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80
3부 3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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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동안 수군을 방치하다시피 했던 청나라에는 전선을 설계할 역량이 부족하다. 그런 탓으로 현재 청나라 수군이 보유한 전선은 우리가 넘겨준 판옥선을 기반으로 한다. 당연히 철갑선 건조도 판옥선을 장갑화하는 쪽으로 진행됐다.
청나라 수군의 철갑선 설계 및 건조를 돕는 우리 고문관들은 후송 수군처럼 외륜선으로 만들면 청나라 수군이 유지하기 어려우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판옥선의 기본 설계를 그냥 쓴 결과 경인왜란 시절 거북선과 거의 다를 게 없는 배가 되었다. 다만 용두는 없다.
경인왜란 시절 거북선 설계라고 해도 화력은 상당하다. 전면에 18근 포가 2문, 양 측면에 12근 포가 12문씩 들어간다. 그만하면 후송 철갑선을 상대해서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는 정도는 가능하리라.
현재 새로 편성한 청나라 수군은 일반 판옥선 120여 척에 철갑선 5척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 전선 대부분은 아직 발해만에서 훈련에 매진하고 있고, 산동반도 이남에는 배치하지 않았다. 후송과의 국경인 회하에서는 별도로 전선을 건조한다고 했다.
“수군을 확충하면 남진을 재개할 예정이라 하던가?”
“아직은 남정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회하 일대는 곳곳에 포대가 들어서서 후송군의 도강을 막고 있다. 하지만 그 긴 강기슭을 전부 요새화할 수는 없으니 기동하면서 방어할 수 있는 수군 전력이 필요하다. 지금도 일부 수군을 회하에서 운용하고는 있다. 후송 수군에 상대가 안 되니까 그렇지.
“청나라 중통제는 서나라에서 내란이 발발하고 후송이 그에 개입하려 서나라를 침공하면 그 뒤를 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송이 서나라로 출병하지 않으니, 청나라도 출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촉?오가 삼파전을 벌이던 삼국시대와는 상황이 다르다. 촉나라 땅을 차지한 서나라가 위나라 격인 청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청나라도 서나라를 노리지 않는다. 고로 두 나라 다 후송만 경계하면 된다.
“서나라는 언제까지 평온을 유지할 듯한가?”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새 황제인 승평제(升平帝)는 무능한 군주는 아니나, 분봉을 받은 황자들이 계속 순순히 복종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장형운은 서나라 땅을 대략 일곱으로 나눴다. 태자(현 황제 승평제)의 출신이자 근거지인 사천은 황제 직할지로 두었고, 그 외에 광주(광저우), 중경, 장사 같은 중요 지역도 황제의 직할지가 되었다. 형주 지방은 황제의 친동생 청왕 장원정을 형주왕으로 봉해 맡겼다.
바이족 출신인 백왕 장원교는 운남 태반을 통치하는 운남왕이 되었다. 장원교의 동생인 자왕 장원락은 귀주왕이, 광동 출신인 적왕 장원소는 광동왕이, 북방 한족 출신인 흑왕 장원식은 섬서왕이, 묘족 출신인 녹왕 장원호는 광서왕이 되었다.
여섯 황자들이 차지한 영토 중 가장 강력한 지역이 광동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장형운은 광서와 광동 사이에 있는 광주 및 주강 삼각지 일대는 황제가 직할하는 영토로 삼아 황제가 임명한 절도사가 다스리게 함으로써 균형을 맞췄다. 양광 지방을 셋으로 나눈 셈이다.
“여섯 번왕은 자기 봉지에서 기반을 다지면서 부황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다만 황제가 승상을 보내 감시하는 데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운남, 귀주, 광서 등지는 워낙 가난한 땅이고 타지와의 교통도 어려워서 그다지 성하지 못합니다.”
서나라 영토는 지도상으로는 엄청나게 넓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생산력을 발휘하는 땅은 절반밖에 안 된다. 사천, 형주, 광동 정도다. 운남이 그나마 귀주나 광서보다는 낫다.
“하지만 사는 땅이 척박할수록 그곳에 사는 거민(居民)들은 성정이 거칠고 싸움이 능숙한 경우가 많으니, 다른 황자들이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이 옳다. 부유한 땅을 받은 황자들이 꼭 유리한 것도 아니다. 참, 왕작은 세습할 수 있더냐?”
