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89
3부 407화
– 19 –
디에고 일가가 도성에 다녀가는 건 3년 전 책봉식 이후 처음이다. 본국과 술루 사이가 꽤 멀다 보니 자주 오가기는 힘들다.
“신도 심왕처럼 한양을 자주 오가고 싶습니다만, 사정이 받쳐주지를 않습니다.”
심양에 있는 준이는 심양의 추위가 싫다면서 양력으로 매년 11월 중순이면 처자와 함께 도성으로 온다. 그리고 도성에 있는 자기 저택에서 따뜻하게 지내다가 4월이 되면 이번에는 한양의 더위가 싫다면서 심왕궁으로 간다. 한양이 심왕부의 ‘겨울 수도’인 셈이다.
덕분에 상희는 헤어질 각오를 했던 준이를 예전처럼 볼 수 있었고, 며느리들과 손자녀들 역시 자주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처음 한양에 왔을 때는 황실 식구들과 서먹한 사이던 후금 공주도 이제는 모두와 친해졌고 말이다. 애들 셋도 황실 전체의 귀여움을 받는다.
나도 못 누리는 여유를 누리는 준이가 부럽기도 하지만, 조건이 아예 다르니 부러워해도 별수 없다. 내가 현직 태황이 아니라면 대한의 강역 어디든 내가 가고 싶은 곳에서 유유히 지낼 수 있겠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지 않은가.
“심왕이야 솔직히 말해 한량 아닌가. 하지만 그대나 조홀국왕은 나라를 다스리느라 바쁜 사람들이니 그리 쉽게 도성을 왕래하기는 어렵다. 짐도 잘 알고 있으니 괘념치 마라.”
디에고와 비슷한 위치인 조홀국왕 정명완은 의원공주를 하사받고서 확실하게 우리 산하에 들어왔다. 하지만 도성에 입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칠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조홀국은 아직 기반이 제대로 반석에 오르지 못했다. 일단 군대는 국왕에게 충성하는 한인과 일본인, 중국인으로 되어있고 조정 신하들은 이 세 부류에 더해 말레이 토인들까지 있다. 백성은 대부분이 말레이 토인이다.
인종만 다른 게 아니다. 종교도 문제다. 군대를 지휘하는 장교들은 태반이 불교도에 일부 천주교 신자가 있고 토착 백성들은 대부분 회교도다. 지금은 정복 직후라서 아직 정복자의 눈치를 보느라 이 문제로 충돌이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심각해질 수도 있으리라.
이 복잡한 나라가 순전히 정명완 개인의 역량으로 하나로 뭉쳐 있다. 10년 가까운 고난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단련된 덕분에, 숙부들의 반란을 만나 해적단 두목 자리에서 쫓겨난 그 미숙한 젊은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라 상황이 아직 안정되지 않고 보니 국왕이 반년은 족히 소요될 본국 방문에 나설 수 없을 뿐이다. 나라를 비웠을 때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아무리 해사도에 대한 해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해도 모든 상황을 다 살펴서 대응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조홀국왕이 자리를 지킬 필요가 있지요.”
디에고는 정명완의 능력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했다. 두 번국이 원활하게 교류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소식은 듣고 있다면서 말이다.
“이번에 그대가 유럽에 가는 길에 잠시 조홀국왕과 회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여차하면 서로 도와야 할 수도 있는 상대이니, 친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중간에 보르네오가 끼어있기는 하지만, 조홀국과 해사도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 측 거점이 술루국이다. 고로 그쪽에서 무슨 사태라도 터진다면 지원군으로 먼저 출동해야 할 병력도 술루군이다. 누손주 주둔군은 주력이 루손에 있으니 말이다.
“그 이야기는 됐고, 어디 왕자들 얼굴 좀 보자.”
올해 열넷인 디에고의 장남은 한국 이름이 이성진, 스페인 이름은 프란치스코다. 부친인 디에고가 자기 외조부인 빌라다리아스 후작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했다. 작년에 왕세자로 정식 책봉하는 조서도 내렸다. 3년 전에 왔을 때보다 부쩍 키가 큰 청년이 되었다.
장남보다 한 살 아래인 공주 ? 조선의 전례에 따른 작호다 ? 는 이성희, 스페인 이름은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이사벨라다. 네 살 어린 막내는 이성운, 스페인 이름은 알레한드로다.
이들은 왕의 자녀이므로 봉작도 받았다. 프란치스코는 부친의 작호를 이어받아 ‘비수공’이 되었고, 알레한드로는 보르네오를 뜻하는 ‘볼내공’이 되었다. 공주인 이사벨라는 술루군도에 있는 큰 섬의 이름을 따서 ‘바실공주’가 되었다.
“술루 왕궁에서는 스페인어를 주로 쓸 것 같은데, 어떠냐. 그동안 사용하지 않은 탓으로 한어(韓語)를 다 잊지는 않았는가?”
“잊지 않았습니다, 폐하. 부왕께서 우리는 대한의 신하이니 한어를 마땅히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서반아어는 외가의 말이니 익히면 더 좋으나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지요.”
내 질문은 스페인어였지만, 프란체스코는 유창한 한국어로 답했다. 도성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보다 도리어 더 유창하다. 대견하기도 하지.
“제 혈통의 절반은 서반아에서 왔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피는 대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피를 폐하께 바쳐 영원히 충성하겠습니다.”
