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31
3부 349화
– 3 –
화공들은 이 여정의 첫 구간이었던 제물포 출항부터 그림으로 그렸다. 황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의궤(儀軌)를 그려 남기듯, 이번 남순에서도 그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남순의궤(南巡儀軌)》를 작성하기 위해서다.
그림으로 묘사할 첫 장면은 지난 2월 20일, 양력으로는 3월 19일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제물포를 출발하는 ‘어승함대(御乘艦隊)’를 그린 광경이다. 본진과 후진으로 구성된 함대의 전체 숫자는 13척이다.
본진은 어승선인 동현을 중심에 두고, 호위를 맡은 1등 중선 4척, 2등 중선 2척이 주변을 에워싸는 원형진을 구성했다. 순시하러 가는 거지 무력시위나 원정을 벌이려는 게 아니니, 너무 위압감이 강한 전열함이나 기갑선은 동반하지 않았다.
본진 뒤쪽에는 호위대를 태운 수송선 6척이 후진을 형성하고 따라왔다. 수송선도 모조리 범선으로 하고 증기선을 쓰지 않은 건, 아직 증기선 중에 병사 수백 명과 그 장비, 말까지 싣고 다닐 만큼 큰 배가 별로 없어서다. 18척에 백 명씩 태우고 끌고 다닐 수는 없지 않나.
게다가 일본인들은 이미 북구주나 동래, 제물포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우리 증기선을 볼 만큼 봤다. 그러니 내가 증기선을 끌고 간다고 해서 딱히 겁을 먹거나 경탄할 일도 없다. 공연히 끌고 갔다가 혹시 화재라도 나면 그게 도리어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일이 될 거다.
화재 걱정은 내가 괜히 하는 기우가 아니다. 석탄 야적장이나 창고에서는 생각보다 자주 화재가 일어난다. 석탄이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해서 스스로 발화하기 때문이다. 역청탄이 이런 사고를 더 잘 일으키기는 하지만, 무연탄이라고 발화하지 않는 건 아니다.
더 나쁜 건 분진폭발이다. 밀폐된 창고 안에서 날리던 석탄가루가 자극을 받아 폭발하면 배가 그대로 날아간다. 북구주를 오가는 일상적인 항해 중에 터지는 사고도 아니고, 임금이 기껏 작심하고 나간 남순에서 배가 날아간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증기기관을 다루는 기술자들도 이런 현상에 대해 알고 있다. 과학적인 원리는 알지 못해도, 어떤 상황에서 석탄이 저절로 불이 붙으며 석탄 창고가 폭발하는지를 경험적으로는 아는 거다. 이런 사고를 예방하는 방법도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사고 확률을 0%로 만들 수는 없다. 나도 평소에 한강을 건널 때나 제물포에 갈 때 증기로 움직이는 어도선을 아무렇지 않게 타고 다니기는 하지만, 이번 남순처럼 중요한 정치적이자 외교적인 행사에서는 일말의 위험이라고 해도 피하는 편이 낫다.
범선이라고 해도 능숙한 선원들이 움직이니 육로로 진행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이동 속도가 빨랐다. 육로로 움직였던 무종 때의 남순은 평균을 내면 하루에 50리(20km)쯤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하루에 200리는 우스웠다. 출항 첫날에 아산까지 갔을 정도다.
아산을 첫 목적지로 정한 이유는 알렉상드르가 여기서 전열함을 건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조선소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조선소를 내가 직접 방문해 상황을 살피는 한편으로 조선공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께서 이렇게 관심을 쏟으심을 알았으니, 모두 최선을 다해서 일할 겁니다. 폐하를 위해서 말입니다.”
알렉상드르의 장담을 들으며 조선소를 둘러보았다. 지금 가장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가는 선대에는 1천 명에 달하는 조선공들이 달라붙어 대한에서 건조하는 첫 번째 2등 대선, 즉 2급 전열함을 건조하는 중이었다.
