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04
3부 3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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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충격이 청해의 선체를 때렸다. 벽을 이룬 두꺼운 참나무 목재가 터져나가고, 둥근 쇳덩이가 포갑판 안으로 뚫고 들어와 앞을 막는 방해물들을 들이쳐 부쉈다. 관통당한 벽은 날카로운 목재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살려줘!”
“으아악! 내 다리!”
적이 쏜 포환이 모두 아군에게 명중한 건 아니다. 명중한 포환이 모두 선체를 뚫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몇 발은 명중해서 선체를 뚫었다. 그리고 피해를 일으켰다.
이 포탄들이 선체 양쪽을 몽땅 뚫었다면 도리어 피해가 적었으리라. 하지만 포탄에 힘이 조금 부족했는지, 선체를 뚫고 들어온 포환 대부분은 반대쪽 벽에 맞고는 다시 튀어나왔다. 그리고 포갑판 안을 이리저리 튀면서 수졸들의 사지를 끊고 몸통을 짓뭉갰다.
숨이 붙어 있는 중상자는 급히 선창으로 운반해서 선의가 상처를 싸매고 혈관을 묶는 등 응급치료를 했다. 이미 죽은 전사자의 시신도 여유가 있으면 선창에 들어갔다. 하지만 잘린 사지 따위는 모두 열려있는 포문으로 내던져 밖에 버렸다.
“정신 차려라! 연습한 대로 하는 거다! 어서 다음 화약을 재라!”
정면에서 날아드는 양적의 포탄도 무섭지만, 뒤에서 고함치는 선임 화포장(火砲長)은 더 무섭다. 적어도 포탄은 선체를 뚫고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몽둥이를 든 화포장은 바로 뒤에 붙어서 고함을 치고 있다.
일포수(一砲手)가 먼저 소제봉을 점화구에 찔러넣어 안에 남은 화약 찌꺼기를 긁어냈다. 이포수(二砲手)는 젖은 양가죽을 씌운 소화봉으로 포 안에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불티와 재를 싹 제거했다. 이 작업을 소홀하게 하면 새로 넣는 화약이 폭발할 수도 있다.
다음 과정은 포구에 화약을 부어 넣고, 장전봉으로 다진 뒤 격목(激木) – 이름은 여전히 격목이지만, 이제는 나무를 깎지 않고 낡은 밧줄을 풀어 만든다 ? 을 넣어 포환이 들어갈 자리를 잡는다. 여기에 18근짜리 철환을 넣고 다시 격목을 넣어 굴러 나오지 않게 한다.
점화구에 새로 심지를 꽂으니 포를 쏠 준비가 다 끝났다. 이제 4천 근이 넘는 포와 동차(童車)를 앞으로 밀어 포문 밖으로 포구를 내놓어야 한다. 10명이나 되는 수졸이 달라붙어 죽을힘을 다해서 밀자 포가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계속 고함을 치면서 빨리 장전하라고 수졸들을 닦달하던 화포장이 포 위로 머리를 내밀고 지금 쏘면 포탄이 날아갈 방향을 살폈다. 배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포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주기를 살피던 화포장이 몸을 빼면서 벽력같은 고함을 쳤다.
“불을 댕겨라!”
“예!”
점화봉이 닿자 화구에 물려둔 심지가 바로 타들어 가면서 굉음과 함께 포탄이 날아갔다. 대포 자체도 반동으로 튀어 올랐지만, 굵은 마닐라삼 밧줄로 단단히 고정해둔 덕분에 바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행히 후퇴하는 포에 맞아 다친 사람은 없었다.
“맞았습니까요, 화포장 나리?”
“모른다, 자식아! 얼른 다음 포탄이나 장전해!”
수졸들은 방금 한 일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적이 먼저 물러나거나, 아니면 갑판 위에 있는 통제사가 배를 돌리라고 명령할 때까지 계속 반복해야 할 일이었다. 적이 쏜 포탄에 맞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 16 –
동양에 수군이 생긴 지 천 년이 넘었지만 이런 전투는 처음이다. 나무로 만든 성과 같은 거대한 전선들이 줄지어 전진하고, 화포 여러 문이 일시에 불을 뿜을 때마다 천둥과 벼락이 천지를 뒤집었다. 양군을 합쳐 40척 가까운 전선들이 쉴 새 없이 불길과 연기를 토했다.
