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33
3부 3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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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서는 닷새를 머물렀다. 첫날과 둘째 날은 객사에서 쉬면서 주민들에게 알현을 받았다. 개중에는 명나라 붕괴 뒤 피난을 나와 이쪽에 정착한 중국인 집단도 있었다.
“폐하께서는 진실로 대명의 천하를 계승하신 정통한 군주이십니다. 대한의 임금이야말로 대명공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군주이시니, 천하에 폐하와 동등한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가사키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대개 상해가 있는 강소 지방 출신들이다. 그래서 소명동에 정착한 산동 출신 난민들과 성향이 달랐다. 소명동 주민들은 ‘명나라? X까!’라는 태도인데, 이들은 비교적 명나라 황실에 우호적이었다. 살던 곳이 수도에서 멀어서 그런가.
아니면 친황실파였기 때문에 본토에 남지 못하고 일본으로 탈출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대명공을 퍽 존중한다. 그리고 우리 대한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로 명나라를 이었다며 호감을 표한다.
“대명천하를 수호하시는 폐하께 저희가 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입니다.”
“고맙다. 내 너희의 봉사를 잊지 않으마.”
중국인들은 내게 바치는 선물로 커다랗게 차린 음식상을 들고 왔다. 일본에서 중국요리를 먹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것도 강소 요리라니!
중국요리 중에서 사천 요리나 산동 요리는 대한에서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다. 사천 요리가 먹고 싶으면 대명동에 가면 되고, 산동 요리가 먹고 싶으면 소명동에 가면 된다. 내 직속 숙수 중에도 소명동 출신 중국인이 있고, 이번 남순에도 데려왔을 정도다.
그런데 강소 요리를 뜻밖에도 일본에 와서 처음 먹어보게 되었다. 신하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산처럼 쌓인 요리를 배부르게 먹고 술잔을 나누니 즐겁기 그지없었다.
둘째 날까지를 이렇게 보내고, 셋째 날에는 운젠 화산에 갔다. 굳이 복잡한 육로를 택할 이유는 없기에, 배를 이용해 화산 바로 밑 해안까지 편하게 갔다.
미리 알아보고 왔지만, 운젠산은 지금 용암을 뿜지 않는다. 50년쯤 전에 한 번 분화했고 30년쯤 전에 한 번 더 터졌다. 현재는 평온한 상태다. 그래서 화산에는 오르지 않고 곧바로 60여 년 전에 처음 문을 열었다는 운젠 온천탕으로 향했다.
“폐하께서 오신다고 하여 탕과 숙소를 모두 깨끗이 정비해 두었습니다. 부디 편히 쉬시고 가시옵소서.”
온천 관리는 근처 사찰에서 맡고 있었다. 책임자인 승려는 물론 일본인이었지만 한국어가 아주 유창했다. ‘쿠카이(空海)’라고 하는 이 승려가 스스로 소개한 바에 따르면, 경상도에서 건너온 한인 승려와 교류하면서 배웠다고 했다.
북구주에 천주교도들이 많다고는 하나, 불교가 아예 전멸한 건 아니다. 대한 조정에서는 모든 종교에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고, 불교 역시 마찬가지다. 북구주에 있는 사찰들도 본국에 있는 절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재산도 당연히 보장한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좋기는 정말 좋구나.”
화산 덕분에 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짜 ‘뜨거운 물’이 펑펑 솟아난다. 그런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다. 아아, 이게 단순한 가족여행이라 상희하고 올렝카, 다른 식구들까지 데리고 자유롭게 온 거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온천은 현대에서도 직접 와본 적이 없다. 난생처음으로 이런 뜨거운 온천을 즐기고 있으려니, 온천이 생길 수 있는 근본 원인인 화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운선산(雲仙岳, 운젠산)이 부사산(후지산)처럼 큰 화산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로다.”
후지산이 분화한 지도 2년 반 가까이 지났다. 하지만 그 피해는 아직도 크게 남아있다. 농경지를 덮은 재도 다 걷어내지 못했고, 흐름이 막힌 냇물과 강을 다 정비하지도 못했다. 막부가 각 번에 의연금을 갹출하라는 명을 매년 내리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운젠산은 후지산보다 크기도 작고, 바다 가운데로 튀어 나간 반도 위에 있다 보니 육지 한가운데 있는 후지산보다 주변에 피해를 적게 입혔다. 분출물이 나와도 대개는 주변 바다에 내려앉기 때문이다.
