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60
3부 3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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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 사절단은 심양성 북쪽에, 청나라 사절단은 서쪽 들판에 각각 진을 치고 천막을 쳐서 처소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후금이나 청나라나 주인이 아직 없는 심양행궁, 아직 심왕궁이 되지 않은 궁에 들어가기보다는 차라리 들판에 천막을 치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천막 크기와 숫자를 보니, 양쪽 다 5천 명은 될 것 같구나.”
심양성 서문 위에 서서 둘러보니 성벽에서 10리쯤 떨어진 자리에 있는 두 진영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간단히 저들의 규모를 파악하자 내 뒤에 붙어 따라오던 요동주 도독 최기열이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숙였다.
“정확하시옵니다. 폐하의 식견이 이토록 밝으시니, 신으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내가 군영 치는 거 한두 번 봤나. 막사 크기 보면 몇 명이나 들어갈지 바로 견적 나오고, 막사 숫자 어림하면 바로 전체 병력 규모 나온다.
혹시 심양에 있는 우리 관원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해도 저 많은 인원이 왕궁에 다 들어갈 수도 없었겠다. 누르하치 시절 이후 전혀 증축하지 않은 심양행궁은 그 규모가 경복궁의 ?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 1천 명쯤 들어갈 수 있을까나?
그래도 작은 궁궐치고는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다. 심지어 천단까지 세워놓았을 정도니까 말이다. 분명히 이 궁궐을 지을 때 건주는 명의 번국으로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을 궁궐 안에 떡하니 지어놓았다.
“청 태조가 주장하기를, ‘같은 번국이면서 또한 형제국인 조선에도 환구단이 있어 천제를 지내는데, 우리도 마땅히 우리의 하늘에 제를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면서 신하들을 시켜 짓게 했다고 합니다.”
“짐도 들어서 알고 있다.”
누르하치 그놈 내 흉내 엔간히도 냈구나 싶다. 조선식 관복이나 관제도 그렇고, 우리처럼 한다고 조공도 1년 3공으로 하더니 나를 명분으로 삼아 천단까지 만들었단 말이지. 그리고 거기서 수시로 천제까지 지내고.
그래도 명나라는 누르하치의 그 ‘방자한’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분명히 몰랐을 리가 없건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겠지 싶다. 하기야 조선이 묘호 쓰고 시호 올리는 것도 눈감아준 명나라였으니, 더 통제 안 되는 건주야 뭐….
“그렇게 열심히 중화의 법도를 흉내 냈으면서 왜 머리는 기르지 않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최기열이 은근히 비아냥거렸다. 건주식 변발이 엔간히 보기 싫은 모양이다.
“자기들의 하늘이 있으니 머리카락 정도는 자기들이 본래 기르던 방식대로 기르겠다는 거 아닌가. 그냥 놔두어라.”
도성에서도 봤지만, 그 쥐꼬리 같은 변발은 여전히 옛날 누르하치나 다이샨 시대하고 별 차이가 없다. 전란이 아직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고 보니, 혹시 전장에서 약점이 될 수 있는 머리카락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듯하다. 두꺼운 변발은 적이 확 잡아채기 좋으니.
“기선이 연기를 내며 올라왔으니, 양 진영에서도 짐이 도착했음을 알아채고 입성 준비를 시작했으리라. 하지만 도착했으면 도착했다고 알리는 것도 예의겠지.”
내가 도착했다고 양쪽 진영에 알리는 사자로는 영해공과 삼성공을 보내기로 하자. 호위는 겸사복 기병들을 붙여서 보내면 충분하다.
1만에 달하는 건주군을 견제하기 위해 요동주 병마절도사는 병력 1만 5천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1만은 상비군, 5천은 소집한 속오군이다. 여기에 내가 데려온 경군 3천까지 합하면 확실히 저들을 압도하는 전력이다.
이만하면 신변의 위협을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심양행궁에서 피로를 풀면서 내일 열리는 첫 회견이나 준비하도록 하자. 챙길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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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의 진영 위치에 따라 와극달은 북문에서, 파사합은 서문에서 성에 들어왔다. 명나라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두 성문은 고요히 한때 이 성의 주인이었던 이들을 받아들였다.
심양을 처음 수도로 삼았던 누르하치는 성벽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 뒤를 이은 다이샨은 어차피 버릴 수도였기에 역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도록 보수 정도는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래서 심양성을 제대로 개수하게 된 건 우리 지배하에 들어온 뒤였다.
