니다. 가짜 포문은 싸움이 시작되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적과 마주쳤을 때 겁을 주기 위해서 갈레온 선체 측면에다 가짜 포문을 여럿 꾸며놓기는 했다. 하지만 실제 1천 5백 톤급 갈레온이 탑재한 제대로 된 무장은 18근 포 30문, 9근 포 30문뿐이다. 1천 톤급은 18근 포 20문, 9근 포 16문을 싣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 무장을 가지고는 프리깃은 몰라도 전열함과는 절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싸움을 시작할 때야 적과 비슷한 규모로 포를 쏘아댈 수도 있겠지만, 적의 포화를 견뎌내는 힘은 훨씬 약하다. 그러니 이쪽이 먼저 무력화되기 쉽다.
“통제사 나리, 어서 지시를 내려 주시지요. 적선들과의 거리가 계속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지시가 없어서 군사들이 불안해합니다.”
주로 바타비아에서 저들과 싸우다가 후퇴한 배들에서 동요가 계속 커졌다. 사실 따지자면 그때는 너무 서둘러 탈출하는 바람에 실제 교전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일단 한번 패했다는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었다.
“싸워야겠소. 적이 강하다고는 하나, 우리한테 유리한 점도 있으니.”
팔짱을 낀 채 침묵하던 이홍원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지금 저들과 싸우지 않고 그대로 후퇴한다면, 대한 수군은 다시는 바다에 나가 유럽 수군과 싸울 수 없을 터였다. 아산에서 새로 건조하는 전열함이 예정대로 내년에 완성되어 싸움에 나선다고 해도 말이다.
“겁둥이가 되어버린 군사들에게 아무리 좋은 무기를 쥐여준들 제대로 적과 싸울 리 없소. 우리는 눈앞의 적을 물리치고, 이로써 장졸들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주어야 하오.”
이홍원은 삼사법(三駟法)을 활용한다고 지시했다. 과거 손빈이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의 빈객으로 머물던 시절, 늘 지던 전기가 전차경주에서 제나라 왕을 2:1로 이기도록 만들었던 고사에서 비롯된 전술이다.
“가장 강한 말을 상대의 2등 말과 맞붙게 하고 2등 말은 상대의 가장 약한 말과 맞붙게 하며 가장 약한 말을 상대의 가장 강한 말과 맞붙도록 하면 한 번은 져도 전체적으로는 늘 이기게 되어있소. 그러니 우리 수군도 그렇게 움직이도록 하겠소.”
신형 전선 8척은 연합함대 프리깃함들과 싸우게 한다. 중선 8척은 배 크기는 작지만 대신 신기전을 잔뜩 싣고 왔으므로 신기전을 사용해서 적 전열함들을 공격한다. 대형 갈레온들은 신형 전선들 뒤를 따르다가 적의 프리깃함 대열이 무너지면 그 틈을 파고든다.
“포격전을 오래 끌면 우리 피해가 더 커지오. 그러니 포격은 두어 번만 가하고, 등선군을 동원해서 백병전으로 가는 편이 좋겠소.”
“예, 나리.”
명확한 지시가 내려가자 군사들의 동요도 가라앉았다. 그리고 함대는 좌선 해명을 선두로 해서 바람을 타고 비스듬하게 연합군 함대를 향해서 전진했다. 잉글랜드 해군이라면 횡대로 평행하게 접근하겠지만, 대한 수군은 프랑스군 전술을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움직였다.
“지금 우리 군선들이 해야 할 전법의 요체는 전력을 집중해서 적 함대 후미부터 격파하는 데 있다. 8개월간 마닐라만에서 벌인 훈련의 효과가 있기를 바란다.”
“잘들 해낼 겁니다, 사또.”
참모들이 결의를 다졌다. 이때 가운데 돛대 위에 있던 파수꾼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양적 함열 후미에서 전선 4척이 튀어나왔습니다! 따로 움직이려는지, 전열에서 벗어나서 곧바로 우리 쪽으로 옵니다!”
놀란 참모장 김홍진이 외쳤다.
“잉글국 배인가, 내달국 배인가?”
“서반아 배입니다!”
스페인 함대가 주력인 잉글랜드, 네덜란드 함대와 따로 움직인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그 움직임 자체가 미끼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대한 수군이 스페인 함대를 먼저 치느라 정신을 쏟은 사이, 본대가 돌아와서 뒤를 칠 가능성도 있다.
“사또, 명을 내려 주십시오.”
이홍원이 또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표정은 여전히 색경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