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71
3부 389화
– 21 –
2년째 풍년이 이어진 덕분에 용산에 짓는 새 궁궐 공사는 순조롭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아무래도 궁궐을 지을 때 필요한 건 심리적인 여유라서 말이다.
지난 8년 동안 백위영 군사들이 말발굽으로 열심히 다진 덕분에 부지를 평탄화하는 작업 같은 건 별도로 할 필요가 없었다. 편리하다.
“백위영장, 자네들이 보탠 공이 없지는 않군.”
“물론입니다, 폐하!”
보리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주변에 새로 연병장을 구해주지 않으셔서, 대규모 훈련을 하려면 마장동까지 가야 하는 게 아쉽습니다만 어쩔 수 없지요.”
새 궁궐이 들어설 곳은 대략 국립중앙박물관 위치쯤 된다. 백위영 군영은 그 옆에 있는 용산가족공원쯤이고. 백위영 때문에 부지가 2할쯤 줄어들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 괜찮다.
물론 나중에도 이곳 경비를 백위영이 전담하지는 않는다. 백위영은 지금 외금위에서 하듯 궁궐 외부 경계를, 내금위 병력 일부가 이쪽에 와서 궁궐 내부 경비를 맡게 된다. 내금위 규모 자체가 더 늘어나야 한다.
솔직히 내?외금위에 겸사복까지 해도 1,600명밖에 안 되는 건 많은 숫자는 아니다. 예전 조선 시절처럼 오군영에서 일부 병력을 교대로 들어와 근무하게 해서 인원 부족이 나타나지 않게 하고 있지만, 다소 증원할 필요는 있다. 적어도 내금위는.
보리스는 주변에 있는 논밭을 사들여서 연병장을 넓혀주면 안 되냐고 했다. 하지만 이곳 농지는 도성에서 필요한 작물을 제공하는 배후농지라서 함부로 줄일 수 없다. 게다가 장차 용산 지역을 개발하려면 그렇게 넓은 땅을 군용지로 묶어둘 수도 없다.
“그런데 폐하, 코끼리가 없어서 작업이 더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남은 코끼리도 많으니 큰 영향은 없다. 조금 힘들기는 하다만.”
얼마 전까지 이곳 공사장에는 사복시에 있는 코끼리 열한 마리가 모두 동원되어 있었다. 하지만 심양에 있는 준이가 편지를 보내 상사(象舍)가 다 완성되었다며, 코끼리 세 마리만 보내 달라고 조르는 통에 내주고 말았다. 지금은 열심히 서해를 북상하고 있으리라.
“심왕이 되어 내 집을 나갔다 하나, 어쩌겠는가. 그 녀석도 내 자식인 것을.”
“소인도 같습니다. 미주에 간 드미트리 녀석은 편지도 잘 쓰지 않고, 어쩌다 편지가 오면 말과 갑옷을 새로 마련해야 하니 돈 보내 달라는 소리밖에 안 하지 뭡니까.”
카자크 녀석들이 미주에 간 지도 1년이 넘었다. 미주총관부에서는 특별히 녀석들을 같은 부대에 넣어주었고, 바쁘게 돌아다니며 사냥과 전투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아파치를 포함한 도둑놈들이 우리 변경을 습격하는 탓이다.
미주 동변이 워낙 넓다 보니, 아파치를 비롯한 잡다한 도적놈들이 숨어드는 걸 다 막아낼 수가 없다. 그래서 예전에 이주한 오도리를 비롯한 북방 출신 기병들, 그리고 우리 편에서 싸우는 원주민 토병들로 편성한 기동력 있는 토벌대가 꼭 필요하다.
“드미트리를 비롯한 제 아들놈들은 드디어 실전을 치렀다고 좋아 죽으려고 합니다. 장차 본국에 돌아오면 꼭 그 경험을 살려서 폐하께 충성하겠답니다.”
여섯 카자크가 모두 이형준을 아버지로 모셨던 기억 때문인지, 카자크 2세들은 친아버지 외에 다른 카자크들도 아버지라고 부른다. ‘보리스 아버지’, ‘안드레이 아버지’ 하는 식이다. 당연히 윗세대에서도 죄다 아들딸로 부른다. 이고르가 ‘우리 아들 드미트리’ 하는 식이다.
“좋아 죽는 건 괜찮지만 화살이나 도끼에 맞아 죽지는 말라고 하게. 다행히 아직은 죽은 녀석이 하나도 없다지만, 모르는 일이니. 그러고 보니 탈라스는 통 세묜이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를 하지 않더군. 드미트리는 혹시 그 녀석에 대해 별말 없던가?”
