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72
3부 2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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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정 그늘 안에 앉아 있으니 따가운 여름 햇살도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 점심을 마친 뒤 잠시 쉴 틈을 내어 상희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만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기분 참 묘하네.”
“뭐가?”
상희의 부드러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 있으려니 전쟁도 잠시 잊었다. 아무래도 싸움은 머나먼 남쪽에서 벌어지는 중이고 본토에 직접적으로 전화가 미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이럴 때는 마음이 약간은 풀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떠오른 단상도 전쟁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약간 겸연쩍은 기분으로 입 밖에 내놓았다.
“벌써 내가 두 번째 죽은 지 백 년이 다 되어간다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아, 그렇구나. 올해가 97년째 되는 해네.”
내 손으로 내 제사를 또 지내는 것도 벌써 7년째다. 무종의 제사를 지낼 때는 말로 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드는데, 장조의 제사는 별로 힘들지가 않다. 비명횡사한 인생과 할 거 다 하고 만족스럽게 마무리한 인생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너는 그렇겠지. 난 안 그랬어. 그때도 18년이나 더 네 제사를 지내야 했다고. 내가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미안, 미안. 혼자 외롭게 지내게 해서 정말 미안해. 이번 생에는 꼭 같이 오래오래 살자.”
지난번 생에는 내가 상희보다 16살이나 많았으니 그만큼 일찍 죽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튼튼한 몸도 아니었는데 생애 내내 격심한 과로에 시달리면서 정력을 깎아 먹었으니, 장수하기를 바라는 건 언감생심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와 상희 사이의 나이 차이가 9살밖에 안 된다. 그리고 몸 하나는 어디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다. 통치도 혼자 이끌지 않고 신하들에게 맡길 부분은 맡기면서 최대한 스트레스를 줄이고 있다. 상희와 함께 오래 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제사 생각은 갑자기 왜 났어? 아직 제삿날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오늘은 6월 21일, 양력으로는 8월 10일이다. 내(장조) 제삿날은 11월 15일이었으니 올해 달력으로는 양력 12월 30일이다. 4개월도 더 남았다.
“아까 예부에서 보고가 들어왔는데, 북평관에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올해 제사에 청과 후금 태자들이 참례하겠다고 했대. 그동안 한 번도 안 오던 것들이 왜 하필 올해 오는 걸까 생각하다 보니 그 생각이 났어.”
건주 양 황실은 태조 누르하치 못지않게 장조를 귀하게 여긴다. 공식적인 호칭은 아니나, 장조를 ‘외조(外祖)’로 부르는 사례도 있다고 들었다. 여기에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조선에 와서 머물렀던 전례를 따라 태자의 즉위 전 방문이 관습화된 것이고 말이다.
다이샨의 장남 요토와 홍타이지의 장남 호거가 찾아오면서 시작한 이 관습은 그 후계자들 모두 빼먹지 않고 수행했다. 유일한 예외가 현 후금 대칸 와극달이다. 전임 대칸인 분고가 후계자 없이 급사하는 바람에 급히 제위와 황후를 상속하느라, 태자 시절이 없었던 탓이다.
다만 매년 와야 하는 게 아니고 즉위하기 전에 딱 한 번만 오는 거라, 언제 올지는 각자 정하기에 달려 있다. 청나라 태자인 파사합의 맏아들은 올해 16살, 후금 대패륵인 와극달의 둘째 아들 ? 장남은 4년 전에 낙마 사고로 죽었다 ? 은 이제 12살이라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 올해, 그것도 같이 오겠다니 신기한 노릇이다.
“청황제랑 후금 대칸이 숙질간이긴 해도 동갑이지?”
“그래.”
“걔들, 지난번 혼담 건 때문에 서로 견제하느라 같이 오겠다는 거 아닐까.”
파사합이 의도한 청나라 공주와 은이 사이의 국혼 건은 청나라 태후의 방해로 무산됐다. 그럼 이 문제에서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 두 나라가 뭔가 다른 수작을 상대가 펼 게 두려워 아예 동시에 움직일 수도 있긴 하겠다. 그런데 와봐야 할 게 없는데.
