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64
3부 382화
– 1 –
심왕 책봉식 겸 회맹 행사 이후 사흘간은 축하 잔치를 겸해 시끌벅적하게 보냈다. 그전에 이틀 동안 벌인 대규모 사냥 중에 끝내지 못한 각 진영 최고수들의 대결 같은 것도 벌였다. 질주하는 준마 위에서 기수가 활시위를 놓자 과녁 옆에 선 심판관이 목청 높여 외쳤다.
“명중이오!”
세 나라 모두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시합 종목은 말타기와 활쏘기밖에 없을 것 같겠지만, 다른 종목도 있다. 격구는 기본이고 씨름 시합도 있었다. 두 가지 전부 원래 대한과 여진과 몽골이 다 같이 즐기던 운동이다. 여기에 축구도 한몫 끼었다.
건주에 축구가 퍼진 건 다이샨과 홍타이지 때문이다. 이들은 볼모가 되어 한양에 머무는 동안 각 군영이 축구를 통해 거두는 효과를 보고 관심을 가졌다. 비싼 말과 장비가 필요한 격구와 달리, 공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격구나 축구나, 툭하면 난투가 벌어진다는 점은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석전이나 격구에 비하면 축구에서는 사상자가 안 나는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건주 양국도 우리처럼 축구를 군사들에게 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각 시합에서 뛰어난 힘과 솜씨를 발휘한 자들은 심왕의 명의로 주는 상을 받았다. 이제는 심왕부가 확실히 들어섰으니, 그 위신을 세우기 위함이다.
세 진영이 모두 최정예를 뽑아서 데려온 탓인지, 상을 받은 자들의 숫자는 비슷했다. 그 결과를 본 와극달은 이런 불평을 하기도 했다.
“사냥 시합에서 폐하의 수하들이 이긴 건 인원수가 네 배나 많았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똑같은 숫자를 내보냈으면 우리가 이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니, 대칸. 몰이꾼이 전부 우리 군사들이었으니 그대들보다 인원이 네 배일 수밖에 없지 않소. 혹시 우리 몰이꾼들이 우리 군사들 앞으로만 짐승을 보내기라도 했소?”
사실 몰이꾼으로 나선 속오군 중에 왜인여진 전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기는 했다. 심양 인근은 ‘조선의 카자크’인 왜인여진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땅이고, 이들은 여전히 옛 법도에 따라 부족 전체가 속오군으로 편제된다.
허접한 일반 농민이 아니라 왜인여진 전사들이 몰이꾼으로 나섰으니, 이들이 잡은 짐승도 산같이 쌓일 수밖에 없다. 와극달이 체념하지 못하고 투덜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와극달이 심왕부 친위대를 꼭 차지해야겠다는 욕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나름대로 엄선해서 데려온 수하들이 시합에 졌다는 사실에서 생긴 불만이 컸다.
“공평하게 하자면 대금과 우리 청에서도 같은 수의 인원을 데려와서 몰이도 하고 사냥도 하면 되겠지만, 이번처럼 대규모 사냥을 자주 여는 건 어렵겠지요. 그보다는 매년 이즈음에 선발한 인원들로 시합을 벌여 승부를 다시 겨루는 쪽이 어떻겠습니까?”
파사합이 중재 겸 재도전 의사를 피력했다. 청나라 병사들도 그 기량이 후금이나 우리에 뒤떨어지지 않으니, 자기들도 심왕부 호위대 지휘권이라는 명예를 누리고 싶다면서 말이다.
“단 한 번의 시합으로 결판을 짓는 건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저희에게도 승부를 뒤집을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제 생각에도 중통제께서 하시는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상익도 파사합 편을 들었다. 아니, 내 거수기가 되어야 할 놈이? 파사합이 처음부터 계속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그 은혜를 갚는 건가?
다만 파사합의 제안이 그렇게 심한 억지는 아니다. 친목을 다지기 위해 매년 세 나라에서 모인 무사들이 무예 시합을 펼치는 것 자체는 나쁜 생각이 아니기도 하고.
“좋네. 그럼 매년 가을에 심양에 정예 군사 3백 기씩을 파견해서 서로의 기량을 겨루도록 하지. 그리고 그 시합에서 우승한 측이 다음 해 가을까지 1년 동안 심왕군 금위대장 자리에 앉도록 하세.”