“동현을 개장하는 데 일손을 좀 돌렸던 탓에 진도가 약간 늦어졌습니다. 그래도 오는 4월 중순까지는…아니, 대한 달력으로 3월 말까지는 진수할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다닌 지도 거의 20년, 대한에 들어온 지는 10년이 지나 한국어도 유창해졌다. 하지만 알렉상드르는 여전히 달력은 서양 달력, 언어도 프랑스어 쪽을 훨씬 편하게 여긴다. 나처럼 프랑스어가 통하는 상대와 대화할 때는 언제나 프랑스어를 쓸 정도다.
“전쟁도 끝났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차근차근, 꼼꼼히 만들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지난번 전쟁, 계미남변 중에 급하게 건조했던 3등 대선 초도건조분에서 불량이 속출하는 바람에 당황했던 경험이 선명하다. 그래서 3등 대선은 전쟁 중에 발주했던 15척만으로 1차 건조를 마쳤다. 추가 건조보다는 기존 함선의 결함을 파악하고 보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대신 그 경험을 바탕으로 4등 대선을 추가로 확충하고 기함 격인 2등 대선 시험 건조에 들어가기로 했다. 지금 아산에서 건조하는 4등 대선이 3척, 2등 대선이 1척이다.
“장차 해군이 보유할 함대 규모는 몇 척으로 잡고 계시는지요?”
“삼군부에서 진언하기를, 1등 대선 2척에 2등 대선 4척, 3등 대선 15척, 4등 대선 10척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하더구나. 중선은 1등 중선 30척, 2등 중선 40척 정도면 넉넉할 것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 항구 방어용으로 쓸 기갑선이 12척쯤 추가된다. 그리고 그동안 전선으로 사용하던 갈레온들은 죄다 수송선으로 전환하거나 민간에 불하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알렉상드르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야 배를 만드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습니다만, 대한에서 얼마나 많은 배를 갖추는 편이 좋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많은 배를 한 번에 다 만들 수는 없습니다. 프리깃함은 다른 조선소에 분배하고 여기에서는 전열함만 건조하더라도 한 15년은 걸릴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이건 초안일 뿐이다. 의논을 거쳐 조정해 나가야 할 숫자지.”
지금 당장 전쟁을 재개할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함대 건설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해도 괜찮다. 혹시 후송이나 서나라, 정말 일이 어긋나서 일본과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 되더라도 현재 해군력만으로도 우위를 차지하기는 간단하니까 말이다.
조선소를 죽 둘러본 뒤에는 조선공들을 위무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내탕금 1만 냥을 잔치 비용으로 미리 받은 알렉상드르가 술과 음식을 넉넉히 준비해 두었고, 조선소에서 근무하는 4천 명이 넘는 일꾼과 기술자 전원에게 그 음식으로 크게 한턱을 냈다.
아산에서 하루를 지낸 뒤에는 다시 남으로 향했지만, 곧바로 제주도로 내려온 건 당연히 아니다. 전속력으로 움직였으면 아산에서 제주도까지 나흘이면 족했겠지만, 수시로 포구에 배를 멈추고 육지에 내려 각 고을 백성들을 만나느라 스무날 이상 걸렸다.
도화원에서 선발한 화공들은 이 여정 내내 나를 따라다니면서 내가 방문한 모든 장소에서 내가 참여하는 모든 행사를 스케치하고 밑그림을 그렸다. 서해수영 전선들이 벌이는 수조(水操)를 참관하고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부안의 면포 공장을 찾는 모습 등을 말이다.
그중에 가장 강조해서 치른 행사가 나주목에서 치른 콜레라 방역 포상 행사였다. 콜레라 유행은 목포를 중심으로 해서 퍼져나갔고, 목포는 나주목에 속한 고을이므로 당연히 나주목 일대 피해가 가장 컸다. 고로 나주목에서 일하던 의원들과 관원들의 수고도 많았다.
물론 내가 수훈 대상자들에게 일일이 훈장을 걸어주지는 않았다. 나주목사 허선이 임금을 대신하여 수훈 증서를 낭독하고 수훈자들의 목에 훈장을 걸어주었다. 매 모양 문양을 새긴 자응장과 달리, 홍익장에는 세상을 상징하는 팔괘를 새긴다.
나주에서는 도중에 들렀던 다른 고을들보다 훨씬 많은 수훈자가 있었다. 훈장과 포상금을 나눠주면서 치하하려니, 참으로 뿌듯하고 고마웠다. 이 광경도 모두 그림으로 남았다.