지금 서나라는 사실상 한나라의 예에 따른 군국제(郡國制)를 시행하는 셈이다. 모든 왕이 동성왕이라는 점에서 주나라의 봉건제와는 차이가 좀 있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힘이 한나라 때만큼 강하지는 못할 듯하다.
여섯 황자가 자신의 번왕 지위를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다면 그건 서나라가 사실상 일곱 조각이 났다는 뜻이다. 만약 상황이 그렇다면 황제가 공식적으로 통치하는 영토는 사천과 광주를 비롯한 일부뿐이라는 말이 되니, 장형운이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제까지 알아본 바로는 번왕이 왕작을 세습하려면 황제에게 표를 올려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번왕이 불충하여 역심을 품거나 백성들을 착취하여 가렴주구를 일삼을 때는 황제가 왕작을 박탈하고 철번할 권한을 갖습니다.”
“조건이 그러하니, 일곱 형제가 기반을 다 다지고 나면 필시 내란이 일어날 듯하구나.”
황제는 힘 있는 형과 아우들의 영토와 세력을 뺏고 싶으리라. 번왕들은 자기 땅과 세력을 지키면서 기왕이면 옥좌까지 가지고 싶으리라. 어느 쪽이 먼저 화살을 겨눌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내란이 한 번은 일어날 게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서나라 내에서 내분이 터질 전망이 없다. 그렇다 보니 후송은 좀처럼 서나라 내부로 파고들 틈을 노리지 못했다. 앞에서 말했듯, 청나라가 자기 배후를 노리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에 확실한 자신 없이는 서나라를 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서나라 내부가 안정되니, 후송에서도 남방으로 모았던 군사를 다시 되돌리고 있습니다. 요즘 소무제는 학자들을 동원하여 책을 편찬하고 있다 하니, 당분간은 주변국을 공격하느라 군사를 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책이라, 좋은 일이로다. 소무제가 과연 무슨 책을 내려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부러 거짓을 쓰는 것만 아니라면 책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요즘도 정호찬과 가끔 이야기하는 거지만, 중원의 세 나라가 서로 싸우지 않으며 군비를 갖춰 대치한 채로 서로 욕이나 퍼붓는 편이 우리에게는 가장 좋다. 중원이 하나로 합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주야장천 싸움만 벌여도 우리에게 좋을 건 없으니까.
세 나라 전부 군비는 서로 경쟁하는 정도로만 갖추고, 건축이나 문화사업으로만 싸웠으면 좋겠다. 인류 문명을 원시시대부터 우주시대까지 발전시키는 그 게임에서도 정복 승리 말고 문화 승리가 있지 않았는가?
세 나라가 경쟁적으로 랜드마크를 만들고 그게 후대에 전해진다면 그것도 괜찮은 결말일 거다. 그쪽이 승패도 결정짓지 못할 전쟁을 계속 이어가면서 서로 죽어라 싸우기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
– 4 –
중국 못지않게 커다란 대륙, 인도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만만찮게 흥미진진하다. 중국에서 4년 동안 평화가 유지된 덕분에 그나마 피는 별로 안 흘렀다면, 이쪽에서는 반란과 내란이 연이어 터지며 수많은 피가 흘렀다. 그리고 그 피를 마시고 우리는 상당한 이득을 올렸다.
“여전히 무굴에서는 내란이 끊이지 않는가?”
“예, 폐하. 6대 바드샤가 워낙 폭정을 휘두른지라 백성들이 원한을 품었고, 그 뒤를 이은 황제들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다독여 민심을 수습할 생각은 않고서 옥좌를 두고 싸우기만 하며 국정은 권신이 멋대로 농단하니 어찌 나라가 안정되겠습니까.”
이번에 무굴에서 제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전은 1713년에 일단 마무리되었다. 자한다르 샤가 조카인 플루크시야르에게 패해서 죽고, 플루크시야르가 제위를 차지했다.
패배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무능하고 게으른 인간인 자한다르 샤는 제위에 오르자 재상 줄피카르 칸에게 국사를 몽땅 떠넘기고 자기는 놀아나는 데만 집중했다. 심지어 기생 출신 총비를 황후로 책봉하고, 그 일족에게 벼슬과 이권을 뿌렸다.
