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21
3부 339화
– 3 –
조문 사절로 온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옷은 물론 자기 관위에 맞추어 일본식 예복을 입고 왔지만, 예의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을 선보였다. 보좌를 맡아 따라붙은 수행원이 우리 예법을 잘 알고 있어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옆에서 보조했다.
일본 쪽 관습으로 따지자면, 자기 영지를 따로 다스리는 분가한 동생보다는 주군 옆에서 중책을 맡은 중신 쪽이 훨씬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중신을 보내지 않고 자기 친동생을 보낸 건 우리 쪽 기준에 맞춘 인선인 듯했다.
그 점에서는 후금이나 청나라와도 코드를 맞춘 셈이다. 그 두 나라도 황실 사람을 조문 사절로 파견했으니 말이다. 다만 후송은 황족을 보내지 않았다. 세 나라에서 보낸 사절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나중에 따로 언급하겠다.
“저희 대군께서 이르시길, 폐하의 효성이 지극하심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데 어찌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을 보내서 조문하게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직책은 조금 낮을지라도 마땅히 친혈육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폐하의 슬픔을 위로하는 편이 낫다고 하셨지요.”
요시노부는 한국어를 구사하기는 하는데 조금 서툴렀다. 그래서 히로시마에서 보좌역으로 따라온 유학자, 우삼동(雨森東)이라 하는 이가 통역을 맡았다. 우삼동은 한국어에만 뛰어난 게 아니라 성리학에도 능통했다. 대한에서도 일본의 석학이라고 거명될 정도다.
다만 원래 세계에서 내가 관심이 있던 일본사는 전국시대하고 근대사뿐이었다. 그래서 그 중간에 낀 에도 시대 인물인 이 우삼동이라는 이가 원래 역사에서도 나온 인물인지, 역사가 바뀌면서 새롭게 얼굴을 내민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공식적인 인사를 마친 뒤에 요시노부는 동평관으로 물러갔다. 그리고 수행원이라 부수적인 역할을 맡아야 할 우삼동과 따로 대화를 나누는 다소 모순된 상황이 연출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우리 문물에 익숙하냐고 질문하자 이런 답이 나왔다.
“제 학문은 대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니 한어에 솜씨가 있는 것도 당연하지요.”
각성한 뒤에 이형준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파악한 거지만, 이쪽 세계에서도 강항은 일본 성리학의 시조가 되었다. 강항은 죽을 때까지 우에스기령에서 머무르면서 제자를 양성했고, 일본 전체에 강풍(姜風)을 퍼뜨렸다. 죽은 뒤에야 유골이 되어 돌아왔다.
우삼동은 강항에게 직접 수학하지는 못했으나, 강항의 제자였던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 마츠나가라는 이가 키운 제자 기노시타라는 자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했다. 그리고 성리학을 더 배우고 싶은 마음에 동래에 유학했고, 울릉도 출신 스승에게 더 깊이 학문을 배웠다.
“뭐야, 또 울릉도냐?”
“폐하, 울릉도에 무슨 좋지 않은 감정이라도 있으신지요?”
우삼동이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고니시와의 사연을 이놈한테 함부로 들려주기도 좀 곤란해서 그냥 손을 저었다.
“됐다. 계속해 봐라.”
“예. 처음에는 그저 유학을 배우러 왔을 뿐이었으나, 동래에서 지내며 대한의 온갖 문물을 접하다 보니 점점 대한의 모든 것이 좋아졌습니다. 대한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탄식할 정도였습니다.”
“그것참 안타깝구나.”
한일간에 유학, 사업 등으로 상대국에 체류하는 건 간단한 허가만으로도 가능하다. 허나 아예 상대방으로 귀화하는 건 좀 어렵다. 조선(대한)에서야 원래 어려웠고, 일본에서는 꽤 쉬웠지만 에도 막부가 통제를 강화하면서 어려워졌다.
조선 초부터 장조 시절까지는 지방 소영주나 말단 무사들이 개인적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귀부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금위에 왜인 무사가 복무하는 사례도 종종 있곤 했다. 종…성순은 그런 사례는 아니긴 했지만.
아소 씨 시절만 해도 통제가 꽤 허술해서, 대우에 불만이 있다거나 하는 이유로 조선으로 넘어오는 무사들이 적잖았다. 하지만 에도 막부가 압력을 넣어 진서 막부를 흡수하고 규슈 일대 개항장들을 폐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에도 막부는 일본인이 막부에서 공식적인 허가를 받지 않고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행위를 범죄로 취급했다. 목적지가 대한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으며, 이는 대한으로서도 부정할 수 없는 권리였다. 우리도 똑같이 하고 있었으니까.
