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19
1부 119화
– 1 –
새해가 왔지만 딱히 모든 형편이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흉년 때문에 민심은 팍팍하고 재정은 여전히 쪼들렸다. 지금 내게 즐거운 일이라면 오직 하나, 4월 달에 태어날 아이‘들’을 기다리는 것 정도였다.
“이제 여덟 달이 되었구려. 어이구, 이놈이 발길질을 하네.”
중전이 부끄러워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배에 귀를 대고 들어보았다. 조용히 잘 들으면 작게 두근거리는 태아의 심장 소리도 들리고, 배를 미는 움직임도 느껴지곤 했다. 심장 소리는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배를 밀어내는 힘을 보니, 아들인 모양이오. 이리 힘이 세니 나올 때 중전께서 힘들어지지 않을지 모르겠소.”
“처음도 아니니 괜찮을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여유로운 태도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하긴, 중전에겐 이번이 벌써 세 번째 겪는 출산이다. 궁인들에게 들으니 지나간 두 차례 출산도 순산했다고 했고, 아직 나이도 젊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겠다 싶다.
“소첩보다는 두 숙의가 걱정되옵니다. 용종을 받아 아기씨를 회임함은 실로 영광이오나, 두 숙의도 결국은 약한 여인네가 아니겠사옵니까. 아이를 낳는 아픔을 아직 겪어 보지 못했기에 무척 힘들 것이옵니다.”
“과인도 그리 생각하오. 중전이 숙의들을 찾아가 마음을 달래주고 있다는 말은 궁인들에게 들었소. 실로 자애로운 처사이니 고마울 뿐이오.”
중전과 달리 두 숙의들은 모두 출산을 처음 경험한다. 당연히 두려운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중전은 이들을 배려하여 중궁전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고 후궁 침소로 직접 찾아가서 담화를 나누며 달래 주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아내가 또 있을까.
“세 비빈들이 거의 동시에 출산을 하니, 같은 시기에 태어난 형제지간의 우애도 매우 돈독하리라 기대가 되오. 다만 작은 소원이 있다면 중전께서 낳은 원자가 가장 먼저 태어났으면 좋겠소. 대군과 군이 엄연히 다르기는 하나, 가능하면 원자가 장자인 편이 좋지 않겠소.”
나 스스로가 적서 차별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일단 나라에서 유지하는 질서가 적서를 엄연히 구분하고 있으니 별 수 없다. 사실 왕위계승에 걸린 분쟁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되는 관습이기도 하고 말이다.
중국 왕조들은 정비 소생이 아닌 왕자들에게도 평등하게 계승권을 주었다. 그러다가 보니 제위를 놓고 음모와 분쟁이 툭하면 일어나고, 피바람이 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조선에서 하듯이 정비 소생 왕자에게 우선적으로 계승권을 보장하면 그런 갈등은 확실히 줄어든다.
나는 내 아들들 중에서 광해군이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선조는 정비 소생 왕자를 얻지 못하자 왕자군들 중 둘째였던 광해군을 세자로 세웠다. 문제는 십여 년 뒤에 가서 영창대군을 낳고, 어설프게 이쪽에 힘을 실어주다가 나중에 참혹하게 죽게 만들었다는 거다.
“소첩도 원자를 낳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습니까. 다만 그 일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니, 소첩으로서는 그저 기원할 뿐이옵니다. 또한 태어나더라도 하늘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원자가 어찌 되겠사옵니까.”
아, ‘내’ 첫아들이 원손으로 태어나서 한 달 만에 죽었지. 나는 그 기억이 없지만 중전에겐 있겠구나. 7년 동안 마음속에 묻어둔 쓰린 추억이. 내가 너무 아들 타령을 했네.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없이 중전을 살그머니 안아주었다. 그래, 딸이면 어떠냐. 서출인 형들보다 어리면 어떠냐. 내가 젊으니까,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보살피면서 기반을 다져주면 된다. 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성종처럼 술도 많이 안마시니까 적어도 환갑 채울 때까지는 살겠지.
