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59
3부 2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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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16명, 짐승 24마리로 이루어진 대열은 꾸준히 산길을 걸어서 키토를 향했다. 행렬이 앞으로 나갈수록 더 높은 산길로 올라갔고, 왠지 호흡이 가빠졌다. 현지에서 고용한 마부와 노새꾼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디에고 일행은 다들 어딘가 몸이 거북해졌다.
가장 상태가 안 좋은 이들은 두 코사크였다. 온종일 입에 달고 다니던 욕지거리도 어느새 멈췄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경마 잡힌 말안장 위에서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의원인 안돈이도 처음 보는 증상에 제대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닥친 가장 큰 피해는 식사가 질이 떨어진 것이었다. 일행의 식사를 담당하던 바실리가 ‘머리가 아프고 속이 뒤집혀서 도저히 음식을 못 하겠다’라면서 자빠지는 바람에, 밖에서 식사할 때마다 그 대신 김은어가 일행의 밥을 맡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음식이 너무 초라해서 죄송합니다, 나리.”
김은어가 머리를 긁으며 그릇을 내밀었다. 바깥 생활을 오래 한지라 김은어도 꽤 괜찮은 음식 솜씨를 발휘하기는 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태황을 수행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바친 프랑스인 숙수, 앙투안의 수제자나 마찬가지인 바실리와는 당연히 상대가 안 됐다.
“아니다. 그래도 알아볼 만하고 먹을만하구나. 도대체 뭘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지경인 저 일꾼들의 밥보다는 훨씬 낫다.”
김은어가 만드는 밥은 그래도 숟가락을 댈 수 있었지만, 원주민 일꾼들이 만드는 음식은 디에고는 물론이고 다른 일행도 도저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실리가 병에서 나을 때까지는 모두 참는 수밖에 없었다.
“나리님들, 이건 나리님들이 이런 높은 산지에 처음 올라와 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요. 다들 앓는 병이니, 그러려니 하십쇼. 이 정도 산에서는 죽지는 않습니다.”
“주, 죽기도 한단 말인가?”
이 병에 관해 답을 준 사람은 안내인 페르난도였다. 숙소를 잡은 마을에서 디에고가 아픈 머리를 쥐고 식탁에 앉아있으려니 다가와서 설명해주었다. 입에는 뭔가를 질겅거리며 씹고 있었지만, 대화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낮은 땅에 살던 사람들은 높은 땅에 올라오면 제대로 숨을 못 쉬고 거북해하지요. 산에 사는 정령이 다른 땅에서 온 자들을 싫어해서 심술을 부리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죽이기까지 하다니 심술치고는 고약하군.”
디에고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투덜거렸다. 페르난도는 오는 길에서 계속 자기 모계는 원래 잉카 제국 황족이었다며 허풍을 떨었다. 디에고는 그의 허풍이 딱히 싫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머리도 아프고 몸도 별로 좋지 않은 상태다 보니 절로 대답이 퉁명스러워졌다.
“그래서, 우리도 죽는단 말인가?”
디에고가 반문하자 페르난도가 곁에 앉아 히죽거리며 웃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이 정도 높이에서는 안 죽습니다요. 여기보다 지대가 더 높은 키토나 보카타에 가도 좀 힘들기는 해도 죽지는 않아요. 지금 상태가 안 좋은 일행분들도 며칠 푹 쉬면서 가만히 있으면 정령이 저주를 거둘 겁니다.”
이 병으로 죽으려면 한참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현지 인디오들도 사람이 안 죽는 정도 산지에서만 산다면서 말이다.
“신실한 기독교도에게는 주님과 성모님의 가호가 있건만, 감히 그런 잡다한 정령 따위가 해를 끼치다니….”
디에고가 연신 탄식했지만, 페르난도는 그저 곁에서 웃을 뿐이었다.
