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63
3부 2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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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따라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여정은 지루했지만 평화로웠다. 말꾼들이 고삐를 잡고 끌고 가는 말등에 앉아 흔들거리며 졸다 깨다 하다 보면 밤이 왔다.
고지대다 보니 밤이 되면 심한 추위가 엄습했다. 하지만 모기와 재규어가 없다는 장점이 있으니 추위 정도는 기꺼이 참을 수 있었다.
평온한 여행에서 한 가지 자극이 있다면 음식이었다. 키토를 떠난 지도 한참 지나 친절한 스페인인들이 싸준 식량은 이미 다 없어졌다. 빵과 밀가루, 염장고기를 다 먹었으니 사냥한 새와 짐승의 고기, 원주민 마을에서 구한 낯선 농작물을 먹는 수밖에 없었다.
“페르난도, 이 둥글둥글하게 생긴 뿌리 이름이 뭐라 하였는가?”
받아온 농작물을 디에고가 골똘히 들여다보며 질문하자 페르난도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마카라고 합니다. 매워서 생으로는 못 먹으니까 괜히 맛보려고 하지 마세요.”
“여기 고구마같이 생겼는데 맛은 생판 다른 것은?”
“야콘이라고 하지요.”
두 가지 모두 감자, 고구마와 더불어 이 일대에서 재배하는 주요 농작물이다. 곡물도 몇 가지 있었지만, 본래 유럽 귀족 출신인 디에고에게는 이렇게 뿌리를 먹는 농작물 종류가 더 신기하게 다가왔다.
고구마하고 감자는 조선에 간 뒤에 자주 보았기에 ? 조선식 이름인 담저, 감저도 이제는 익숙하다 ? 낯익은 작물이다. 하지만 야콘과 마카는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봤다. 조경신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비수백 나리, 코카목과 친초목을 가져가는 김에 이것들도 좀 가져가서 심도록 해보지요. 상당한 쓸모가 있어 보입니다.”
“이건 곡식을 심지 못하는 높은 지대에서 심는 작물인데, 우리는 그런 곳에 사는 백성이 거의 없지 않소?”
디에고는 잠시 조경신에게 배운 조선 황실의 계보도를 떠올렸다. 자기보다 9대 위 조상, 이사벨 1세 시절 조선의 군주였던 ‘무종대왕’이라는 임금이 산에 불을 놓아 농토를 만드는 행위를 엄금했다. 그 법을 어기는 자들은 새로 개척한 북방으로 추방했다.
여기에 목재 생산을 위해 식림을 권장하고 벌목을 제한하는 정책이 계속 시행되면서 산에 들어가서 사는 주민은 거의 사라졌다. 약초꾼이나 사냥꾼이 소수 있을 뿐이다.
“그런 자들은 농사를 별로 짓지도 않고, 짓더라도 기존에 심던 콩이나 옥수수, 담저만으로 충분할 거요. 이런 낯선 작물을 심으려 할 것 같지 않소. 고추 같은 향신료도 아니잖소.”
디에고의 의문도 일면 당연했다. 게다가 디에고는 친초목 종자를 구한다는 처음의 목적을 이미 달성한지라, 그 외의 다른 일들에 관해서는 관심이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이 한 가지 위업만 가지고도 이미 역사에 남을 큰 공을 세운 게 아닌가 말이다.
여기에 코카목도 있다. 과연 본국에서 제대로 자랄지는 알 수 없지만, 야생목을 발견해서 코카 씨앗도 한 자루 모았다. 디에고 자신은 친초목만 가져가면 충분했으므로 코카목 발견 쪽은 기꺼이 안돈이의 공적으로 넘겨줄 생각이었다.
“나리, 생각해보시지요. 열병을 고치는 친초목과 기운을 솟게 하는 코카목도 물론 중요한 물건이나, 백성들의 배를 채워줄 새로운 작물을 얻는 것도 어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야콘은 마치 마와 배를 섞은 듯한 신기한 맛이 나니 과일이라고 해도 통할 것이고, 마카는 매운맛이 나서 생으로는 먹지 않는다지만 이곳 토인들이 하듯이 가루를 내거나 말려서 먹으면 담저와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담저와는 다른 효능이 있다.
“나리께서는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저는 그 막가(마카)분으로 쑨 죽을 먹은 뒤에는 몸이 후끈하고 단전에 힘이 솟는 것이, 마치 인삼탕이라도 먹은 듯한 기분입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이 정령과 배 부령을 보십시오.”