– 2 –
“전하, 이 나뭇갓 문제는 실로 심각합니다. 왕자군들 때문에 경기도 일대 백성들이 수없이 굶어죽을 지경이오니 부디 조치를 내리소서.”
미래에 내 아들에게 물려줄 튼튼한 나라를 만들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지금 내 골치를 썩이는 허다한 정치적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 나뭇간 논란이었다.
“본래 경국대전에서 나뭇갓은 각 관청에서 맡아 관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민생에 끼치는 영향이 그만큼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여러 왕자군과 공주들이 독점하여 백성들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어찌 바른 일이라 하겠습니까?”
나뭇갓(柴場)은 땔나무와 가축에게 먹일 풀을 얻는 땅을 의미한다. 연료라면 나무가 전부인 조선에서는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반자원이다. 장래에 석탄 공급이 늘어나면 대체자원이 될 수 있겠지만, 아직 개발 초기인 석탄으로는 민간에 공급할 양이 되지 못했다.
연천 지방에 노천탄광이 있는 건 안다. 원래는 몰랐는데, 어쩌다가 풍문으로 탄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쓰는 연료는 충당할 수 있겠다 싶어서 실험삼아 구해다 때봤는데 이게 정말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열이 보통 나무보다 절반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 저질탄으로는 장작을 대체할 수가 없다. 게다가 채굴에 드는 수고, 무거운 탓에 제법 비싼 운반비까지 감안하면 도성에 보급할 실용적인 연료자원으로서 가지는 가치는 제로였다. 이래서야 계속 나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선왕께서 내리신 것이라 하나, 역대 조종조에서 한 번도 시행하지 않은 일입니다. 심지어 세종대왕께서는 대군을 여덟이나 두셨으면서도 그중 한 사람에게도 나뭇갓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성종께서는 많은 왕자군에게 나뭇갓을 내리셨으니, 이는 잘못입니다.”
대간들은 웬만해서는 이미 죽은 선대 임금을 직접 나서서 비판하지 않는다. 더구나 성종은 성인 취급해서 절대 안 깠다. 하지만 지금 대간들은 서슴없이 성종을 깠고, 나도 그 평가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나뭇갓 문제가 정말 심각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경기도는 백성이 많고 경작하는 땅이 넓어 가뜩이나 땔감을 얻기 어려운데, 올해는 흉년까지 들었기에 땔감을 팔아 연명하는 이들이 허다합니다. 헌데 나뭇갓을 하사받은 왕자와 공주들은 일반 백성들이 그 안에서 나무를 베거나 꼴풀을 거두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제방 보수나 도로 정비 같은 공공근로(…)를 통해서 식량을 풀기는 했지만, 당연히 그 양은 겨우 연명할 정도밖에 안 됐다. 당연히 많은 백성들이 수입을 좀 더 얻기 위해 시장에다 땔감을 해서 팔았는데, 종친들이 나뭇갓을 독점하고 있으니 자연히 원성이 나올밖에 없었다.
“과거 종친들에게 나뭇갓을 나눠주지 않았을 때도 종친들은 아무 탈 없이 잘 살았사옵니다. 왕자군들이 시장에서 땔감을 사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나뭇갓을 주어야 하겠사옵니까? 신들이 전하께 간곡히 청하오니, 왕자군들이 가진 나뭇갓을 다시 각 관청에 되돌리소서.”
딱 잘라 답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간단히 답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간들이 이 문제로 날 다그치기 시작한 건 작년 10월부터였다. 지금이 2월 말이니까 거의 반년이 되어간다. 흉년이 얼마나 심각한지 대충 집계된 직후였다.
