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62
3부 280화
– 11 –
모기와 짐승을 쫓기 위해 피워 놓은 모닥불이 은근하게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 빛으로 모든 위험을 쫓아버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먹이를 덮치는 짐승의 포효와 찢어지는 소리로 지르는 말의 비명이 어둠을 갈랐다.
“재규어다!”
마부들이 고함을 쳤다. 고함 사이에서 총성이 울렸다. 모포를 덮고 잠들어 있던 디에고를 비롯한 일행은 화들짝 놀라 법석을 떨었다. 총을 잡고, 고함을 지르고, 말을 찾았다.
“쫓았는가?”
겨우 소동이 진정되자 디에고가 헐떡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말을 매어둔 자리까지 달려가 확인하고 온 페르난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쫓기는 쫓았는데, 그놈이 말을 한 마리 물고 갔습니다.”
“제기랄, 또!”
정글의 밤은 사람에게는 한 발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과 같다. 그 안에 어떤 위험이 숨어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 어둠으로 들어가서 맹수를 쫓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디에고 일행은 모닥불을 더 크게 지펴서 놈이 돌아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잠이 모자란 이들은 모닥불 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교대로 선잠을 잤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이보게, 김 공. 왜 친초피 거래에 관해 아는 바를 다 말하지 않았는가?”
디에고가 추궁하자 김은어는 잠시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디에고가 그 일에 관해서 자기에게 화를 내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저 서운한 기분을 토로하려 한다는 냄새를 맡았다. 그제야 김은어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건…나리께서 바라시는 친초목 입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 그랬습니다. 어차피 저는 진짜 친초목 산지가 어디인지는 전혀 모르니까요. 제가 아는 바를 솔직히 다 말씀드려 알고 계셨다 한들, 지금 상황이 달라질 건 없었을 겁니다.”
“그런가. 그렇기는 하겠지.”
디에고가 받아들여 줄 기색을 보이자 김은어는 계속 굽실거리며 변명을 했다.
“아무렴요, 나리. 아무려면 제가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을 일부러 더 힘들게 하려고 나리께 사실을 숨겼겠습니까. 말씀드려봤자 굳이 도움도 안 될 일이기에….”
“자네 뜻은 알겠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목숨을 걸고서 적지에 들어와 있네. 서로를 굳게 믿어야만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갈 수 있어. 그런 처지인데도 서로 솔직하지 못했다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네.”
이제야 디에고의 속이 좀 후련해졌다. 조경신한테는 묻고 지나가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한 번은 따지고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계속 속에 묻어둔 채로 참았다면 언제 어떤 형태로 화가 폭발했을지 알 수 없다. 드러내 말한 덕분에 엊저녁부터 느끼던 두통도 좀 나아졌다.
“나리, 해가 뜨고 있습니다.”
이고르가 옆에서 속삭였다. 고개를 드니 나무 위에서 은은한 새벽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디에고가 총을 잡고 일어섰다. 흥분 탓인지 몸이 후끈해졌다.
“이제 우리 말을 훔친 말도둑놈의 뒤를 쫓아가 보세. 해가 떴으니 발자국도 보이겠군.”
벌써 세 마리째다. 며칠째 계속 당했다. 다행히 예비로 끌고 온 말이 넉넉해서 치명적인 타격은 아니지만,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었다. 두 카자크와 페르난도가 따라나섰다.
디에고가 앞장서서 흔적을 쫓았다. 카자크들이 앞에 서겠다고 했지만 물리쳤다. 스페인에 있을 때나 조선에 건너간 뒤에나, 사냥이라면 남들 못지않게 나가 봤다. 외조부의 교육에는 당연히 사냥이 있었고, 사촌인 현왕네 형제들은 사냥이 일상이었으니 말이다.
당연하지만 재규어를 잡아본 적은 없다. 그래도 비슷한 표범이나 호랑이는 사냥한 경험이 있다. 물론 혼자 나가 잡은 게 아니고 충분한 경험을 쌓은 사촌 형제들과 함께 잡은 거지만 말이다. 그때 배운 바에 따라 꼼꼼히 발자국을 살폈다. 옆에 피가 점점이 떨어져 있다.
“한 마리. 새끼가 딸린 흔적??없고 발자국이 큰 걸 보면 혼자 사는 수컷 같은데….”
산길에서 사람을 태우고 짐을 나르는 데 쓰는 말은 끈기가 중요하지 속도 같은 건 의미가 없다. 그래서 덩치가 별로 크지 않다. 카자크들이 ‘노새 애비에 당나귀 애미를 둔 똥 같은 놈들’이라고 욕지거리를 한 이유도 거기 있다.
조선 조랑말처럼 작은 말이니 재규어가 물어가기도 쉽다. 핏자국을 따라 쫓아가니, 말이 반쯤 뜯어먹힌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죽은 말 옆에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려는 디에고를 페르난도가 제지했다.
“재규어는 사람에게 잘 덤비지 않긴 합니다만, 먹이를 건드리면 달려들지도 몰라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주의하시죠.”
