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57
3부 275화
– 1 –
사방에서 스페인어가 들려 온다. 그 목소리들을 듣고 있으려니, 갑자기 향수가 밀려왔다. 지난 몇 년 동안 조선에 머무르던 시간이 환상이었던 것만 같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나리, 앞으로 가셔야지요”
뒤에서 이영선(이고르)이 서툰 스페인어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 목소리가 단정이 부두에 닿아 멈췄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있던 디에고를 다시 현실로 끌어냈다.
“음, 알겠네.”
디에고는 정신을 차리고 잔교 위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는 한편으로 자신의 차림새와 뒤를 따르는 다섯 사람의 행색을 다시 한번 살폈다. 좋아, 이 정도면 원주민 출신 어머니를 둔 귀족 도련님과 수행하는 시종들의 모습으로 보일 만하다.
맨 뒤에 선 서기 조경신의 지친 얼굴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디에고의 머릿속에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지금부터 바다를 건너는 동안 그대가 할 일은 이 공과 배 공에게 서반아어를 가르치는 거요.”
“예에에?! 그게 참말이십니까??!!”
배가 제주도를 통과하자마자 이런 지시를 받은 조경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경신은 디에고가 싸움에 나가 공을 세우려고 한다고 알고 있었고, 카자크들은 디에고의 옆과 뒤를 지켜주기 위해 따라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스페인어가 필요할 리는 없다.
“비수백 나리, 뭔가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으신 계획이 있으신 거군요. 이미 돌아가기에는 늦었으니 솔직히 털어놓으십시오.”
“왜 그리 생각하시오?”
“왜라니요. 뻔하지 않습니까.”
신분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자라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잘 돌봐주라는 어명도 있었던지라, 십여 세 이상 나이가 많은 조경신은 막냇동생을 돌보는 것 같은 기분을 품고 디에고에게 조선에서 종친으로서 살아가야 할 자세에 관해 일러주었다.
함께 그 일을 맡은 박수원은 가산 관리 등 법률적인 부분을 주로 챙겼지, 따로 마주 앉아 공부를 가르치는 시간 같은 건 거의 없었다. 디에고에게 말과 글, 예법을 가르치는 건 거의 조경신이 맡았다. 그의 노력 덕분에 디에고는 한자까지 웬만큼은 읽고 쓸 수 있었다.
다만 디에고는 조경신이 가르친 재주 중 활쏘기만은 잘 배우지 못하고 바로 진력을 냈다. 조경신은 ‘궁술은 사대부라면 꼭 익혀야 하는 교양’이라면서 활을 쥐여주었지만, 디에고는 그것만은 못 하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황실 사냥 행사 때도 활이 아니라 총을 들고 나갔다.
“나리께서 서반아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셨고 그 사정을 상감마마께 고하셨다면, 폐하께서는 정남대장군처럼 서반아말이 능숙한 군관을 기꺼이 붙여주셨겠지요. 하지만 그런 말씀을 안 하셨으니 서반아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못 하는 그 두 명을 보내신 것 아닙니까.”
디에고의 계획은 아주 위험한, 적어도 대놓고 부황에게 허락을 청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계획일 게 분명했다. 동현에 탄 선원들과 함께 신서반아 항구와 선박을 공격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계획 말이다. 어명으로 디에고의 신변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냥 둘 수 없었다.
“빨리 사실대로 털어놓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조경신이 며칠을 다그치자 디에고가 그제야 자기 계획을 이야기했다. 동현이 유구 영역을 지나 대동양으로 완전히 나가고, 본국으로 돌아가기가 정말 어려워진 뒤였다.
“해성공의 본을 떠, 대삼주 산속으로 들어가 친초목 종자를 찾으시겠다고요!”
친초목(親椒木)은 대삼주, 즉 남아메리카 산속에서 자라는 나무다. 친초목(親椒木) 속껍질을 벗겨 잘 말린 것을 기나피(幾那皮)라고 해서 약재로 쓰는데, 이 기나피가 학질에 걸린 병자들의 목숨을 구하는 특효약이다. 같은 무게의 금을 값으로 내도 원하는 만큼 사기 힘들다.
