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86
3부 3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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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담 진행과 별개로, 우리 황실에서도 족보 정리가 좀 있었다. 요절하는 바람에 후계자를 두지 못한 형황의 두 아들, 효장태자 이원과 경친왕 이천의 제사를 받들기 위해서 봉사손을 들이기로 한 거다.
“올해 열한 살인 영해공의 삼남을 경흥공으로 봉하여 효장태자의 제사를 잇게 하고, 역시 열한 살인 강녕공의 차남을 길주공으로 봉하여 경친왕의 제사를 잇게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은이야 태자니까 국혼을 서둘렀다고 치자. 하지만 둘째인 준이까지 혼담이 오가는데 죽은 형황의 두 아들은 봉사손도 없다면 그게 말이 되냐 말이다. 그동안 논의가 없지는 않았으나 이제는 결정을 지을 때가 되었다.
봉사손으로 선정된 두 사람은 모두 현왕의 손자다. 내 자식들을 빼면 현왕이 가장 가까운 근친인 데다가 나이 역시 적당해서 골랐다. 왜 내 자식들을 보내지 않았느냐고?
작은집에서 큰아버지 양자로 들어가는 거야 물론 흔한 사례다. 내가 직접 본 사례로 원균 동생 원연이 그렇게 양자로 갔었다. 그러고 보니 원균 그 새끼도 참 안되기는 했지. 어떻게 인생이 그따위로 풀렸는지.
이번에 제위에 오르고 나서 그동안 익문사가 일본에서 입수해서 축적한 문서를 보니, 참 뜻밖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있었다. 『왜지일록(倭地日錄)』이라는 책이었는데, 진위는 불확실하지만 적힌 바에 따르면 원균이 일기도주 시절 쓴 일기라는 게 아닌가.
그놈이 눈앞에 있었다면야 당연히 찢어 죽이겠다고 덤볐겠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겨서 읽어보았다. 그리고 원균이 딱히 부와 권세를 얻을 심산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게 아니고, 탈출할 길 없는 왜국에서 살고자 했을 뿐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뜻밖의 놀라움을 얻었다.
‘정말 그런 거였다면, 경상도에 와서라도 귀순했으면 목숨은 살려줬을 텐데.’
물론 그때 내가 원균이라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증오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원균의 두 번째 동생인 원준이 중과부적 상태에서 싸우다가 자폭으로 의기를 보인 데다, 원연도 있는 힘껏 싸우고 있었으므로 원연이 나서서 빌었다면 탈출해온 원균을 살려줬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랬으면 처형하는 대신 북방 구석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겨울에는 눈이나 쓸고 여름에는 말똥이나 치게 했겠지만.’
하지만 원균은 뭐가 무서웠는지 친구가 된 히데요시 옆에 죽어라 붙어있었고, 결국 일본 땅에서 뼈를 묻…지도 못 했다. 절친과 함께 백골이 되어서 강무관 수장고에 처박혀 있으니 말이다. 히데요시는 말려서 죽였지만 참시(斬屍)하여 몸은 버리고 수급만 보존했다.
누구의 배려인지, 두 놈의 두개골을 넣은 상자는 옆자리에 나란히 있다. 노부나가 ? 나도 알지만 노부나가의 수급은 가짜다 ? 를 비롯한 다른 왜장들의 수급도 상자에 담아 꼬리표를 달아서 강무관 수장고에 잘 쌓아두었다. 노획품인 칼이나 갑옷과 함께 말이다.
이게 상당히 끔찍한 물건들이다 보니 보존하지 말고 없애버리자는 움직임이 그동안 몇 번 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장조께서 직접 수집하라 명하신’ 전리품이고 보니 임금들은 물론이고 중신들도 없애자고 나서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서로 미루면서 백 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도 칼이나 갑옷은 몰라도 해골은 딱히 더 가지고 있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해골이 새끼를 칠 것도 아니니 그다지 급할 건 없는 문제다. 에구구, 삼천포로 그만 빠지고 본래 하던 생각으로 돌아가야지.
