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83
3부 401화-혜련의 나날(상)
– 1 –
자신에게는 부모가 없다. 그건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상감마마, 중전마마.”
자신을 키워주고 사랑해 주신 두 분의 이름이었다. 대한을 다스리는 가장 높은 두 분이 혜련의 어버이인 셈이다. 하지만 이들은 혜련의 진짜 부모가 아니다.
혜련에게 명확하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남색 치마와 옥색 저고리를 입고 태황 폐하 앞에 엎드리던, 정식으로 애기나인이 되던 날의 광경이다. 그 이전 일은 어렴풋할 뿐 확실하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나는 분명했다. 처음 말을 배울 때부터, 호칭은 정확하게 써야 했다. 지고하신 중전마마 앞에서 실수로라도 ‘엄마’라고 불러서는 안 됐다. ‘중전마마’라고 불러야 했다. 자신을 크게 아껴준 다른 사람인 순비 역시 ‘순비 마마님’이라고 불러야 했다.
사실 그 두 사람은 혜련이 호칭을 틀리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중궁전에 있는 상궁들은 아주 엄하게 혼을 냈다. 그래서 혜련은 네 살이라는 나이로 정식 애기나인이 되기 전에 이미 호칭에서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되었다.
애기나인이 되면서 강제당한 또 한 가지 변화는 함께 자란 황자, 황녀들을 친 동기간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옥색 저고리를 입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섯 살 위인 황태자도, 두 살 위인 심왕이나 수빈공주도 자신을 친동생처럼 대해주었다. 함께 뛰어다니며 울고 웃었다. 아직 갓난아이인 정친왕이나 수명공주의 옆에 나란히 앉아 신기하게 들여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애기나인의 옷을 입게 되자 모든 게 바뀌었다. 나이 든 상궁들은 혜련에게 ‘너는 중전마마를 모시는 궁녀다’라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중전께서 너와 침소를 같이 쓰신다고 해서 네가 황녀라도 된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너는 천애고아가 된 것을 두 분 폐하께서 가엾이 여기셔서 거두셨느니라. 네 출신을 잊고서 주제넘게 굴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야.”
하필 이때 황태자가 정식으로 책봉을 받아서 동궁으로 떠났다. 늘 옆에 붙어서 감싸주던 황태자가 없어지자 상궁들이 혜련을 엄하게 다그치지 못하게 막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전은 늘 바빴고 심왕은 코끼리에 미쳐 있었으며 수빈공주는 원래도 자주 오지 못했다.
혜련은 그렇게 지내며 상궁들의 가르침에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오라비’와 ‘언니’라고 생각하던 이들과 자신은 지체가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황태자나 수빈공주가 틈을 내서 중궁전에 찾아와도 자기 스스로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래도 중전은 그전처럼 혜련을 대했다. 임금이 교태전에 들지 않는 날에는 혜련을 불러 함께 침소에 들고, 직접 머리를 땋아주는가 하면 글과 산술을 가르쳐주고 중궁전에 선물로 들어온 예쁜 옷이나 노리개를 나누어주곤 했다.
적어도 그렇게 돌봄을 받는 순간만은 혜련도 상궁들의 부라림에서 벗어나 자신이 중전의 친딸인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갓난아이인 선친왕조차 중전이 아닌 유모와 함께 민가에 피접(避接)해서 지내는데 자신은 중전과 함께 먹고 자면서 보살핌까지 받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우 2년 뒤, 중전이 의명공주를 낳았다. 태황과 중전 두 사람이 의명공주를 품에 안고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여섯 살밖에 안 된 혜련은 깨달았다. 자신의 자리는 이제 중전 옆에서 사라졌음을. 아니,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 2 –
태황은 막내딸인 의명공주를 너무 예뻐해서 법도에 따라 대궐에서 내보내 피접도 시키지 않고 궁 안에서 키우게 했다. 그리고 혜련은 애기나인으로서 맡아야 했을 다른 잡일 대신에 이 공주를 돌보는 일을 돕게 되었다.
“힘드는 일은 경험 많은 상궁들이 다 맡을 거다. 너는 그저 이 아이와 동기처럼 지내면서 놀아주기만 해 다오.”
“예, 중전마마.”
그 대화는 자신이 공주와 친동기가 아니라는 사실만 더 뼈저리게 깨닫게 했을 뿐이었다. 혜련도 알았다. 일반 민가의 진짜 친누이라면, 젖먹이와 그저 놀아주기만 하는 대신 재우고 먹이고 씻기는 온갖 잡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은 이 아이의 언니가 아니었다. 놀아주고 보듬어주는 몸종일 뿐이었다. 그녀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함께 공주를 돌보는 상궁들도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녀를 단속했다.