대한에서는 인삼주 담글 때 하듯이 술로 담가서 마시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가루로 만든 기나피를 주머니에 담아서 독한 소주가 든 병에 담가두었다가 그 소주를 마신다. 말 그대로 약주(藥酒)지만, 기나피도 비싸고 소주도 비싸니 학질에 걸렸다고 아무나 마시지 못한다.
“친초목은 대삼주 산속 깊은 곳에서만 채취할 수 있고, 그 땅에는 광대한 밀림에 사람을 잡아먹는 야만적인 토인과 흉포한 대표와 악어가 우글거려 외부인은 범접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만…게다가 금수품이니 서반아 관헌들이 철저하게 지켜 반출을 막으려 할 것입니다.”
대표(大豹)는 그저 덩치가 큰 표범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본국에 있는 보통 표범과 다른 미주에 서식하는 특별한 표범을 뜻한다. 체구가 훨씬 크고, 모피에 새겨진 무늬에도 차이가 있다. 매화꽃 같은 문양이 있는 건 같지만 대표의 매화꽃에는 검은 점이 찍혀 있다.
“그거야 다 예수회 신부들이 퍼뜨린 허풍이오. 어디, 신드바드가 다이아몬드를 캐러 갔던 골짜기에는 진짜로 날개 길이가 5리나 되는 괴조(怪鳥)가 살면서 보석을 지키고 있겠소?”
‘신드바드’는 『천일야화(千一夜話)』라 하는 돌궐 설화에 나오는 상인이다. 몇십 년 전에 골가타 상관에서 아랍어로 된 이 책 원서를 입수해서 본국에 보냈는데, 한달서관에서 바로 손에 넣어 번역본을 냈다. 그리고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면서 논란도 함께 불러일으켰다.
한달서관은 옛날 유럽에서 들여온『십일야화(十日野話)』를 내놓아 엄청난 논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다. 그나마 십일야화에는 사람만 등장하고 선정적인 묘사도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천일야화는 괴력난신이 판을 치는 데다 묘사가 음탕하고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책이 나오자 당연히 유림이 발칵 뒤집혔다. 심지어 당시 임금이던 건복제가 나서서 묘당에서 천일야화의 도를 지나친 수위 묘사를 지적하고, 벌떼같이 일어난 사대부들이 이런 저속한 음서(淫書) 때문에 하늘이 노해서 가뭄이 닥쳤다고 비난을 퍼붓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한달서관도 더 버티지 못했다. 야심만만하게 찍어낸 20권짜리 대작을 불과 한 달 만에 도로 거둬들여 몽땅 불태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제가 된 부분들을 삭제한 12권짜리 축약판을 다시 냈는데, 워낙 재미가 있어서 그것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다만 한달서관에서 회수하기 전에 이미 팔려나간 초판본은 그대로 시중에 남아있다. 이를 가리켜 신유년에 나왔다고 해서 ‘신유판’이라고 부르는데, 그중에서도 노골적인 성애 장면만 발췌한 필사본이 지금도 암암리에 돌고 있다. 물론 그 정확한 수량은 아무도 모른다.
“괴물이니 야만인이니 하는 것들은 죄다 먼저 도달한 자들이 꾸며낸 거요. 자기가 발견한 보물을 독점하고자, 다른 자들이 범접할 엄두를 못 내게 하려는 거지. 신드바드의 보석이건, 예수회 신부들의 친초목이건 다를 게 없소.”
물론 쉽게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찾아내서 묘목과 종자를 본국으로 가져갈 수만 있다면 부황으로부터 분명히 큰 포상을 받을 터였다. 당장 이번 전쟁에서 필리핀에 갔다가 학질에 걸려 병을 앓은 군사가 만 단위를 헤아리지 않는가 말이다.
“학질로 죽은 군사만 2천 명은 된다지 않았소? 우리가 친초목을 구해가면 나와 조 서기는 파란 책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거요. 최근의 사람이라서 일단 해성공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사실 해성공보다는 그 누구더라…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 가져왔다는…그 사람처럼.”
