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07
3부 325화
– 7 –
『…짐이 즉위하여 제대로 국정을 살피기 전에 변경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누대에 걸쳐 친분을 다져 오던 귀국 조선과 우리 스페인 사이에 우애가 심히 상한 데 대하여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호세 페르난도 1세의 편지는 무척이나 정중했다. 물론 이제 겨우 15세밖에 안 된 소년이 라틴어 문장을 이렇게 수려하게 쓰지는 못했으리라. 필시 보좌관들이 썼겠지.
문장 비평은 이쯤하고, 대략적인 내용은 간단했다. 현장에서의 사소한 오해가 겹친 끝에 이런 비극이 벌어진 데 깊은 유감을 표하며, 과거 펠리페 2세와 장조 시절처럼 양국 관계를 되돌리고 싶다는 게 호세 페르난도 국왕이 보낸 친서의 주된 내용이었다.
다만 구체적인 협상 제안까지 적지는 않았다. 본국에서 조건을 전부 정해서 틀을 확고히 잡아버리면 현장에서 재량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 배려인 듯했다.
“서반아 국왕도 우리 쪽에서 입은 피해를 배상하겠다는 의사는 언급했으니, 영토 할양에 동의하게 될 겁니다.”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도 요구사항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비변사에 모인 주요 신하들은 그 문제에 관해서 의견을 취합했다. 이 전쟁을 끝낼 때 우리가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할지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몇 차례 논의가 오간 바 있었다.
“두 대신이 맡은 일상 업무도 많으니, 서반아와 회견에 나설 이를 따로 정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중추원에서 덕이 높은 이를 골라 맡게 하소서.”
“중추원에서 사람을 발탁하여 일을 맡기는 건 좋으나, 중추원에 있는 이들은 내정에 관한 일을 맡기기에는 좋아도 외정에 관한 일을 맡기기는 어렵다. 이번 일은 좌승상과 외부대신 두 사람에게 맡기는 편이 좋겠다.”
중추원에 있는 고관들은 현직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군사 및 외교에 대한 현황 파악은 조정에 있는 현직 중신들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게 당연하기도 하고.
하지만 연륜이 중요한 내정 관련 사안들은 중추원 구성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가 없다. 형황 시절에 16%를 유지하던 전세를 한 번에 20%로 환원하지 않고 계미년(1703)에 일단 18%로 올렸다가 병술년(1706)에야 20%로 올린 것도 중추원의 의견에 따른 결정이었다.
올봄에 한바탕 난리가 났던 국채 조기상환 건만 해도 그랬다.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끝에 가서는 중추원의 의견이 대폭 반영됐다.
“폐하. 국채를 사들인 이들은 나라에서 10년 동안 이자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돈을 낸 것입니다. 아예 이자를 주지 않기로 하고 잠시 쓸 요량으로 빌린 급전이라면야 최대한 빨리 갚는 게 서로 좋은 일이겠습니다만, 10년 동안 내기로 했던 이자를 겨우 2년에서 3년 만에 끊고 원금을 돌려줘 버리겠다 하면 어찌 백성들이 나라의 정책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국채 조기상환 정책을 주도한 건 호부 관리들이었다. 이제까지 빚이라곤 져 본 적이 없는 호부 관리들은 나라에 빚이 있는 상황을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파나마에서 약탈한 전리품이라는 가외수입이 들어오자 그 돈으로 당장 국채를 청산하자고 건의했다.
중추원 의관(議官) 중에도 재산에서 농지의 비중이 높은 문관 출신들은 대다수가 국채를 얼른 청산하는 편이 옳다고 나섰다. 하지만 상공업에 많이 투자한 이들, 그리고 국채 대량 인수를 조건으로 공명첩을 받아 중추원에 입성한 일부 상단 대표들은 반대 의견을 냈다.
