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5
1부 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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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까지 가물던 날씨는 신기하게도 7월이 되어 늦은 장맛비가 내리면서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번에는 전국에서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주구장창 떨어지는 빗줄기에, 처음에는 해갈이 됐다고 좋아하던 백성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우거지상이 되었다.
“비는 아직도 멈출 기색이 없느냐.”
“송구하옵니다.”
관상감에서는 이렇다 할 예측을 내놓지 못했다. 젠장, 하긴 하루 날씨라도 정확히 예측하면 신통할 이 시대에 몇 주, 몇 달 뒤 날씨를 정확하게 맞히라고 요구하는 게 잘못이긴 하지.
“가을에 이토록 비가 내려서야 곡식이 패지 않을 텐데….”
가물더라도 어느 정도만 물을 댄다면 곡식을 거둘 수 있다. 하지만 홍수로 쓸려 내려가면 수확이고 뭐고 아예 없다. 게다가 토사에 덮인 경작지는 재생 불가능 상태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벼가 제대로 익으려면 햇빛을 많이 받아야 한다.
“그래도 전하께서 수리시설과 제방을 든든하게 보강하라 하신 덕분에 홍수가 나지는 않고 있사옵니다. 작년과는 다르옵니다.”
새 이조판서 허침이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전임 이조판서 강귀손이 지난 6월에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하고 새로 임용한 사람인데, 과거 연산군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또한 폐비 논의 때도 결사적으로 폐비론을 반대했다. 유능하고 강직한 사람이라 평이 좋다.
“저수지와 보에 있던 물도 거의 비웠으므로 새로 오는 비를 받을 수 있고, 든든하게 다져 놓아 지난번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모두 전하께서 신경을 쓰신 덕분이옵니다.”
7월에 서울, 충청, 전라 일대에 지진이 있었다. 그래도 둑이 무사하다니 정말 다행이라고 여기며 안도하고 있는데 병조판서 이극돈이 또 한 가지 제언을 했다.
“전하, 그동안 각 고을에 흩어서 키웠던 물소를 경상도, 전라도의 각 섬들 중 따뜻한 곳을 골라 방목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물소가 아직도 있었느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5년쯤 전에 각 고을에 있는 물소를 농사에 쓸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보고하라고 지시한 기억이 났다. 결과보고가 어떻게 올라왔었더라.
물소 사육은 조선에서 벼르고 벼른 숙원사업 중 하나였다. 전투용 각궁 제작에 꼭 필요한 재료가 물소뿔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도 못 구한 물소였는데, 세조 때 오우치 씨가 암수 한 쌍을 선물로 바치면서 입수했다. 헐, 오우치 씨가 조선에 러브콜을 보낸 게 꽤 전부터였군.
이 물소들은 사복시에서 애지중지 기른 끝에 70여 마리까지 불어났고, 각 고을에 나누어서 기르게 했다. 초기에는 사람을 들이받는 사고도 몇 번 있었지만 요즘은 별 말이 없었다.
“지금 각 고을에 흩어져 있는 물소가 몇 마리나 되느냐?”
“4백 두 정도 되옵니다.”
잠시 생각해보았다. 좋은 활을 만들려면 물소뿔이 필수지만, 물소는 한반도의 풍토에서는 잘 살지 못한다. 그 긴 세월이 지났는데 수효가 고작 4백 두, 이래서야 원활한 공급이 가능할 수가 없다. 게다가 농사에 쓰기도 힘들고, 고기가 딱히 맛이 좋지도 않다. 키울 이유가 있나?
“섬에서 물소를 키운다면, 말을 키우는 목장을 침범할 우려가 있다. 목장에 모으는 대신 각 호마다 분배하여 키우게 한다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물소가 죽거나 제대로 번식을 못할 공산이 크다. 또한 남도의 섬이라 해도 남만보다는 추우니, 물소가 자라기에 적당치 않다.”
“그럼 전하께서는 물소를 어이 처분하고자 하십니까?”
“각 관청에서는 물소 관리에 골치를 썩이고 있고,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키우게 하면 그대로 또 민폐가 되리라. 그러니 이미 성장한 물소는 모조리 잡아 뿔을 뽑아내고, 덜 자란 송아지는 클 때까지만 기다려 도축함으로써 물소 사육을 그만 폐함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건 총이 있기 때문이다. 각궁보다 훨씬 강력하고 사거리도 긴 강선총이 있는데, 왜 막대한 비용을 들여 물소를 키운단 말인가?