연이는 본래의 심양성 성벽에 보루를 추가해서 화포를 쏠 때 사각(死角)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넓은 해자를 파서 적이 바로 성벽에 달라붙지 못하게 했다. 본국에 있는 여러 요새를 건축하는데 사용된 최신 축성술을 활용하여 개축한 거다.
다만 비용과 시간 문제로 인해 성 전체를 헐고 다시 짓는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성문은 옛날 모습 그대로다.
“만나서 반갑소. 내가 조금 늦어서 그대들을 기다리게 했구려.”
“아닙니다. 조상의 옛땅을 오랜만에 찾아 주변을 둘러보며 편안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 팔촌인 와극달이 먼저 웃으며 답례를 했다. 와극달의 조카 파사합은 내게 먼저 인사할 기회는 외숙에게 양보했다. 덕분에 율리아 이야기를 좀 더 길게 나누었다.
“내 딸이 카라코룸에서 며느리 노릇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소.”
“아주 착하고 신앙심도 깊어서 우리 황실에는 최고의 며느리입니다. 조금 더 일찍 인연을 맺었다면 패륵이 아니라 대패륵의 아내로 들였을 만큼 훌륭한 규수더군요.”
분명히 인사치레겠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말이었다. 자식이 칭찬을 받았는데 어떻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올렝카가 저 말을 듣지 못한 건 다행이다 싶다. 처음 올렝카가 잡은 목표가 파포태였으니 말이다. 얼마나 안타까워하겠는가.
“진영에서 쉬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저녁에 패륵과 함께 보낼 테니, 폐하는 물론 함께 데려오신 순비와 함께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올렝카가 정말 펑펑 울겠구나. 자기가 원해서 보낸 시집이고 후회도 하지 않았지만, 막상 헤어진 뒤에 허전해하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루시아 때는 그래도 율리아가 곁에 남아있었지만, 율리아가 떠난 뒤에는 올렝카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폐하의 존안을 다시 뵈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30여 년 전이지요? 처음 뵈었을 때가?”
와극달과 인사를 끝내자 파사합이 웃으면서 내게 말을 건넸다. 과거에 나와 맺은 인연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지만, 나는 난처할 뿐이었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소. 워낙 오래된 옛일이고, 그때 워낙 어렸던지라 떠오르는 추억이 아무것도 없구려.”
‘내’가 파사합을 만난 건 파사합이 태자 시절에 장릉을 참배하러 왔을 때 일이다. 하지만 와극달은 형의 급사로 급하게 보위에 올라서 대칸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한 번도 한양에 온 적이 없다. 그래서 만난 적도 없다.
그러나 파사합이 과거에 만난 성친왕은 내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내게는 그에 대한 아무 기억도 없다. 얼굴을 마주했는데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성친왕에게도 청나라 태자와의 만남은 딱히 대단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둘 다 어린애였으니.
“제게는 폐하의 기운찬 모습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합니다. 왕자의 기상이란 진실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지요.”
“어험, 부끄러우니 부디 그만해 주시오.”
그 성친왕이 파사합한테는 그래도 패악질을 안 부렸던 모양이다. 청나라 황태자한테까지 못된 짓을 했다가는 외교적인 문제가 터질까 봐 주변에서 필사적으로 막았는지도 모르지.
“자, 안으로 듭시다. 우리, 나눌 이야기가 많지 않소? 편히 앉아서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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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작년에 칭제한 유구국 황제요. 유구가 비록 국세(國勢)는 좀 약하다 하나, 80년 전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친 사이이니 그대들이 반겨 주기를 바라오.”
“두 분 폐하를 뵙게 되어 기쁩니다. 추후 더 많은 왕래를 통해 우리 유구가 건주 양국과 긴밀한 사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상익은 안에서 우리가 들어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의 앞에 찻잔이 하나씩 놓인 뒤에 내가 두 건주 군주에게 그를 소개하자 미리 준비한 정중한 인사말을 올렸다. 네 사람이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말, 한국어였다.
“만나서 반갑소. 유구 상인들이 어찌 그리 예의가 바르고 성품이 정직한가 했는데, 군주가 모범을 보이니 곧고 바르지 않을 수가 없겠구려.”
파사합이 덕담을 건넸다. 유구 상선은 천진으로 들어가지는 못해도 산동반도 남쪽에 있는 즉묵항에는 드나들 수 있다. 즉묵은 청나라 부도(副都)인 제남을 배후에 두고 있는 상당히 번영하는 항구다.