그중에서도 송방 소속 9개 상단을 대표하는 3명이 선두에 섰다. 내달상단은 지금 우리와 전쟁 중인 상대 중 하나가 자기네와 인연이 깊은 네덜란드라서인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국채를 조기에 상환하신다면 이는 구매자로서는 7년에서 8년분의 이자를 빼앗기는 거나 마찬가지이옵니다. 나라가 백성에게 강제로 재산을 빼앗는 셈이니, 부디 재고하소서.”
애초에 나는 국채 발행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건함예산을 조달하느라 급전을 구하는 수단 정도로만 생각했던 탓이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고 소액으로 국채를 산 백성들 태반이 그렇게 생각했다. 이쪽이 몇만 냥 단위 대량 인수자보다 수는 훨씬 많았다.
호부에서 ‘여유가 생겼으니 건함비용을 조달하느라 발행한 국채 백만 냥 어치를 당장 다 청산해버리자’라는 제언이 올라왔을 때 선뜻 도장을 찍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조금 늦게 중추원을 통해 ‘상공업계의 반응’이 나온 거다.
“그럼 그대들은 국채를 상환하지 말자는 건가? 그럼 그 돈은 어디에 쓰자는 말인가?”
하지만 중추원에서 나오는 반대 의견을 들어봤더니 그것도 맞기는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물어보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돈이야 늘 없어서 문제지 쓸 곳이 없어 문제겠습니까? 아직 배도 더 지어야 하고, 포도 더 뚫어서 만들어야 하고, 군사들에게 급료도 주어야 합니다. 당장 돈을 전부 국채 상환에 썼다가 이러한 용처에 쓸 돈이 모자라면 그때 또 빚을 낼 참이십니까?”
이때는 아직 양쪽 전선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이었다. 그래서 언제쯤 전쟁이 끝날지 확신할 수 없었고, 건함 비용을 포함해서 막대한 전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작년인 병술년부터 전세가 18%에서 20%로 오르면서 신냥으로 80만 냥 가까운 세수가 추가되었다. 여기에 담배세와 주세 인상분을 더하면 세수 증가분만 백만 냥을 수월하게 넘나들었다. 국채를 상환해도 건함 비용 정도는 댈 수 있었다.
여기서 당장의 재정 수지만 따지자면 국채를 몽땅 상환하는 편이 당연히 유리하다. 혹시 돈이 더 필요하면 그때 가서 또 국채를 발행하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중추원에서는 2차 발행한 국채가 시장에서 신용 문제로 제대로 소화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채 조기상환 때문에 손해를 본 이들이 다음번 국채를 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건 좀 골치가 아플 수 있는 문제다. 물론 목에다 칼을 들이대면 다들 알아서 자기 몫을 인수하겠지만, 그게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긴 하니까.
그렇다고 내 결재를 받아서 호부에서 실무 처리를 이미 시작한 사안을 도로 없던 것으로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려던 일을 중단하는 데서 행정상의 혼란이 일어날 것도 신경이 쓰이고, 엄연히 ‘자문기관’인 중추원에 휘둘리는 선례를 남기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뭐,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긴 하지. 현대에서도 은행 대출을 약정한 기간보다 더 일찍 갚으면 중도상환수수료를 내지 않던가. 그 제도를 도입하면 되지 않을까.
“그대들이 말하듯이, 조기상환은 조정이 백성들을 상대로 위약(違約)을 범하는 결과임은 맞겠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남은 계약 기간에 지급할 예정이었던 이자에서 3할을 위약금으로 삼아 따로 지급한다면 어떻겠는가.”
2년 전에 백 냥 어치 국채를 산 사람은 앞으로 8년 동안 받을 이자로 80냥이 남아있다. 조기상환으로 그 수입이 사라지는 대신 올해 원금과 함께 24냥을 준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처리할 경우 당장 24만 냥이 추가로 나간다. 하지만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거둬온 전리품을 조금 더 털면 그 정도는 충당할 수 있다. 그리고 외수사가 맡아두고 있는 프랑스 사략함대의 전리품을 잠시 ‘빌려’ 써도 된다. 그것도 2백만 냥은 되니까 말이다.
“그만하면…국채를 산 이들도 크게 불평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자. 이 논의는 여기서 끝내겠다.”
