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74
3부 2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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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쌓이던 부정적인 감정은 실물을 대면하는 순간 확 증폭됐다. 자칭 ‘아들’이라는 작자의 행동거지가 디에고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국왕 폐하! 제가 당신의 둘째 아들입니다!”
내금위 군사들이 재빠르게 막아서지 않았으면 달려들어 내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늘어질 기세였다. 녀석을 외면하고 냉소를 지으면서 사정전 마루 위에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았다. 조르조 살마나사르, 즉 자칭 대한의 둘째 황자는 아래쪽 돌바닥에 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저는….”
“어허, 고개를 숙이지 못할까!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혀를 놀리느냐!”
선전관이 호통을 치자 놈이 흠칫했는지 고개를 숙인다. 녀석이 고개를 숙인 틈에 천천히 얼굴을 살폈다.
눈앞에 나타난 자칭 ‘아들’은 정말 나랑 닮지 않았다. 눈이나 머리카락 색깔이야 그렇다고 치고, 다른 부분은 구석구석을 하나씩 뜯어봐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체격이야 성장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얼마나 잘 먹고 몸을 단련하느냐에 따라서 키나 덩치는 달라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눈이고 코고 귀고 턱이고, 어느 한구석도 나하고 닮은 부분이 없다. 누가 봐도 내 아들이라고 할 디에고와는 천지 차이다.
눈과 머리카락 색깔이 검다는 것 정도로는 이놈이 내 핏줄이라는 확실한 근거는 안 된다. 아니, 과연 한인 혼혈이기나 할지 그것도 의문이다. 남유럽 백인 중에는 머리 검고 눈 검은 이들도 많지 않은가. 어쩌면 머리카락도 다른 색인데 검게 염색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 총관, 이 통변. 우리가 로마에 있을 때, 혹시 저자와 닮은 여인을 내가 가까이한 적이 있는가?”
혹시나 해서 불러놓은 정호찬과 이홍석에게 속삭이듯이 질문을 던졌다. 작년에 이형준이 죽는 바람에, 견서사 일행 중 바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이 둘뿐이었다.
홍상훈, 김종건, 이진원은 공 세우러 간다고 필리핀에 가서 아직 안 돌아왔다. 박종선은 칠순이 가까워지다 보니 기억력이 희미해져서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지말복, 오돌천은 지금 어디 있는지 미처 못 찾았다. 살아있기는 하려나.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근 20년 전 일이 되다 보니….”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저었다. 디에고야 나를 닮은 얼굴이라는 빼도 박도 못할 정황증거가 있었고, 모친 이사벨의 초상화라는 확실한 증거품을 들고 왔기 때문에 나나 정호찬이 바로 알아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둘 중 아무것도 해당이 안 된다.
내 옆에 늘어선 중신들도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심문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얼간이는 아닐 정경원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의금부 수사관들이 하는 심문도 버틴 배짱과 말주변을 과연 내 앞에서도 발휘할지 모르겠다만.
“네놈이 조르조 살마나사르냐.”
“아닙니다.”
“뭣이라?”
뜬금없는 대답을 듣고 나 혼자만 놀란 게 아니었다. 임석한 승상 민성윤 이하 중신들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통역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잘못 들은 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자기 입으로 단호하게 ‘Non(아닙니다)!’이라고 한 거다.
기껏 내 아들이라고 주장해서 내 앞에까지 나온 주제에 자기가 자기가 아니라고? 그러면 넌 대체 누구냐고 일갈하려는데 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조르조입니다. 살마나사르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임시로 사용한 성일 뿐이니, 진짜 아버지 앞에서 어찌 그 성을 쓰겠습니까? 제 아버지께서 이 성을 쓰시는 이상, 저는 이 조르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구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혀가 굳었다. 받아칠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 침묵을 인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조르조라는 놈은 20년에 걸친 자신의 인생 역정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진술서에 적은 그 이야기였다.
“제 모친 카테리나는 로마에서 손꼽힐 만큼 젊고 아름다웠습니다. 귀하신 분들의 부름을 받아 극장과 연회장에서 흥을 북돋워 주는, 조금 점잖지 못하지만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셨었지요.”
그거,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고급 창부였다는 소리잖아. 네놈은 자기 엄마가 창녀였다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거냐 지금.
“그러던 중에 오르시니 가의 잔치에 불려가셨고, 거기서 폐하를 만나 며칠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프랑스로 떠나신 뒤에야 제가 생긴 사실을 알았지요.”