내 아들들을 보내지 않는 이유야 간단하다. 항렬이 안 맞는데 양자는 무슨 양자인가? 내 자식들과 죽은 형황의 아들들은 사촌이므로 당연히 서로의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
게다가 현왕 쪽에서도 자기 후손들을 형황의 양손자로 밀어 넣으려고 여기저기서 은근히 로비를 많이 했다. 그야 당연히 그게 자기 집안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현왕 쪽에는 후손이 많다. 현왕은 처첩만 다섯이나 두면서 무려 6남 8녀를 낳았고, 이렇게 왕성한 정력은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딸들은 제외하고 아들들 쪽에서 얻은 손자녀만 계산해도 12남 7녀나 된다.
이 많은 자손에게 한 살림씩 챙겨줘서 분가시키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왕은 치부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재산도 많지 않다. 분가할 때 부황이 나눠준 재산을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일부러 그런 거라면 그것도 재주다만.
상황이 그러니 손자를 하나라도 양자로 보낼 자리가 나온다면 관심이 동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자리가 정치적으로 위험할 일도 없는, 죽은 선황의 태자와 친왕의 봉사손이라면 꺼릴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입양되는 녀석들 처지에서도 좋다. 본가에 있으면 작위는 후작에다 재산은 얼마나 받게 될지 알 수 없는데, 태자와 친왕의 봉사손이 되면 작위가 부친과 같은 공작으로 뛰어오르는 데다 재산도 별도로 받는다. 어찌 횡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주상이 선황의 후사를 챙기니, 이 어미가 참으로 기쁩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모후에 이어 태후, 그리고 정말 오래간만에 입궐한 덕비까지 연이어 내게 감사를 표했다. 덕비는 여전히 태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아닙니다. 형제의 도리로서 마땅히 서둘렀어야 하는 것을, 얼른 처리하지 않고 끌었으니 그저 죄스러울 뿐입니다.”
하려면 빨리 처리할 수 있었던 문제를 미루다가 7년이나 보내버렸다. 그동안 서두르라고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려준 모후와 태후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제 내가 챙길 ‘집안일’은 딱 내 자식들 혼사만 남은 셈이다. 그 맨 앞에 있는 게 준이와 율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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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의 혼사 문제에 관해서 조정에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일단, 이 한반도 역사에서 외국 왕실(황실)과 정식으로 제대로 혼인하는 최초의 사례가 될 상황이라 전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건주로 시집간 혜원이와 혜연이의 경우는 엄밀히 말하면 상황이 다르다. 그때 누르하치는 아직 건주국왕으로 책봉되기 전이었다. 고로 격이 같은 왕실간의 혼인이 아니라 격이 낮은 부족장에게 딸을 하사한 셈이었다.
고려 때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든 ‘충(忠)’자 돌림 왕들은 정반대 사례다. 고려를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붙들어두기 위해서 원나라 쪽에서 공주를 ? 진짜든 가짜든 ? 하사한 사례였다. 고로 한반도에서는 외국 왕실과 동등한 관계에서 제대로 ‘국혼’을 맺은 사례가 없었다.
억지로 찾는다면야 백제 성왕의 딸과 진흥왕의 결혼,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결혼 정도가 사례가 되겠다. 하지만 후자는 역사보다는 전설에 가까우니 전례로 삼기 애매하다. 게다가 백제와 신라 사이는 국혼을 했든 말았든 죽어라 싸웠으니 국혼의 의미도 없고.
정말 억지로 끌어다 붙이려면 내가 올렝카를 데려온 사례를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심각하게 무리수다. 올렝카는 얀 소비에스키의 사생아였고, 폴란드 왕국 공주로서 정식으로 나한테 시집온 게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중국의 옛 고사를 살피면 사례를 찾을 수 없지 않습니다. 또한 유주에서는 흔하게 있는 일이기도 하니, 이를 원용함이 옳겠습니다.”
예부대신 윤시현의 말이었다.
“일단 국혼 제안을 거부할 필요는 없을 듯하옵니다. 혼인을 맺어 두 나라 사이의 우의를 굳게 다지자는 청제(淸帝)의 제안은 우리로서도 쓸모가 있습니다.”