“그나저나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번 심왕 책봉식은 우리 집안일이라고 여겨 밖에서 누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유구국 영락제께서 오실 줄은….”
와극달은 깔보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서평관에 주재하는 두 나라 관원들을 통해 상익이 증인으로 동참하리라고 사전에 통보했음에도, 아니 사전에 통보했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일부러 영락이라는 연호를 힘주어 말하는 것도 그렇다. 너 따위가 광개토대왕의 연호였고 명나라 영락제가 쓰던 연호를 쓰다니, 가소롭다는 태도가 온몸에서 스며 나왔다.
“집안일이기 때문에 집안에 속하지 않은 이가 증인으로 동석할 필요가 있다 하신 폐하의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영락제께서도 좋은 뜻으로 이 먼 곳에 오셨으니 기꺼이 제 손님으로 환대해야겠지요. 성경에서도 나그네를 영접한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라 했으니까요.”
와극달은 상익에게 나와 함께 자기 진영을 방문한다면 북방에서 하는 방식으로 성대하게 대접하겠다고 했다. 상익도 그 후의에 감사드린다며, 와극달이나 그 대리인이 혹시 유구에 온다면 남방의 방식으로 성대하게 대접하겠다고 했다.
오가는 대화 내용만 보면 제법 화기애애했지만, 와극달의 눈은 분명히 상익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낄 자격도 없는 자리에 내 위세를 등에 업고 참석했다고 업신여기는 거다. 상익 역시 그 눈치를 모를 리 없건만 열심히 고개를 숙였다.
“대청국과는 그동안 교류가 꽤 있었습니다만, 대금국과는 교류가 없었기에 대칸께서 저희 유구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더 잘 알리고자 찾아뵈었습니다.”
상익은 파사합에게도 굽실거리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유구의 처지에 관해 외삼촌보다 잘 아는 파사합은 상익에게 멸시하는 눈빛 따위는 보내지 않고 부드럽게 대해주었다.
“영락제께서 여기 오는 건 좋지만, 송주가 이를 알면 분명히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귀국이 피해를 보지 않겠소?”
“저희 유구는 엄연히 따로 하늘을 모시는 나라지 송의 번국이 아니니, 어찌 송주가 우리 뜻에 따라 행하는 바에 간섭하겠습니까. 불만을 품으려면 품으라지요.”
웃음보가 터졌다. 네 나라 모두 후송 태조 조승복에게 모욕을 당한 경험이 있다. 우리와 유구를 보고는 그저 천하의 질서가 회복되었으니 돌아와 무릎을 꿇으라고 했을 뿐이지만, 건주 양국을 상대로는 대놓고 ‘주인을 해친 도적’이라고 욕지거리를 퍼부었었다.
“서로 중원 일통을 노리고 맞붙어서 싸웠으니 무슨 말인들 못 했겠습니까. 그자와 맞서신 태종, 세종 두 분께서도 입담이라면 만만치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입담 정도가 아닐 텐데. 대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다만, 다이샨이 화북을 장악하고 요토가 지배기반을 확실히 다지는 과정에서 죽은 주민의 숫자가 수백만은 된다.
반항하다가 본보기로 전멸당한 4개 도시 주민만 2백만이다. 여기에 고영상군의 잔당들, 숲과 목장을 조성해야 하니 땅을 버리고 나가라는 말에 반기를 들었다가 학살당한 농민들, 전란 중에 닥친 기근과 질병으로 죽은 자들도 있다. 적어도 모두 5백만 명은 되지 않을까?
이런 학살을 벌였으니 화북에서 강남으로 도주한 백성이 천만이라는 말도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정말이지 나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영락제의 소개는 이쯤이면 충분한 듯한데…대칸과 청제께서도 데려온 이들을 소개해주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폐하. 이쪽부터 인사를 드리도록 하지요.”
이번에도 와극달이 먼저 나섰다. 헛기침부터 한번 하고 나서 자기를 따라온 이들을 내게 소개했다. 세 사람은 몽골의 칸, 여섯 사람은 후금 황실의 후예로 전공을 세운 조상 덕분에 세습 친왕직에 있는 이들이었다.
대한에서는 왕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가 극히 적다. 태황의 친아들이라면 친왕 또는 군왕을 받으며, 태자의 아들은 정1품 왕을 받는다. 왕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들뿐이다.