“으음, 그러고 보니 이번에 고지에 올라와서는 ‘저주’에도 걸리지 않고 멀쩡했지. 하지만 그건 코카 잎을 씹어서가 아니오?”
처음 고지대에 올라갔을 때는 일행 여섯 명 중에서 안돈이와 김은어 둘만 코카 잎을 받아 씹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머지 네 명도 사양하지 않고 코카 잎을 씹었다. 안돈이를 통해 그 효능을 확인한 덕분이다.
덤으로 안돈이는 ‘저주’의 원인이 정령 따위가 아니라 자연적인 데 있다고 확신하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과연 어떤 결과를 낼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저주에만 안 걸렸습니까? 토인촌에 들를 때마다 아낙네나 처녀들을 보는 눈빛이…아이고, 저는 차마 쑥스러워 말로 표현을 못 하겠습니다.”
“그 둘이야 늘 발정이 나 있지 않았나 싶은데.”
객으로 재워줍시사 하고 찾아든 처지에 동네 여자들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결딴이 날 수도 있다. 카자크들이 아무리 여자를 좋아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기에, 키토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고 함부로 침상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다.
“다릅니다. 원기가 솟는 게 다르단 말입니다. 비싼 인삼을 먹을 수 없는 이들에게 인삼을 대신할 대체품으로 먹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담저보다 훨씬 인기가 좋을 겁니다.”
그렇게 듣고 보니 확실히 몸 한쪽에 기운이 쏠리는 것도 같다. 기운이 치솟아 봐야 지금 당장은 쓸 데도 없는 기운인데 무엇하나 싶었지만, 효과가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알겠소. 다만, 그것들이 과연 우리 본국에서도 같은 맛이 날지는 나는 모르겠소.”
친초목과는 다르다. 친초목은 최대한 이곳 안데스와 기후 풍토가 비슷한 곳에 심을 거다. 대남도나 필리핀에 있는 높은 산이라면 충분히 자랄 수 있으리라.
하지만 마카나 야콘은 친초목처럼 귀중한 약재가 아니다. 아무리 맛이 특이하다고 해도 결국은 근채류(根菜類)의 일종일 뿐이다. 일부러 멀리서 배로 실어들일 만큼 귀중한 물건은 아니다. 고로 본국에서 밭에 심었을 때 같은 맛과 효능이 나야 한다.
“장조께서 처음 감저, 담저, 옥수수, 남만박 따위를 퍼뜨리실 때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 두 가지도 서두를 필요 없이 천천히 보급하면 될 겁니다.”
“알겠소. 조 서기가 정 원한다면 그것도 챙기시오.”
조경신은 ‘꾸이’도 본국으로 가져가기로 작심한 상태다. 여기에다 목화밭을 보고서는 목화 종자도 얻었다. 이래저래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골라서 가져가는 셈이다. 다만 디에고가 과연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계속 의구심을 표하자, 조경신이 짐짓 핀잔을 주었다.
“비수백께서 가져가자고 하신 알파카보다는 소인이 가져가는 꾸이와 마카, 야콘이 훨씬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사옵니다만?”
친초목을 찾으러 가는 동안에는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임무를 마치고 유람하듯 움직이게 되자, 그동안은 눈에 들어오지 않던 이곳 풍물들이 갑자기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조경신에게는 목화, 마카, 야콘이 그런 것이라면 디에고에게는 알파카였다.
“이곳 토인들은 양털을 깎듯 그 털을 깎아 면과 섞어 피륙을 만든다고 하지요. 그 피륙을 보니 무척 부드럽고 따뜻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겨우 4마리를 가지고 제대로 새끼를 쳐서 수를 늘릴 수나 있겠나이까? 게다가 오면서 보니 성격도 낙타만큼 고약하던데요.”
조경신은 도중에 알파카가 뱉은 냄새 나는 침을 얼굴에 정면으로 맞은 적이 있다. 그래서 알파카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저건 폐하께 바치는 진상품이지 백성들에게 주려는 게 아니오. 성격이 전혀 다르지 않소.”
만약 목장을 만들려고 한다면 적어도 수십 마리는 데려가야 할 터인데, 그만큼 많은 수를 끌고 갈 여유도 없다. 게다가 본국의 풍토는 알파카 목장을 만들기에 적절하지도 않다. 이 짐승들을 데려가는 건 오로지 부황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다.
부황은 진기한 짐승을 좋아한다. 그래서 홍제원에 여러 짐승을 모으지 않았는가? 새로운 땅에 왔으니, 마땅히 진기한 짐승을 구해서 바침이 옳다.