“의궤가 완성되면 중전마마께 바로 보여드리시겠지요?”
“아닐세, 협판. 당연히 태후마마께 먼저 보여드려야지.”
민지원과 잠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옆에 앉아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조용원이 끼어들었다.
“폐하, 악공과 무희들의 솜씨가 도성에 있는 이들만 못하여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이곳 제주도에서는 이것이 한계이니 부디 너그럽게 보아주시옵소서.”
“음? 괜찮다. 짐이 잠시 예부협판과 한담을 나누기는 했으나, 악공들의 솜씨가 부족해서가 아니니라. 그저 용건이 있었던 것이니 공연한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제주도 악공이나 무희들 솜씨가 그렇게 뒤떨어지는 수준도 아니었다. 물론 도성에 있는 장악원이나 최고급 주루만큼이야 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못 들어주고 못 봐줄 지경은 아니다. 게다가 상당히 다채롭기까지 하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제주도는 옛날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다. 그 돈으로 본국이나 일본, 후송 등에서 악공과 무희를 구해 들일 수가 있다. 그래서 지금 연회 자리에서도 무척 다양한 음악과 춤이 이어지고 있다.
제주도에서 아예 보고 들을 수 없는 음악이라고 하면 유럽식 음악 정도다. 현재 대한에서 유럽 음악을 제대로 접할 수 있는 곳은 주교좌 성당인 마포대성당과 부안에 있는 내달인들 거주지역 정도뿐이니까 말이다.
– 4 –
서양 미술은 장조 시절에 베네치아에서 데려온 안토니오 살바네티가 씨를 잔뜩 뿌렸다. 본업은 화가라고 하지만 본래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그림만 그린 게 아닌지라, 안토니오 역시 그림 외에도 조각?건축 등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능력을 발휘했다.
그 뒤로 서양 미술은 그림, 조각 등의 수요를 민간에서도 제법 확보해서 안정적인 위치를 얻었다. 이건 전에도 언급했던 것 같은데.
헌데 서양 음악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백성들이 양악(洋樂)에 딱히 관심이 없고, 나도 현대에서부터 고전 음악 같은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장조 때도 음악가를 데려온다거나 악기를 구한다거나 하는 일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혹시 베토벤이 역사에서 없어질까 봐서 군사고문이었던 베이트호번 대령을 잘 대해주기는 했다. 하지만 위인으로서의 베토벤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는 감정과 내가 음악을 잘 알고 좋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닌가.
내 뒤를 이은 임금들도 서양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격동기에 재위하던 성이와 그저 기근 대책에 몰두하던 부황 연가제는 예술 같은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연이는 부안 출신 내달인 후궁을 들인 김에 악기를 좀 만져본 것 같지만,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만져보다 말았던지라 궁중음악에다 서양 악기를 넣거나 하지는 않았다. 형황인 건복제는…음악 운운하는 거 자체가 미안한 사람이었고.
다만 이번 생에는 장조 때와는 조금 상황이 달라지긴 했다. 장조 때는 그 시절에 유럽에 있는 음악가 이름도 몰랐지만, 지금 활동하는 음악가 중에 바흐 정도는 나도 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그 음악가 이름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였는데 내가 독일을 지날 때 본 사람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였다. 어쩌면 바흐 집안의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음악에 취미를 갖기에는 그때 내 형편이 좀 안 좋았다. 어떻게든 형황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기를 쓰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그림에는 그래도 조금 관심을 쏟아서 여럿 수집했지만, 본래 관심이 적었던 음악가나 악기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네덜란드에 들른 김에 렘브란트를 수집한 것처럼, 원래 예정대로 이탈리아까지 방문하는 코스로 돌아왔으면 이탈리아에서 악기는 몇 개 가져왔을지도 모르지.’
바이올린은 이미 발명된 걸 확실하게 봤다. 모후와 형수에게 보낼 선물로 고려해 보기도 했었지만, 바다를 건너다가 습기 때문에 망가질지도 모르고 연주하는 방법도 모르는 악기를 선물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패물만 보냈었다.