작년 이맘때 같았으면 서슴없이 대간들이 하자는 대로 했을 것이다. 대간들처럼 격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삼정승을 비롯한 고관들도 나뭇갓 문제에 있어서는 대간들과 의견이 일치했다. 나 역시 이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게다가 나뭇갓을 받은 왕자군들, 공주들은 죄다 내게 있어서 남남이었다. 아 뭐 물론 공식적으로는 다 ‘내’ 이복동생들이지만, 내겐 기억에도 없고 정도 없는 이들이다. 그나마 재작년까지 궁 안에 살았고 일단은 ‘어머니’가 같은 진성대군 정도만 동생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이고 뭐고 없는 형제들에게 특권을 허용해주고 싶을 까닭이 없다. 마침 맞닥뜨린 상황도 좋으니, 왕자군들이 가진 세력도 약화시킬 겸 해서 백성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신하들의 뜻에 따라 못이기는 척 나뭇갓을 회수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기가 망설여졌다. 지난번 유자광 탄핵 시도 때부터 눈치를 챈 바지만, 내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가 은연중에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물론 전부터 늘 해오던 짓이고 새삼스럽게 신경을 쓰는 것도 뭔가 바보 같지만, 그 바닥에 깔린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나뭇갓을 빼앗으면, 왕자군들이 내게 어떤 감정을 품을까? 당연히 원망을 품겠지? 그럼, 이 조치가 왕자군들 중 누군가가 불만세력과 손을 잡고 내게 맞서려는 생각을 품게 하는 단초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전하께서 물으시니 답합니다만, 약 1년 전부터 훈구 대신들 중 일부가 사적으로 은밀하게 회동하고 있사옵니다. 다만 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의를 하였는지 그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었고, 딱히 드러내서 반역적인 언동을 한 바도 없기에 아직은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서너 달 전에 우연히 몇몇 훈구 대신들이 서로 모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은밀하게 도성 안팎에서 만나는데, 그 외에 딱히 세력을 모은다든가 하는 움직임은 없습니다. 종친이나 조정 사람들을 만나고 대함도 이전과 다름이 없으나, 혹여 모르는 일이라 살피고 있습니다.”
금위사와 포도청에서 정호찬과 정유지를 각기 불러 중신들이 요즘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지 묻자 놀랍게도 거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정유지에게 좀 더 캐물으니 박헌이 그쪽 일을 맡아 사찰중이라고 했다.
두 기관이 각기 제출한 연루자 명단을 보니 몇 명 빼고는 거의 일치했다. 한 사건을 양쪽이 따로 꼬리를 밟아 수사를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양자에게 알아서 계속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편에서 같은 조사를 하고 있음은 알리지 않았다.
양 조직이 보고를 미룬 건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판단 자체는 합당하다고 나도 생각한다. 원래 조선에서는 의심만 들어도 사람을 잡아다 족치는 게 당연했지만 나까지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증거, 가능한 확고한 물적 증거가 없는 한은 사람을 잡고 싶지 않다.
더구나 지금 조정에서 훈구 대신들은 큰 움직임이 없다. 날뛰는 건 거의가 대간을 비롯한 사림들이다. 과연 이들 사이에는 어떤 고리가 있을까?
게다가 지금 사건을 터트리면 초대형 역모 사건이 될 것이고, 여러 종친들이 혐의를 쓰게 된다. 확증도 없는데 내 이복동생들을 비롯한 왕자군들이 역모 혐의자로 거론되면 대왕대비, 왕대비, 중전까지 줄줄이 나서서 구명을 청하겠지. 특히 중전은 그 태산만한 배를 가지고….
그런 난처한 상황에 처하느니, 두 기관 중 어느 한 쪽에서 역모에 대한 확증을 잡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과연 누가 음모를 주동할지 추리나 하는 편이 더 낫다. 확증만 잡으면 대왕대비가 아니라 태조 이성계가 살아서 돌아와도 안 봐줄 테니까.
일단 저들이 역성혁명을 꿈꾸는 건 아닐 거다. 만의 하나 반정이 일어난다면, 분명 누군가 종친 중 한 사람을 임금으로 내세우고자 하리라. 또한 반정 명분은 내가 ‘부덕하다’는 이유일 테니까, ‘덕이 있다’고 평가받는 이와 손을 잡든 끌어다 내세우든 할 게 분명하다.
과연 누구를 내세울까?
성종의 왕자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던 숙의 홍씨 소생들, 셋째 견성군을 필두로 한 7형제는 견성군이 처형되고 형들 둘은 변방으로 귀양을 가면서 힘을 잃었다. 견성군 밑의 네 왕자군들은 아직 나이가 많이 어린데다 거의 연금(軟禁) 상태다. 그러니 논외로 하자.