심왕부 경비는 세 나라가 제공하는 병력이 맡고, 독자적인 군대는 보유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동맹의 상징일 뿐인 심왕부는 혼자서 일을 꾸밀 만한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군대를 거느리고 싶어도 10만 냥 남짓한 고정수입으로는 충분한 병력을 가지기 어렵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기 전에는 나도 준이가 자기 뜻대로 뽑은 병사들로 호위대를 거느리는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 나라가 기병 1천 기를 제공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준이 역시 새 방침 쪽을 더 좋아했다,
‘제가 군대를 직접 거느리지 않아도 된다면, 거기 들어갈 돈으로 동물원을 더 크게 지을 수 있겠군요!’
어쩌면 준이는 동물원을 크게 지어서 그걸 자기 수익사업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 아직은 그게 제대로 사업이 될 만큼 돈이 벌리지는 않겠지만, 장차 인구가 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동물원에서 여흥을 즐기는 시대가 오면 크게 한몫 잡을 수도 있겠지.
‘장차 심왕부의 형편을 생각하면 필요한 일이기는 할 것이다.’
심왕부의 수입은 내가 나눠준 농지와 파사합이 준 염전, 와극달이 준 교역권에서 나온다. 지금이야 고정적인 비용을 빼도 준이와 왕비 둘이 쓰기에 부족함이 없겠지만, 장차 식구가 더 늘어나면 재정적인 문제가 생길 공산이 크다.
준이의 아들들, 손자들, 증손자들…여기서 세 나라 보위에 앉을 자격은 심왕 혼자에게만 있다. 왕의 아들이나 형제라고 해도 안 된다. 심왕가의 사내 모두에게 계승권을 주지 않는 건, 만에 하나라도 허튼짓을 벌이는 놈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혹시 심왕가의 못난 후손이 보위를 노려 적도들과 손을 잡기라도 하면 안 되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세 나라 중 둘 이상이 동시에 대가 끊어질 리도 없고요.”
심왕은 명목상의 계승권을 가지고 우리 세 나라의 우호를 상징하는 존재다. 고로 심왕의 혈통을 빌미로 도리어 난을 일으키는 자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하지만 한정된 심왕부의 재산만으로 모든 후손이 지금 준이처럼 풍요롭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온 보완책이 심왕부 왕족들이 세 나라에 문무관으로 출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거다. 물론 대한에서는 기존 법도에 따라 무관만 할 수 있다.
고로 심왕부에는 왕과 세자만 남게 된다. 다른 후손들은 공?후?백 등의 작위는 받되 다른 나라에 출사해서 사실상 평범한 사대부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혹시 심왕부의 대가 끊어진다면 서열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면 되는 것이지요.”
“내 생각이 바로 그거요.”
심왕이 언제 어떻게 다른 세 나라 보위에 오르나 하는 규정은 없다. 하지만 심왕 자리가 비었다면 그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는 확실하게 정했다. 그래야 혼란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심왕의 지위에 관해 생각나는 모든 합의를 마치고 육로로 귀환길에 올랐다. 양력 10월 중순이라 아직 해로가 막힐 정도는 아니어서 도성에서 불러온 반촌극장 배우들 같은 일반인들은 이제 빈 배가 된 호위대를 싣고 온 수송선으로 돌아가게 했다.
“기갑선들도 그 참에 돌아가야겠지. 헤어지려니 좀 아쉽구나.”
우리 기갑선들은 내가 심양에 머무르는 내내 강 한가운데 닻을 내린 채로 존재감을 한껏 과시했다. 공연히 공포를 쏴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았지만, 그저 정박하고 있기만 해도 내게 강력한 권위를 주는 존재들임은 분명했다.
“자, 남쪽으로 가자!”
도성에서 거느리고 온 경군 보기 2천 8백 ? 심왕부에 잔류하는 병력은 경군 2백, 요동주 병력 2백으로 편성해서 요동주 병마사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했다 ? 을 인솔해서 남쪽으로 가는 귀로에 나섰다. 요동주 유군장 권훤이 왜인여진 속오군을 포함한 휘하의 정예병 4천을 거느리고 압록강까지 나를 배웅하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뵈었는데, 벌써 헤어지게 되었으니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저도 문청공처럼 시라도 쓰며 폐하를 다시 뵐 날만 손꼽아 기다려야 하려나 봅니다.”
