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19
3부 337화
여기서 열기창에서는 라이센스 비만 받고, 민간에서 직접 알아서 기관을 생산하게 하는 방안을 내가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각 상단이 투자해서 합자회사 같은 걸 만든다면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조직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계획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무종대왕께서 국가의 기밀로 지키라 하신 기술을 어찌 믿을 수 없는 장사치들에게 맡겨 사익을 취하게 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돈밖에 모르는 장사치들은 분명히 돈만 준다면 누구에게나 증기기관을 팔아먹을 것이고, 제품뿐만 아니라 제작하는 기술까지도 팔아먹을 것입니다. 나라 바깥에까지 말입니다. 어찌 이를 용납하겠습니까?”
“장사치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시중의 요구에 따라 알아서 일을 처리하여 관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들을 믿지 못해 관원을 붙여 엄중히 감시할 거라면 처음부터 관에서 생산을 맡으며 만사를 관장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내가 의논 대상으로 삼은 조정 중신 중 누구도 이 방안을 찬성하지 않았다. 기술 확산을 통한 시장 확대보다 ‘선대의 유훈’에 따른 기술 보존 쪽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증기기관을 더 생산해야 하니 공장을 늘리지만, 그 역할은 철저히 관에서 맡아야 한다는 거다.
시대가 바뀌기는 했어도 분명 내가 직접 내렸던 지시니까 그 지시를 따르겠다는 놈들한테 그건 틀렸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옛날 무종 시절 같으면 피바다를 만들면서라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렇게도 못 하겠다.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니까.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타협안은 일단 열기창 지소를 열어 공급을 확대하면서 지소들 사이에서 경쟁을 붙이고, 여기서 민간이 맡은 역할을 조금씩 키워나가기로 하는 정도였다. 열기창 퇴직자들이 유지보수 업무를 일부 위탁받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상황을 봐서, 구형 기관 중심으로 조금씩 수출도 시도해보자. 당장은 아직 어렵고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나 가능해 보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공부 및 호부 관리들과 한참 논의한 끝에 결정한 열기창 지소 설치 후보지는 일단 세 곳이다. 평양, 대구, 그리고 해삼위다.
“평안도 일대에는 광산과 염전이 많습니다. 애초에 무종께서 제작하라 명하신 증기기관을 처음 수령하여 사용한 시설이 평양의 탄광이고 평안도 해안의 염전이었으니, 평양에 열기창 지소를 두어 그 뜻을 이음은 지극히 옳고도 옳습니다.”
현재 대한에서 생산하는 소금은 7할 정도가 천일염이고, 3할 정도가 자염이다. 연료비가 막대하게 드는 자염 쪽이 훨씬 비싸긴 하지만, 천일염에 비하면 맛이 훨씬 좋다 보니 고급 소금으로 여전히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자염 생산지는 전국에 비교적 골고루 산재해 있다. 하지만 천일염은 평안도와 요동주에서 전체 생산량의 9할 이상을 생산한다. 당연히 양수기의 동력원으로 사용할 증기기관 수요도 많다.
햇볕이 많이 쬐는 남쪽에다가 염전을 만든다는 현대 한국의 상식과는 다르다. 긴 겨울과 이로 인해 일조량이 부족한 단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북방에서 천일염을 생산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더 중요한 건 물론 첫째 요인이다.
첫째, 개펄이 단단해서 소금에 흙이 덜 섞인다. 남쪽으로 내려오면 개펄이 물러서 소금이 흙투성이가 된다. 아무리 햇볕이 좋아도 생산한 소금의 반이 흙이면 그걸 어디다 팔겠는가. 현대에 남쪽에서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건 순전히 개펄 위에 깔아놓은 고무판 덕분이다.
둘째, 천일염 주요 수요처인 북방과 가깝다. 천일염은 식용 소금 시장에서는 찬밥이지만 북방에서 가축에게 먹이는 용도로는 많이 쓰이는데, 그러자면 가까운 데서 생산할수록 갖다 팔기 유리하다. 게다가 소금은 무거워서 운송비도 많이 든다.
“옳다. 더불어서 평양에는 조병창이 있어 우리 군이 사용할 주요 무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증기기관을 쓰고 있으니 이를 유지하기에도 열기창이 있는 편이 유리할 것이다.”
조병창은 북한산성, 탕춘대성, 평양, 대구 네 곳에 있다. 무기 생산 작업이 갈수록 자본과 기술이 많이 필요한 사업이 되다 보니, 이제는 옛날처럼 아무 데서나 쇠를 적당히 두드리고 녹여서 만들지는 못한다.