하지만 이를 안다고 해서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화재로 부모를 잃은 자기를 데려와 키워주고 보듬어주신 중전마마였다. 혜련이라는 이름조차 중전께서 지어주시지 않았는가. 그만하면 충분히 축복받은 삶이었다.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꼭 갚아야 한다고 했었다. 은혜를 베푼 분의 아이를 소중하게 잘 돌보는 것도 은혜를 갚는 일이었다.
– 3 –
“중전마마, 외람되오나 여쭙고 싶은 일이 있사옵니다. 무인년(1698)에 죽은 제 생부모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혹시 아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미안하구나. 나는 폐하께서 너를 데려오신 것만 알고 그 이상은 모른단다. 단지 백위영장 이진용이 불타 무너진 네 집 땅광에서 너를 파냈다는 이야기만 들었었지.”
“네….”
혜련은 자신의 처지를 절감했다고 해서 불만이나 실망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지금 누리는 것만 해도 대궐 밖에 있는 수천, 수만이나 되는 아이들보다 훨씬 나은 삶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공주의 시중을 들고 중전의 말벗이 되었다.
하지만 십여 세가 되었을 무렵, 얼굴도 모르는 친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새 마음속에 쌓여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동정심에서 베푸는 호의가 아닌, 순전히 혜련이 자신을 위해서 주는 사랑을 받고 싶었다.
물론 모든 부모가 태황과 중전처럼 딸을 귀애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애기나인 동료인 관비 출신인 아이들에게 들은 부모 이야기에 따르면 정말 끔찍한 부모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노비라서 그런 게 아닐까? 양민이던 내 부모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았을까?
존재하지 않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애달파져 갔다. 그래서 용기를 내 중전마마께 살짝 여쭈어보았지만 실망스러운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네게 가까운 일가라도 있었다면 그 집에 맡겼겠다만, 정말 아무도 없었단다. 사고무친한 너를 차마 관청에 넘길 수도 없어서, 그냥 우리가 키우자는 폐하의 말씀을 받아들였지.”
중전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혜련을 끌어당겨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전에도 종종 안겼었던 품이지만 자신의 것은 아니다. 혜련은 흐르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았다. 참아야 했다.
– 4 –
“너는 지밀에 있는 혜련이가 아니냐. 어찌 공주를 돌보지 않고 대전에 왔느냐? 네가 딱히 대전에 올 일은 없을 터인데.”
“공주께서 낮잠을 주무시는 사이 중전께서 잠시 분부하신 것이 있어….”
본래 법도에 따르면 어떤 전각에 속한 궁인이 용무도 없이 함부로 다른 전각에 드나들지 못한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혜련은 아직 어린 데다, 중궁의 지밀에 속한 생각시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게다가 상감께서도 특별히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도 다들 알다 보니, 그녀가 대전에 왔다고 해서 딱히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살 아래인 정친왕 이권은 뭔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혜련을 붙들고 자꾸만 말을 걸었다. 중궁전에서도 혜련을 보면 편하게 말을 걸곤 하던 정친왕이지만, 오늘은 그때와는 달랐다. 중전의 분부가 아니라 허락을 얻고 온 참인지라 조바심이 일었다.
“무슨 분부시냐? 본왕이 혹시 도움이 될 일이라면….”
“백위영장께 드릴 전언이옵니다. 마침 저기 백위영장이 나오시니 그만 가보아야겠습니다. 부디 소녀의 실례를 용서하소서.”
혜련은 정친왕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대전에서 나온 보리스 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그녀를 불러세우려는 듯 손을 뻗던 이권이 한숨을 쉬며 슬며시 손을 내렸다.
“백위영장 나리, 혹시 잠시 말씀 여쭐 수 있을지요.”
혜련은 정친왕이 내민 손도 보지 못했고 깊은 한숨도 듣지 못했다. 그저 보리스의 대답을 기다리며 얼굴을 붉힌 채 속삭였을 뿐이었다.
“음? 너는 혜련이가 아니냐. 중전께서 내게 내리실 분부라도 있으시냐?”
궁녀가 임금이 아닌 다른 남자와 함부로 접촉하다가는 참형을 당할 수도 있는 게 법도다. 하지만 혜련이 아직 어리고 중전의 측근임을 모두가 알다 보니 그런 의심을 받지는 않았다.
“그…그것이 아니오라…혹시 저를 처음 구하셨을 때, 제 생부모가 있던 그 집이 어디인지 혹시 기억하시나 해서요….”