“허나 산 바로 밑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어쩔 수가 없겠구나. 늘 머리 위에 불화로를 이고 사는 셈이 아니냐.”
운젠산 밑에도 상당한 인구가 있다. 도원만호부(島原萬戶府), 즉 ‘시마바라(島原)’가 바로 운젠산 동쪽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원래 역사에서 일본 최대의 농민반란,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던 곳이 바로 그 일대다.
이쪽 세계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여기가 아니라 규슈 중남부 전체를 무대로 해서 원래 역사보다 훨씬 대규모로 벌어졌다. 덕분에 이곳 시마바라는 역사에 크게 이름을 남길 일이 없는 작은 시골로 남았다. 가톨릭 탄압도 일어나지 않았고 말이다.
“오늘은, 올해는 화산이 터지지 않기를 늘 부처님께 빌면서 살고 있습니다.”
쿠카이가 조용히 합장하며 대답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화산 밑에서 계속 살아가는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라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목욕은 그만 마치겠다.”
몸을 일으키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급히 와서 시중을 들었다. 경호를 겸해 함께 탕에 들어와 있던 보리스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뒤를 따라 일어섰다. 옷을 입고 탕에 들어온 나와 달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보리스의 알몸을 본 하녀들이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어허, 그대들은 사내 알몸을 처음 보는가?”
보리스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의기양양하게 우뚝 섰다. 두 다리 사이에서 덜렁이는 크고 굵직한 양물이 마치 어린애 팔뚝 같았다. 하녀들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당황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끼어들어서 적당히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위영장, 물건을 보여주기만 하고 팔지 않으면 그것도 일종의 협잡이네. 헌데 여기서 그 물건을 팔면 후환이 있을 터인데, 각오가 되어있는가?”
보리스의 처 장옥정은 도성 제일의 미인이다. 하지만 겉만 보는 사람들이 모르는 특징이 하나 있는데, 질투가 정말 심하다. 보리스가 밖에서 여자를 품은 사실을 알기만 하면 집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래서 보리스가 첩을 두지 못하는 거다.
예왕의 첩이던 시절에 장옥정이 투기를 했다는 말 같은 건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보리스에게는 질투심을 드러내는 이유가 뭔지를 모르겠다. 하여간 그 문제는 내가 보리스를 놀려먹고 싶을 때 가끔 써먹고 있다.
“폐하, 짓궂으십니다. 기왕 원지에 왔는데 폐하나 저나 서로 눈감아주면서 작당하여 조금 재미를 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보리스가 농반진반으로 투덜거리면서 허리에 옷을 걸쳤다. 웃으면서 저녁 식사가 준비된 방으로 향하는 내 옆에 욕탕 옆에서 경비하던 내금위 병사들이 급히 달라붙었다.
걸어가며 생각하니, 이 온천은 이제 수백 년 동안 두고두고 계속 써먹을 간판을 얻었구나 싶었다. 대한 태황께서 친히 방문하신 온천! 이거 얼마나 효과 좋은 선전 문구겠는가. 아마 내가 오늘 묵는 별채까지 길이길이 보전하면서 상품으로 써먹겠지.
운젠에서는 온천욕과 일본식 만찬을 즐기면서 하룻밤을 푹 쉬었다. 아침이 되어서 산에서 내려와 홀가분한 마음으로 배에 오르니 대기하고 있던 수병들이 일제히 예를 올렸다. 선장 안용복이 그 선두에 있었다.
“편히 쉬셨습니까, 폐하.”
“덕분에 잘 쉬었네.”
동현이 돛을 펼치고, 곧바로 호위함대도 돛을 올렸다. 한나절 뒤 동현은 나가사키 항구에 들어왔다. 도착한 지 넷째 날인 이날 저녁에는 한인, 일인, 당인(중국인) 유력자들을 객사로 불러서 친히 연회를 베풀었다. 음식은 내가 동현에 태워 데려온 궁중 숙수들이 준비했다.