민간에서 수렵용으로 쓰는 조총 같은 거야 지금도 대장간에서 대충 두드려 만들곤 한다. 하지만 군용으로 쓰는 총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쏘다가 터지지 않도록 수력이나 증기력 해머를 사용해 성의껏 두드려 가면서 만든다.
“그러니 두 번째 지소는 대구에 둔다. 여기 대해서도 다들 동의하였으리라.”
낙동강 하구, 동래 철소에서도 증기기관을 꽤 쓴다. 끝없는 망치질, 풀무질 같은 걸 그저 사람의 힘만 가지고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까운 통영에 있는 조선소에서도 증기로 작동하는 크레인을 쓴다. 동래에 열기창이 들어서면 편리하기는 할 거다.
그런데 동래는 항구도시다. 더구나 개항장이라 외국 상선이 수시로 드나든다. 일본, 유구, 심지어 서양 배들도 들어온다. 국가적 기밀시설인 열기창을 두기에는 당연히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그에 비하면 내륙인 대구가 훨씬 안전하다.
생산한 제품을 나르기도 간단하다. 무거운 기관과 부품은 낙동강 수로를 이용해 동래로 보내면 되고, 작고 가벼운 부품은 영남대로를 통해서 수레로 운반해도 된다. 그러면 경상도 일원은 전부 커버할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지소를 설치할 곳은 해삼위다. 여기에 지소를 두는 이유야 뭐 이미 말한 대로다. 공장과 조선소, 철도를 위해서다.
“북방은 겨울에 강이 얼어 쓸 수 없으니, 연중 쓸 수 있는 증기기관이 꼭 필요하다. 또한, 내륙에 있는 물산을 해삼위로 가져오기 위해서도 철도를 놓아야 한다.”
북방에서는 송화강, 목단강, 흑룡강, 우수리강 같은 강들이 중요한 교통로다. 이 강들이 가진 단 한 가지 문제는, 요하를 제외한 나머지 강들은 죄다 북쪽으로 간다는 거다. 심양을 제외하면 북방 최대의 도시인 해삼위로 흘러온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물론 북방에 까는 철도가 내륙과 해삼위를 연결하는 정도로 끝나면 안 된다. 당장이야 안 되겠지만, 한양으로 내려오고 요동까지도 이어져 전국을 연결하는 철도망을 이루는 일부가 되어야 한다. 과연 언제쯤 그게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만 해삼위 역시 동래처럼 개항장이기는 하다. 동래보다 적기는 해도 외국에서 온 배가 비교적 자주 드나든다. 그러니 열기창 지소는 최대한 내륙 쪽에 설치하고 보안을 강조해서 누가 함부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해야겠다.
– 22 –
당연한 소리지만, 열기창을 증설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내년부터 당장 세 공장에서 새로 만든 제품이 쏟아져나오는 건 아니다. 세 곳에 공장을 지을 부지를 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기관 제작에 필요한 공작기계를 설치하고 인력을 충원해서 제 궤도에 올리려면 아마….
“새 지소들이 한양에 있는 열기창 본소(本所)만한 수준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면 10년은 걸릴 것이옵니다.”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세 곳 공장에 건물과 기계를 갖추는 데는 3년이면 될 터인데?”
“건물을 짓고 기계만 둔다고 일이 되겠습니까. 숙련된 장인이 다수 필요합니다. 그 장인을 키우는 데 필요한 시간까지 계산하면 진실로 10년을 잡아야 합니다.”
열기창 도제조 장성준은 지소를 새로 설치한다는 방침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공장들이 조속한 시일 안에 궤도에 오르지는 못하리라는 비관적인 예측을 했다.
“서학당에서 가르친 생도들을 쓰면 되지 않는가.”
형황 시절, 사절단으로 찾아왔던 프랑스인 학자들을 기용해서 설립한 서학당이 생긴 지도 이미 20년이다. 유럽에서 건너온 화학, 물리학, 공학, 천문학 등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다.
형황은 학교를 세우고 새 학문에 흥미를 품은 이들을 모아 배우게 했다. 하지만 자연과학 분야에서 기초가 부족한 우리 대한에서 교수들을 데려와 조금 가르친 정도로 곧바로 유럽 대학교 수준의 졸업생을 배출할 수는 없었다.
졸업해도 딱히 들어갈 곳도 없었다. 군기시와 열기창 같은 곳들은 옛날부터 해오던 대로 직접 기술자를 양성했고, 괴상한 서양 학문을 배운 이들 따위는 신용하지 않았다.