영국, 네덜란드 측 함열은 전열함 14척으로 이루어진 단종진이다. 이에 반해서 대한 측은 전열함 10척으로 이루어진 단종진이 전위를 담당하고 대형 프리깃 10척이 형성한 복종진이 후위를 맡는 다소 복합적인 구성이었다.
위치만으로 보면 바람 위쪽에 있는 영란 연합함대의 형세가 훨씬 유리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 전투가 진행되는 양상은 그다지 연합함대 쪽에 유리하지 못했다.
“제기랄, 무슨 프리깃이 저따위야!”
처음에 전위에 있다가 함대가 반전하면서 역할이 바뀌어 함대 후위에 위치하게 된 페어본 제독이 주먹으로 뱃전을 내리쳤다. 지금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 프리깃함은 전열함 간의 전투에는 끼어들지 않는다. 프리깃함의 임무는 속도를 살린 정찰과 연락이고, 적의 상선을 습격하는 통상파괴전을 벌이거나 역으로 그런 습격함을 치러 다니는 데 유용한 배다. 그래서 무장도 가볍다.
페어본 제독은 전위를 맡아 조선 함대 선두를 지나치면서 그 함열의 ⅓이 프리깃함임을 알고 폭소를 터트렸다. 저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조선 제독의 처지가 가엾어서였다.
양측의 전열함 숫자는 14대 10이다. 전열함만으로 전투를 벌이면 조선 함대는 삽시간에 영란 연합함대에 포위되어 협격을 당하고 말리라. 그러니 전열 길이를 같게 만들어 이쪽이 자기네 전열을 간단히 둘러싸지 못하게 해야 하는 사정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래 봐야 프리깃은 프리깃이다. 보아하니 덩치는 대략 1천 톤, 아군 60문 전열함 비슷한 수준은 된다. 하지만 프랑스식 프리깃은 주무장이 12파운드 포이므로, 전열함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페어본 제독은 저 정도는 아주 간단히 격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저놈들이 24파운드 포를 싣고 있느냔 말이다!”
24파운드 포를 한쪽 현측에 10문도 넘게 싣고 있는 미친 프리깃이라니, 저런 걸 여기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여기에 12파운드 포도 10문 이상 탑재했으니, 방어력은 다소 약할지 몰라도 화력은 아군 60문 전열함에 뒤지지 않는 셈이었다.
“그런 놈이 10척이나 있다니…!”
단함 대결이었다면 문제가 안 된다. 선체도 이쪽이 더 튼튼하고 승무원도 이쪽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지금은 페어본 제독 쪽이 확연히 불리했다. 기함인 서섹스가 80문 함, 나머지 4척은 70문 함과 60문 함이 각각 2척이므로 한 번에 쏠 수 있는 화포 숫자는 170문이다. 여기서 장거리에서는 별 효과가 없는 소구경포를 빼면 150문이 안 된다.
하지만 적은 확실하게 유효타를 낼 수 있는 함포만 200문 이상 가지고 있다. 원거리에서 포격전을 벌인다면 유리할 게 없다. 심지어 조함술도 뛰어나서 엇갈린 2열 종대를 유지하며 두 척이 아군 한 척씩을 표적으로 쉴 새 없이 포탄을 퍼부었다. 페어본 제독 휘하 함선들은 말 그대로 난타를 당했다. 그나마 거리가 멀어서 피해가 적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적선의 돛대 위에 올라간 머스킷총 사수들은 아군 갑판 위에 연달아 탄환을 날렸다. 양쪽 배 모두 심하게 흔들리는 데다, 아직 거리도 멀고 포를 쏘면서 나오는 연기가 시야를 가리기도 해서 명중탄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함장! 적 전열에 접근해야겠소.”
서섹스는 비교적 작은 화포들을 빼고 32파운드급인 데미캐논 24문, 18파운드급인 컬버린 30문을 탑재하고 있다. 지금은 거리가 멀어서 잘 맞지도 않고 위력도 제대로 안 나오지만, 작정하고 가까이 가면 제대로 적선을 제압할 수 있다. 소구경포와 소총도 쓸 수 있다.
“각하. 아직 기함에서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총사령관께서 적과의 근접전을 피하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전열을 유지하는 건 단종진 전투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를 벗어나라는 지시를 받자 함장이 얼굴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페어본 제독은 생각이 달랐다.
“지금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덕분에 저놈들이 함열을 유지하고 있지만, 돌입하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흐트러지고 말 거요. 아무리 화력이 강해도 프리깃은 프리깃이오! 근접한 뒤에 일제사격 한 번이면 그대로 무력화할 수 있단 말이오!”