디에고가 잘못된 상식을 이야기하자 조경신이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충선공 문익점 말씀이십니까? 그 붓두껍 이야기는 거짓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남효온이 쓴 『목면화기(木綿花記)』는 문익점이 강남에 귀양을 가서 붓두껍에 목화씨를 감춰왔다고 적었는데, 이는 순전한 거짓이다. 문익점은 애초에 강남에 간 적도 없었다.
“그랬었던가? 어쨌든 문익점 그 사람이 목화를 들여와서 널리 퍼뜨린 건 사실이잖소. 이 일이 성공하기만 하면 우리도 문익점만큼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될 거요.”
이기빈이 커피를 구해온 공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고는 하나, 커피란 결국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기호품에 불과하다. 하지만 친초목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귀한 약이다. 어느 쪽이 역사에 이름을 귀하게 남길지는 비교해 볼 필요도 없다.
사정이 있어서 중간에 그만뒀다고는 하지만, 조경신 역시 한때는 과거에 응시해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싶다고 생각하던 선비였다. 부를 얻기보다는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기고자 친초목을 찾으려 한다는 디에고의 말에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수백께서 그런 기특한 의도를 품고 계셨다니, 저도 최선을 다해서 돕도록 하겠습니다. 바다를 건너 미주에 닿으려면 몇 달 정도는 걸릴 테니, 그동안 소인이 할 수 있는 만큼 이 정령과 배 부령에게 서반아어를 가르쳐 보겠습니다.”
그 뒤로 7개월 동안 조경신은 열과 성을 다해 카자크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이미 머리가 굳을 때가 된 중년 사내들에게, 그것도 새 언어를 배울 의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들에게서 제대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리 없었다.
조경신이 아무리 고함을 질러가면서 가르쳐도 이들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가까스로 약간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는 만들었지만 그게 한계였다. 다른 이들에게 스페인인처럼 보이기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저 지쳐 있는 얼굴은 그 탓이다.
“오늘 입항한 산 페드로호를 타고 오셨다고요?”
과야킬 항구 부두를 관리하는 관원들은 다소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디에고 일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평소에 이 항구를 드나드는 스페인인이나 메스티소 출신 선원이나 상인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색이 너무 독특했다.
귀족적으로 차려입은 인디오 혼혈 젊은이와 백인 장년은 일단 괜찮다. 그런데 다른 백인 둘은 말이 너무 서툰 것이 아무래도 스페인인이 아닌 것 같았다. 나머지 두 사람 중 하나는 인디오, 하나는 조선인 같았다.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하선하신 목적은 뭐죠?”
메스티소인 항만 관리원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예상대로 이어지는 상황에 디에고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면서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보스케 후작의 아들 돈 디에고라고 하오. 신기한 짐승과 초목을 구경하러 다니기를 좋아해서 여기 페루 부왕령에 와 보았소. 석 달쯤 머물 생각인데, 좋은 숙소가 있겠소?”
디에고가 손짓하자 조경신이 재빨리 은화가 한 줌씩 든 가죽 주머니를 은밀하게 하나씩 쥐여주었다. 좋아서 입이 벌어진 항만 관리원들은 싹트려던 의심 같은 건 바로 은화와 함께 가슴 깊숙이 처박아버렸다.
“여기 이 사람들은 모두 내 시종이오. 여기 두 사람은 슬라브인이라서 우리말이 서투르니 양해하시오. 이 둘은 내가 서기와 통역으로 데리고 다니는 인디오들이오. 북쪽에는 이처럼 동양인과 닮은 부족도 있다오.”
이미 관원들은 은화를 받고 경계심의 빗장이 빠진 상태였다. 두 사람 모두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과야킬에서 제일가는 여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디에고는 짐을 든 일행 앞에서 걸어가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친초목을 구하는 첫 단계는 성공적으로 시작한 셈이었다.
– 2 –
과야킬은 페루 부왕령 북부의 주요 항구로, 인구가 1만 명이 넘는다. 리마나 아카풀코가 그러하듯 내륙에서 생산한 금과 은이 실려 나가는 도시는 아니지만, 상업과 조선업이 크게 번성하는 곳이다. 덕분에 나름대로 부유한 도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17년 전에는 잉글국, 불랑국 해적들이 합동으로 습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그전부터 원래 있던 건지는 몰라도 항구에는 항구를 지키기 위한 포대가 들어서 있고 그 위에 수비병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방비 상태는 바르가 지휘하는 함대가 전부 몰려오면 모를까, 산 페드로 한 척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가브리엘 선장에게는 석 달 동안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두었는데, 과연 그동안 기나나무를 구할 수 있을까.”