그 업계에서는 사생아가 드물지 않지만, 생기는 족족 처분해 버리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조르조의 모친 역시 자기가 아는 파리 출신 수도사에게 아기를 부탁했다. 마침 그 수도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참이었고, 도중에 남프랑스 랑그도크 지방 수도원에 조르조를 맡겼다.
“저는 16세가 될 때까지 예수회 수도원에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제게 그리스어를 가르치신 피에르라는 수사님이 조선에서 20년을 머물다 귀국하신 분이었지요. 그분 덕분에 조선에 관해서 여러 가지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단 마포에 사람을 보내 조회해달라고 부탁해두긴 했는데, 피에르라는 수도사가 실제로 있었을 확률이 없지는 않다. 아시아에 온 모든 예수회 선교사가 죽을 때까지 여기서 지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유럽으로 귀환하는 자들도 꽤 있다.
그렇게 수도원에서 지내던 중에, 16세가 되었을 때 모친이 병에 걸려 죽어간다는 편지가 도착했다고 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로마에 가서 모친의 임종을 지켰는데, 그 자리에서 모친이 고백한 덕분에 비로소 자신의 부친이 조선 임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프랑스에 계신 폐하께 저를 데리고 가봐야 그게 누구 새끼인지 어찌 아느냐며 문전박대당하는 게 고작이리라고 생각하고 저를 수도원에 맡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시고, 이 증거물을 제게 넘겨주셨습니다.”
조르조는 안주머니에서 커다란 루비 하나와 월장석 반지 하나, 한지로 만든 한국식 부채 하나를 꺼냈다. 루비는 내가 자기 어머니에게 봉사에 대한 보수로 금화와 함께 준 것이고, 반지와 부채는 자기 어머니가 나 모르게 훔쳤다고 했다.
“물욕 때문이 아니라 고귀한 분을 모신 기념으로 훔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팔지도 않고 루비와 함께 가지고 있었고요. 어머니는 임종하는 자리에서야 제게 모든 사실을 고백하면서 이 물건들을 유품으로 건네주었습니다.”
저놈의 어미가 내가 누군지 알았다는 소리에 당황했다. 정호찬을 손짓으로 불렀다.
“정 총관, 그대는 분명 내가 창관에서 신분을 밝힌 적이 없다 하지 않았는가?”
민성윤을 비롯한 중신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정호찬도 나지막하게 답했다.
“창관을 직접 찾아가셨을 때는 분명히 그러셨습니다만…로마에서는 이자가 말했듯이 거소(居所)에 창기를 들이신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는 폐하께서 대한 친왕의 신분이심을 상대가 알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로마에 하루 이틀 머무른 것도 아니었고요.”
그러니까 연회장이나 극장에서 파트너로 부른 창녀가 마음에 들면 그냥 침실로 데려가서 방아를 찧었다, 그 말인가? 그런 짓을 했으면 상대가 내가 누군지 알 수밖에 없지.
스페인에서는 귀족 영애나 시녀들을 건드렸다더니 로마에서는 왜 창녀들을 불러들였는지 모르겠다. 여자를 손에 넣으려고 공을 들이는 과정이 귀찮았나? 창녀는 돈만 주면 되니까? 모르겠다. 그저 속으로 성친왕 개새끼를 외치며 머리를 감싸 쥐는 수밖에 없다.
내게서 훔쳤다는 물건들을 선전관에게 건네받아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보석은 보석일 뿐이고 부채도 부채일 뿐이었다. 부채 위에 한시(漢詩)가 한 수 적혀 있기는 했지만, ‘내’가 쓴 것도 아니었다. 필체가 달랐다. 성친왕이 이런 시를 알았을 리도 없다.
“이건 도연명이 쓴 책자(責子)가 아닌가.”
도연명 자신에게 아들이 다섯이나 있는데 학문에 관심을 쏟는 놈은 하나도 없다는 시니, 공부 따위는 팽개치고 있던 성친왕에게 쥐여주기에 딱 알맞은 시구이기는 하다. 문제는 이 부채가 내 기억에 전혀 없다는 거다. 정호찬과 이홍석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 시기에 폐하께 이런 물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신들은 전혀 모르겠습니다.”
내가 던지듯이 부채를 내려놓자 조르조가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16세 때 자기 출신을 알고 나자 수도원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졌다. 하지만 세상 반대편까지 여행을 떠나기에는 망설임이 생겨서 로마에서 지내며 기회를 기다렸는데, 그러다가 디에고의 소식을 들었다.