“과연 4마리를 모두 살려서 본국까지 갈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한 마리라도 살아서 도착하면 폐하께 바치는 좋은 선물이 되지 않겠소?”
모닥불 가에서 이어지는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내일 일찍 일어나서 길을 가려면 이만 자야 한다는 페르난도의 재촉을 받고 나서야 다들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 14 –
눅눅한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상쾌한 고지대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바람이지만, 정말로 반가웠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12월 3일이다. 3개월 만에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오겠다고 목표를 세운 날보다는 이틀 늦었다. 하지만 이틀이 어디 문제인가. 디에고 일행이 주파한 거리를 생각해보면 이틀 정도 늦어진 건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고생이 많았네, 가브리엘 선장. 그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는가?”
“예, 각하. 다행히 스페인인들은 우리 산 페드로가 진짜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온 상선이라 생각했고, 흉계를 꾸미고 여기 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배가 부서진 것도 정말로 배가 낡아서 구멍이 났다고만 여기더군요.”
지난 3개월 동안 선원들은 스페인인 척, 미주 토인인 척하면서 아슬아슬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누구 하나만 프랑스어나 한국어를 잘못 쓰다가 실은 스페인 배가 아니라는 게 들통이 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안용복과 바르가 이끄는 함대가 파나마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과야킬 앞바다를 지나갔지만 산 페드로를 그들과 엮어 의심하는 자들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경계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자들은 상륙도 하지 못했다. 배를 고치는 척 빈둥거리다 상륙한 동료들이 술을 사다 주면 그거나 마시며 소일할 뿐이었다.
“나리께서는 그래도 무사히 다녀오셨습니다?”
“운이 좋았지. 운이 좋아서 원하던 종자도 잔뜩 구하고, 사람도 잃지 않았네.”
디에고는 흡족한 기분으로 선창에 쌓은 친초목 종자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노새 등에다가 싣고 오던 것보다 다섯 배는 늘어난 것이 정말로 흡족했다.
“이 고장에도 똑같은 친초목이 나는군!”
침보라소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를 지나자 안데스산맥 서쪽 사면으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이미 석 달 전에 지나간, 낯익은 길이었다.
디에고는 페르난도에게 들은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키토로 가는 길에 그냥 지나쳤던 이 고장에도 친초목이 자란다고 했던 이야기 말이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우리가 씨를 받은 그 친초목과 똑같습니다.”
안돈이가 감탄사를 발했다. 이쪽 고장에는 안데스산맥 동쪽보다 친초목이 더 많이 자라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나리, 여기서 씨를 더 얻는다고 한들 과야킬까지 운반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노새 여섯 마리와 말 여덟 마리에 실을 수 있는 만큼 실었습니다. 이제는 술과 음식을 실을 말도 없습니다.”
예비마도 모두 짐말로 바뀐 지 오래다. 디에고 일행이 타고 가는 말에도 짐을 싣고 대신 사람은 걸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참인데, 종자를 더 얻는다고 한들 운반하기 어려울 건 당연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페르난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이나 노새를 더 구하시겠습니까? 마을이 있으니 구하려면 구할 수는 있습니다.”
“아니. 그럴 건 없네. 내게 다른 생각이 있으니.”
일행의 궁금증 어린 시선이 집중됐다. 디에고가 유유히 입을 열었다.
“저기 강이 흐르는 것 같은데, 저 강이 혹시 과야킬로 흘러가지 않는가?”
“덕분에 수로를 통해 편히 내려올 수 있었지. 이 많은 종자를 가지고 말일세.”
배는 없었다. 하지만 나무를 베어 뗏목을 엮으면 과야킬 항구까지 곧바로 내려오는 길이 있었다. 수로가 열려 있음을 확인한 디에고는 촌장과 협상하여 친초목 씨앗을 잔뜩 채취해 상자에 담고, 그 상자를 모두 실을 수 있을 만큼 뗏목도 엮었다. 그리고 항구로 직행했다.
뗏목을 엮으면서 필요가 없어진 말과 노새는 모두 계약을 해지하고 집으로 보냈다. 물론 보수는 약속한 액수보다 더 후하게 주었다.
“덤으로, 사실을 아는 자들이 항구에 나타날 위험이 없어졌지.”
과야킬까지 와서 계약을 종료했다면, 저들이 산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무슨 소리를 지껄였을지 알 수 없다. 페르난도의 설득과 은화 덕분에 충실하게 뒤를 따르며 일해주긴 했지만, 일이 끝난 뒤까지 입을 다물어주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맞습니다, 나리. 마지막 여정에서 뗏목을 타기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셨습니다.”