“그게 언제 적 일인데…청계천 남쪽 어디라는 것밖에 모른다. 네게는 미안하다만, 네 부모 얼굴도 하나도 기억 안 난다.”
만사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보리스는 이미 자기 머릿속에서 그 일을 싹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당황해하는 혜련이 가엾은 생각은 들었는지, 그걸 알고 싶으면 누구한테 가서 물어보면 좋을지는 알려주었다.
“완친왕저 집사 조경신에게 가서 물어봐라. 그 친구가 그때 현장에서 수습한 시신 명단을 작성했으니 아마 기억하고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혜련은 부푼 가슴을 안고 돌아섰다. 이제 대궐 밖에 나가서 조경신을 찾아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자신의 과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다.
– 5 –
장옷을 걸친 혜련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염의 처녀처럼 꾸미긴 하였으나 그 외모에서는 숨길 수 없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흘렀다. 그녀의 입에서 조심스럽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낙선방(樂善坊)….”
3년 만에 찾아왔다. 백위영장 보리스에게 언질을 받고 여기 찾아오는 데 3년이 걸렸다.
궁녀는 본래 대궐밖에 나갈 수 없는 몸이다. 대궐 바깥에 나가려면 특별히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지밀상궁은 혜련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볼 본가도 없는데 공주마마를 두고 어딜 나가느냐는 거였다. 게다가 너무 어려서 혹시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이유도 붙었다.
중전마마께 사유를 아뢰고 도움을 구했으면 쉽게 허락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던 참에 마침 생일을 맞은 선임 상궁이 혜련을 비롯한 나인 몇을 데리고 나가 반촌극장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하늘이 베푼 기회였다.
‘소녀, 돌아가신 부모님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고자 하여….’
애절한 호소에 마음이 흔들린 보모상궁은 귀궐(歸闕)할 시간에 맞춰야 하니 흠경각 앞에 있는 시계탑이 7시를 치기 전에 반촌다점에 오라는 조건만 붙여서 혜련을 보내주었다. 겨우 틈을 얻은 혜련은 곧바로 심왕저로 가서 중궁전에서 왔다고 하고 조경신을 만났다.
“아, 네가 혜련이로구나. 워낙 오랜만에 만나서 알아보지 못했다. 열다섯 살? 이제 완전히 처녀가 되었구나. 하긴 도성이 불탄 게 벌써 15년 전 일이니….”
한동안 비수후의 살림을 맡아 관리하던 조경신은 심왕이 완친왕이 되어 분가하면서 이쪽 집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심왕이 심양으로 떠나자 한양 저택은 온전히 그가 관리하게 됐다.
“네가 본래 살던 동네는 청계천 남쪽 낙선방이다. 여기 주소가 있다만, 지금 가보더라도 별로 신통한 건 없을 거다. 옛 모습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조경신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혜련을 위로했다. 같이 가서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혜련이 거절했다. 아무리 심왕부 집사라지만 외간 남자와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주소를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여기가…여기가 내가 살던 집….”
15년 전에 한양 시가를 휩쓸었던 화재 흔적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깔끔하게 벽돌이 깔린 보도, 3층으로 솟은 건흥옥, 간혹 섞인 학당과 점포를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조경신은 그녀가 살던 집터는 화재 후에 주인이 없는 무주지로 분류되는 바람에 한성부가 수용했다고 했다. 당시 태황은 난리를 치르느라 경황이 없어 일이 그렇게 처리된 줄도 알지 못했고, 여러 해 뒤에야 상황을 알고 미안해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덮었다고 했다.
‘지금 그 땅에 사는 이를 내보낼 수도 없으니. 나중에 네가 돈이 필요해진다면 폐하께서 적당히 보상금을 주실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혜련에게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기가 잠깐이지만 가족과 함께 살던 집, 그곳을 드디어 직접 와봤다는 생각밖에는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왜 남의 집을 그렇게 쳐다보시오?”
중년 사내 하나가 나타나 마땅치 않은 투로 쳐다보았다. 혜련이 별것 아니라면서도 발을 떼지 않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섰다.
“흠, 흠. 혹시 여기 사는 사람이라도 찾아오셨소? 헤헤,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시구려. 내 숭늉이라도 한 그릇 대접할 테니.”
“됐어요.”
혜련은 쌀쌀맞게 한마디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은 궁녀였고 저런 바깥사람들과 괜히 얽혀서 좋을 건 없었다. 그리고 상대를 외면하고 한참을 그 길가에 서 있었다. 사내는 잠시 혜련을 노려보더니 툴툴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