더구나 명나라에서도 올해부터 물소뿔에 대한 무역 제한을 풀었다. 물소뿔이 필요한 만큼, 그것도 직접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싼 값에 들여올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조공으로 조총을 보내면서 더 이상 각궁이 우리에게 핵심전력이 아니라고 암시한 덕이니, 결국 조총 덕분이다.
“각 고을에 명을 내려 물소 뿔과 가죽은 모두 군기시에 올려 활과 갑옷을 만드는데 쓰도록 하라. 뼈와 살은 이제까지 물소를 기른 보수로서 각 고을이 알아서 처분해도 좋다. 그리고 이번에 도축하지 않고 남은 물소는 모두 사복시로 보내게 하라.”
“예, 전하.”
내정은 확실히 일상적인 관리가 필요하지만 지루한 일이기도 하다. 물소 이벤트는 간만에 나타난 비일상적 과제였다. 그 외에는 가뭄, 야인, 왜구 등등 스트레스 요인만 하나가득이다. 그러니 이렇게 뭐라도 만들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지.
“경주에서 올리게 한 백수정은 무사히 도착하였느냐?”
“잘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에서는 렌즈에 쓸 만한 유리를 만들 기술이 없다. 유리 자체가 보석이나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들어온 색유리구슬이나 유리거울이 장식용으로 쓰이는 정도다. 유리병이나 유리잔을 쓰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워낙 비싸면서 내구도는 약하니 인기는 없었다.
“잘 다듬어서 투경을 만들도록 하라. 매끄럽게 잘 깎아야 빛이 잘 통과할 것이니라.”
“예, 전하.”
투경(透鏡)은 렌즈를 뜻한다. 경주 인근에서 산출되는 백수정은 예로부터 공예품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지만 렌즈를 만드는데도 쓸 수 있다. 문제는 조선에 아직 안경이 없었고, 당연히 렌즈 깎는 기술자도 없다는 거다. 하지만 안경, 망원경, 현미경을 만들려면 렌즈가 필요했다.
결국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조총 공납을 받으면서 기뻐하던 황제가 답례로 은 말고 바라는 게 없냐고 물었고, 잽싸게 요구한 것들 중 하나가 안경 제조 기술자를 보내달라는 청이었다. 물소뿔 수출 제한을 풀어달라는 부탁이 다른 하나였고 말이다.
전문기술자가 오자 당연히 만들어내는 렌즈 수준이 달라졌다. 기존에 작업하던 보석세공인들 솜씨도 나쁘진 않았지만, 중국인 기술자가 만들 렌즈가 훨씬 좋았다. 크게 정밀하지는 못한 갈릴레이식 망원경이지만, 충분히 쓸 만했다.
직접 들여다보니 시야가 선명하게 확 트였다. 대마도 원정 때 쓴 시제품 망원경이 윤곽만 흐릿하게 보이던 데 비하면 훨씬 나았다. 여기서 더 정밀한 렌즈를 만들려면 수학을 연구해서 굴절각 계산을 해야겠지.
정밀한 렌즈가 생겼으니 현미경도 만들어볼까 싶기는 한데, 당장 실용적인 용도가 있을지 걱정이다. 조선에서 과학 연구를 하는 이가 있을까? 여유 생기면 성균관에 대응하는 박물관을 만들고 과학 연구를 후원할까보다. 과제는 내가 직접 정해주면서 연구를 이끌어야겠지 싶다.
– 14 –
“대간의 청을 허한다. 모든 왕자군과 공주 및 옹주들이 가지고 있는 나뭇갓을 본래대로 각 관청이 관리하도록 되돌리되, 진성대군, 제안대군, 월산대군 세 사람에게만 예외로 한다. 다만 이것도 다음 대에서는 회수토록 하겠다.”
“전하, 어찌 대군들에게는 남겨주려 하시옵니까? 모두 회수하시지 않으면 왕자군들도 다시 돌려 달라 할 것이옵니다.”
“어찌 적통 대군과 나머지를 똑같이 볼 수 있느냐? 진성대군은 내 친형제이며, 월산대군과 제안대군 모두 엄연한 적통 대군이니라. 추후 후손에게까지 인정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대군 및 부인이 살아있는 당대에는 나뭇갓 하나 정도는 주어도 된다. 아무 말 말고 실행하라.”
흉년 때문에 시작된 이 나뭇갓 문제는 거의 올해 내내 논란거리였다. 결국 대간들 요구대로 대부분의 나뭇갓을 국가 소유로 다시 회수했다. 경기도 백성들은 다시 자유롭게 산과 숲에서 땔감과 꼴을 채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염려하던 왕족들의 반감 문제는 결론을 내렸다. 나뭇갓 따위로 들 반기라면, 어서 들고 일어서라고 말이다!