조경신도 이런 착안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디에고의 창의성을 한층 더 칭찬했다.
“남은 건 페르난도 자네뿐이군. 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네만….”
‘씨앗 한 줌에 은화 한 줌’이라는 처음 약속을 지키자면, 산 페드로 호의 선창 절반을 꽉 채울 만큼 은화를 주어야 했다. 하지만 디에고에게는 당연히 그렇게 많은 은화가 없었다.
“저도 저만큼 많은 돈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저 상자만큼 쌓인 은을 제가 가져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각하께서 적당히 주실 만큼 주십시오.”
다행히 페르난도도 상식적으로 나왔다. 그래서 에스쿠도 금화 한 상자로 보수는 타협을 보았다. 페르난도가 하선해서 떠나고, 선원들이 급히 출범 준비를 하는데 부두 쪽에서 보트 한 척이 다가왔다.
“산 페드로! 출항하는 거요? 점검을 받으시오!”
“스페인 관리들입니다. 그냥 쏴버릴까요?”
가브리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만 먹으면 한 방 먹이고서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니다. 과야킬에는 전함이 없고, 당장 추격하기도 어려울 거다. 하지만 디에고는 고개를 저었다.
“소동을 일으키지 말고 부드럽게 가세. 승선시키게나.”
“그래, 엘도라도는 찾으셨습니까?”
“못 찾았네. 산속에서 두 달쯤 고생하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돌아왔지.”
마침 배에 오른 관리들은 산 페드로가 처음 과야킬에 도착했을 때 승선하고 임검을 했던 바로 그 관리들이었다. 조경신이 건넨 뇌물을 받고 헤벌쭉해서 여관을 안내해줬던 바로 그 작자들 말이다.
“맞습니다. 공연히 고생하느니 집에 가서 편히 지내시는 편이 좋지요.”
디에고를 보고 헤헤거리던 관리들은 가브리엘에게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지었다. 밀수품을 싣고 있는지 확인해야겠다면서 말이다.
“선창에 있는 저 짐은 뭐요? 열어보시오. 음? 씨앗? 저쪽에는 살아있는 알파카가?”
가브리엘이 머뭇거리는 사이 디에고가 나섰다.
“다 내가 가져온 것들이네. 마카와 야콘은 가는 길에 선원들에게 먹이려고 넉넉히 실었고, 알파카는 부모님께 선물할 애완물이라네. 씨는 훌륭한 나무가 있기에 돌아가서 심어보려고 씨를 좀 받아왔네.”
디에고는 짐의 대부분이 식량으로 실은 마카와 야콘, 감자와 고구마인 것처럼 둘러댔다. 그래도 관리들이 의심할 기색이 보이자 조경신에게 눈짓을 했다.
“이거, 조그만 성의일세.”
이번에는 레알 은화가 아니라 에스쿠도 금화가 든 주머니가 하나씩 손에 쥐어졌다. 자기 손에 들어온 물건을 본 관리들은 눈을 마주쳤다. 디에고에게 뭔가 수상한 기색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그걸 굳이 캐낼 필요가 있을지 논의하는 눈빛이었다.
“알겠습니다. 먼 뱃길 주의해서 돌아가십시오.”
두 관리는 결국 뇌물을 받아먹고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스페인인들이 뱃전을 내려가 대기하고 있던 보트를 타고 떠나자 조경신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정말 다 끝났군요, 비수백 나리. 아까 저들이 선창에 있는 상자를 열어보는데, 그만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괜찮네. 여차하면 놈들을 태운 채로 바다로 나가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공연히 총성이나 포성을 울려서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다. 놈들을 배에 태워서 끌고 가는 편이 훨씬 깔끔하게 일이 끝난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으니 나중에 아무 해안에나 내려주면 그만이다.
“자, 이제 거북섬으로 가세. 본대와 만나서 본국으로 돌아가야지.”
미주로 다시 가지는 않는다. 거북섬에서 하와이를 거쳐 본국으로 귀환하는 게 계획이다.
“본국에서는 지금 상황이 어떨까요, 나리.”
“나도 모르겠네. 다만 폐하께서 심려가 크실 건 알겠군.”
제물포에서 배를 띄운 지 어느덧 11달이다. 그동안 본국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과연 상황이 어찌 되었을까.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걸어왔을까? 수군은 작년 패전을 설욕했을까? 도로테아는 무사히 아이를 낳았을까?
모두 알 수 없다. 적어도 석 달 뒤, 본국으로 귀항한 뒤에나 이 모든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