우리가 후송과 강화를 맺은 뒤로 청나라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불안해하는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 당장 생기는 이득만 생각한다면 후송 쪽이 청나라보다 우리에게 더 줄 게 많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후송과 동맹을 맺고 청나라를 협공하는 사태라도 벌어지면 청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박살이 난다. 우리도 알고 청나라도 알고 후송도 안다. 심지어 청나라는 후송이 내게 공주를 측비로 바쳐 동맹을 맺으리라는 소문을 믿고 두려워한 전력도 있다.
물론 국혼 자체는 오래전부터 준비했을 수 있다. 우리와의 외교 일선에 나설 필요도 없는 공주가 우리말까지 할 줄 안다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에 속했을 공산이 크고, 결단을 내리게 한 건 지금의 외교적 상황이 분명하다.
“공주를 친왕비로 받아들이면, 청나라 황실도 우리가 저들을 버릴 뜻이 없음을 알고 크게 안심할 것입니다. 이대로 받아들이시지요.”
성시균 역시 찬성하는 편에 섰다. 하지만 조정 전체가 그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완친왕께서 꼭 그러시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황자가 외국에 강력한 처가를 둔다면 혹 불상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지난번 그 협잡꾼이 왔을 때 잉내군이 그자를 내세워 우리 사정에 개입할 위험이 있었듯, 타방(他邦)이 내정에 개입할 우려가 어찌 없겠습니까?”
청나라 측에서 사위를, 외손자를 위해 우리 내정에 개입할 수 있지 않으냐는 이야기였다. 극단적으로 간다면 청나라 군대가 개입해 황위를 놓고 벌이는 내란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말이다.
“좌찬성에게 묻겠다. 무인지변은 어디 외병(外兵)이 들어와서 벌인 난리였느냐?”
“물론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위험은 있을 수 있고, 피하거나 대비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인왜란 때 역도 이진의 사례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좌찬성 김회정은 반대라기보다는 회의적인 태도였다. 세 정승이 다 찬성 내지는 우호적인 기권이었으므로 김회정이 이 혼인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가장 고위 관료인 셈이다.
대략 조정에서 목소리를 내는 이들 중 3할 정도는 김회정과 의견을 같이했다. 막무가내로 억누르기에는 좀 수가 많았다. 이진(임해군)의 전례가 있었기는 하니, 설득이 필요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국혼을 맺더라도 청나라가 우리 내정에 개입하기는 어렵다. 그대들은 우리 두 나라 사이에 서해가 가로놓여 있음을 잊었는가? 그런데 어찌 청군이 우리 본국까지 들어와 정변을 일으키겠는가?”
장조 때 꾼 꿈 생각이 난다. 그 꿈에서 정씨 후손이었던 내가 함대를 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도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제위를 차지했었다. 물론 현실에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청나라에는 서해를 건널 수 있는 수군도 없지 않은가.
육로로 군대를 움직일 수도 없다. 청나라와 우리 사이에는 수백 리에 걸친 후금 영토가 있다. 물론 후금이 그 지역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성채 몇 개 정도는 쌓아두었다. 이를 모두 돌파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당연히 우리에게 소식이 온다.
“금령(金領)을 뚫은 청군이 대릉하를 건넌다고 한들, 그다음에는 저들을 맞이하려고 싸움 준비를 마친 우리 북방군을 상대해야 하지 않는가. 청군이 도성까지 오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내정 개입이라는 게 군대로만 되는 건 아니다. 돈과 영향력으로도 가능하다. 청나라 황실이 후송만큼 부자는 아니라고 해도, 공주 하나 지원할 수 없을 리는 없지 않은가.
“외방을 처가로 두지 않아도 역적이 될 놈은 역적이 될 것이고, 외방을 처가로 두었어도 충심을 지킬 놈은 충심을 지킬 것이니라. 지금 유주에서도 그렇지 않으냐.”
김회정은 임해군을 거론하며 불안감을 표했지만, 임해군이 왜군을 등에 업고 쳐들어올 수 있었던 건 그놈이 일본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놈이 근본이 아무리 쓰레기라도 일본에 안 갔으면 노부나가의 꼬임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난신적자가 되지도 않았으리라.
유럽 왕족과 귀족들이 어떻게 혼맥을 맺고 전쟁이 터졌을 때 그 혼맥이 서로 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는…사례 제시를 포기하겠다. 너무나도 복잡하니까.