무능한 놈이 멋대로 손을 댔다가 나라 살림을 망치는 것보다야 재상에게 국사를 일임하는 편이 훨씬 낫기는 하다. 하지만 후자는 황제 편에 선 귀족들의 격노를 불러일으켰다. 황후 자리에 기녀를 앉히고 그 가족을 우대하는 작태가 귀족들에게 좋은 평을 들을 리 없다.
“그런 식으로 암군이나 할 짓을 서슴지 않았으니, 무굴 폐주에게 아무리 유능한 총신이 있다 하여도 패망할 수밖에 더 있겠느냐.”
당연히 황제에 대한 평가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황제군의 사기도 형편없었다. 무굴의 옛 수도인 아그라 교외에서 플루크시야르의 군대와 결전이 벌어졌을 때 전투는 고작 하루 만에 끝나고 말았다. 황제에게 불만이 많던 황제 측 귀족들이 이반했기 때문이다.
도망가지 못하고 생포된 자한다르 샤와 재상 줄피카르 칸은 승자에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소용없었다. 부친이 살해당한 원한을 곱씹어온 플루크시야르는 이들을 다 목매달아 죽이고 시체를 델리 성문 앞에 버렸다. 그리고 썩어 없어질 때까지 방치했다.
이 내전 동안 골가타에 있는 우리 상관은 현명한 투자로 대박을 터트렸다. 골가타 총관 이성은은 전임 황제 바하두르 샤가 주문한 왜병 3천 명을 후계자 자한다르 샤에게 보내지 않고, 반기를 든 조카 플루크시야르에게 넘겨주었다. 이쪽에 승산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천축 용병 4천을 우리 돈으로 고용해서 별도로 빌려주었고, 모아두었던 무기와 탄약 상당량도 내주었다. 플루크시야르는 우리가 넘겨준 병력까지 포함해서 벵골에서 모은 군대를 끌고 수도 델리로 진격했고, 당당하게 백부를 쳐부수고 승리를 거두었다.
승자가 된 플루크시야르는 우리가 베푼 이 호의에 후하게 보답했다. 병력 7천과 군수품을 내준 댓가로 우리 상관은 관세를 면제하는 특권을 받았다. 플루크시야르와 개인적인 친분을 깊게 쌓은 이성은이 잘 꼬드긴 덕분이었다.
“하오나 폐하, 무굴 현주 역시 폐주에 뒤지지 않는 암군이라 하던데 괜찮겠사옵니까?”
몇몇 신하들은 이놈이나 그놈이나 다 막장인데 바뀌어 봐야 무슨 소용이냐며 별로 반기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승자가 된 플루크시야르가 패자에게 관대함을 베풀기는커녕 자한다르 샤와 재상 외에도 수많은 반대파 황족이나 귀족들을 처형하는 무자비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우랑제브 시절의 탄압, 줄피카르 칸이 재정 회복을 위해 도입한 징세 청부 제도 등은 모두 그대로 시행하면서 백성들을 쥐어짜고 있다. 그러니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진압하느라 군대를 보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현주는 그저 허울뿐인 군주이고 권신들이 국권을 농단하고 있으니, 어찌 제대로 된 나라라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천축이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의로운 군사를 내어 무굴 조정을 숙청하고 어진 이를 군주로 세웠을 텐데 말입니다.”
예무대신 양반, 도리와 예를 전하는 선비가 되려면 차라리 진짜 성종 때 사림이 되시오. 그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탈레반 같은 발언으로 날 섬?하게 하지 말고. 저놈들이 예를 지키지 않으니 두들겨 패서 예를 지키게 하자니, 너무 심하잖소.
“예무대신이 하는 말이 그르지는 않으나, 천축은 먼 땅이고 저들은 우리 백성이 아니니, 어찌 만사를 옳게 보살필 수 있겠느냐. 상황을 살피며 놓아두는 수밖에 없다.”
현재 기술 수단으로 인도는 너무 멀고, 관리하기도 힘들다. 덩어리가 너무 크고 경쟁자도 많다. 지금은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벵골과 실론에 발이나 걸치고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이 두 곳은 관광지로서도 의미가 있다. 순례관광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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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수사 보고를 듣는 건 참으로 즐겁다. 그 보고서 한 장마다 돈뭉치가 굴러들어오니까.