금위사와 포도청은 주요 종친 및 행세깨나 한다는 중신들, 사림들 사이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신망 있는 이들 등을 모조리 감시하고 있다. 나뭇갓을 내놓게 된데 대해서 불평을 하는 정도를 벗어나, 반심까지 품고 일당을 모은다면 기꺼이 현장을 잡아드려야지.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조사보고서를 보면, 아직까지는 훈구파나 사림파나 모두 은밀히 모여 불평불만을 나누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아직까지 직접적으로 행동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한 번에 모이는 인원은 최대 십여 명. 양쪽에 모두 연계가 있는 사람이 양쪽 회동에 모두 얼굴을 내미는 경우는 있지만, 딱히 양 집단이 합세해서 뭔가 꾸민다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물증은 아무 것도 없고 심증뿐이지만, 관심법을 쓸 수 없는 이상 심증은 별 가치가 없다.
보고서를 내려놓고 생각해 보았다. 사실 작정하고 사건을 키우면, 지금 단계에서도 조정을 피바다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일단 몽땅 잡아들인 뒤 주리를 틀고 인두질을 하면 누군가는 자백하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누구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는지도 짜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공작정치를 벌이고 싶지는 않다. 그저 불평이나 좀 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을, 정치적인 필요 때문에 혐의를 조작해서까지 감옥에 넣고 거짓 재판으로 사형에 처한다? 그거 완전히 우리나라 옛날 독재정권이잖아. 국가보안법으로 수없는 생사람을 잡았던.
지금은 분명 비민주적인 시대다. 군주제 자체가 비민주적이고, 나 역시 딱히 민의를 반영한 정책을 펼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재판은 공정해야 하고, 죄 없는 사람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흉년에 지진, 왜구, 여진족 때문에 민심도 흉흉하다. 이런 판에 혐의도 분명치 않은 역모사건을 터트려 봐야 별 도움도 안 된다. 쓸모도 없는 일을, 무리해 가면서 시도하진 말자. 내가 한사문을 비웃으면서 했던 말을, 나 스스로가 어길 수는 없지 않은가?
‘아직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고, 저지를 조짐도 보이지 않는 자들을 죽이거나 가두라니. 그대들이 말하는 덕이란 참 자애롭기도 하구려.’
“종성가에게 시집보낼 처녀는 의금부 경력 겸 금위사정, 정호찬의 삼녀로 정하였소. 과거 세종대왕 때 동청례의 부친 동소로가무(童所老加茂)가 공을 세웠을 때도 세종께서 예빈시 판사의 딸을 내려 장가들게 하셨으니, 이 정도면 격이 맞는다고 생각하오.”
공표하기 전에 내 제안을 받은 정호찬은 흔쾌히 허락했다. 위의 두 딸은 이미 다 출가하고 막내딸만 남아 있어 고민이었다며, 마침 혼담도 아직 정해 놓지 않았다고 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 아닌 정호찬이니만큼 나로서도 안심이 된다. 절대 뭔가 수작을 부리지 않을 테니까.
“타당한 분부이시옵니다.”
조정에서도 별 반발은 없었다. 아마 다들 자기 딸이 뽑히지 않은 게 기뻤겠지.
일단 결정을 한 뒤에는 빨리 진행해서 일을 끝냈다. 대마도에 있는 종성가의 부친 종재성에게 상황을 통보하고, 정호찬의 집 가까이에 집을 한 채 하사해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게 했다. 볼모 신분임을 감안하여 식은 처가에서 간략히 치르도록 하고.
다만, 종성가가 조선의 사위가 되었다고 해서 왜구가 근절되지는 않았다. 혼인식을 치르고 겨우 사흘 뒤에 경상도에 대마도 출신 왜구 14명이 나타났다. 다 붙잡기는 했지만.
– 15 –
“요즘 중전이랑 애들 잘 돌봐줘서 고마워.”
“내 일인걸 뭐.”
밖에서는 상희네 행랑어멈과 다지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내가 임금이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말아야 하는데, 다지는 뜻밖에 거짓말을 잘도 꾸며대고 있었다. 내가 양녕대군의 후손인 어느 댁 넷째아들인데 이집 의원나리의 뜻이 마음에 들어 대화를 나누러 오는 거라니, 참.
“그런데 어쩐 일이야?”
