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2
1부 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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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하고 불안했다. 도저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정사고 뭐고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만사 다 때려치우고 뛰쳐나가고 싶은데 나갈 수가 없었다.
“전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편전에서 기다리시옵소서.”
내시감 김처선이 지옥문을 지키는 수문장같은 태도로 버티면서 내 방문을 막아서고 있었다. 덩치도 나보다 훨씬 작은 양반인데 어떻게 밀어젖히고 나갈 수가 없었다.
“내전이 당장이라도 원자를 낳으려는 참인데 어찌 가까이 가보지도 못한단 말인가? 여염집 사내도 처가 출산을 할 때면 툇마루에서 발을 구르며 기다리지 않는가? 진통을 하는 아내를 위해 자기 상투를 붙잡으라고 내주기까지 하지 않는가!”
처결하던 업무는 중전이 진통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모두 집어치웠다. 중궁전에 1분이라도 빨리 뛰어가서 중전의 손이라도 잡아줘야지 일은 무슨 일이란 말인가?
헌데 편전을 나서려는 내 앞을 내시감 김처선이 바위처럼 막아섰다. 내가 무슨 말로 설득을 해도 요지부동,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초가삼간에 사는 백성들은 그런 천박한 습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허나 사대부 집안에서는 지어미가 안채에서 출산을 할 때 지아비는 사랑채에서 차분히 기다림이 지켜야할 법도입니다. 이제까지 그 어떤 임금께서도 산실(産室)에 직접 들어가신 전례가 없으셨사옵니다.”
꼬장꼬장한 영감 같으니. 내가 더 투덜거릴 기색이 보이자 김처선이 태연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전하께서도 예전에는 그런 법도를 지키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동궁에 계시던 시절 처음 원손을 보셨을 때나, 휘신공주께서 출생하셨을 때는 지금처럼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리셨사옵니다. 원자를 오래 얻지 못하시어 초조하신 줄은 알겠사오나,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그때 그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고요, 이 영감님아. 젠장, 해봤자 소용없는 생각이지.
한참을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알겠노라. 그렇다면 편전에서 기다리다가, 중궁전에서 출산이 끝났다는 연락이 오면 바로 가보는 건 괜찮겠느냐?”
“당연히 괜찮사옵니다.”
“알겠다. 그럼 그대도 나가 있으라. 내전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는 아무도 보지 않고 혼자서 있겠다.”
김처선을 내보내고 나서 지금 느끼는 감격스러운 기분을 혼자 되새겼다. 야, 내가 드디어 아빠가 되는구나. 저쪽 세상에선 과연 내가 결혼은 할 수 있을지, 혹시 하더라도 애는 가질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 살았는데 여기서는…참, 뭐라고 할 말이 없네.
산달이 비슷해서 혹시 출생순서가 꼬일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중전에게 가장 먼저 진통이 왔다. 혹시나 싶어 후궁 처소에 내관 한 명씩 보내 물어보니 두 숙의들에게는 아직 진통이 올 기미가 없다고 했다. 내가 동시에 세 사람한테 가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행이다.
아들이 태어나서 건강하게 자란다면…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기본적으로 세자를 교육하는 주체는 아버지인 왕이 아니라 신하들이다. 이 조선 땅에서 제일가는 학자들이 모여서 세자를 나라에서 으뜸가는 사대부로 교육시킨다. 부왕은 단지 그 진도를 가끔 확인할 뿐이다.
이 시대에 묻어가려면 그렇게 해도 충분하겠지. 하지만 그런 교육만으로는 내가 만족할 수 있는 후계자를 키울 수 없다. 지금 서양은 이른바 대항해시대, 탐험선이 세계로 뻗어 나오고 있다. 공맹만 외워서는 곧 다가올 유럽인들에게 대처할 수 없다.
아들이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면, 세상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 가르쳐야겠다. 5대양 6대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서양에는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이 조선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지진이나 폭풍 따위는 자연현상일 뿐, 절대 임금이 정치를 잘못했다고 해서 하늘에서 벌을 내리는 게 아니니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해줘야겠다. 이번 달만 해도 평안도 영변 일대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대간들이 그걸 가지고 얼마나 날 물고 뜯었는지 모른다.
외국어는 가르치는 게 의미가 없겠다 싶다. 아마 내가 아는 영어나 독일어 ?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독일어였다 ? 는 이 시대 영국인이나 독일인들은 거의 못 알아듣지 않을까. 글만 가르치려고 해도 철자법이나 문법도 차이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서양인들이 찾아왔을 때 빨리 그 말을 배우도록 하라고 가르치는 게 낫겠다. 지금 연도가 1502년, 콜럼버스는 한참 아메리카를 탐사중일 거고 포르투갈인들은 이제 막 인도까지 왔다. 30, 40년쯤 있으면 마카오에, 그리고 일본에 도달하겠지.
안타까운 일은 조선이 중국과 일본을 잇는 주요 교역로에서 벗어나 있다는 거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도 서양인들이 조선에 찾아오지 않았다. 중국에서 곧바로 일본으로 갈 항해술이 있고, 조선이 별로 중요한 중계점도 아니라면 그들이 찾아올 이유가 어디 있었겠는가.