“그것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라네, 문청공만한 문재가 있어야지? 그리고 그대의 말은 잘 들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게나. 적어도 봄까지는 머물러야 하지 않겠나.”
권훤이 내 총신이라는 건 천하가 안다. 그런데 내가 북방에 다녀가자마자, 그리고 북방에 근무한 지 딱 1년이 되자마자 곧바로 도성으로 불러올리면 누가 봐도 너무 얌통머리 없는 짓 아니겠는가. 참, 문청공(文淸公)은 정철의 시호다. 그 송강 정철 말이다.
그렇게 북방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여러 고을을 방문하며 순조롭게 남쪽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임금의 모습을 본 북방 백성들은 고을마다 몰려나와 환호하며 만세를 불렀다.
“폐하의 존안을 뵈었사오니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죽기는 왜 죽는단 말인가. 만수무강하면서 길이길이 충성함이야말로 신하로서 갖춰야 할 도리이니라.”
내게 술을 따르면서 울먹이는 나이 든 선비들을 위로하는 건 방문하는 고을마다 치르는 통과의례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순조롭게 남하하던 참에 안주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 2 –
상희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가식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실로 애달픈 일입니다. 좀 일찍 기별하셨으면 신첩이 어떻게든 손을 썼을 터인데….”
“중전이 동행하고 있었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을 거요. 워낙 증세가 나빠서 짐과 동행하던 태의 세 사람도 사실상 손 놓고 쳐다보는 것밖에 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경복궁에 돌아온 날은 12월 20일, 심양을 출발한 지 95일이나 되어서였다. 아무리 중간에 고을마다 들러 접대를 받았다지만, 통상적인 이동 속도로 한 달이면 되는 거리를 석 달이나 걸린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상익이 안주에서 쓰러졌기 때문이다.
“멀건 콧물이 흐르며 코가 막혀 그렁거리는 소리가 나고 허옇고 멀건 가래가 솟으니 이는 폐에 한사(寒邪)가 침범하여 폐한(肺寒)에 걸렸다는 표식이옵니다. 그 증세가 매우 심하여 쾌유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남방 출신인 상익은 심양 날씨를 매우 힘겨워했다. 겨우 양력 10월 중순밖에 안 되었는데 추워서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와극달이나 파사합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모피옷을 걸치지 않았다. 약해 보이면 얕잡아 보일까 봐 일부러 참은 거다. 대신 독주로 몸을 녹였다.
그렇게 열흘을 버티다가 책봉과 회맹 의식이 모두 끝나고 남쪽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꼭 나를 따라올 필요는 없으니 배를 타고 먼저 돌아가라고 넌지시 권했지만, 상익은 ‘폐하께서 백성을 살피시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라면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가 기특하기도 하고, 나도 같은 급으로 대화할 말동무가 있으면 좋겠기도 하고 해서 그럼 같이 가자고 마차를 한 대 더 준비해서 함께 내려왔다. 나랑 같이 타고 내려오면 내가 부담스러워서 편히 쉬지도 못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하니 그게 실수였다.
함께 마차를 탔으면 상익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다른 마차를 탄 데다 계속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보니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안주에서 ‘유구국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라는 보고를 받고서야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네놈들은 네놈들의 주군이 이토록 아픈데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는 말이냐! 네놈들이 내 신하였다면 모조리 주리를 틀어 손발의 힘줄을 끊은 다음 산에다 던져버렸으리라!”
“폐, 폐하, 화내지 마십시오. 저들에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시킨 건 저 스스로입니다‥.”
내가 유구인 시종들에게 격노하고 있으니 상익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고열과 기침 때문에 제대로 말을 이을 수는 없었으나, 대략적인 뜻은 알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수백만 백성들을 직접 살피는 귀한 걸음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보잘것없는 이 몸의 안위 때문에 폐하께서 신경을 쓰시게 하겠습니까. 제게도 분명 태의가 있는 것을요….”
당연히 상익을 따라온 수행원 중에도 의원이 있었다. 도중에는 그 의원이 혼자 애를 써서 어떻게 버티게 했는데, 북방의 심한 추위를 이기지 못한 상익이 안주까지 와서 마침내 중증 폐렴으로 드러눕고 말았다. 그 의원으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었던 거다.
“폐하…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어서 백…백성들을 보러 가셔야지요. 이제 평…평, 평양에 가실 차례가 아닙니까…?”