“오랜만에 이야기나 좀 나누고 싶어서. 낮에는 만나도 말도 못 건네니까.”
상희가 내 부탁에 따라 내의원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내의원에서 중궁전을 드나들고 하다 보니까, 그동안 상희가 누구인지 모르던 겸사복들이 자연스럽게 상희의 신분을 알아버렸다. 상감이 승마에 자주 데리고 나오던 젊은이가 바로 이 내의원 의원이라고 말이다.
그나마 여자라는 것까지는 탄로나지 않았다. 남자인 척 행동하는 버릇도 완전히 몸에 익어 있고, 꽤 긴 수염도 붙이고 다닌다. 그래도 더 이상 상희를 불러내서 같이 말을 탈 수는 없게 되었다. 심지어 대화도 편하게 나눌 수 없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너무 신경 쓰였다.
헌데 날 대하는 상희의 태도가 왠지 딱딱하고 거칠었다.
“그래? 그런데 왜 오늘도 하필 저 백정 계집애를 데리고 왔어?”
“…왜 그런 걸 신경 써?”
상희가 다지를 대하는 태도에는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날 외면하고 문 밖을 쳐다보는 두 눈에서 분노가 일렁였다.
“나 놀리려고? 여자인 거 숨기지 않고, 자기 얼굴 드러내고 다니면서도 남자처럼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애 데리고 와서, 남자인 척 하면서 겨우 버티는 날 놀리려고 저애만 자꾸 데리고 오는 거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기분이 확 상했다. 원자가 태어나면서 한동안 상희를 신경써주지 못하고 지낸 게 미안해서 찾아왔는데, 얘가 보이는 까칠한 태도에 나도 기분이 나빠졌다.
“다지는 그냥 내 경호원일 뿐이야. 데리고 다니기 편해서 데리고 다닐 뿐이라고.”
처음에는 상희 일을 발설할까봐 데리고 다녔지만 이젠 그런 걱정은 안 한다. 다지는 충분히 입이 무거운, 신뢰할 수 있는 경호원이었다. 다만 상희가 실은 여자라는 사실을 더 이상 들키지 않으려면, 이미 알고 있는 다지가 가장 나은 대안인 건 사실이다. 상희는 그걸 모른다.
신경 쓰이는 일이라면 다지가 상희와 나 사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점이지만, 다지는 그 문제를 가지고 내게 단 한 번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 것인지, 지레짐작으로 사태 판단을 이미 마친 다음 그에 따라 말조심을 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래, 미녀 경호원. 좋겠네. 경호도 받고, 여자가 그리우면 아무데서나 품을 수도 있고.”
“야!”
이게 날 뭘로 보나. 얼마 전부터 삐딱해져 있는 줄은 알겠는데 이건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나도 정말 화가 났다. 대답이 좀 거칠어졌다.
“네가 남자로 사는 게 힘든 건 알아. 그래서 그만두라고 했잖아! 의원 일 그만두고 정 도사 집에 들어가서 친척 조카라고 해. 그럼 내가 궁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편히 살게 해 줄게. 꼭 내 여자가 될 필요도 없어. 그냥 유유자적 지내기만 해도 돼.”
아직까지 상희가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 확신이 없어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제안을 듣고도 상희는 반응하지 않았다. 단지 새빨개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필요 없어, 나가. 여긴 내 집이고, 내 방이야. 내 앞에서 임금 노릇 하려고 하지 마.”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임금과 신하, 백성이 아니라 동등한 친구 사이로 설정한 건 나 스스로였다. 그렇게 지낸지 벌써 3년이고, 내가 스스로 정한 바를 내 입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후궁? 절대권력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여자가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는 노리개로밖에 안 보여? 연산군 몸에 들어가더니 정말 연산군처럼 노네. 가, 가버려. 사라지라고!”
마지막에는 상희가 거의 고함치듯이 소리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툇마루에서 조잘거리던 두 여자들도 일순간 대화를 멈췄다.
“알았어, 간다. 잘 있어.”
지금은 도저히 대화가 될 상태가 아니다. 나중에, 진정되거든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 상희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도 그때 판단해야 할 것 같다.
방에서 나와 신을 신는데 문득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상희가 흐느끼는 소리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지만 도로 마루로 올라서지 않고 그대로 사립문을 나섰다. 오늘 상희와 주고받은 대화, 그리고 그 흐느낌이 갖는 의미를 생각했다. 상희를 향한 내 마음이 얼마나 애틋하든, 아무래도 당분간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다지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조용히 내 뒤를 따라왔다.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