“별다르게 행동하는 건 없다고 합니다. 그저 다른 놈들하고 똑같이 싸우고, 말을 달리고, 술을 마신다고 하더군요.”
은이가 미주에 가면 세묜을 만날 텐데…일말의 불안감이 있다. 은이는 ‘세묜은 그런 놈이 아니’라고 자신만만해했지만, 종성순을 겪어본 나로서는 100% 안심할 수는 없었다. 따라간 익위사 관원들에게 경호에 만전을 기하라고 하긴 했지만, 세상사는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폐하, 하와국 왕자는 어찌 데려오지 않으셨습니까? 지난번 시찰 때는 그 커다란 덩치로 폐하를 따라다니며 여기저기 신기한 듯이 구경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혼례를 올리기 전이었잖은가. 혼례를 올리고 나서는 회동관 밖으로 아예 나오지를 않는다네.”
회동관(會同館)은 이번에 번국 사신들을 위해서 새로 연 객관이다. 하상운이 여기 머무는 첫 손님이다. 휴,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이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며칠 안 남았다. 화번공주로 받은 아내와 함께 말이다.
– 22 –
다섯 달 만에 또 제물포에 왔다. 이번에는 맏아들을 전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손녀를 전송하기 위해서다. 올해 태풍철은 다 끝났으니, 항해는 평온하리라.
“공주를 잘 부탁한다. 하와국까지 무사히 데려다주고, 그곳에서 자리를 잘 잡는지까지 잘 살핀 뒤 돌아오도록 하라.”
내게 당부를 받은 조문 사절 겸 책봉사 겸 공주 호송까지 맡게 된 강녕공, 아니 강녕왕이 고개를 숙여 절하며 엄숙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폐하. 신명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목소리는 장중하지만, 입가에서는 웃음기가 가시지를 않는다. 이제는 일개 종친이 아니라 사실상 하와국의 국구(國舅)가 되었으며 봉작도 태자의 아들과 같은 정1품 왕으로 올랐고 막대한 돈까지 받았다. 그러니까 입꼬리가 귀에 걸리는 것도 당연하리라.
하상운이 종실의 딸에게 장가들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도성에 퍼졌다. 그거야 나도 예상했지만, 선뜻 응하는 이가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물론 ‘왕비’라는 자리는 대단하기는 하다. 하지만 하와국까지는 뱃길로 수만 리, 번국으로 들어온 지도 겨우 20년밖에 안 됐다. 대한 황실이나 사대부들의 눈에는 여전히 야만인이나 다름없다. 공주로 책봉까지 해서 보내준다지만, 자원하는 이가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자기 딸을 이 혼인에 내놓겠다고 자원하는 이가 나왔다! 그것도 내가 전혀 예상도 하지 않은, 나와 정말로 가까운 사람이었다. 내가 하와이에 보낼 조문 사절로 점찍어두었던 강녕공이 뜬금없이 입궐하더니 올해 열여섯 살이 된 자기 딸을 내놓겠다고 나섰다.
“강녕공, 어찌 그대가 이 혼사에 자원하였는가? 굳이 그대가 나서지 않아도 적당한 다른 종친이 얼마든지 있을 것인데.”
“폐하, 저는 폐하의 조카가 아닙니까? 황실에 가장 가까운 근친으로서, 마땅히 폐하께서 느끼시는 고충을 헤아려 이를 돕고자 노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강녕공의 딸은 세간에서 회자될 정도의 대단한 신붓감은 아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외모에 그럭저럭 괜찮은 품성, 그럭저럭 괜찮은 혼수를 마련할 수 있는 재력 등 그럭저럭 평범하게 배필을 구할 수 있는 처녀다. 특출난 건 종친의 딸이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바로 그 배경이 필요했기에 강녕공의 딸이 의미가 있었다. 그만큼 나하고 가까운 아이를 택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자원하고 나서는 이를 물리치고서 싫다는 사람한테서 딸을 빼앗을 건 없지 않은가.
“신의 딸이 비록 뛰어나지는 않으나, 신의 자매인 현주들은 모두 출가하였으며 영해공과 삼성공의 딸들은 이미 출가하였거나 나이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와국에 보내기에는 제 딸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야만인들이 사는 먼 땅에 자기 딸을 보내기 싫은 다른 종친들은 강녕공이 나서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조정에서도 사람만 괜찮으면 누구 딸이든 상관없지 않냐는 의견이 대세를 점했다. 중추원에서도 대체적으로는 여기 동조했다.
이런 흐름을 유일하게 거스르고 나선 기관이 삼사, 그리고 중추원의 일부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강녕공의 평소 행실을 문제 삼았다.