“이 정령의 심술은 신부님들도 피하지 못하십니다요. 그러니까 체념하시고 괜히 설치지만 마십쇼. 공연히 낮은 땅에 있을 때처럼 날뛰면서 뛰고 싸우고 하시다간 정말로 쓰러져서 못 일어나십니다.”
좀 불편할 뿐이지, 죽지는 않는다는 말에 그래도 위안을 얻었다. 키토에 도착하면 며칠은 푹 쉬면서 몸을 추슬러야겠다 싶었다.
한숨을 쉬는 디에고 앞에서 페르난도가 허리에 찬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나뭇잎 같은 것을 한 줌 내밀었다.
“이거라도 씹어보시렵니까? 이걸 씹으시면 그 병이 나을 겁니다.”
“이게 뭔가?”
길쭉하고 평평한 보통 나뭇잎이었다. 차를 끓이는 것도 아니고 나뭇잎을 생으로 씹으라는 말에 디에고가 무슨 소리인가 하는데, 페르난도가 잎에 물고 있던 것들을 뱉더니 새로 잎을 몇 장 집어 입에 넣고 씹어 보였다.
“이건 코카라는 건데, 씹고 있으면 배도 안 고픈 데다 정령의 심술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신비한 나뭇잎입니다. 견디기 힘드시면 가지고 계시다가 몇 장씩 씹어 보십쇼.”
“어, 음…괜찮네, 고맙네.”
아무리 약효가 좋다지만, 나뭇잎을 생으로 그냥 씹는 건 꺼려졌다. 게다가 지금 느껴지는 불쾌감도 좀 참으면 사라진다지 않는가.
“알겠습니다. 혹시 생각 있으시면 나중에라도 말씀하십시오.”
페르난도가 웃으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한숨을 쉰 디에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 방으로 향했다. 어서 푹 자야 내일 조금이라도 몸 상태가 더 좋아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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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일행이 키토에 도착한 날은 9월 26일, 과야킬에서 짐을 꾸려 떠난 지 25일째였다. 산을 오르면서 일행 모두 몸이 좋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그래도 빨리 여행한 셈이었다.
산속에 있는 도시라 그런지, 키토는 과야킬보다는 규모가 작았다. 디에고 일행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해방감에 사지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카자크들이 땅에다 등을 대고 누워 꼼짝도 안 하는 모습을 본 페르난도가 웃으며 제안했다.
“나리께서는 여기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신세를 질 곳도 없으시니, 숙소는 제가 적당히 잡지요.”
“자네 좋도록 정하게.”
의심해 봐야 다른 방법도 없다. 디에고 일행은 페르난도가 대상들과 함께 움직일 때 주로 묵었다는 여관에 짐을 풀었다. 마구간도 널찍한 것이, 몰고 온 말과 노새를 다 넣고도 남을 만했다.
“김 공, 여기까지 오느라 말과 노새가 지쳤을 듯한데 바꾸지 않아도 되겠는가?”
“백작 나리, 제가 처음부터 모두 여기 고지에서 내려왔다가 돌아가는 이들을 수소문해서 고용했습니다요. 다들 이곳 풍토에 익숙하니 굳이 바꾸지 않고 계속 쓰실 수 있습니다.”
김은어는 페루 부왕령 내륙에서 직접 움직여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동안 과야킬을 몇 번 다녀가면서 이곳 밀수업자들에게 내륙 사정에 관해서 웬만큼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허술하게 준비할 리가 없었다.
“사람을 자주 바꾸면 그만큼 우리 여행에 관해 아는 자들이 늘어나지 않습니까요? 그러니 꼭 필요한 숫자만큼만 사람을 데려가고, 두둑한 품삯을 주어 배신하지 않도록 해야 합지요. 물론 놈들이 재물을 도둑질할 마음을 품을 만큼 허술하게 보이면 안 되고요.”
“자네 말이 백번 옳군. 고맙네.”