토목이나 천문학을 배운 이들은 좀 나았다. 토목을 배운 이들은 군대에 지원해서 공병이 되고, 천문학을 배운 이들은 잡과를 보아 관상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물리학이나 화학, 기계를 다루던 이들은 진로가 마땅치 않았다.
이 사례에서도 형황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어딘가 자리를 만들어서 졸업생들을 억지로 끼워 넣지도 않고, 그렇다고 쓸모없다고 학교를 없애지도 않고, 그냥 놔두었다. 학교 운영과 학생들의 숙식에 필요한 만큼의 돈은 그대로 대주면서 말이다.
내가 즉위했을 때, 개교한 지 딱 10년이 된 서학당에서는 여기서 배우는 공부가 좋아서 과거 본다고 자퇴 ? 한 학생들이 의외로 꽤 된다고 했다 ? 하지도 않고 10년 동안 학교에 머무르면서 교수들과 어울려 뒹굴던 고인 물 ? 한마디로 대학원생 ? 들이 바글거렸다.
나도 나름대로 이들의 진로를 알아봐 주려고 했지만, 보낼 만한 기관들은 이미 그래왔듯 전통적인 방식으로 양성한 자체 인력만 쓰려고 했다. 그리고 서학당에 있는 생도들도 굳이 학교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학생으로 있어도 봉급이 나오고 군역도 면제되니까.
그래서 서학당 내에서 일종의 연구소를 설립하고 뭔가 만들어 보라고 했는데, 돈을 들여 뭔가 좀 해보려는 참에 전쟁이 터졌다. 당연히 서학당에 보내려던 연구비는 몽땅 삭감됐고, 서학당의 교수와 생도들은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으며 5년을 보냈다.
그래도 그 안에서 보낸 세월이 20년이다. 그 긴 시간을 버텨낸 생도들은 적어도 이론적인 수준에서는 프랑스인 교수들과 다퉈볼 만한 경지에 올랐다. 그러면 이제는 뽑아 쓸 때가 된 거고, 열기창 지소 설치는 그 고인 물들을 서학원에서 뽑아내고 새 물을 받을 기회였다.
“서학당 생도들은 몇십 년씩 현장에서 쇠를 만지면서 솜씨를 단련한 공인(工人)들과 같은 경험이 없습니다. 기술이란 실수를 거듭하며 선임자에게 배워야 하는 법인데, 새 공장에는 새 기계와 새 사람밖에 없을 터이니 어찌 빠른 배움이 있겠습니까.”
“그럼 그대가 거느린 노련한 공인들을 갈라 보내 함께 일하게 하면 되겠군.”
“예…예?”
“짐이 말한 그대로다. 서학당 생도들이 공부만 하여 실제로 공장에서 물건 다루는 재주가 부족하다면, 그대가 10년 동안 데리고 있던 숙련된 장인들을 붙여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 될 게 아니냐.”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장성준은 ‘차라리 제 배를 가르십시오’라는 태도였다. 자기 밑에 있는 최고급 기술자들을 빼앗기면 증기기관차 개발을 진행할 수 없다나.
“도성에 있는 열기창 본소도 서학원에서 생도를 받아 가르치라. 그리하면 더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열기창 증설이 기계과 출신자들의 진로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기쁘지만, 화학을 연구하는 이들도 슬슬 써먹을 단계가 되어서 다행이다. 이제 전쟁이 끝나서 서학당에 다시 돈을 부어줄 수 있게 됐으니, 내년부터는 뭔가 성과를 좀 얻을 수 있겠지 싶다.
– 23 –
“자, 내가 내리는 술 한 잔 받으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마침내 필리핀에서 귀환한 권훤에게 친히 어주를 한 잔 주었다. 검게 탄 얼굴에 흰 이만 하얗게 드러낸 권훤이 싱긋 웃으며 잔을 받아 쭉 들이켰다.
“이 술 한 잔이 참으로 그리웠습니다.”
“그러면 진즉에 돌아오지 그러하였느냐.”
내 핀잔을 들은 권훤이 겸연쩍게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마지막 배가 닻을 올릴 때까지 필리핀에 머무른 건 좀 너무했나 싶었나 보다.
“누군가는 뒤에 남아 뒷수습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정남대장군 대감께 그런 수고를 끼칠 수는 없으니, 신이 맡았을 뿐입니다.”
양력 3월에 시작한 필리핀 철수는 10월까지 끌었다. 이미 말했듯, 갑자기 배를 마련하기 좀 어려웠던 데다 포로를 송환하고 미주원정군을 철수시킬 배를 따로 빼야 했던 까닭이다. 미주에 있는 배까지 동원해서 나른 끝에 미주원정군은 양력 9월에 철수를 완료했다.