“우리 애들 중에는 이제 혼인할 애도 없는데 뭘. 준이는 이제 10살이고 권이랑 율리아는 6살이야. 혼담을 넣어도 못 받아들여.”
“꼭 혼담이 아니라, 그저 상대가 자기들 모르게 뭔가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견제만 해도 의미가 있잖아. 그리고 혹시 알아? 당장 혼인하자는 게 아니고 일단 약혼만 하자고 할 수도 있어. 약혼은 어린 나이에도 할 수 있으니까.”
가문 간의 교우관계나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로 인해 아직 어린 나이에 정혼하는 사례는 대한에서도 흔하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서 혼약을 맺었는데 태어난 아이가 둘 다 아들이거나 둘 다 딸이라 혼약이 엎어졌다는 후문도 자주 들을 수 있는 우스개다.
“별일 없이 얌전히 제사만 지내고 갔으면 좋겠네. 따지고 보면 양쪽 다 조카고 손자니까 얼마든지 편히 지내다 가게 해줄 수 있는데.”
파사합의 아들은 내게 손자, 와극달의 아들은 내게 조카뻘이 된다. 은이에게는 각기 11촌 조카, 10촌 형제가 된다. 파사합의 딸과 혼인하자는 이야기는 무산됐지만, 이들하고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다지는 건 장차 분명히 도움이 될 거다.
“어쩌면 그 둘도 그 목적으로 오는 걸지도 모르지. 형황도 태자 시절에 나락혼이랑 분고 두 사람을 만나서 제법 가깝게 지냈었다고 하니까. 그 덕분에 건주 양국과의 사이도 꾸준히 원만했었다고 하고.”
둘 다 나와 형황에게는 8촌 형제다. 나이순으로 하면 나락혼 ? 형황 ? 분고 ? 나 순서다. 분고가 장릉에 성묘하러 왔을 때는 나도 태어나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 다행히도 분고와의 사이에서 별일은 없었다고 한다.
“은이를 놓친 대신 너한테 ‘누이를 바치겠습니다’ 뭐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도 없지만 받지도 않아. 나한테는 너희만 있으면 되는데 뭐하러 혹을 늘리겠어.”
일부러 상희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상희의 오른손을 잡고 손등에다 ‘쪽’하고 입을 맞췄다. 상희가 배시시 웃으며 뺨에다 홍조를 띄웠다.
“나한테 잘해야 해. 그래야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지. 나한테 제대로 안 했으면 디에고도 인정 안 해줬을 거야.”
중전인 상희가 절대 안 된다고 끝까지 버텼으면 디에고는 내 친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상희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겼기에 대한 황실에 받아들여졌고 종친 지위도 얻었다.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 막대한 일을 해냈다. 어떻게 봐도 상희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서야 서녘으로 해가 질 때까지 상희와 이렇게 있고 싶다. 하지만 지금도 국사를 미뤄두고 있는 처지인지라 더 오래 있을 수가 없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니,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내가 움직이지 않아 발을 구르고 있는 내관이 보였다.
– 18 –
편전 안은 차분했다. 전황은 소강상태고, 가뭄은 여전하여 당장 급한 일이 없는 덕분이다.
“루스에 보낼 소총은 무사히 출발하였는가?”
“예, 폐하. 이번에도 3천 정을 수집하여 보냈습니다. 다음 달 중순에는 북정호(바이칼호)에서 루스 측 대관을 만나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표트르가 서한을 보내 무기 제공을 요청했을 때가 벌써 작년 봄이다. 그 요청에 응하기로 했고, 총값도 이미 받았으니 조치를 미룰 필요가 없었다. 저쪽은 한시가 급하지 않은가.
보내기로 한 소총 2만 정 가운데 4차분 1만 2천 정이 이미 바이칼호를 건너 시베리아로 떠났다. 처음에는 알렉세이가 귀국할 때 같이 보낼까 했는데, 한시가 급할 표트르의 처지를 생각하니 그렇게 늑장을 부릴 수 없을 듯했다. 더구나 총값도 이미 다 받았으니 말이다.