고로 우삼동이 아무리 대한 문물에 심취했다고 해도, 대한으로 이주해서 한인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허가를 받더라도 일본에 남은 가족과 친지들을 모조리 잃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다시는 일본에 돌아갈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개항장인 동래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색수피어극으로 명성 자자한 반촌극장도 끝내 가보지 못했지요. 동래에도 극장은 있었습니다만, 향극단만 공연할 뿐이라 말입니다.”
외국인이 개항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제한도 두 나라 모두 공통되게 유지하는 규제다. 그 제한을 피해 도성에 드나들려면 정부에서 파견한 외교사절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
향극단(鄕劇團)은 지방에서 순회하며 공연하는 극단을 말한다. 도성에 있는 반촌극단과 정도극단의 두 극단을 이들과 구분해서 경극단(京劇團)이라고도 한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막부에서 관원을 선발하는 시험에는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제 선배인 아라이가 막부에 이미 들어가 있어서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만, 어렵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히로시마 도쿠가와가에 출사했습니다. 대한과 가장 교류가 많은 영지니까요.”
일본에서는 과거 제도가 없어진 지 오래다. 오랜 옛날 헤이안 시대에는 잠시 시행했다고 하지만, 율령제가 무너지고 무사 계층이 신분을 세습하면서 중단되었다. 지금도 막부 및 각 번의 중요 관직은 대부분 세습된다.
하지만 에도 막부에서부터는 일부 실무직에 한해 시험을 통해 채용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이것 역시 우리 대한의 영향이라면 영향인 셈이다.
“그대들 일본의 유학자들은 대군의 지위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삼동의 한국 문화 사랑에 관해 좀 더 대화를 주고받은 뒤 조금 거북할 수 있는 주제로 이야기를 돌려보았다. 일본의 정치적 안정과 관련되는 주제인지라, 한 번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원래 역사를 되새겨 보면,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지방 무사들이 내세운 이념이 성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막부는 조조나 왕망 같은 역신이므로 이를 타도하고 정당한 군주인 천황에게로 권력을 다시 되돌려야 한다는 거다.
혹시 이쪽 세계 일본 유학자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곤란하다. 원래 세계에서 그 생각을 한 자들은 권력을 잡자 제국주의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유신 전 막부는 양요를 겪는 조선에 원군을 보내려 했지만, 유신 후 신정부는 정한론을 내세워 조선 침략을 시작했었다.
나는 말이 통하는 상대인 막부 정권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일본 유학자들의 동향을 알고 싶었다. 부정확할 수 있는 보고서가 아니라 내 귀로 직접 말이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제 개인적인 의견이며, 막부나 저희 히로시마 도쿠가와가의 공식적인 견해가 아님을 먼저 밝히겠습니다.”
망설이던 우삼동이 자기 개인 의견이라는 전제를 확실히 한 후 입을 열었다.
“천하의 질서는 다 같은 것이고, 천명을 받은 군주가 나라를 다스림이 옳은 도리입니다. 그 천명은 천자를 통하여 천하에 전해집니다. 비록 지금은 천자가 사라졌으나 천하를 두루 살피는 그 뜻과 지위가 영구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전에 언급한 것 같지만, 일본 역시 후송을 천자국으로 인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중원에는 천자가 없고, 각자 자신의 하늘을 모셔야 한다는 태도 역시 우리나 건주와 같다.
“그래서, 일본의 하늘은 누구를 통해 그 뜻을 내리는가?”
“그야, 저희 대군께서 받지 않으셨겠습니까.”
과거 조선 임금들이 그랬듯이, 일본에서도 진서대장군이 ‘일본국왕’으로 정식 책봉을 받아 명나라 천자로부터 그 정통성을 공인받았다. 그리고 그 지위와 권한은 모두 정이대장군에게 승계되었다. 고로 일본을 다스리는 정통성 있는 통치자는 정이대장군이 맞다.
“비록 저희 대군께서 겸양의 도를 발휘하여 왕호를 쓰지는 않고 계시나, 그 격은 이웃에 있는 여러 나라의 군주와 다를 바가 없으니 마땅히 동격의 군주라 하겠습니다. 어찌 천명이 대군이 아닌 다른 이에게 있다 하겠습니까?”
우리 학자나 관리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 대놓고 선양 의식을 거행하지는 않았지만 아소 씨는 스스로 퇴위하면서 명나라에서 받은 금인을 포함한 모든 상징물을 도쿠가와에게 넘겼다. 이는 곧 군주로서의 정통성을 넘긴다는 의미다.