여기서는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저들이 욕심날 만큼 조선이 부유하고 중요한 나라라면 오지 말라고 해도 찾아올 거다. 물론 정복이 아니라 교역을 하러 온다는 말이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내가 옥좌에 앉아 있을 테니까 대비할 시간이 있다. 적당히 섭생하면서 건강을 지키자. 그동안 나라를 꾸준히 발전시키고 일본과 명나라를 상대로 교역을 원활하게 하면 서양인들도 알아서 찾아올 거다. 팔릴 만한 수출품만 준비해 두면 된다.
다만 포르투갈 상인이 오면 필연적으로 선교사들이 따라올 텐데…기술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분은 꽤 있을 거다. 문제는 가톨릭이 전파되면 19세기에 일어난 사회적 갈등이 3백년 일찍 폭발할 수도 있다는 거다. 유교윤리와 기독교 신앙의 충돌…이건 좀 고심을 해봐야겠군.
어쨌든 여기까지는 내가 살아있으면서 대처해나갈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내가 죽은 뒤에 일어날 일들…임진왜란, 명나라의 쇠락, 서세동점, 이런 후대 사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비시켜야 할까. 유교에서는 예언자 같은 것도 인정 안 하는데. 참언이라고 때려잡기나 하지.
역시 마지막 순간에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말해주어야 하나? 아무리 내 아들이지만 과연 믿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늙은 부왕이 죽을 때가 다 되어 정신이 나갔다고 여길지도 모르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아버지가 미쳤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고….
내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 회고록 같은 것을 써두어야 하나 고민이 좀 된다. 후대 역사와 기술적인 진보에 대한 기록을 내가 아는 대로 써서 역대 임금만 읽을 수 있도록 남기면, 그 책을 본 내 후손들은 내가 미래에서 왔음을 알게 되지 않을까?
“전하, 전갈이옵니다.”
“무슨 일이냐? 들어와서 고하라.”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밖에서 누가 날 불렀다. 고개를 드니 문 앞 복도에 서있던 내시감 김처선이 방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방금 중궁전에서 전갈이 왔사옵니다. 중전마마께서 대군아기씨를 순산하셨다 하옵니다.”
“오오! 역시 대군이냐!”
아들이다, 내 아들이다! 후계자 걱정을 덜어줄 내 아들이다!
“어서 중궁전으로 가자!”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그대로 벌떡 일어섰다. 얼른 가서 중전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해주고, 새로 태어난 아이도 안아봐야지. 예전 몸에서 느끼던 감각이 변하지 않았다면, 아이 안는 솜씨도 남아있으리라. 결혼은 안했지만 사촌동생들은 많이 안아봤으니까.
– 9 –
복이 쏟아지려니까 이것도 타이밍인지, 중전에 이어 두 숙의들도 이틀, 사흘씩 간격을 두고 출산을 했다. 다행히 숙의 이씨는 아들을 낳았고, 숙의 곽씨는 딸을 낳아서 조화를 이루었다. 중전이 낳은 아이까지 2남 1녀다.
현대에 있을 때 내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자녀 숫자가 2남 1녀였으니 단박에 꿈을 이룬 셈이다. 여기에 일단은 내 딸인 장녀 휘신공주까지 더하면 2남 2녀다! 적자녀, 서자녀가 모두 1남 1녀씩이다.
현대라면 여기서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조선시대고 나는 왕이니까, 앞으로 더 낳아야 되긴 할 거다. 적어도 아들만 너덧 명 정도는 있어야 할 테니까. 뭐 나도 아이들은 좋아하니까,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더 낳기는 낳고 싶다.
“진실로 감축드리옵니다. 앞으로 왕실에 무궁한 영광이 있을 것이옵니다.”
“감사하오.”
원자가, 그리고 뒤이어 그 이복동생들이 태어나면서 며칠 동안은 조정 내에서 다툼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허구한 날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대간들조차 경사가 생기자 감정은 일단 미뤄두고 웃는 낯빛으로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제 전하께서 후사를 얻으셨으니 이 나라 사직이 한층 더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신들이 살아서 새로워지는 천명을 보게 된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진실로 하늘이 복을 내려 만백성이 그 은혜를 입었습니다.”
신료들을 대표해서 영의정 한치형이 경하인사를 올렸다. 나도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준비해둔 기념사를 발표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이으려면 제사를 이어야 하고, 그러자면 아들을 얻는 것보다 더한 효도가 없다. 후손이 번창함은 누구나 바라마지않는 일인데, 과인이 덕이 부족하여 왕위에 오른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가 없었다. 그동안 크게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내심으로 후사를 얻지 못함이 심히 죄스러웠는데, 이번에 드디어 지난 4월 19일에 정비 신씨가 원자를 낳고 수일 내로 두 숙의가 왕자군과 옹주를 하나씩 낳아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였다. 한꺼번에 후사가 셋이나 생겼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이는 그저 나 한 사람이 아들을 얻은 것이 아니라 두 대비께서도 기뻐하실 바이고, 길이길이 이어야 할 종묘사직이 그 주인을 얻었음이라. 마땅히 온 나라와 만백성이 함께 해야 할 기쁨이니, 모두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나갈 길을 새로이 닦을지어다.”