안용복이 동현을 몰고 다니면서 싸움질만 벌인 건 아니다. 홍제원에 넣을 희귀한 짐승을 실으러 다니거나 할 때면 남는 선창에다 교역품을 잔뜩 싣고 다니면서 장사도 열심히 했다. 고로 낯선 항구에서 산 페드로 호에 실린 면화와 밀을 처분하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짐을 처분한 뒤다. 싣고 온 짐도 다 팔았는데 계속 항구에 머무른다면 그것도 좀 수상한 일이 된다. 항구 측에서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를 수리하게 만들지 않았사옵니까. 무리하지 않고서도 석 달 정도는 시간을 끌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의심을 받지 않고 오래 정박할 수 있을까? 거북섬에 정박했을 때, 그 문제를 놓고 디에고와 조경신과 가브리엘이 진지하게 논의를 벌였다. 김은어는 옆에 서서 과야킬이 어떤 곳인지를 자기가 아는 대로 설명했다.
가브리엘은 일단 출항해서 거북섬에 머물다가 약속한 날에 데리러 오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도 여기까지 와서야 기나나무 획득 계획에 대해 비로소 알았고, 당연히 너무 위험하다고 말렸으나 디에고가 부득불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이 동의한 상태였다.
다만 이 계획은 갑자기 급하게 탈출할 필요가 생겼을 때 배를 구하기 곤란할 수 있다는 문제점 때문에 각하됐다. 그래서 배를 적당히 부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양선은 판자를 맞대 붙여서 건조하므로 물이 샐 수밖에 없다. 항해 중에도 늘 양수기로 물을 퍼내며 움직여야 한다. 만약 그 구멍이 좀 크게 뚫렸다면 항구에 들렀을 때 조선소에 들러 수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시간을 끄는 거야 쉽지요. 소인이 걱정되는 건 배에 두고 온 우리 선원들이 입을 잘못 놀리는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수십 명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이상한 소리를 하다가 정체가 들킨다면, 당장에 서반아 관원들이 선원들을 체포하고 배를 압류할 겁니다.”
조경신이 걱정하는 바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 대한과 스페인은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그런데 대한인들이 신분을 위장하고 항구에 들어와 있다가 들킨다면, 일이 잘 풀리면 포로 취급을 받을 것이고 혹시 재수가 없으면 해적으로 간주당할지도 모른다.
“그럼 갈데없이 처형입니다. 하지만 황자 신분을 밝히시면 나리께서는 처형은 안 당하실 겁니다. 하지만 대신 저들의 인질이 되실 테고, 그 사실이 본국에 통보되면 폐하께서 무척 난감해지시겠지요.”
“바로 그래서 배가 출발하기 전까지 폐하께 내 계획을 밝힐 수 없었던 걸세. 폐하께서는 분명히 내가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막으셨을 테니까.”
아무리 서자, 그것도 하필 스페인계 혼혈이라지만 디에고는 분명 대한 태황의 장남이다. 디에고가 적에게 붙잡힌다면 대한 조정은 심각한 곤란에 봉착하게 될 터였다.
스페인군이 단순히 인질로 삼는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의 임금 대신에 디에고를 새 임금으로 추대한다며 직접적으로 내란을 유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디에고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그래서 공연히 적 앞에 나서서 전투를 벌이며 신분을 드러내기보다는 ‘스페인인 같은’ 자기 외모와 태도를 활용해서 경계가 심하지 않은 틈바구니를 파고드는 작전을 벌이고자 했다. 이번 키니네 획득 시도도 그 일환이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부터 내륙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세. 친초목이 대체 어디쯤에서 자라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직접 다니며 뒤지는 수밖에.”
“예, 나리.”
침대에 벌러덩 자빠진 디에고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당분간은 깃털 이불이나 비단으로 짠 시트 같은 건 볼 수 없으리라. 산속에서 보내야 할 시간이 부디 짧아지기만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