본국에서는 방문할 지역 지방관들이 적절한 술과 음식을 준비하도록 일정을 미리 알렸다. 잔치 비용도 미리 지급해서 내가 도착하면 바로 잔치를 열 수 있도록 했다. 머무를 시간이 넉넉하지 않기도 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제주도와 일본에서는 조금 다르게 준비했다. 아무래도 내가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 지역에서 내 인상을 강하게 남기자면 주민들이 구경하기 힘든 도성 음식을 식탁에 내놓아야 했다. 그래서 일부러 황궁 주방에서 숙수들을 데려온 거다.
이 숙수들을 활용한 연회는 도착 첫날이 아니라 그 고을에 머무는 마지막 날에 베푼 것도 그래서다. 숙수들이 준비하는 동안에 나도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현지 사정을 살피면서 바쁘게 일했다. 물론 그런 도중에 틈을 내서 한라산도 가고 온천에도 다녀오고 했지만.
“저희에게 이런 진기한 음식을 내리시니 영광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것 아니다. 너희가 바치는 충성에 이깟 음식이 어찌 충분한 보상이겠느냐?”
출신이 어느 민족이건, 대한의 신하로서 임금에게 충성하면 모두 대한의 백성이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신하였던 북방의 여진족은 이미 이 단계를 거쳐 충실한 우리 신민이 되었다. 우리 땅에 거주하는 중국인과 일본인이라고 해서 그게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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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를 떠나서 하카타에 들어가는 데는 사흘이 걸렸다. 나가사키와 하카타 사이에는 내가 직접 내려서 살펴야 할 만큼 중요한 섬이나 항구는 없었고, 그래서 하카타까지는 배를 멈추지 않았다.
물론 들르려고 하면 들를 곳이 없는 건 아니다. 일기도는 내가 들러서 살필 가치가 있는 우리 영토다. 하지만 일기도는 규슈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친 뒤에 들르기로 했으므로, 일단 지금은 그냥 통과한다.
“저쪽이 신장이 세운 나고야성이 서 있던 곳인가.”
공연히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으므로, 우리 남순함대는 히라도 바깥으로 크게 돌았다. 히라도와 규슈 본토 사이 해협을 통해 질러가면 시간을 반나절은 아낄 수 있었겠지만, 우리 함대는 모두 범선이다. 혹시 한 척이라도 좁은 해협에서 난파하면 큰일 아닌가.
히라도 서쪽으로 우회한 우리 함대는 일기도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갑판 위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니 을미동정 때 받던 보고 내용이 떠오른다. 나고야성을 공격해서 어떤 전과를 세웠다고 세세하게 적어 보내던 장수들의 장계가.
“예, 폐하. 여기서 곧바로 남쪽으로 30리만 움직이면 신장이 우리 땅을 범하는 거점으로 삼으려고 세운 나고야성의 남은 흔적이 있습니다.”
안용복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덧붙여 관련된 야사도 이야기했다.
“나고야성은 실은 우리가 함락한 게 아니고 적이 스스로 불태웠습니다. 우리 군사들은 그 불탄 잔해를 보고 그 위에 신나게 오줌을 갈겼고, 그 뒤로 나고야성을 오줌이 묻었다 하여 오줌성이라고 부르며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합니다.”
“짐은 처음 듣는 이야기로다.”
이것도 그 코끼리에 밟혀 죽을 뻔했다는 일본인의 고조부처럼 후대에 생겨난 전설 아닐까 싶다. 내가 나고야성이 함락되고 13년 뒤까지 살았는데 그런 소문을 전혀 들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굳이 공식적으로 보고할 만한 이야긴가 하면 그건 또 아니긴 하다.
그래도 나고야성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 진짜 이유는 순전히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는 게 정답이지만 말이다.
애초에 나고야성은 ‘조선 원정의 근거지’로 세워진 성이었다. 그렇다면 북구주를 차지한 우리로서는 그 성을 재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을미동정 이후, 북구주 일대 성들은 대부분 전쟁으로 인해서 파괴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 영지로 돌아온 영주들은 그 성들을 다시 쌓았다. 을미조약이 군사시설 복구에 관한 제약을 전혀 걸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는 없었다.