아이고, 길다. 이 답사를 작성하느라, 예문도 엄청 빡세게 찾았다. 결국 고른 답안은 선왕인 성종이 ‘나’를 얻었을 때 뭐라고 말했는지 기록을 찾아서 적당히 참고하는 거였지만.
줄줄이 서서 웃으며 축하하는 신하들을 보고 있으려니, 그래도 이 양반들이 날 정말로 미워하는 건 아니구나 싶다. 하긴 나도 밑에 있는 신하들이 정말 사람이 싫거나 그런 건 아니다. 의견충돌 때문에 싸우다 보니 갈등이 있을 뿐이지, 대개 인간적으로는 좋은 사람들 아닌가.
자, 좋은 일이 생겼으니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방 쏴야겠지.
“이에 기쁜 마음을 다 함께 하려고 넓은 은택을 펴노니, 금년 4월 19일 새벽 이전까지 죄를 지은 자들 중 모반한 자, 조부모나 부모를 모살하거나 때리고 욕한 자, 처첩으로서 지아비를 모살한 자,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자, 고의로 살인한 자, 독이나 주술을 써서 사람을 해한 자, 강도질한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한다.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벌이 이미 정해졌거나 정해지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하노라. 모반죄 이하로 도형·유형·부처·충군(充軍)된 자는 모두 방면할 것이며, 벼슬자리에 있는 자는 자급(資級)을 더하되 더 이상 올라갈 품계가 없는 자는 아들·사위·아우·조카 중에서 대신 가자하여 주라. 아! 하늘이 자손을 내려 주어서 후세를 이어가게 하였으므로, 멀고 가까운 곳에 은혜를 베풀어 사방의 흠되는 점들을 없애게 한다. 그래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모두들 마땅히 잘 알게 하라.”
부처(付處)는 주거지를 제한하는 귀양의 일종이다. 벼슬 대신 일시금으로 저화를 나눠주고 끝낼까도 생각해 봤는데, 소액을 주면 줘놓고 욕만 먹을 것 같고 크게 쏘기에는 요즘 흉년에 부담이 너무 커서 현금 보너스 대신 성종이 했던 것처럼 벼슬을 올려주었다.
다만 성종이 했던 것 중 백성들에게 세금을 감해준다는 조치는 빼버렸다. 작년에 먹은 흉년 크리가 너무 커서, 세금을 깎아줄 만큼 재정 형편이 좋지를 못해서 말이다.
“올해는 정말 가뭄이 들겠구나.”
관상감에서 예언…한 것처럼, 정말 4월 들어서도 비가 별로 오지 않았다. 다만 예보가 늦었다. 겨우 한 달 동안 물을 모은다고 해 봐야, 근본적으로 비가 오지 않으니 각지에 있는 저수지와 보에 찬 물도 그다지 늘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정도로만 물이 있어도 작년보다는 나을 것이옵니다. 작년에는 아예 홍수가 농토를 휩쓸지 않았사옵니까.”
호조참판 송질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보고했다. 그로서야 거둘 것이 얼마라도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우리라.
“다만 올해가 풍년은 아니니만큼, 휘신공주께서 거주하실 집을 짓는 일은 조금 늦춰 주시옵소서. 예로부터 기근이면 이러한 역사(役使)는 멈추는 것이 관례였사옵니다. 아니면 군사들을 투입하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본래 국가가 하는 토목공사는 백성들이 바치는 요역(?役)으로 진행한다. 궁궐 건축까지야 확실히 여기 속하지만 왕족의 저택 같은 건 공적인 공사라고 말하기 힘든데, 조선에서는 이런 건축을 할 때는 번을 서는 군인들을 노동력으로 동원하는 게 상례였다.
“아니다. 군졸들이 번을 섬은 전시를 대비해 조련을 받고자 함이지, 주춧돌을 심고 기둥을 세우러 모인 게 아니지 않느냐? 군사들은 군영에 머무르게 하고, 공사는 인부를 구하는 대로 천천히 진행하라.”
나라 지키려고 군대 왔지, 삽질하러 군대 왔냐? 그 많은 삽질,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나부터가 제대하고는 삽이랑 곡괭이가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내 군사들한테까지 그걸 시키기는 싫다. 그것도 내 ‘사적인’ 용무 때문에.
공주 저택이라지만 휘신공주는 이제 겨우 만으로 7살이다. 결혼이나 해야 집이 필요할 텐데 아무리 조선시대라고 해도 12살은 되어야 결혼을 할 테니, 집 정도는 천천히 지어줘도 된다.
서두르지 말자. 안 그래도 처리할 일도 많은데. 지금은 부마감보다 종성가 색시 찾는 일이 급하다. 그래야 또 난리를 치기 시작한 저 왜구 놈들을 때려잡는데 사용할 사냥개를 한 마리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