“그대가 여기 누워있는데 어찌 내가 혼자 가겠는가. 도성에서 여기까지 함께 왔으니 이제 도성에 돌아가는 길도 같이 가야지! 북순도 병풍도 함께 봐야 하고!”
내가 크게 외치자 상익이 눈을 뜨더니 빙그레 웃었다.
“감…감사합니다, 폐하….”
중환자를 데리고 움직일 수도 없고, 상익이 하라는 대로 상익 혼자 안주에 두고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속절없이 안주 관아 객사에서 보름을 보냈다. 그동안 내가 상익을 위해서 해줄 수 있었던 건 손을 굳게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폐하….”
“오, 정신이 드는가?”
보름째 되던 날, 상익이 눈을 떴다. 혹시 완쾌한 게 아닐까 했지만 기대는 곧 사라졌다. 정신이 맑아졌어도 열은 그대로였고, 얼굴에는 내가 이미 수백 번은 본 모습 ? 죽음을 맞는 사람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마지막…마지막 부탁을 드리고 싶사옵니다.”
“말해 보게.”
쓸데없는 위로나 격려는 이미 소용이 없다. 나도 알고 상익 본인도 알았다. 그래서 헛된 희망 같은 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상익이 부탁하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게 중요할 뿐이다.
“태자…나하에 있는 태자를 부탁드립니다. 폐하께서는 저를 진정 아들로 대해주셨습니다. 부디 그 자비를 나하에 있는 제 아들에게도 베푸시어, 폐하와 같은 성군이 되도록 보살피고 돌보아주소서. 이 무능한 아비가 폐하께 드리는 마지막 소원이옵니다.”
“알겠다. 내 할 수 있는 바는 모두 해주리라.”
약속을 받은 상익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내 손을 꼭 쥔 채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진실로 감사합니다….”
내가 귀경한 건 상익의 관이 도성에 도착하고 엿새 뒤였다. 도착하고 보니 도성에서 잠시 소동이 있었다고 했다.
“폐하께서는 아직 오시지도 않았는데 시신을 실은 수레가 먼저 오는 바람에 황실과 조정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옵니다. 정말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그것은 짐의 불찰이었다. 태자야, 네가 잘 수습하였다.”
상익은 내 친구의 아들이다. 그런 아이를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공연히 데리고 다니다가 죽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내 이성이 좀 마비되었는지, 순행을 재개하면서 상익의 시신을 도성으로 보낼 때 파발을 먼저 띄워 사정을 알려야 하는데 그만 빠트리고 말았다.
난데없이 나타난 겸사복 기병들이 관을 끌고 도성으로 돌아오자 나한테 혹시 변고가 생긴 게 아니냐 하여 조정 일각이 발칵 뒤집힐 뻔했다. 하지만 은이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닥치라고 호통을 치고, 겸사복 군관을 불러들여 사정을 들음으로써 바로 상황을 수습했다.
“유구국주의 시신은 일단 원각사에 안치해 두었습니다. 어찌 처결하면 좋겠습니까, 폐하?”
여기는 대전이나 동궁이 아니라 편전 안이다. 다른 신하들도 있는 자리니까 은이가 나를 폐하라고 부르는 게 당연하다.
“유구관에서는 이미 알고 있으렷다?”
“예, 폐하. 유구 주재관원들은 며칠째 통곡하고 있사옵니다.”
고개를 돌렸다. 외무대신 유명홍이 내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락제의 시신을 본국에 보내주어야 하니, 즉시 동현에 출범 준비를 명하라. 외무대신은 짐의 이름으로 이번 흉사가 일어난 사정을 설명함과 동시에 유구국주를 크게 애도하는 글을 써서 조문품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조치하라.”
오늘은 양력으로는 1월 27일이다. 겨울이라 항해에 조금 적당하지 않은 계절이지만, 일단 먼바다를 거쳐 유구 인근까지 가면 바다도 그리 험하지 않다. 게다가 동현을 모는 선원들은 충분한 경험을 쌓았기에 이 정도 날씨는 큰 문제가 아니다.
“또한 태자가 신속하게 보위에 올라서 부친의 뜻을 이을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말라. 행여 이 틈을 노려 삿된 욕심으로 보위를 탐하는 자가 있다면 가차 없이 치라!”
내 손을 쥐고 죽은 상익의 체온과 목소리 때문에라도 유구를 번국으로 삼을 생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적으로도 못 할 일이고 정치적으로도 못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