프리깃 함열이 무너지면 전열함들도 도주할 수밖에 없다. 프리깃들을 격파한 후위부대가 조선 전열함대의 우측으로 들어가면 협격을 가할 수 있고, 조선 해군이 그런 궁지에 몰리지 않으려면 곧바로 물러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함장은 다소 불안한 기색이었지만 제독의 명령에 따라 휘하 사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중앙 부대에 ‘후위는 적 함열에 돌입하겠다’라는 신호가 전해졌다. 서섹스를 선두로 해서 전열함 다섯 척이 조선 함대 후위의 프리깃함들을 향해 뱃머리를 틀었다.
“아무리 협상이 목적이라고 해도 이길 수 있는데 일부러 져줄 건 없지 않은가!”
조선인들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아군의 사기와 잉글랜드 함대의 명예는 더 중요하다. 이제 갓 전열함을 만든 아시아인들 따위에게 패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일단 이겨 놓고 나서 저들에게 강화하지 않으면 재미없을 거라고 위협하는 것도 괜찮다.
오포드 백작으로부터는 아무 신호도 오지 않았다. 묵인하겠다는 뜻이거나,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해서 지시할 말을 정하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기회라고 생각한 페어본 제독은 그대로 전진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전면에 있는 조선군 프리깃들 위로 커다란 불꽃이 연기를 뿜으며 솟아올랐다. 60문 전열함 요크의 돛을 불태워 항행 불능 상태로 만들고, 28문 호위함 세이렌을 격침한 바로 그 로켓이었다.
“키를 꺾어라! 좌현으로!”
함장의 명령에 따라 조타수가 필사적으로 타륜을 돌렸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로켓 십여 발이 서섹스가 진입하려던 지점 근방에 연달아 떨어졌다. 급하게 방향을 바꾸지 않았으면 지난번에 요크가 당한 일을 그대로 당할 뻔했다.
로켓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사격이 연이어 조선군의 함열을 넘어 이쪽으로 날아왔다. 당황하여 로켓을 피하는 후위 함선들을 향해서 조선군 프리깃들이 신나게 포격을 퍼부었다. 선두에 있던 서섹스가 가장 많은 포탄을 맞았다.
영란 해군 수뇌부는 조선군이 포모사에서처럼 로켓함 전대를 따로 운용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켓함 전대를 발견하면 프리깃함을 이용해 제거할 생각이었는데, 그놈들이 본대 뒤에 숨어있으니 계획대로 처리하기가 곤란해졌다.
“로켓함을 격파하려면 적 함열을 돌파해야 합니다. 각하, 결행하시겠습니까?”
함장의 질문을 받은 페어본 제독이 입술을 깨물었다. 로켓을 피하려고 지그재그로 배를 몰면서 접근하면 그만큼 오래 포화를 뒤집어쓰고 피해가 누적된다. 그렇다고 곧바로 적진을 향해 뛰어들면 진로를 예측하기 쉬워져서 로켓을 얻어맞는다.
문제는 방금 조선군이 퍼부어댄 포격을 맞고 돛과 삭구가 상당히 손상되었다는 점이었다. 쏟아지는 로켓을 피할 만큼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기함에서 통신! 즉시 함열로 복귀하랍니다!”
고민하는 사이 오포드 백작으로부터 귀환 명령이 떨어졌다. 그제야 과감하게 그냥 적진에 들이대 볼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우유는 쏟아진 뒤였다.
– 17 –
잉내군 함대는 풍상 쪽에 위치를 잡았으면서도 과감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세 시간이나 포화를 교환했는데도 적은 선뜻 돌입하지 않고 원거리에서 포격만 가했다. 유독 큰 선체에 화포도 많이 실은 좌선 두 척조차 말이다.
포탄에 맞은 선체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고 사상자도 발생했다. 하지만 목조로 된 배에 구멍이 몇 개 뚫린다고 해서 배에 별다른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다. 지금 청해를 비롯한 각 전선은 아무 문제 없이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참모장, 저들이 과감하게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시오? 역시 손실을 내는 게 두려워서인가?”
이홍원은 평범한 검은색 군관복을 입고 있어서 색경 외에는 근처에 있는 다른 군관들과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 전투 중에 아군 장수를 골라 노리는 적 선방포수의 눈길을 피하고자 일부러 눈에 띄지 않게 입은 거다.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야 본국에서 배와 병력을 얼마든지 불러올 수 있습니다만, 저들 잉내인들은 세상 반대편에서 몇 년이나 걸려 원병을 데려와야 하니까요.”