그렇게 해서 국채 문제는 중추원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이는 형태로 마무리가 됐다. 반대 의견을 받아들여 그냥 국채 상환을 연기하는 쪽이 처리 자체는 더 간단했겠지만, 말했듯이 내가 일을 뒤집고 싶지 않았던 탓이 컸다.
이 국채 건을 처리하면서 얻은 교훈은 뭔가 좀 애매하다 싶은 사안은 실행에 옮기기 전에 중추원 얘기부터 듣자는 거였다. 아무래도 현직에 있는 행정관료들보다 경험이 더 풍부하고 현직자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사안을 볼 수 있는 것도 강점이니까 말이다.
내가 몇 년을 살았지…원래 생 27년, 무종으로 12년, 장조로 26년, 성친왕으로 25년 해서 딱 90년을 살았다. 지금 조정과 중추원을 통틀어서 가장 오래 살았지만, 내 뇌는 결국 달랑 하나다. 시야도 한 사람분이다.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한계가 있으니 나 혼자 대제국을 통치할 수 없는 거야 자명한 노릇이다. 좀 더 넓은 시야를 갖춘 중추원에 좀 더 많은 역할을 맡기고, 실질적인 의회 노릇을 할 수 있게 해야만 나도 지쳐 쓰러지지 않고 임금 노릇을 할 수 있겠지.
뭐, 이런 자문기구 역할은 중추원만 하는 것도 아니다. 지방에서는 유향소가 수령을 위해 비슷한 역할을 한다. 장래에는 유향소가 확실한 지방의회 노릇을 할 수도 있으리라.
아무튼, 스페인과의 강화협상을 진행할 대표를 중추원에서 뽑자는 제안은 물리쳤다. 이건 아무래도 현직 관리에게 맡기고, 중추원에는 나중에 의견이나 한번 묻겠다.
– 8 –
회견이 이루어진 장소는 스페인 대표단의 숙소인 남평관 안이었다. 스페인 사절단은 그 밖으로 나오지 못했는데, 그 이유에 관해서는 성시균이 우르수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우리 백성들은 아직도 4년 전에 데 에체바리 총독이 우리 백성들을 학살하고 상감마마의 신주를 불태운 일을 잊지 않고 있소이다. 그리하여 귀국 사람들이 길에 나가면 모욕하거나 해치려 들 우려가 있으니, 보호하려면 이 안에 머물게 할 수밖에 없소. 양해 바라오.”
“이해합니다. 조선인들은 국왕께 충성심이 강하니 전임 필리핀 총독의 행동이 저주스럽기 그지없었겠지요. 제가 공연히 길에 나가 한양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우르수아는 데려온 서기와 문관 몇 사람을 거느리고서 회담 테이블에 앉았다. 우르수아가 한국어를 못 하는 탓에 양 대표단 사이를 오가는 언어는 스페인어였다. 성시균과 윤시현은 둘 다 스페인어가 유창하다. 서로 정식으로 소개가 오간 뒤 우르수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다시 한번 사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르수아는 남평관에서 조용히 보낸 지난 사흘 동안 가져온 자료를 검토하면서 조선 측의 입장을 고려했다. 어떤 조건을 제시하면 종전할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일단 요구는 크게 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최대한 정중하게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다.
“몬타네스 주교의 명령 때문이었다고 하나, 귀국 이주민들을 학살하고 위패를 불태운 데 에체바리 총독의 행동은 분명 잘못이었습니다. 제대로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명백한 우리 측의 잘못입니다. 그 점에 대해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사과를 전합니다.”
우르수아를 비롯한 스페인 대표단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사과를 받게 될 줄은 몰랐던 성시균과 윤시현도 급히 일어나 마주 허리를 숙였다.
다시 허리를 편 양측 대표들이 각자 자리에 앉자 분위기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사태를 촉발한 가해자였던 스페인 측이 진심을 내보이며 사과한 덕분이다.