그나마 이 왕호는 세습도 안 되고 다음 대부터 곧바로 품계가 떨어진다. 그래도 적자는 공>후>백으로 작위가 차츰 낮아지지만, 서자는 두 단계씩 떨어진다. 친왕과 군왕의 서자는 공작이 아니라 후작을 받고, 후작의 적자는 백작이지만 서자는 바로 평민으로 떨어진다.
법으로 적서를 차별하는 건 분명히 없어졌다. 하지만 가문을 계승한다는 사적 영역에서는 여전히 적서 차별이 상존한다. 그리고 종친부에서 내주는 품계도 역시 ‘가문을 잇는’ 문제다 보니, 적서에 따른 차별이 있다.
하지만 후금과 청나라에서는 세습되는 왕작이 있다. 황제와 대칸의 아들로서 당대만 잠시 책봉되는 친왕과 별도로, 그 지위가 장자에게 계승되는 왕 말이다.
후금에는 세습 친왕가가 8개 있고 청나라에는 친왕가 4개와 군왕가 4개가 있다. 이들을 가리켜 후금에서는 ‘팔친왕가(八親王家)’, 청나라에선 ‘철모자왕(鐵帽子王)’이라고 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후금 땅에는 다수의 몽골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정확한 현재 수치는 모르겠지만 그 숫자가 대략 만주인의 3배에 가깝다. 당연히 몽골인 유력자들에게 자치권과 귀족 지위를 줄 수밖에 없다.
후금은 몽골을 제패한 뒤에 복속시킨 몽골 제후들을 재편성하면서 몽골 귀족 체계에 따라 가장 신분이 높은 이들을 ‘칸’으로 봉하고 후금 친왕과 같은 급으로 인정했다. 몽골의 칸은 4명으로, 황실 출신인 여덟 친왕과 합산하면 12명이 되므로 이들을 ‘12사도’라고도 부른다.
세습 친왕들이 12사도라면 대칸은 예수인 셈이다. 이 나이롱 신자 놈들, 정말 하는 짓을 보면….
“몽골 칸들은 몽골 팔기를 거느리는 기주이기도 합니다. 고로 모두 대칸인 제게 복종하는 번왕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역시나 내가 예상한 이유가 맞았다. 다만 내가 상익을 데려온다고 하니 자기도 저놈들을 데려온 건지, 처음부터 여기 올 때 함께 데려올 생각이었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파사합도 청나라 영내에 거주하는 몽골 귀족들을 데려오기는 했다. 다만 청나라는 몽골인 인구가 후금보다 적고, 그나마도 여기저기에 흩어 놓았다. 그래서 몽골 귀족들에게 내리는 지위도 ‘공’ 정도였고 왕으로는 봉하지 않았다. 고로 번왕이라 할 존재가 없다.
다만 파사합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인지 몽골인이 아닌 다른 세력도 자기를 떠받치고 있음을 과시했다. 바로 화북의 한인들이다.
“이들도 이제 대청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폐하께 보여드리고 싶어서지요. 그 복색은 조금 달라졌으나 명나라 시절과 똑같은 관아에서 오직 천하의 평안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 어찌 옛 법도에 어긋났다고 하겠습니까?”
청나라에서도 명나라 시절처럼 과거를 통해 관료를 뽑는다. 특히 문관은 대부분이 과거를 통해 임용되며, 과거에 응시하는 급제자 대부분은 화북을 기반으로 하는 한인 신사층이다.
다이샨의 대학살은 이미 두 세대 전에 지나간 옛날이 되었다. 청나라 조정에 심한 불만을 품은 이들은 이미 반란을 일으키다 죽었거나 회수를 건너 후송으로 떠났다. 지금껏 화북에 남은 이들은 이처럼 청의 충실한 신하로서의 자리를 굳혀 가고 있다.
다만 복색은 조금씩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분명 명나라 관복이 기반인데, 청나라 이후에 호복이 들어오면서 변화한 복식에 맞춰서 약간씩 바뀌었다. 정말 명나라 관복 그대로 쓰는 후송과 차이를 두느라 변했나 싶기도 하다.
“잘 보았소. 두 나라 모두 그 기반을 단단히 굳히고 있으니 기쁠 뿐이오.”
동맹이자 우방의 내정이 안정되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 이런 상태로 동맹을 다진다면 참으로 든든하리라.
※작가의 말: 지방에 머물고 있는 현왕의 서자 세 사람은 종3품 후작이 아니라 정3품 후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