이대로 가면 내년 봄에 알렉세이가 출발하기 전에 소총 2만 정이 먼저 러시아로 들어갈 듯하다. 그리고 표트르 쪽 요청에 따라 더 많은 총이 넘어갈 수도 있고 말이다.
“헌 총을 치우고 새 총을 받으리라 하여 장수들은 은근히 좋아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창고에 쌓아둔 묵은 물자인데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러는가.”
창고에 쌓인 총이라고 해도, 상태는 다들 좋다. 애초에 상태가 나쁜 총은 망가질 때까지 쓰다가 쓰레기장에 처박지, 공들여 보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진짜 새로 만든 총을 받는다고 하면 기분이 다르기는 하리라.
“루스 쪽은 이대로 순조롭게 진행하면 되겠고…대남도 정씨들이 정가군을 돕겠다고 모아 보낸 의군 수가 얼마라 하였느냐?”
“483명이라 하옵니다.”
“애매한 숫자로구나.”
워낙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니, 정명완에게는 그 정도 숫자도 가뭄 끝의 단비이리라. 물론 내가 왜병 포로 2천 명을 보내긴 했지만, 5백여 명도 의미 있는 수인 건 분명했다. 더구나 그 483명은 전원이 사람 목을 자르고 싶어 환장한 대남도 토인 전사들이니까 말이다.
대남도 인구 240만 명 중에서 고산지대에 사는 토인 인구는 20만 명 정도다. 섬 전체에 임금의 권위가 확립되면서 토인 부족들에게는 전쟁이 금지됐다. 한인 이주민을 습격하는 건 물론이고 자기들끼리도 싸울 수 없었다.
머리 사냥을 할 수 없게 된 대남도 토인들은 섬 밖으로 나갔다. 수군에 입대해서 수졸과 등선군으로 전투에 나가 날뛰었다. 조정으로서는 고맙고 환영할 일인지라 이들에게 대우도 풍족히 해주었고 이들의 마을도 후하게 대했다. 마치 오도리나 왜인여진처럼 말이다.
‘산악지대 출신인 주제에 어떻게 바다에서 ?瀏린?잘들 버티는지 참 신기할 노릇이지.’
대남도 토인들은 사실상 우리 대한의 구르카인 셈이다. 그것도 정글과 산악에다 바다까지 누비는 구르카 말이다.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다.
“대남도 정씨는 본래 그 근본의 절반이 대남도 토인이라, 그 부족과 친분이 깊습니다. 그 연을 활용하여 이번에 군사를 모았다 합니다.”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정씨 일족이 벼슬길에 나서서 출세해도 대남도 도독이나 병마절도사 자리에는 절대로 앉을 수 없는 거다. 대남도를 들고 통째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말이다.
정씨 가문에서 벼슬에 올라 능력을 발휘한 자는 본국이나 북방으로 보내 대남도 외부에서 경력을 끝내도록 하는 게 불문율이다. 이번에 정명완 지원에 나선 정경원은 집안을 돌보기 위해 대남도에 눌러앉은 구성원 중 하나다.
“아무리 일가를 돕기 위해서고 도독에게 허가를 받았다고 하나, 일개 집안이 멋대로 나서 군사를 모으게 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상황을 참작하여 당장 벌하지는 않더라도, 엄하게 경고하여 같은 일을 반복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이쪽 세계에서는 대대적으로 의병이 일어난 경험이 없다. 경인왜란 때 나선 곽재우 같은 이들조차 정식 직책과 품계를 갖춘 향군장이었지 의병장이 아니었다. 당연히 개인이 나서서 병력을 모으는 행위를 좋게 볼 리가 없다. 사병을 양성하려는 의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지금은 벌하지 않겠다. 당장 정가군에 병력을 보내야 하는 터, 우리 손으로 병력을 모아야 할 판이 아니었느냐? 게다가 정가는 도독에게 분명 허가를 청하여 허가를 받은 후에 사람을 모았으니, 죄를 지었다고 하기 어렵다. 이대로 넘어가라.”