하지만 정남군은 태풍 철이 중간에 끼는 바람에 2개월 정도 아예 철수가 중단됐다. 이런 난관 끝에 마지막 철수선을 탄 권훤이 필리핀에 남아서 치료를 받던 병자들과 함께 돌아온 날짜가 11월 1일, 양력으로는 12월 18일이었다. 사흘 전이다.
“개선식을 성대하게 열었어야 했는데 아쉽다. 그대들 모두를 세워 놓고 장조께서 하셨던 것만큼 성대하게 열고 싶었건만.”
개선식을 거행하기는 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하면 무척 간소하게 했다. 장희재와 이홍원, 민지상까지 세 사람이 모두 귀국한 뒤인 양력 8월 말에, 합동으로 치렀다.
다만 옛날에 한 개선식과는 달랐다. 도성 거리를 행진한 건 승리한 우리 장병들뿐이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포로를 끌고 와서 모욕을 주거나 수급 수레를 끌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래도 전리품을 실은 수레는 있었지만.
법도를 바꾼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외교적인 문제다. 우리는 야만인이 아니라 ‘유럽 국가들과 대등하게 상대할 만한’ 문명국이라고 내보여야 했고, 그러자면 상대방을 과도하게 모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승자의 아량을 보이는 쪽이 훨씬 나았다.
복승에서 우리 상관원들을 학살한 발데즈조차 목숨은 살려서 보내줬다. 대신 아오지에서 반년쯤 죽어라 노역했지만 말이다. 아마 놈은 스페인에 돌아가서도 그 석탄가루 냄새를 못 잊으리라.
“그대도 대장군과 함께 돌아왔으면 같은 자리에서 영광을 누렸을 것을. 참으로 아쉽도다. 허나 갸륵한 뜻으로 뒤에 남았으니, 어찌 나무라겠느냐.”
“과찬이시옵니다, 폐하. 그저 깊으신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연회는 미주에서 함께 고생했던 권훤의 귀환을 환영하는 자리기에 모처럼 ‘미주파’ 전원을 모았다. 다만 장희재와 민지상도 미주파다 보니 그저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육군 장수들을 치하하는 것 같은 자리도 되었다.
한쪽에서는 카자크 6형제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목청으로 크게들 떠들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제 완전한 노인이 된 프랑스인 삼총사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25년 동안 나와 함께 지내긴 했지만, 프랑스 형편이 불안하긴 한 모양이다.
“저는 이미 70세입니다. 파리를 다시 한번 보고 싶지만, 이제는 무리겠지요. 그저 전쟁이 유리하게 끝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토스는 나이가 든 뒤에도 우리 공병대를 지도하는 군사고문 노릇을 하다가 5년 전에야 은퇴했다. 68세가 된 드 포르토도 좌포청에서 고문 노릇을 하다가 다토스와 함께 은퇴했다. 이들이 이제 프랑스로 돌아가겠다고 하던 참에 전쟁이 터져버렸고, 그대로 발이 묶였다.
“바르 함대에 억지로라도 동승해야 했었나 싶습니다. 그때 배를 탔으면 지금쯤 프랑스에 돌아갔을 텐데 말이지요. 어쩌면 잉글랜드 해군과 싸우다 죽었을 수도 있겠지만.”
바르 함대가 파나마를 떠난 게 1706년 6월이었다. 2년 반 전이니까 프랑스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기는 하다. 과연 무사히 돌아갔으려나.
“바다에서 영감들 송장 치우기 싫다고 승선 거부당한 건 잊었나? 귀국은 그만 체념하고, 한양 풍경이나 유유히 즐기다가 곱게 가세나.”
66세로 가장 젊은 아라미츠가 옆에서 웃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세 사람 중 유일한 현역이다. 아라미츠의 한마디에 다들 웃음보가 터졌다.
앞에 앉아서 나도 웃었다. 그래, 올해는 꽤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한해였다. 가뭄이 들어서 조금 걱정을 했지만 비축한 식량과 수입한 식량으로 필요한 양은 충당할 수 있었고, 출정한 군대도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돌아왔고, 무엇보다 전쟁을 적당히 잘 끝냈다.
이제 당분간은 누구랑 싸울 일도 없을 테니, 내년부터는 내정을 챙기면서 평화를 누리자. 올해는 다 끝났으니 별일 없기도 할 거고.
그날은 모처럼 마음 편히 미주 시절 이야기를 하며 수하들과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모후의 용태가 좋지 않은 것도 있어서 술은 거의 마시지 않고 이야기만 나눴지만 마치 술을 통으로 마신 듯 즐거웠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사흘 뒤, 모후가 아무 징후도 없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7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