다른 후궁 소생 왕자들 중 장성한 이들도 일단 경계할 만 하다. 귀인 정씨 소생으로 22세인 안양군과 18세인 봉안군이 있고, 숙의 하씨 소생으로 역시 22세인 계성군이 있다.
성종의 모든 아들 중 셋째인 안양군은 효성스럽다고 칭송을 참 많이 들었다. 성종이 병상에 누웠을 때 극진히 병구완을 했고, 마지막에는 나를 잘 보필하라는 유명(遺命)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능침(陵寢)도 모셨는데, 덕택에 주변에서 칭찬을 아주 많이 받았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효자라는 타이틀은 아주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안양군은 이 평판과 유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무기로 삼아서 내게 참 수많은 간언을 했다. 그리고 그 간언 내용은 상당부분 대간들과 겹쳤다.
대간들과 겹쳤다…함은 곧 내 일에 방해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선왕께서 하신 예에 따라서’ 사냥을 멈춰라, 토목공사를 줄여라, 군사를 일으키지 말아라…아주 그냥 성인군자가 나셨다는 생각 밖에 들지를 않았다. 여섯째이자 친동생인 봉안군도 그 뒤를 아주 잘 따르고 있다.
계성군은 좀 다르다. 어릴 때는 총명하고 영특하다는 평을 받은 모양인데, 아무래도 주변에서 예의상 그렇게 말해준 것 같다. 경연을 가능한 빼먹은 내가 까기는 좀 뭐하지만, 종친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는 종부시(宗簿寺) 수업을 정말 지랄맞게도 빼먹더라.
공부만 안 하는 것도 아니다. 품행도 상당히 불량하여 본인은 물론 집에 거느린 하인들도 여색을 탐하고 물건을 빼앗는 등, 크고 작은 스캔들이 그칠 날이 없다. 심지어 형조 관원이 자기 종을 붙잡아갔다고 해서 마음대로 잡아다가 사형(私刑)을 가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두 대비들이 말리지만 않았으면 진즉에 붙잡아다가 죽도록 곤장을 친 다음 어디 먼데 귀양보내버렸을 망나니다. 계성군 스스로도 내가 어떤 눈으로 자기를 보는지 잘 아는지, 내 앞에 나타나면 그저 절만 할 뿐 국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성종의 후손들 중 일단 주의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면 이들 셋이다. 진성대군은 내 친동생(?)이자 중종반정의 주역(?)으로서 어쩌면 가장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이제 겨우 14세다. 나랑 사이도 좋으니 딱히 위험하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범위를 더 넓힌다면 예종의 적자였던 내 ‘오촌당숙’ 제안대군, ‘할아버지’ 덕종의 적자인 ‘백부’ 월산대군의 아들 덕풍군까지도 위험 대상으로 포함될 수 있다. 물론 이쪽은 다행히도 서자라서 위험이 좀 덜하긴 하지만.
문제는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이들을 먼저 나서서 몽땅 다 쳐내 버리면 날 원호해줄 우호세력도 다 없어진다는 거다, 역모를 꾸몄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형제, 사촌, 당숙부까지 다 죽여 버린 임금을 과연 누가 진심으로 믿고 따른단 말인가…?
이런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 있으니, 언뜻 사소해 보이는 나뭇갓 문제를 가지고 내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공연히 종친들이 조금이라도 나한테 반감을 갖게 해서 반정을 일으키거나 반정세력과 손을 잡고 싶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전하, 실로 시급한 문제이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이 문제는 과인이 좀 더 숙의한 후 결정하도록 하겠다.”
일단, 중전이 출산할 때까지라도 문제를 미뤄 두자. 지금 나한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중전이 안전하게 출산을 마치는 거니까. 올해 농사가 좀 괜찮게 되고, 원자를 얻고 나면 그 뒤에 증거를 잡아서 숙청을 벌여도 늦지 않다. 시간을 좀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