“목이 마르실 텐데 포도주라도 한 잔씩 드시면서 이야기 나누시면 어떻겠습니까?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가져온 특급 포도주입니다.”
호의로 권하는 줄은 알겠으나 업무 중에, 그것도 중요한 회견에서 술을 마시다니 대한의 법도로는 턱도 없는 일이다. 성시균은 포도주는 점잖게 사양했다. 그리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전쟁은 귀측의 잘못 때문에 시작되었소이다. 그건 인정하시겠지요?”
“방금 말씀드렸듯이 전적으로 몬타네스 주교와 데 에체바리 총독, 두 사람의 잘못입니다. 또한, 명령을 실행하면서 지나친 잔혹 행위를 저지른 일부 우리 측 수도사와 군인들에게도 명백하게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르수아가 단서를 덧붙였다.
“가장 큰 죄를 지은 몬타네스 주교와 데 에체바리 총독은 이미 죽었습니다. 주교는 자기 죄 때문에 번민하다가 고통 속에 죽었고, 데 에체바리 총독은 기독교도로서 절대 범해서는 안 되는 죄악인 자살이라는 죄를 지었습니다.”
분명 두 사람 모두 지옥불 속에서 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이들에게 죄를 물어 그 두 사람 대신 처벌하지는 말아 달라는 당부였다. 학살에 직접 참여한 병사들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그나마 그 이후에 전투에서 대부분 죽지 않았냐면서 말이다.
“그 문제는 우리도 굳이 더 따지지 않기로 했소. 이미 여러 해 전 일이고, 남은 포로들도 자기 몸으로 죗값을 갚았으니까. 강화협상이 체결되면 아직 수용하고 있는 스페인군 포로는 즉시 해방할 거요. 전원을 누에바 에스파냐로 태워 갈 배도 제공하겠소.”
대한 측에서 아직 잡아두고 있는 스페인군 포로는 스페인인 2천 5백 명, 메스티소 1천 명 정도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붙잡혀 회복하지 못하고 죽기도 했고, 수용소에서 열병이 돌아 사망한 이들도 있다. 노역 중에 사고사한 사례도 있다.
“필리핀 토인 포로는 이미 진즉에 다 석방했소. 이제 우리 백성이 되었으니까.”
우르수아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 이 내기에서 판돈을 최대치로 불러볼 시점이 바로 지금이었다.
“부재상(副宰相) 각하, 필리핀을 저희에게 반환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성시균은 아무 말 없이 우르수아를 바라보았다. 옆에 앉은 윤시현의 얼굴에는 그런 말을 제정신으로 하느냐는 표정이 드러났지만 성시균은 그냥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허나 상대가 그런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설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번 사태의 단초가 되었던 조선인 이주민들의 거주에 어떤 제약도 두지 않겠습니다. 딱 하나, 국왕 폐하께 세금만 낸다면 그 외의 다른 조건은 일절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데 에체바리 총독에게 피해를 본 모든 조선 이주민에게 배상하겠습니다.”
“그게 전부요?”
흰 수염을 잠시 흔든 성시균이 조용히 질문했다. 우르수아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번 전쟁에서 조선군이 소모한 전비에 대한 보상금으로 3백만 에스쿠도를 별도로 내겠습니다. 혹시 그 액수가 부족하다고 여기신다면, 조금 더 늘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금화 3백만 에스쿠도는 은화로는 4천 8백만 레알이다. 엄청난 돈이지만 어쩔 수 없다.
필리핀을 상실한다면 스페인은 사실상 아시아에서 쫓겨나는 거나 마찬가지다. 본국에서는 어떤 조건이든 좋으니 강화만 맺으라고 했지만, 설마 필리핀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필리핀이 어떤 땅인가. 위대한 군주, 펠리페 2세의 이름이 붙은 땅 아닌가!
“보상은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부디 전쟁 전으로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르수아는 조심스럽게 상대방의 표정을 살폈다. 조선군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돌려받고 돈으로 보상하는 건 스페인으로서는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과연 조선 대표가 그 조건을 받아들일까?
“그렇게는 안 되겠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