“그럼 경도(교토)에 있는 그대들의 조정은 어찌 되는가?”
“그 조정은 과거 송나라 때 후주 황실을 우대하여 연명하게 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천명을 잃고 쓰러졌을 것을, 역대 대군들께서 가엾게 여겨 존속을 허락하고 형식상의 권위를 주었을 뿐이지요. 일본을 진짜로 다스리는 군주는 대군이십니다.”
우삼동은 매우 현실적인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일본 유학자 중에는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도 있음을 분명히 했다.
“정당한 군주는 경도의 황실이며, 대군께서는 그저 신하로서 권력을 위임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요. 하지만 을미년에 천자께서 아소 씨를 국왕으로 책봉하신 시점에서 옛 천명은 확실하게 명을 다하였습니다. 지금 일본의 군주는 도쿠가와 가문입니다.”
“알겠다. 짐은 그대가 들려준 이야기를 확실히 참고하겠다.”
몇 가지 사소한 질문을 더 던진 뒤에 대화를 끝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의 답은 받지 못했다.
“몇 년 전부터 대군이 계속 짐에게 직접 만나고 싶다며 회견을 청하고 있다. 이번에도 또 친서에서 그 언급을 하였는데, 그대는 혹시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전혀 모릅니다. 히로시마는 에도에서 천 리가 넘게 떨어져 있으니, 대군께서 어떤 사안에 관해 뜻을 정하셨다고 해도 따로 알려주지 않으시면 알 수가 없습니다.”
“알겠다.”
일본 조문 사절단은 국상이 다 끝날 때까지 도성에 머물렀다. 반촌극장은 국상이 끝나는 날부터 공연을 재개했으므로, 우삼동은 귀국하기 이전에 반촌극장에서 공연하는 셰익스피어 무대를 직접 보고 묵은 소원을 드디어 풀 수 있었다.
이들이 귀국하기 전까지 서너 번 정도 더 만났다. 일본 측의 이런저런 사정에 관해 많이 듣기는 했지만, 요시무네가 나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만은 알아내지 못했다.
‘대군께서는 즉위하신 지 올해로 20년째가 되십니다. 특별한 해를 맞아 뭔가 백성들에게 드러내 보일 성과가 필요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우삼동이 그나마 좀 도움이 되는 말을 했다. 요시노부는 끝까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친서를 전달했을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우리 쪽이 조문 사절에 관한 답례라는 형식으로 사자를 보내 저쪽의 진의를 캐봐야겠다.
– 4 –
장례식 자리를 외교 무대로 삼은 건 유구와 일본 두 나라만이 아니다. 청나라, 후금, 후송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청나라 사신이 던진 말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폐하께서 겪고 계시는 슬픔이 곧 우리의 슬픔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집안이니, 어찌 이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겠습니까.”
청나라에서는 파사합의 숙부인 아달례(阿達禮)가 왔고, 후금에서는 와극달의 사촌동생인 악이박(鄂爾博)이 왔다. 아달례는 나한테 8촌 형님, 악이박은 8촌 동생이 되는 셈이다.
두 나라 모두 본래 혈족으로서 우리와 가깝게 지냈고, 최근에는 혼사도 맺었으니 한층 더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다음 대의 군주가 될 태자들끼리 만나서 친분을 다지기도 하였으니, 세 나라 간의 의는 한층 더 단단해졌다고 보아도 좋다.
건주 양국과의 관계는 일본처럼 타산적으로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다는 점이 좋다. 다만 때에 따라서는 고삐를 당겨야 하는데, 이때 반감을 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게 어렵다.
“남쪽에 보낸 간자가 알리기를, 송주가 조만간 침노해 오리라고 했습니다. 지난번 패전의 보복을 위해 그동안 모아놓은 군사로 공격해오리라고 하더군요.”
아달례는 후송군이 지난번에 빼앗긴 서부 지역을 탈환하는 대신 동부에서 대공세를 펼쳐 역전을 노리려 한다는 첩보가 있다고 했다. 수군과 협동으로 말이다.
“저희 건주는 수군이 취약합니다. 대한 수군이 지원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유주인들과 화약을 맺은 지도 이미 1년이니, 군사들도 다 기운을 찾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는 싶으나, 확답은 할 수 없소. 싸울 시기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우리 전선이 그때 어디 있을지를 알 수 없어서 말이오.”
남중국해 일대에서 벌인 마다구 토벌은 작년 말, 겨울이 오기 전에 끝냈다. 11월에 받은 보고 이후에 별다른 전과는 없었다.