정씨가 내 후손이라서가 아니다. 분명히 지킬 절차 다 지킨 뒤에 일을 벌였으니까 놔두는 거다. 우리가 할 일은 앞으로도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거고,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 가서 병력 모집을 허가한 도독을 족칠 일이다.
아이고, 이대로 계속 고요하면 좋겠다. 비 안 내리는 거랑 전열함 건조에 돈 들어가는 거 빼면 지금은 별다른 고민도 없으니까 말이다. 여기에 연합군들이랑 단독강화만 체결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러자면 걸림돌인 프랑스 함대를 어서 유럽으로 보내야겠다. 우리 영해를 근거지로 해서 이미 신나게 해먹었으니, 이제 슬슬 돌아갈 생각들이 나겠지.
– 19 –
배가 항구로 들어섰다. 조선이 아니라 유구 상선이라고 했지만, 제물포를 자주 출입했던 배라서 뱃길에 아주 밝았다.
“여깁니다. 여기가 도성으로 들어가는 외곽 항구입니다.”
“오, 로마의 오스티아 같은 곳입니까?”
뱃전에 선 청년이 탄성을 발했다. 유럽인이 분명했지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깔은 이곳 조선인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검은색이었다. 청년은 자기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항구, 더 많은 배가 그 안을 메운 모습을 보고 감탄한 모양이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조선이 얼마나 크고 풍요로운 나라인지 이로써 알겠습니다.”
“네, 나리께서 살아가실 나라. 나리를 계시게 한 분이 다스리는 나라는 실로 위대합니다.”
청년은 항구를 바라보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이만하면 유럽에서 기대한 것보다는 못해도 충분히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듯했다.
“뭐라고요? 스페인에서 오신 형님이, 황태자가 되지 못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나리께서 대체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청년은 자기보다 먼저 조선 임금을 찾아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청년을 만난 조선 임금은 그 자리에서 청년을 자기 맏아들로 인정했으며, 그에게 장차 자기 옥좌에 앉아 나라를 다스릴 권한을 주고 태자로 책봉했다고 듣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무조건 장자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조선의 옛 왕조에서도, 국왕이 다른 나라에 버려두고 온 맏아들이 장성해서 찾아오자 자기 아들이 맞는지 시험해 보고 곧바로 계승자로 결정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조선에 다녀온 스승님께 이야기를 들었단 말이다.
“그건…확실히 고구려 때 있었던 일입니다만, 그때 동명왕의 아들 유리는 부여에서 국왕이 정식으로 혼인한 아내에게 얻은 적자였습니다. 그래서 보위를 받을 수 있었지요. 만약 그가 서자였다면 어려웠을 겁니다. 비수백께서도 그래서 태자가 되지 못하신 겁니다.”
참으로 실망스러운 이야기였다. 스페인에서 찾아온 첫째가 황태자가 된 줄만 알고 자신도 조선에 가기만 하면 대공 작위쯤은 간단히 받으리라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다.
하지만 작정하고 건너온 길을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법이다. 청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선실에서 느긋하게 보냈다. 이탈리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지위를 마침내 곤에 넣고 말 작정이었다.
“이제 곧 항구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세관에서 검역이랍시고 귀찮게 할 터인데, 잠시만 더 참아주십시오. 그곳 관원들은 나리의 신분을 모르니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정 공. 부왕께서 내 신분을 원래대로 돌려놔 주시기만 하면 그때는 귀공에게 오늘의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별말씀을요. 황실을 위해 마땅한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경원은 이 예의 바르고 잘 교육받은 청년이 분명히 임금의 둘째 황자라고 믿었다. 그가 하는 설명은 만사가 참으로 절묘하게 맞아들어가는 설득력이 뛰어났다.
이제 세관에서 도성에 파발을 보내면 황궁이 발칵 뒤집히리라. 장성해서 나타난 아들을 맞이한 태황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