“스페인에 형님이 계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님께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먼저 조선에 가셨고 태자에 봉해지셨다는 이야기를 듣자 ? 그건 헛소문이었음을 여기 와서 알았습니다 ? 저도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행 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조르조의 노력도 혀를 내두르게 했다. 자기가 유럽을 떠날 때 전황이 어땠는지를 설명하면서, 아프리카를 빙 돌면 몇 달은 더 걸릴뿐더러 한참 진행 중인 전쟁에 말려들 위험도 있어서 대신 이집트를 거쳐 인도양으로 나왔다고 했다.
튀르크 배를 타고 모카에 도착해서는 거기서 포르투갈 상선으로 갈아타고 믈라카로 갔다. 여기서 육로로 조호르로 갔고, 정경원을 만나 유구 배를 타고 올라왔다는 이야기였다.
“이 모두 하루라도 빨리 폐하를 뵙고 이 아들이 찾아왔다고 알리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굳이 제 이름을 프랑스에서 쓰던 조르주가 아니라 이탈리아식으로 조르조라고 말했던 것도, 폐하께서 제 이름을 보시고 출신을 바로 알아보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중신들도 이야기를 중간에 끊지 않고 묵묵히 들었다. 일단 끝까지 들어야 뭘 해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프랑스어 역관이 마침내 통역을 다 마쳤나 싶을 때 조르조가 마지막 호소를 덧붙였다.
“폐하, 이 아들, 16년 동안 계신 줄도 모르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다가 비로소 아버지께서 세상에 계심을 알았고, 다시 4년 동안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였습니다. 그 뒤에 비로소 길을 찾아 떠나왔으니, 부디 제게 걸맞은 지위와 재산, 아내를 내려 은총을 베풀어주소서.”
길고 긴 조르조의 이야기가 마침내 끝났다. 의금부에서 작성한 진술서 내용과도 완전하게 일치했고, 개연성도 충분했다. 소설이라고 치면 핍진성이 그럴듯했다. 문제는 그놈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증명할 증거도, 증인도 없다는 사실이다. 순전히 조르조 개인의 주장일 뿐이다.
각본만 잘 짜면 논리적이고 감동적인 줄거리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조르조에게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각본을 짜고 다듬고 머릿속에 욱여넣을 시간도 넉넉했다. 그 자신의 주장에 따르더라도 1년 이상 배를 탔으니까.
“그대가 고생 끝에 여기까지 찾아온 줄은 알겠다. 하지만 짐은 그대가 유럽에서 출생한 짐의 친자라고 인정할 수 없다.”
조르조를 직접 만나기 전부터 내 의향은 이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만나본 뒤에 확실히 생각을 굳혔다.
“아버지, 아니 폐하! 저는 분명…!”
“그대의 입이 뭐라 말하든 소용이 없다. 그대는 용모도 짐과 전혀 다르며, 확실하다고 볼 만한 증거도 전혀 없다. 그런데 어찌 짐의 피를 받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증거가 있다기에 설마 했었다. 하지만 알보석 루비 한 알, 누가 세공했는지도 알 수 없는 반지 하나, 아무리 봐도 공장에서 만든 수출용 양산품인 것 같은 부채 하나를 두고 자기가 내 아들이라는 증거라니. 이거 너무 성의가 없지 않은가?
‘이 새끼가 날 바보 천치로 봤나?’
출생증명서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건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다. 디에고는 빌라다리아스 후작이라는 확실한 후견인이라도 있었지만, 조르조에게는 그런 사람도 없다.
“폐하, 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제가 자란 수도원에 사람을 보내 물어보시면 제 신원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조르조는 발악하듯이 외쳐댔다. 하지만 그 주장을 받아들여 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증거도 없이 황족을 사칭함은 대역죄에 해당한다. 법에 따라 처결하자면 그대를 당장에 참수해도 모자랄 것이 없으나, 그대의 모친이 뭔가 착각하였거나, 그대가 모친의 이야기를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니 일단은 벌을 면하여 주겠다.”
“아니옵니다, 폐하. 저자를 참하여 또 나타날지 모르는 도적놈들에게 일벌백계하소서!”
대사헌 정견미가 끼어들어 조르조를 처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내가 이놈 때문에 분노한 것과는 별개로, 아직은 사기꾼이라고 확정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순진한 멍청이일 수도 있기는 있지 않은가.
확실한 사기꾼이라면 당연히 처형한다. 하지만 뭔가 착각하고 여기까지 온 거라면 내쫓는 것으로 족하다.