이 문제는 하루 만에 끝날 논제는 아니었다. 조정에서도, 그리고 중추원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상당한 논의가 계속 이어졌다. 전쟁을 치르느라 바쁜 조정보다는 중추원에서 벌어지는 논의가 좀 더 치열했다. 나는 임석하지는 않고 문서로 보고만 받았다.
사신단이 찾아오고 두 달 가까이 지나간 4월 24일, 양력 6월 4일에야 중추원에서 결론을 냈다. 중추원 영사 윤예성이 근정전에 와서 무릎을 꿇고 논의한 바를 아뢰었다.
“신들이 그 문제에 관해 논하였던바, 완친왕께서 지방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도성에서 거하시며 혼인 후에는 완친왕 전하는 물론 친왕비 전하나 후세이신 공전하들께서도 처가가 있는 화북을 찾지 않으신다면 혼인하셔도 무방하시지 않을까 합니다.”
중추원의 건의는 이 혼인을 인정하기 위해 내건 최소한의 요구라고 할 수 있었다. 청나라 땅에 가지 말라는 요구야 임해군을 생각하면 당연한 조건이고, 지방에 내려가지 말라는 건 임금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세력을 모으지 말라는 뜻이다. 당연한 요구다.
“가납하겠다.”
우리 측의 논의가 끝났으니, 요구조건을 문서로 정리해서 청나라 사절단에게 쥐여주었다. 두 달 만에 회답을 받은 청나라 사절단은 바로 제물포로 가서 배에 올랐다. 제물포와 천진 사이를 잇는 가장 빠른 배, 증기로 움직이는 우리 우선(郵船)이다.
그런 한편으로는 북평관에 있는 후금 주재대관이 상도로 보낸 파발이 최고 속도로 북방 가도를 달렸다. 율리아와 후금 황자 중에서 하나를 맺어주고 싶다는 내 제안이 적힌 편지를 휴대하고 달려가는 거다.
그동안 알아보니 파포태의 남동생 중에 둘이 각각 올해 열 살과 여섯 살이 된다고 했다. 둘 다 나이는 율리아와 맺어줄 만하니, 아마 두 달 안에는 회답이 오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후금 황실은 자손이 꽤 많은 편이다. 3대 대칸이던 석새는 아들만 아홉이나 낳았고, 와극달도 아들이 다섯이다. 우리나 청나라처럼 후궁을 여럿 들이지도 않고 정비인 황후 단 한 사람에게서 그렇게 줄줄이 아들을 얻어내다니, 그 혈통도 보통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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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사 문제를 진행하는 동안 필리핀으로 가는 증원군도 줄줄이 제물포를 떠났다. 미주에 보내는 원정군은 항로가 워낙 먼 탓에 한 번에 4천 명씩 대규모로 보냈지만, 필리핀은 우리 본국에서 가깝다 보니 그럴 필요는 없었다. 1천 명, 2천 명씩 피스톤 수송이 이어졌다.
일단 목표는 루손으로 잡았다. 적의 역공을 경계하면서 대군으로 루손을 확실하게 평정한 뒤에 술루 왕국 원정을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휘권이 양분되면 군사는 필패하게 마련이다. 명장 2명보다 우장(愚將) 1명이 지휘하는 편이 차라리 나으니, 이번에 추가로 보내는 특파군(特派軍) 1만 2천 명도 모두 정남대장군 장희재가 지휘하도록 하라.”
“예, 폐하.”
기존에 정한 지휘관이 있었다면 불만을 품었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 병사들은 본래 미주에 간 민지상이 지휘할 예정이었고 따로 장수를 임명하지 않았다. 그랬으니 이 조치에 딱히 불만을 표할 사람도 없다.
‘몇 년째 필리핀에 머무는 장희재랑 이홍원도 좀 쉬게 해줘야 할 텐데….’
밑에 거느린 군사나 군관들은 교대로 귀국하고 있지만, 그들은 임지를 떠나지 못하고 먼 이국에서 군사를 이끌고 있다. 참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민지상이 임무에 성공해서 얼른 이번 전쟁을 끝낼 수 있기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