“폐하. 강녕공은 주색을 즐기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하와국이 우리 번국이라고는 하나, 일국의 국모가 될 이를 보내려면 마땅히 타의 모범이 되는 집안의 딸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사간 심기철이 삼사를 대표해서 나섰다. 그동안 현왕 일가는 유흥을 즐기더라도 적당한 선은 지켰고, 덕분에 별다르게 문제가 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국혼’에 응하겠다고 나서자 그동안은 별것 아니라고 치부되던 작은 흠들이 갑자기 두드러진 거다.
“짐은 그대들의 비난이 과도하다고 본다. 주색이라면 하와국에서는 단점으로 생각하지도 않을 문제 아닌가.”
“일개 종친과 한 나라의 국구는 엄연히 몸가짐이 달라야 합니다. 하와국이 우리 번국이라 하나, 엄연히 하나의 나라인데 딸을 국모로 보낼 이에게 어찌 흠이 있어도 되겠습니까.”
“강녕공이 다소 호색하였다 하나, 여염의 부녀자를 범하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많은 첩을 거느려 세간의 지탄을 받지도 않았다. 술에 취해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남에게 손해를 끼친 적도 없다. 그런데 어찌 그대들은 이를 큰 흠이라고 보느냐?”
찾으려면 강녕공보다 품행이 바른 종친으로 적당한 나이대의 딸이 있는 이를 찾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 억지로 딸을 내놓게 하기보다는 자원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당연히 낫지 않은가.
“항렬도 문제입니다. 강녕공은 폐하의 조카이니, 그 딸은 손녀뻘이 되지 않습니까?”
“별 사소한 걸 다 트집을 잡는구나. 짐의 손녀로 들이고 공주로 봉하면 그만이다.”
결국, 논란 끝에 강녕공의 딸을 내 손녀로 삼아 하와이로 보내기로 되었다. 고로 은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와 4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 딸을 두게 되었다. 은이가 미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이 사실을 알면 무척 놀라리라.
자기 딸이 하와국 세자빈으로 결정되고 ‘의순공주’라는 봉호도 받게 되자 강녕공은 당장 남촌에 있는 회동관을 찾아갔다.
하상운을 만난 강녕공은 술상을 놓고 ‘사위 예정자’와 함께 신나게 축하주를 나누었다. 그 대결에서는 ‘장인 예정자’가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
“좋은 아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소중히 돌보겠습니다.”
공주와 함께 선 하상운도 싱글거리며 웃었다. 카우이가 서신으로 부탁하기도 했고, 우리 신하들도 공주를 보내려면 일단 혼례를 치른 뒤에 보내야 한다고 해서 열사흘 전에 혼례를 간단히 치렀는데, 신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에서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부디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를 바란다. 다만 공주를 너무 힘…들게 하지는 말아다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시녀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어기적거리는 의순공주를 보니, 이 곰 같은 자식이 그동안 회동관에서 뭘 하며 보냈는지 뻔히 짐작이 간 탓이다. 너무 미안해서 강녕공, 아니 왕에게 도중에 공주를 잘 돌보기를 한 번 더 부탁했다.
“염려 마시옵소서, 폐하. 세자가 세자빈을 아끼는 것은 좋은 일이나, 너무 과도하여 해가 되지 않도록 신이 잘 지도하겠습니다.”
하상운 저놈도 설마 자기 아내의 친아버지가 한배에 타고 있는데 아내에게 심하게 굴지는 않겠지. 부디 의순공주가 견딜 수 있을 만큼 적절히 방사를 자제했으면 좋겠다.
– 23 –
하와국 쪽에서는 후보 부친의 자격 문제로 시비가 벌어졌다. 하지만 조홀국 왕비로 보낼 처녀를 구하는 일은 후보를 정하기부터 쉽지 않았다. 하와국이 야만족 취급을 받은 데 반해 조홀국은 정가군의 과거 때문에 해적 떼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정 내에서도 조홀국에 공주를 보내는 데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와국 세자빈 선정 문제로 논의하는 중에도 조홀국 문제로 여러 번 격론이 벌어졌다.
“하와국이야 저들이 왕화를 위해 공주를 달라 청하였으니 보내도 가하겠지만, 조홀국왕은 따로 신부를 보내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신경을 써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공주를 내려 왕화를 퍼뜨려야 합니다.”
윤시현은 우리와 문물이 달라도 너무 다른 조홀국을 계속 번국으로 붙잡아두려면 저들이 우리 문물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강압적이지 않게 우리 문물을 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국혼이라고 말이다.