“이 황궁에는 그대가 머물 자리가 없다. 조호르까지 가는 뱃삯 정도는 내줄 터이니, 배를 구하는 대로 로마로 돌아가라. 그동안 머물 곳이 없다면, 의금부 감방에 계속 있어도 좋다.”
“아버지! 아니, 국왕 폐하! 저는 분명 폐하의 아들입니다!”
“듣기 싫다. 여봐라, 이자를 끌고 가서 다시 가두어라.”
내금위 군사들이 울부짖는 조르조를 끌고 나갔다. 대사헌이 다시 한번 조르조를 처형하여 도적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라고 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지금은 저자를 처형하는 게 적절치 못하다.”
비슷한 계획을 꾸미고 있을 사기꾼들에게 본보기로 삼으려고만 한다면 처형해서 모가지를 효수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내가 죽이려고만 하면 죽이는 거야 금방이다. 증거도 우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놈은 로마 출신이고, 그렇다면 일단은 교황령 국적인 셈이다. 그런 놈을 확실한 증거도 없이 처형하면 교황청과 외교분쟁이 생길 수도 있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적당히 겁을 주어서 그냥 추방하시고, 이런 허술한 사기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시기만 해도 이를 모방하려는 자들이 또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민성윤은 물론이고 좌승상 성시균도 내게 동조했다. 성시균은 유럽을 몇 번 다녀온 만큼, 외국인을 함부로 처형했을 때 당사국과 어떤 분쟁이 벌어질 수 있는지도 잘 알았다.
물론 교황청과 분쟁이 벌어져도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은 없다. 하지만 국내에 천주교가 얼마나 퍼져 있는지 생각하면, 굳이 불필요한 분쟁을 일으킬 필요도 없는 거다.
“피로하구나. 좀 쉬어야겠으니 다들 물러가라. 정 총관, 이 역관. 그대들만 좀 남으라.”
“예, 폐하.”
“증거는 없으나, 저놈은 분명 가짜이리라고 생각한다.”
“신들도 그렇습니다.”
중신들 앞에서는 성군 코스프레를 하느라 최대한 자애로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20년 전부터 내 곁에 있었던, 말 그대로 내 밑바닥까지 알고 있는 이 두 사람 앞에서라면 연기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가짜라 해도, 고의로 짐을 속이고 또한 이 나라 대한의 사직을 능멸하려 했다는 증거가 없다면 처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그 증거를 찾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지금은 전란 중이라 해로로는 유주에 갈 수 없으니, 북방으로 가서 루스를 통해 유주에 다녀오겠습니다.”
이홍석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유럽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전혀 없다. 왕복에 3년이 넘게 걸리는데, 고작 그따위 일 때문에 왜 그대가 그 고생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할지는 이미 생각해두었다. 이홍석이 과거 금위사 끄나풀이었다는 전력을 이용한 해법이다.
“남으로 가는 교역이 끊긴 상태니, 조호르로 떠나는 배가 당장 있을 것도 아니다. 그동안 저자를 잠시 그대의 집에 유숙하게 하고, 마음을 풀어지게 한 뒤 그 틈을 노리라. 그리하면 저놈이 순진한 멍청이인지 아니면 진짜 못된 마음을 품은 도적놈인지 알 수 있으리라.”
한집에 살게 되면 어딘가 허술한 구석을 보일 수밖에 없다. 이홍석은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며 즉시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그만뒀다지만 이홍석 본인이 본래 금위사 요원이었으니, 빈틈이 생긴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추방한 뒤에라도 그놈이 사기꾼인 게 밝혀지면 교황청에 통보를 넣어 사칭죄로 처벌하게 한다. 그게 되려면 그놈을 추방할 때 호송관 겸 수사관을 딸려 보내 현지에서 증거 수집과 조사를 시켜야겠지.
“정 총관, 그대는 그대 관할에 있는 북한산성과 군기시를 비롯한 주요 시설에서 경비를 강화하라. 확실하지 않아 면전에서 논하지는 않았으나 저자가 혹시 서반아에서 보낸 간자일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니, 대비가 필요하다.”
“예, 폐하.”
이쯤이면 대비에서 모자란 점은 없을 거다. 사기꾼이라는 증거를 못 찾은 상태에서 놈이 순순히 귀국하면 그걸로 땡이고, 귀국하기 전에 증거를 찾으면 당연히 처형이다. 첩자라는 증거를 찾아도 역시 처형이다. 자, 어느 쪽으로 언제쯤 결말이 나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