“작년에 우리 배를 타고 탕갈라로 가서 천축을 순례한 이가 651명, 골가타를 통해 순례한 이가 533명이었습니다. 7할은 일본인입니다.”
“그 수가 많이 늘었구나. 앞으로 더 늘면 좋겠다.”
본격적으로 성지 순례 관광 코스가 가동된 건 경인년(1710)부터다. 계미남변이 끝난 건 양력으로 1707년 12월이었지만, 관광 재개보다 마다구와 왕가적을 토벌하고 인도까지 가는 우리 해운망을 정비하고 현지 상황을 살피며 무굴 당국과 교섭해두는 게 더 급했다.
그게 완료되고 나서 경인년 4월, 양력 5월에 후나도에서 요시무네와 회견이 있었다. 굳이 조약문에서까지 명시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어서 조약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구두로 나눈 대화 주제 중에는 성지 순례 문제에 관한 합의도 있었다.
그 합의 덕분에 그해 가을부터 순례단이 떠났다. 다만 벵골, 비하르 일대는 무굴 황실이 벌인 내전의 무대 중 하나라 정정(政情)이 불안해서 대규모 순례단이 계속 방문하기에는 좀 위험했다. 자한다르 샤에게 처형당한 플루크시야르의 부친부터가 벵골 총독 아니었는가.
대신 떠오른 순례지가 실론이었다. 실론은 벵골보다 도리어 유리한 점이, 벵골과 비하르 등 인도 본국에 있는 불교 유적은 그저 죽은 ‘유적’일 뿐이었다. 이미 인도 본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완벽하게 쓸어버려서 종교로서의 불교가 소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론에는 불교가 살아있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근원지에 가장 가까운 정통적인 불교가 말이다. 역시 고대로부터 내려온 수많은 불교 경전도 있다. 그러니 일단 길이 열린 이상 순례자들이 몰려가지 않을 수가 없다.
“중원과 그 근방에 있는 여러 중요한 사찰에도 순례객을 보낼 수 있게 해보자 하였는데, 성과가 어떠한가?”
“청과 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답을 보냈으나, 후송에서는 딱 잘라 거절하였습니다. 순례를 명분으로 간자가 들어올 수 있으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안타깝구나. 이익을 함께 나눌 기회인 것을.”
불교 성지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중국 본토에도 숱하게 많은 성지가 있다. 이게 천 년을 넘는 시간 동안 천천히 형성된 거라,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나 비하하는 의식과는 별개로 존중하는 마음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 성지 순례 사업도 중국에서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성지 순례니까 돈깨나 있는 사람들이 몰릴 텐데, 중국은 조금만 천하가 어지럽고 치안이 나빠져도 도적이 창궐하는 나라다. 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평화가 필요하다.
지금도 개인적으로 중국에 순례하러 가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상단에서 운행하는 상선을 타고 상인으로 위장한 채로 건너가는 용자들이다. 개중에는 운이 없게 붙잡혀서 후송 측의 주장처럼 간자라는 혐의를 쓰고 처형되는 이들도 있다. 일일이 집계가 안 될 뿐이지.
우리하고 후송은 상대국 출신 죄인을 잡으면 일일이 송환 따위 하지 않는다. 통보도 전혀 안 한다. 이게 우리가 후송 해적이나 잠상을 잡으면 잡는 대로 몽땅 모가지를 매달던 데서 비롯된 건데, 어쩌다가 보니 범죄 관련해서는 속지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정착돼 버렸다.
우리가 순례단을 보내겠다는 것도 아예 공식적으로 관이 관리하는 순례단을 보냄으로써 그런 불상사를 피하려는 건데…후송 쪽에서는 그런 것도 다 의심밖에 안 드는 모양이니 뭐 어쩌겠는가. 우리가 계획을 접어야지.
그나저나, 조형서가 분명히 자기한테 이득이 되는 성지 순례 관광사업에 협력하라는 우리 제안을 거부하며 까칠하게 나오는 이유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서나라뿐만 아니라 안남 쪽에서도 자기 마음대로 일이 잘 안 되고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