“전조 때 원나라 공주들을 통해 몽고풍이 전해져 크게 퍼졌음을 상기하소서. 만약 우리가 관원과 군사를 보내 조홀국에 문물을 전하려 한다면, 저들은 그 땅을 우리가 빼앗으려는 게 아닌가 두려워하고 경계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주를 통해 전한다면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조홀국 백성들은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다. 정명완을 따라간 한인, 중국인, 일본인 부하들은 대개 불교도다. 이들에게 학문과 예의를 전하려면 해사도에 상관과 군영을 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핵심에 쐐기를 박아야 한다는 게 윤시현의 주장이었다.
성시균을 비롯한 세 승상도 윤시현의 의견에 동의했다. 최고위 신하들이 모두 이 건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자 반대하던 신하들도 결국 의견을 굽혔다. 이로써 조홀국에도 화번공주를 보내기로 결정됐다.
“문제는 배필이 될 이를 구하는 일이로구나.”
적당한 명문가 딸을 구하는 거라면 쉽지만, ‘공주’라고 칭하려면 종실의 딸이어야 한다. 하지만 하와국 세자빈으로 딸을 내놓지 않던 이들이 조홀국 왕비 감을 뽑는다고 해서 딸을 내놓을 리 없었다.
“차라리 연우를 보내면 어때?”
상희가 눈을 반짝였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연우? 아, 예왕네 둘째. 걔는 안돼. 이유도 알잖아.”
연우는 신미년(1691)생이라서 나이가 조금 많지만, 정명완은 을묘년(1675)생에다가 이번 혼인이 재혼이니까 그건 괜찮다. 하지만 그 애는 대역죄인의 딸이다. 지금처럼 조용히 성당 경내에서 기도와 봉사를 일과로 삼아 살게 하는 게 서로 좋은 일이다.
언니 연수가 6년 전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 연우는 언니가 자살한 줄 알지만 – , 둘째 오빠인 이청도 4년 전에 하와이에서 병으로 죽었다. 마지막 혈육, 하와이에 있는 큰오라비 이종과는 자주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 정도는 허락하고 있다.
“조정과 중추원 양쪽에서 난리가 날 거야. 어림도 없는 일이지.”
연우를 갇힌 처지에서 풀어주고 싶은 상희의 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왕 때문에 잔뜩 흐른 피가 아직도 도성 백성들 눈에 선한데 그 애를 번국에 왕비로 보내다니, 말도 안 된다.
“그 애한테 자유와 사는 보람을 주고 싶다면 차라리 의학교에 넣어주지 그래? 성모원에서 여의로 일하면 지금처럼 성당에서 허드렛일이나 하기보다 나을 거고.”
성모원(聖母院)은 마포 대성당에서 직영하는 병원이다. 마포 일대에 사는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자선병원으로, 늘 일손이 모자란다. 상희는 자기도 사실 얼마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서 무척 기뻐했다.
“연우 그 아이가 거기서 몇 년쯤 도성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부친의 죄를 갚았다고 하면, 가문의 죄까지는 몰라도 자기 한 사람 속죄할 정도는 되겠지? 그럼 병원에서 인연이 생긴 사람하고 혼인하는 정도는 조정에서 눈감아주지 않을까?”
“품행에 조심하면서 바른 모습만 보이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은데…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얼마나 걸릴지.”
연우가 가엾은 백성들을 열심히 돌보는 성녀로서의 모습을 보이면 확실히 주변의 평가가 좋아지긴 하겠지. 하지만 혼인까지 하게 해줄지는 나도 확신을 못 하겠다. 그때 가 봐야 알 듯하다.
조홀국에 보낼 왕비는 아무도 자원하지 않아서 결국 억지로 끌어내야 했다. 연이가 낳은 서자의 아들, 즉 내 사촌인 경흥공 이원의 딸을 골랐다. 불만을 다독이기 위해, 강녕공처럼 경흥공도 정1품 왕으로 봉작해주고 결혼 비용이라는 명분으로 은 5만 냥도 하사했다.
의원공주로 봉해진 이 애도 의순공주처럼 열여섯 살이다. 서른여덟이나 된 남편을 배필로 맺어주려니 미안하기는 하지만, 사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이 시대 혼인이 다 그렇지 뭐.
의원공주를 태우고 조홀국으로 가는 배는 의순공주보다 이레 뒤에 제물포를 떠났다. 아직 양력으로 10월 5일이라 바다 상태는 양호하다.
그리고 이틀 뒤에 그 바다 위를 달려서 뜻밖의 선물이 왔다. 세 번째 번국 후보인 술루국에서 보낸 살아있는 전리품이었다. 포로가 된 술탄, 즉 전 술루국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