우리 측에서도 만약을 대비해 북구주 각지에 성을 새로 쌓았다. 거점 방어를 위한 일본식 성채 외에 행정 중심지를 통째로 방어하기 위한 조선식 읍성도 쌓았다. 구주총관부가 있는 하카타나 지금 들른 나가사키 같은 곳이 그렇게 읍성을 둘러친 도시다.
“물론 읍성 바깥에 거주하는 자들도 많기는 합니다.”
“어쩔 수 없지 않으냐. 호구가 늘어난다고 하여 자꾸 성을 더 크게 쌓을 수는 없으니.”
파리가 그랬지. 19세기까지 계속 구획을 확장해 가면서 성벽을 증축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하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 수도 한양만 해도 계속 인구가 늘고 있지만, 성벽을 새로 쌓을 계획 같은 건 전혀 없다.
“허나 지금은 중남부 구주에도 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을 더 쌓지는 않고 있습니다.”
일본 측이 성을 없앤 건 에도 막부가 반포한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 탓이 컸다. 처음에 이에야스가 집권할 당시만 해도 막부에서는 다이묘들의 무장에 관해 별다른 통제를 가하지 않았다. 이쪽 세계 일본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도, 오사카성 공방전도 없었다는 점이 컸다.
하지만 진서장군부 폐지와 그에 이어 발발한 천주교도 반란은 이를 진압한 막부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었다. 반란 진압을 위해서 20만 대군을 소집한 막부는 그 힘을 기반으로 전국에 일국일성령을 반포했다. 각 영주는 자신의 거성(居城)을 제외한 모든 성을 헐어야 했다.
반란을 일으킨 천주교도들이 규슈 각지의 성을 거점으로 삼아 항전하는 바람에 진압군이 애를 먹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반란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이 거점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필요 없는 모든 성을 파괴하거나 막부에 넘기라는 지시에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그대는 참으로 박식하군. 배 모는 일 말고도 아는 것이 참으로 많아.”
“과찬이시옵니다, 폐하. 신은 그저 배를 몰다 보니 배가 머무는 땅에 관하여도 좀 더 많이 알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안용복은 겸손을 부렸다. 분명 과거에는 수군 장수로서 공적을 세워 언젠가 무묘에 들고 싶다는 포부도 가졌건만, 어승선을 너무 오래 몰다 보니 그쪽 꿈은 체념한 모양이었다.
“분명 과거에는 해적을 쫓기도 하였고, 불랑국에서 온 고문에게 직접 전술을 배우며 장차 대공을 세울 꿈을 꾸었습니다. 허나 폐하께서 다른 일을 하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셨고, 배를 몰아 세상을 누비며 신기하고 즐거운 광경을 많이 보았으니 지금도 만족하옵니다.”
“알겠다. 허나 그대도 평생 동현의 선장으로만 지내다가 관직을 마칠 수는 없지 않으냐. 이번 남순을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가면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뜻에서 그대에게 적당한 자리를 내리리라.”
전부터 종종 생각한 거지만, 안용복에게 인제 와서 수사 자리 같은 걸 주는 건 어울리지 않을 듯하다. 그보다는 해군본부 직할 탐사국 같은 기구를 설치하고 안용복을 그 책임자로 앉히는 편이 좋겠지 싶다.
안용복은 북태평양을 자기 안마당처럼 오가고, 수시로 인도 항로를 왕래한 사람이다. 그 경험을 누가 앞서겠는가. 모든 항로를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사람인데.
심지어 이번에 일본에 오면서 느낀 바지만 항로가 지나는 주변국 내의 정보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와 상관이 있는 태평양과 동남아 전역에서 모인 정보를 취합하고 정리하는 직책을 주어도 잘 해낼 거다.
내가 돌아간 뒤의 일을 생각하는 동안에도 함대는 계속 동쪽으로 움직인다. 얼마 안 가서 하카타에 도착하리라. 하카타에 도착하면 그곳 백성들을 위무하며 잠시 쉬고, 회담 장소로 움직여서 드디어 역사적인 첫 한일 정상회담을 실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