본래 예정대로 하면 올해 봄에 마다가스카르로 1차 토벌 원정대가 나갔어야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국상이 일어나면서 원정은 내년 봄으로 연기됐다. 다만 출병이 연기된 덕분에 영국인들과 출병 대가에 대해서 논의할 시간 1년을 번 것은 다행이었다.
문제는 해군이 해야 할 일이 마다구 토벌밖에 없는 건 아니라는 거다. 순서대로 조선소에 들어가 보수도 진행해야 하고, 새 배에 더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항해도 나가야 한다.
“헌데 후송 수군은 마다구들과 싸우다가 큰 피해를 보았잖소. 군선 말고도 상선과 연안의 도시, 마을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고. 그런데 북정에 나설 여유가 있겠소?”
후송에 나가 있는 익문사 관원들 보고에 따르면 후송은 마다구 때문에 생각보다 피해를 많이 입었다. 조형서는 그 뒷수습에 정신이 없어서 당분간 외정 따위는 생각할 여유가 없을 거라는 게 내가 받은 보고였는데, 이 정반대되는 정보는 뭐란 말인가.
“송주는 기껏 육성한 수군이 해적에게 참패하여 위신을 크게 상했습니다. 그래서 손실이 없는 육군을 끌고 우리 남쪽 국경을 쳐서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성들 앞에서 체면을 차리려 한다고 합니다.”
그건 또 그럴 법하다. 후송이 전비가 없어 전쟁을 못 할 놈들은 절대 아니니까. 그놈들은 해안이 쑥대밭이 됐어도 내륙에서 걷은 세금과 화약만 가지고도 청나라랑 싸울 수 있다.
“수군을 보내서 직접 도와주기가 곤란하시다면, 배만 좀 빌려주셔도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증기선 몇 척만 빌려주시면, 사용한 날짜를 계산해서 빌린 삯을 철저히 계산하겠습니다.”
“중신들과 의논해 보아야겠소.”
완곡하게 거절하는 티를 내도 아달례는 증기선을 빌려달라고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다. 이놈들이 증기선을 얻으려고 후송의 위협을 일부러 과장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후금 쪽에서는 율리아와 약혼한 3패륵의 안부를 전하며 내년에 있을 혼인을 기대한다는, 별 부담 없는 평범한 이야기만 했다. 만약 청나라 쪽에서 걱정하는 후송의 북벌이 실행됐을 때는 자기들도 바로 원군을 보낼 테니, 대한에서도 도와주기 바란다는 당부가 덧붙었다.
“그리고 폐하, 중대한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만.”
아달례가 다시 순번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정말 깜짝 놀랄 제안을 했다.
“대한의 완친왕께서는 저희 영화고륜공주와 혼인하셨습니다. 영화고륜공주는 대청 황실과 대금 황실의 피를 모두 받았으니, 그 소생은 세 황실의 피를 모두 잇게 됩니다. 실로 귀한 핏줄이지요.”
그건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자고?
“완친왕께서는 차자이시므로 당장 대한의 보위를 물려받을 수는 없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귀한 피를 어찌 헛되이 시들도록 두겠습니까? 그러니 완친왕께 적당한 봉작을 내리시고, 만약 세 황실 중 어느 하나가 대가 끊어질 때 대신하도록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귀국 황제 중통제(파사합)가 정녕 그런 제안을 하였는가? 대금국 태화제(와극달)는 그 제안에 동의하는가?”
삼국이 공동으로 사용할 세습 친왕가 같은 걸 만들자는 소리인데, 나한텐 그거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대한과 청나라는 정비인 황후 외에도 후궁을 두고 서자에게도 계승권을 주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대가 안 끊긴다. 사촌, 조카들도 있다.
서자에게 계승권을 주지 않는 후금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대칸위는 사촌이나 조카에게 얼마든지 물려줄 수 있다. 저 나가리 신자들이라면 무슨 명분을 대서든 그걸 합리화할 거고 말이다.
“허락하셨습니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만약을 위한 대비는 있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셨지요.”
아니 이놈들이 대체 무슨 생각이지? 준이를 이용해서 서로 상대편 황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건가? 준이 아들은 파사합의 외손자니 청나라 쪽에 더 가깝지만, 후금 쪽이 그 애한테 공주라도 시집보내면 그쪽에 더 가까워지고…복잡하다, 복잡해.
“일단 국상이나 끝난 뒤에 중신들과 논의해보겠소.”
하도 파격적인 제안이라 이렇게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결론을 어서 내야 하지만, 그래도 후송과의 외교만큼 까다롭지는 않다. 후송과의 외교는 건주 양국과도 직간접적으로 크게 얽힌지라,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