디에고가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처음 계획을 세울 때는 남미에 가서 나무를 찾는다는 정말 막연하고 단순한 계획이었던 것이, 도와준 사람들 덕분에 구체화된 행동으로 바뀔 수 있었다. 조경신, 안용복, 김은어, 안돈이 등의 조력 덕분에 말이다.
“내, 폐하께 상을 받게 되면 그대의 이름도 꼭 아뢰겠네. 그리하면 잠상 일을 그만두고도 유지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걸세.”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위대한 아버지신 임금 폐하께 상을 받는다면 제 후손들이 대대로 내려가면서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미주가 대한의 강역이 된 지도 이미 백여 년, 미주 토인들은 대한의 백성으로서 임금에게 충성을 바쳤다. 그런 한편으로는 옛 관습대로 임금을 위대한 아버지로 부른다. 물론 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이니만큼 그런 호칭이 문제가 될 건 없다.
“안 의원은? 방에 있나?”
“모르셨습니까? 의원 나리는 요새 그 코카라는 나뭇잎을 씹어보시더니 아주 관심이 크게 쏠리셨습니다. 지금도 곧바로 방에 들어가서 그 이파리를 들여다보고 계십니다요.”
“그 생이파리를 입에 넣고 씹었다고?”
의원이라는 종자는 역시 새 약초를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모양이다. 어째 요즘 기운이 난 것 같더라니, ‘저주가 풀려서’ 그 병이 다 나은 게 아니라 그 코카라는 나뭇잎을 씹은 덕에 효험을 본 모양이었다.
“뭔가 새 약이라도 만들려는 모양입지요. 다 쓸모가 있으니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연에서 채취한 씨나 열매, 뿌리나 잎과 동물의 신체 일부분 따위를 말리고 갈고 달여서 약을 조제하는 건 의원들이 늘 하는 일이다. 유럽이건, 대한이건, 미주건 말이다. 안돈이가 처음 보는 나뭇잎을 보고 약재로 써보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어차피 사흘 정도는 쉬면서 몸을 다스려야 할 테니, 안 의원은 그동안 자기가 좋을 대로 연구하도록 놓아두시면 될 듯합니다. 나리께서도 쉬시고요.”
카자크 사내들을 옆방에 눕혀 놓고 들어온 조경신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카자크 두 사람은 고지대에서 움직이는 게 정말 힘들었는지, 아직도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도 페르난도가 말하길, 많이 좋아졌다면서 여기서 사흘쯤 쉬고 나면 아주 말짱해질 거랍니다. 그놈의 망할 저주에서 풀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백인백색이라,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르다는군요.”
그 저주는 젊고 힘센 사람일수록 도리어 걸리기 쉽다고 했다. 정령은 오만하여 자기 힘을 믿고 함부로 구는 자들을 더 싫어한다면서 말이다.
“페르난도는 여전히 우리가 엘도라도를 찾으러 가는 줄 알고 있소?”
“그렇습니다, 나리. 여기 김 공이 그렇게 말해두었으니까요.”
엘도라도(El Dorado), 신을 찬미하기 위해 호수에 황금과 보석으로 만든 제물을 던지고, 전신에 금가루를 바른 추장이 호수에 뛰어들어 몸을 씻는다는 황금의 고장이다. 백 수십 년 전부터 스페인인들이 그 보물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엘도라도를 찾았다.
“페르난도가 그러더군. 자기 아버지는 그 보물을 찾아 고원을 누비다가 보카타를 발견한 곤살로 히메네스 데 케사다의 부하 중 한 사람의 후손이라고.”
보카타 역시 과야킬이나 키토처럼 원주민들이 대규모로 모여 살던 도시다. 스페인인들은 그 도시에 백인들이 거주하는 구역을 덧붙였고, 주변 지역을 통제하는 중심지로 만들었다.
“조 서기, 이제 슬슬 페르난도에게 우리가 여기 온 진짜 목적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소? 그자는 그걸 모르니까, 정말 우리를 데리고 보물찾기를 하러 갈지도 모르는데.”