참모장 김홍진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생각해보면 전쟁 초반부터 잉내 양국인들은 전쟁을 시작하는데 별 열의가 없었다. 딱히 싸우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3년 전 대남도 해전 때도 신기전 한 발을 맞았을 뿐인데 그대로 물러났다. 그대로 덤볐으면 아군도 손실이 컸으리라.
물론 마다구 해적들을 불러다가 풀어놓은 건 참으로 고약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잉내국 전함들은 필리핀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잉내 양국 함대는 대한과 직접 싸우고 싶지 않고, 순전히 스페인과의 의리 때문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후군에 있는 홍 수사도 돌입하는 적 후군을 무난하게 몰아낸 것 같습니다.”
“훌륭하군.”
신기전을 탑재한 갈래선을 함열 우측에 놓아 적에게 직접 드러나지 않으면서 곡사로 적을 공격하게 한 건 이홍원의 지시였다. 그동안 화약 부족 때문에 포격 훈련이 제한되는 중에도 신기전 발사 훈련은 실탄으로 꾸준히 진행했고, 오늘 그 성과를 보았다.
대포는 정조준해서 쏘면 웬만큼은 맞는다. 하지만 신기전은 날릴 때 바람 방향이나 날씨 상태 등에 따라 천차만별로 날아가는 양상이 달랐다. 특히 대신기전을 목표 위에서 제대로 터트리려면 익숙해질 때까지 실탄으로 직접 쏴보는 수밖에 없다.
“후군을 불러들이는 것을 보면, 적장은 지금 우리와 과감히 싸울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손실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면 진즉에 전선을 더 가까이 붙이고 근거리에서 화포를 쏘면서 등선군을 보내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렸겠지요.”
잉내군은 전열을 벗어났던 후군을 원위치로 복귀시킨 뒤, 아까처럼 비교적 먼 거리에서 포격전을 계속했다. 멀리서 포탄만 쏘다 보니 여태까지 양측 모두 가라앉거나 대파된 배는 하나도 없었다.
잠시 깃발을 휘날리는 적 좌선을 바라보던 이홍원이 한 마디 던졌다.
“이대로는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으니 미끼를 한번 던져보면 어떻겠소.”
잉내군이 아직 전투를 계속하고 있으니 우리가 먼저 물러날 수는 없다. 지금 대한 수군이 물러난다면 모두가 대한 수군이 패했다고 여길 것이다. 아군 장졸들도, 적군도, 해변에 잔뜩 몰려들어 싸움을 구경하는 저 안남인들도 말이다.
“적과의 거리를 살짝 벌리시오. 마치 우리가 싸움을 포기하고 순풍에 힘입어 물러나려는 것처럼. 그러면 저들이 반응을 보일 테니, 그에 맞춰 대응합시다.”
아군이 철수한다고 생각한 적도 바람을 타고 추격에 나선다면, 즉시 반전하여 정면에다가 일제사격을 퍼부은 뒤 배를 붙여서 접현전을 건다. 등선군이 넉넉히 타고 있으니, 접현전을 벌여도 승산이 충분하다.
“적이 추격하지 않고 물러나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리되면 잠시 상황을 살피다가 우리도 다시 돌아와야지. 추격을 꺼린다는 건 잉내군이 지쳐서 더 싸울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소? 우리가 떠나는 척하다 말고 다시 와서 도전하면 저들은 분명 응전하는 대신 바타비아로 물러날 거요.”
이홍원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그동안 잉내 양국이 보인 태도를 바탕으로 해서 합리적인 추론을 했다. 그리고 그 결론에 따라 함대에 기동 명령을 내렸다.
– 18 –
조선 함대의 움직임은 곧바로 연합함대의 눈에 포착되었다. 아소시에이션의 함장 리처드 휴즈가 오포드 백작에게 가서 보고했다.
“각하, 조선 함대가 북쪽으로 움직여 연안을 따라 전장을 벗어날 모양입니다.”
휴즈 함장에게 보고를 들은 오포드 백작은 자기 눈으로 조선 함대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그동안 함대 진형 유지와 전력 보존에 집중하던 조선 함대가 마침내 전장을 이탈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추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들을 해안에 몰아넣어 좌초시킨다거나….”
“함장. 그대도 아까 페어본 제독이 부주의하게 굴다가 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소.”