헌데 본국에 돌아온 뒤에 보니 마포대성당에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프랑스계 신자들이 태연하게 하프시코드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파이프오르간과 함께 미사에서 연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악기가 바다를 건너와도 별문제가 없고, 연주법을 가르칠 사람도 있는 거였다!
심지어 전쟁이 끝난 뒤에 입국한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에게 ‘스트라디바리라는 바이올린 제작자가 명장(名匠)으로 유명하다’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현대에 정말 엄청난 가격으로 팔리는 유명한 명품이라는 정도는 나도 안다.
“그건 꼭 사야 해! 꼭!”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모르는 건 상희도 마찬가지였다. 집안 형편 탓에 여유롭게 음악을 배울 여유 같은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음악을 듣는 건 좋아했고, ‘교수님들의 고상한 취향’을 만족시키느라 고생하면서도 클래식 명반을 구해오는 일만은 즐거웠다고 했었다.
그래서 상희와 의논한 뒤에, 전쟁 끝나고 나서 스트라디바리한테 악기를 주문했다. 생각 같아서는 백 개쯤 사고 싶었지만, 돈도 돈이고 수제품으로 제작하는 물건이 재고가 넉넉할 리도 없어서 바이올린 5개, 비올라 3개, 첼로 2개만 주문했다. 그만한 재고는 있겠지.
상희는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들어오면 꼭 직접 연주하겠다면서, 벌써 선교사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설픈 솜씨로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데 손을 대면 죄악이라면서 말이다. 내가 남순을 마치고 돌아오면 연습한 결과를 보여주겠다던데, 과연 어떠려나.
– 5 –
제주도에는 열흘 동안 머물렀다. 내려오는 길에 들른 충청도와 전라도의 각 고을에서는 하루 이상 지낸 곳이 없었음을 고려하면 압도적으로 오래 머무른 셈이다.
“짐은 이 대한 땅에 나라가 생긴 이래 제주도를 직접 찾은 첫 번째 임금이다. 다시 오기 쉽지 않은 길이니, 한번 왔을 때 제주도 땅의 모든 것을 보고 많은 백성을 만나야 후회하지 않으리라.”
그 열흘 동안 한라산에도 올라갔다 왔다. 한라산 정도는 딱히 오르기 힘들 것도 없었지만 제주부사 조용원은 행여 무슨 사고라도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내 뒤를 따라왔다. 백록담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도 내려가는 길을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짐은 어려서부터 잡기를 즐긴지라 이 정도 산길에서 구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걱정하지 말지어다.”
내가 유럽과 미주에서 뭘 하고 돌아다녔는지 뻔히 아는 보리스야 걱정 따위 조금도 하지 않고 키득거리면서 뒤를 따랐다. 하지만 조용원은 행여라도 자기 관내에서 임금이 낙상하는 불상사가 생긴다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벗지 못했다.
“거참,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대도.”
한라산 등반은 당연히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제주도 전역은 아니라도 제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역만이라도 돌아다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변화가 느껴졌다. 곡식을 키우지 못하는 건 여전하지만 사방에 귤밭과 유채밭이 무성하고, 목장에는 장조 시절부터 강화도에서 육종한 스페인산 말들이 가득했다. 육용으로 사육하는 소와 돼지도 이곳저곳의 목장에 넘쳐났다.
이 부를 지키기 위해 섬에 주둔하는 해군도 막강하다. 새로이 개편한 중부수군통제영에서 관할하는 최남단 수영으로서, 제주도 자체를 방어함은 물론이고 언제든 유사시에는 남쪽에 있는 남부수군통제영을 지원하러 갈 태세까지 갖추고 있다.
“짐은 그대들을 믿노라. 대한의 신하로서 영원히 충성을 다하라.”
“신들의 충성을 믿어주소서. 저 바다가 마르고 한라산이 무너지는 날까지 신들은 폐하의 신하로서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배웅하러 바닷가에 나온 제주도 유지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흐뭇한 기분으로 배에 오르면서 며칠 전에 올라갔던 한라산을 바라보았다. 남순을 마친 뒤에 여유를 내서 북순을 나가면 백두산에도 꼭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