카자크들도 몸을 숙이면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디에고도 발을 멈추고 언제라도 쏠 수 있도록 총에 붙은 격침을 제쳤다. 덤불 사이에서 언뜻 얼룩무늬가 비치자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다만 흥분해서 손이 떨린 탓인지, 날아간 탄환은 짐승의 급소를 빗맞히고 말았다.
“도망친다, 쫓아라!”
‘불 맞은 범’은 절대 놓아 보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원한을 품고 복수하겠다고 계속 뒤를 따라올지 모른다. 디에고는 화근을 뿌리 뽑을 심산에 선두에서 핏자국을 쫓았다.
“2백 근은 되겠습니다.”
사냥에 도가 튼 장정 넷이 달라붙어 추격하니 아무리 크고 흉포한 재규어라 해도 벗어날 재주가 없다. 장장 3시간에 걸친 추적 끝에 재규어를 잡은 디에고는 의기양양하게 야영지로 돌아왔다. 나머지 일행은 출발 준비를 마쳐놓고 있었다.
“확실히 대표(大豹)라 부를 만하기는 합니다. 작은 호랑이 정도 크기는 되는군요.”
본국에 있는 표범은 아무리 커도 백 근을 넘지 않는다. 조경신은 사지를 묶고 통나무에 꿰어 카자크들이 메고 온 수컷 재규어를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미주에서도 산 것을 볼 일은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낯선 땅에 오니 역시 신기한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변 남부 지방에도 재규어가 살기는 한다. 하지만 미주 인구 대부분은 바다에 면한 미주 3주에 거주하므로, 모피가 아닌 살아있는 재규어를 볼 일은 거의 없었다.
“사냥하러 대삼주까지 온 건 아니지만…기왕 잡았으니 가죽을 벗겨 가져가야겠소. 본국에 돌아가서 부황께…아니, 태황태후께 선물하면 좋을 것 같소.”
조모인 태황태후는 디에고가 사생아 출신인데도 무척 예쁘게 봐주면서 이복동생들과 같은 자기 손자로 대우해주었다. 물론 적자인 손자들과 똑같은 위치에 두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대놓고 혐오하던 외조모보다는 훨씬 따뜻하고 자상했다.
“조금 더 가면 마을이 있을 겁니다. 가죽은 거기서 벗기도록 하지요.”
이미 출발이 늦은지라 여기서 노닥거릴 여유는 없었다. 디에고는 페르난도의 제안에 따라 일단 이동부터 하기로 했다. 말에 오르는데 어째 약간 현기증이 나는 듯했다.
‘야숙이 이어진 데다 재규어를 쫓느라 조금 무리했나…뭐, 오늘 밤 푹 쉬면 괜찮겠지.’
오늘은 초라하기는 해도 지붕 아래에서 잘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어제와 달리 시원하게 열을 식혀주었다.
– 12 –
눈을 떴다. 풀로 이은 인디오들의 집 지붕이 보인다. 심한 오한과 고열에 시달린 기억은 나는데 그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데 옆에서 안도하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리, 의식을 회복하셨군요. 역시 진짜 친초피로 달인 탕약을 드신 효과가 있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조경신과 안돈이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이었다.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데 팔에 힘이 없는지, 팔꿈치가 꺾이면서 상체가 휘청거렸다.
“더 누워 계십시오. 사흘 동안 고열로 의식이 없다가 이제 막 일어나셨으니 좀 더 쉬면서 몸을 보하셔야 합니다.”
조경신이 조심스럽게 디에고를 다시 자리에 눕혔다. 모포와 털가죽으로 꾸민 침상에 누운 디에고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사흘? 내가…사흘이나 누워 있었단 말이오?”
“예, 그러니 푹 쉬십시오.”
모피를 목까지 당겨 덮고 다시 누우니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말을 덮치는 재규어를 잡고, 이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 페르난도와 주고받은 대화다.
‘말 위에서 흔들려서 그런지 현기증이 나오. 먼저 좀 쉬겠소.’
‘그러십시오. 여기 인디오 사내가 머무실 집을 안내해 줄 겁니다.’
그렇게 잠자리에 눕자마자 의식을 잃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고 손이 떨렸던 게 전부 열병, 즉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전조증상이었다. 재규어 사냥으로 흥분해서가 아니었다.
“…나만 앓은 거요? 다른 이들은?”
“일꾼 몇이 가볍게 앓기는 했습니다만, 나머지는 괜찮습니다.”
“내가 운이 없었군….”
모깃불도 열심히 피우고, 안돈이가 나눠준 모기 쫓는 고약도 발랐는데 말이다. 안돈이는 일행이 노숙하느라 모기장을 쓸 수 없었던 탓이 큰 것 같다고 진단했다.
“다행히 이곳 토인들이 나리께서 앓으시는 것을 보고는 쾌히 친초피를 나누어주어, 탕을 끓여 드시게 했더니 효험이 있었습니다. 역시 진짜는 다르더군요.”
“그나마 전화위복이구려. 통역을 거쳐 가며 혹시 이 근처에 친초나무가 자라고 있느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
안데스산맥 동쪽 저지대에서는 쓰는 말이 또 달라서 페르난도도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고지대 말을 할 줄 아는 토인을 찾아서 몸짓을 섞어 가면서 대화해야 겨우 뜻이 좀 통하는 수준이라, 친초목이 있냐고 묻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페르난도가 이미 촌장과 교섭하고 있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고, 몸이나 추스르도록 하시옵소서.”