후위에 있던 페어본 제독의 전대는 성급하게 조선군 프리깃의 함열에 접근하다가 로켓에 맞을 뻔했다. 그리고 회피기동 중에 전열함급 화력을 가진 프리깃함 10척에게 집중사격을 받아 항해 장비에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
“조선 해군의 대형 프리깃은 4급 전열함과 화력이 비슷할 지경이오. 저들을 추격하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저들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려야 하는데, 이때 적이 배를 돌리고 우리 정면으로 종사(縱射)를 퍼붓는다면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될 거요.”
전함의 무장은 주로 측면을 향하고 있는지라 적이 정면에서 공격해오면 대응하기 어렵다. 게다가 선미나 선수 쪽에서 쏜 포탄은 배 전체를 휩쓸면서 반대편 끝까지 날아가기 때문에, 측면에서 날아든 포탄보다 피해도 더 크다.
“저들은 손실을 보더라도 본국에서 바로 보충할 수 있소. 하지만 우리는 함선과 승무원을 보충하려면 3년이 걸리오. 혹시 적이 프랑스 함대라면 또 모르겠지만, 조선 함대를 상대로 그런 손실을 내면서까지 싸울 이유가 없소.”
만약 바타비아를 지켜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여기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지킬 곳이 아니다. 오포드 제독으로서는 명분과 실리 중에서 확실히 실리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후퇴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함장의 질문을 받은 오포드 백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저들이 먼저 후퇴하려는 기미를 보였으니, 이참에 우리가 이긴 것으로 하고 일단 물러납시다. 프리깃함 한 척을 불러 성 자크만 지사에게 편지를 전하게 하시오.”
부관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게 한 오포드 백작이 급히 편지를 썼다. 영국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똑똑히 보았느냐는 자랑과 더불어서, 조선 상관을 불태우고 상관원들을 살해한 건 스페인 총독의 독단이었지 영국 및 네덜란드 양국과는 전혀 무관함을 자기 대신 조선 측에 설명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조선 해군의 용전에 경의를 표하는 선물도 첨부했다.
“우리 함대는 조선 함대를 맞아 격퇴함으로써 저들에게 우리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었소. 이에 출격 목표를 달성하였으니, 바타비아로 귀항하겠소.”
“예, 백작 각하.”
각 배로 신호가 전달되고, 지사에게 편지를 전달하러 간 프리깃 한 척을 제외한 연합함대 함선 열아홉 척은 천천히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바람은 여전히 남풍이었지만 남행길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참, 각하. 성 자크만에 남아 있는 산티아고 호는 어쩌시겠습니까? 출항할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주어야 하지 않을지요?”
산티아고 호는 발데즈 총독이 타고 온 소형 갤리온이다. 함께 해전에 나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항구에 그냥 남아 있다. 당연히 철수 통보도 받지 못했다.
“함대에서 나가겠다고 한 배를 우리가 굳이 챙길 필요가 있소?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냥 내버려 두시오.”
“알겠습니다, 각하.”
오포드 백작은 발데즈 총독을 버리고 가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필리핀 탈환을 도울 수 없는 명백한 이유가 있음에도 우선순위도 모르고 그따위 만행을 벌인 데다, 자기가 벌인 일 때문에 벌어지는 싸움인데도 협력을 거절한 행동이 너무나도 괘씸했다.
‘그놈이 조선 상관을 습격하지만 않았으면, 지금쯤 조선 제독과 마주 앉아 전투가 아니라 회담을 하고 있었을 게 아닌가!’
생각할수록 발데즈 총독에게 이가 갈렸다. 하지만 오포드 백작은 꾹 참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함대에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이었다. 일단 귀항한 뒤에 다시 사자를 보내 조선 측에 정식으로 종전 교섭을 제안할 참이었다.
4시간 가까이 벌어진 이 해전에서 대한 수군은 전사자 159명에 부상자 352명, 영란함대 측은 전사자 99명에 부상자 281명을 냈다. 전반적으로 작은 배를 타고 전투에 임한 대한 수군 측에서 피해가 조금 더 컸다.
참전한 배 대부분이 크고 작은 손상을 입었지만, 원거리에서 포격전만 벌인 탓에 격침된 배는 한 척도 없었다. 가볍다면 가벼운 조우전이었던 덕분이다.
나포된 배는 딱 한 척 있었다. 영란함대가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방향을 다시 되돌린 대한 수군 함대가 복승항에 들어올 때까지 출발하지 못한 스페인 갈레온 산티아고 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