정말로 엘도라도를 찾아낸다면야 그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실존 여부도 확실치 않은 그런 허상 때문에 분명히 실재하는 친초목 탐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요. 말하기는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는 키토를 떠난 뒤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 시내에 있는 동안에는 그냥 보물을 찾으러 온 것으로 해두지요.”
친초나무를 찾으러 왔다는 소문이 나면 곤란하다. 친초나무 껍질을 거래하는 건 예수회의 특권이고, 이들은 그 권리를 도둑질하러 온 참이기 때문이다.
“예수회 신부들이 그 소문을 들으면 바로 우리를 관헌에게 고발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장 도망쳐야 하겠지요. 그러니 페르난도에게는 조금 더 있다가 사실을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한 달여를 같이 지내면서 살피니, 페르난도는 보수만 넉넉히 준다면 금제품인 친초나무를 빼돌리는 일 정도는 서슴없이 협력해줄 듯했다. 그래도 공연히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일찍 밝혀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식량을 보충하는 등 여기서 쉬는 사흘 동안 할 일을 셋이 의논하는데, 갑자기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적어도 대여섯 명은 되는 듯했다.
거친 발소리가 계단을 딛고 2층으로 올라오더니 복도를 걸어왔다. 세 사람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발소리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 조용히 주의를 기울였다. 유감스럽게도 그 발소리는 디에고의 방 앞에서 멈췄다.
“나와라! 행정관님의 명령이다!”
복도에 선 자들이 부서질 듯이 문을 두드렸다. 열어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데 갑자기 복도 밖에서 우당탕하는 소음과 함께 고함, 비명이 들려왔다. 한숨을 쉰 조경신이 이를 악물더니 디에고를 돌아보았다.
“나가보셔야겠습니다.”
“알겠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디에고가 크게 외쳤다.
“이고르! 바실리! 당장 멈춰! 이 사람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문밖 복도는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분명히 ‘저주’에서 아직 다 회복되지 못해서 맥을 추지 못한다던 카자크들은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디에고의 방문을 두드리던 스페인 병사 십여 명을 상대로 난투를 벌여 절반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였다.
“당신이 보스케 후작의 아들 돈 디에고요?”
장교 하나가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질문했다. 카자크들이 마구잡이로 메어칠 때 다쳤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왼손으로 자기 오른팔을 쥐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 상태도 급하게 훑어보니, 다행히 죽거나 뼈가 부러질 만큼 다친 이는 없었다.
디에고는 두 카자크가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서 무기 없이 맨손으로 뛰어나오고, 습관대로 제대로 싸우는 대신 막무가내로 상대방에게 부딪치기만 한 데 대해 성모님께 감사했다.
“그렇소. 내가 돈 디에고요. 내 슬라브인 하인들이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실례를 범한 데 대해서 먼저 사과하겠소. 약소하지만, 위로금이라고 생각하시고 나중에 부하들과 술이라도 한잔하시오.”
조경신이 잽싸게 은화 주머니 하나를 꺼내서 장교의 오른손에 쥐여주었다. 장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머니 무게를 가늠하더니 인상을 풀고 헛기침을 했다.
“행정관께서 당신 일행에 관한 보고를 받으시고는 만나야겠다며 호출하셨소. 그러니 지금 바로 우리를 따라오시오.”
“이곳 키토를 다스리는 행정관께서 나를 호출하셨다고?”
잠시 불안한 눈빛이 조경신과 디에고 사이에서 오갔다. 거절했다가는 무슨 후환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직 기밀이 새지는 않았을 터인데, 대체 왜 행정관이 디에고를 부르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좋소. 갑시다. 비센테, 가서 말을 가져오도록.”
“예, 나리.”
비센테는 조경신이 임시로 쓰는 가명이다. 조경신은 급히 여관 종업원에게 가서 디에고와 자기의 말을 끌고 오도록 했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디에고를 따라가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