“고맙소, 조 서기.”
드디어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됐다. 디에고는 안도감에 눈을 감았다.
디에고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데는 이틀이 더 걸렸다. 다행히 열이 내리고 나니 별다른 후유증은 없었다. 초기에 친초탕을 먹고 제대로 처치한 덕분이다.
“그대가 함께 오지 않았으면 큰일이 날 뻔하였네.”
“아닙니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가볍게 병증을 앓았다는 일꾼들도 모두 말짱해져 있었다. 그 ‘금보다 비싼’ 친초피를 선뜻 나눠준 토인들 덕분이다. 다만 종자와 묘목을 얻는 작업은 난관에 부닥쳐 있었다.
“가지고 있는 껍질은 나눠줄 수 있다는데, 나무가 있는 곳은 가르쳐줄 수 없답니다.”
“아니 왜?”
이쪽은 나무를 통째로 뽑아가려는 것도 아니고 종자와 묘목만 얻어가면 된다. 토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안 된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어디, 내가 이야기해 보지.”
중간에 통역을 두 사람이나 두고 촌장과 마주 앉아 한나절 동안 끙끙거리며 대화해 보니 역시나 오해였다. ‘껍질이 필요하니 나무가 있는 장소까지 안내해 달라’는 말을 들은 촌장이 ‘나무를 베어 껍질을 싹 벗겨가겠다’라는 의도로 잘못 이해하고 안내를 거부했던 거다.
이 마을에서는 친초피를 자용(自用)으로 소모할 뿐 아니라, 예수회와 스페인 행정관청에 공물로도 바치고 있었다. 나무가 죽지 않도록 귀중하게 다루는 것도 당연했다. 디에고는 그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최대한 쉬운 말로 자기 뜻을 설명했다.
“우리가 바라는 건 우리 땅에도 이 귀한 나무가 자라게 하여 우리 백성들도 내가 걸린 것 같은 열병에 걸렸을 때 약을 쓸 수 있게 하려는 거요. 좋은 약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이니, 이웃에 나누어줌이 그 뜻을 실천하는 것 아니겠소?”
통역을 둘이나 놓고 하는 대화가 다시 한참을 이어졌다. 그리고 나서야 촌장은 디에고가 친초목 씨앗을 얻을 수 있도록, 내일 그 나무가 자라는 장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동의했다. 이제 정말 목적을 이룬 셈이다.
친초목 나무는 꽤 컸다. 열 자(3m)에서 서른 자 가까이 되는 나무들이 여기에도 한 그루, 저기에도 한 그루 하는 식으로 흩어져 있었다. 넓적한 잎도 잎이지만, 껍질이 붉은색인 게 유달리 눈길을 끌었다.
“이 나무는 꽃 피는 철이 따로 없이 일 년 내내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고 합니다. 꿀이 없어 꽃이 피어도 벌과 나비가 찾지 않는다는군요.”
“소나무 같군.”
페르난도의 이야기를 들은 조경신이 감상을 말했다. 소나무도 솔방울이 맺히긴 하지만 그 가지에는 꽃이라 할 물건이 피지 않는다.
데려온 일꾼들에다가 마을에서 고용한 토인들까지 동원해서 익은 열매를 모으고 속에 든 씨를 털었다. 사흘 동안에 걸쳐 힘써 일한 결과 씨앗을 담은 자루가 줄줄이 늘어섰다. 이걸 보고 흡족해진 디에고가 안돈이를 불렀다.
“우리 처음 계획에서는 이곳 저지대를 따라 계속 남으로 내려가면서 여러 종류의 씨앗을 모으자고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네. 안 의원은 생각이 어떤가?”
안돈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수백께서 와병하셨을 때 시험해보았지만, 이 친초목 껍질은 진품입니다. 약효가 정말로 뛰어나니 굳이 다른 별종의 종자를 구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그럼 되었네. 아직 항구까지 돌아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숲속에 우글대는 짐승과 모기에 시달리면서 계속 저지대로 움직일 게 아니라 다시 고지대로 올라가세. 그편이 낫겠네.”
고지대로 올라가면 행군을 힘겹게 만드는 ‘정령의 저주’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점도 있다. 고지대에는 모기도 없고 말을 잡아먹는 재규어도 없다. 적대적인 원주민도 없고, 길을 잃을 위험도 더 적다. 그리고 ‘저주’를 푸는 특효약인 코카나무 잎이 있지 않은가.
디에고는 다른 인원들을 불러모아 일정을 변경하자고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후덥지근한 저지대 날씨에 진절머리를 내던 참이라, 다들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본래 예정대로 침보라소산 남쪽으로 가는 길로 진로를 잡되, 거기까지는 고지대로 가자고 말이다.
자, 이제 귀환이다. 과야킬로 돌아가서 산 페드로호에 오르면 이 여행도 끝이다. 목적하던 바를 이뤘으니, 다들 즐거운 기분으로 말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