디에고를 술루국왕으로 책봉하면서 왕자들을 교육할 관원들도 따로 파견한 보람이 있다. 공주야 도로테아가 자기 원하는 대로 키워도 상관없지만, 왕자들은 멋대로 자라면 곤란하니 말이다. 스페인 수도사한테 교육받고 자라서 친스페인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떡하겠는가.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너희에게 황실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너희가 우리 대한의 후예임은 분명한 사실이니, 그 충심을 길이 잊지 말지어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아들들도 잘생겼지만, 고명딸인 이사벨라는 이사벨과 도로테아의 얼굴이 절묘하게 섞인 미녀로 자라고 있었다. 이 아이가 혼기가 차면 아마 사방에서 구혼이 밀려들지 않을까. 꼭 그 상대가 한인이라는 보장은 없겠지만. 부모가 어련히 알아서 고르겠지.
– 20 –
술루국 왕자녀들은 디에고 부부가 유럽에 다녀오는 동안 한양에다 두고 가기로 결정됐다. 자기 부모의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 녀석들이 안 한 건 아니지만,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여행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게다가 조정에서도 이 아이들은 두고 가게 하라는 여론이 대세였다.
“혹시 서반아가 누손주를 빼앗긴 데 대한 보복으로 술루국왕을 억류할 수도 있고, 선교권 박탈에 대한 보복으로 도미니코회가 흉행(兇行)을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동행한 어린 왕자녀가 해를 입거나, 붙잡혀 인질이 되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심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혹시 술루국왕과 왕비가 서반아에 남은 가족을 내세운 서반아 조정의 꼬임에 넘어가 반기라도 들게 되면 어쩌겠습니까? 그런 황망한 일이 혹시나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왕자녀들을 도성에 잡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의 의견이 그래도 아이들의 신변을 걱정하는 말이라면 후자는 대놓고 인질로 삼자는 주장이었다. 그나마 디에고를 대놓고 의심하는 건 아니고, 스페인 정부가 디에고의 외조부 빌라다리아스 후작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면 어쩌냐는 소리이긴 했다.
“이미 전쟁이 끝난 지 오래인데 저들이 그런 짓을 벌이겠는가? 당당한 일국의 군주에게?”
“유비무환이라 하였습니다. 설마 그런 일이 생기겠느냐고 방심하다가 후회하기보다 미리 대비하여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함이 훨씬 낫습니다.”
조정 중론은 이랬다. 그와 별개로 나도 내 손자, 손녀들을 내 곁에 두고 싶었다. 감정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이유에서도.
현재 술루는 아시아에서 유일한 진짜 천주교 국가다. 대한의 주류와는 이질적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다. 그 이질감은 조홀국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으리라.
이 말인즉슨 술루국이 앞으로도 충성스러운 우리 번국으로 남으려면 양쪽 수뇌부 사이에 인간적인 유대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내 손자인 성진이, 프란치스코가 조부와 숙부와 사촌과 함께 지내며 친근해질 필요가 있다.
술루국이 반기를 들더라도 우리 토벌대가 바로 진압할 수 있고 어쩌고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아예 ‘토벌’을 할 상황을 안 만들겠다는 거니까. 하여간 디에고가 왔을 때는 애들 셋은 전부 한양에 놓고 가게 하자고 조정 중론이 합의된 뒤였다.
“오가는 길이 멀고 험하긴 하겠습니다만, 훌륭하게 자란 증손자들을 외조부께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후작에게는 짐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해도 좋다.”
이야기를 좀 더 나누다 보니 애들을 놓고 가라고 제안한 게 다행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디에고에게는 딱히 그럴 생각이 없지만, 도로테아는 스페인에서 자기 아이들의 혼처를 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거 자기가 결혼 문제로 겪은 설움을 그런 식으로 풀고 싶었나 보다.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뭔가에 한 맺힌 여자가 자꾸 생기나….’
술루국은 대한 본국과의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왕자비나 부마를 스페인에서 데려온다면 스페인과 가까워질 뿐, 본국과 유대감을 쌓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연에 싹을 자르기를 정말 잘했다.
‘디에고를 도성에 부르면서 사돈을 맺을 상대를 골라두길 정말 잘했군.’
도로테아가 서운해해도 할 수 없다. 장차 대한 본국과 술루 사이에 더 깊은 유대를 쌓기 위한 안배다. 피를 섞는 것만큼 유대감을 단단히 다지는 행위가 어디 있는가.
아이들을 빼고서도 사절단 규모는 상당하다. 전체 인원은 대략 80명이고 정사는 디에고, 부사는 국자감 교수로 재직하다가 ? 2년 전에 성균관을 국자감으로 간판을 바꿨다 ? 은퇴한 뒤에 중추원으로 들어간 이이명이라는 사람이다. 국상 최석정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그대는 이이명과 본래 친한 사이라 들었다. 그 인품과 실력을 알기에 추천한 것이겠지?”
“물론이옵니다, 폐하. 그 좋은 재주를 어찌 중추원에서 썩히게 하겠습니까? 이이명은 아직 환갑도 안 되어서 나라를 위해 많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니, 꼭 뽑아서 쓰시옵소서.”
최석정의 목소리에서 나만 고생할 수 없다는 오기 같은 게 느껴졌다. 이이명은 최석정과 띠동갑인데, 어쩌다 보니 행정직이 아니라 교수직으로 돌다가 일찌감치 은퇴했다. 자기보다 한참 젊은 친구가, 그 능력도 뻔히 아는데 일찌감치 노나는 꼴이 배가 아프기도 했으리라.
“어명이 내렸는데 어찌 망설이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수행하겠습니다.”
불려온 이이명은 부사를 맡으라는 명을 당연히 선뜻 받아들였다.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는 못 하지만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유창하게 할 수 있으니 훌륭히 써먹을 수 있으리라.
여정은 프랑스 동인도회사 배를 타고 프랑스로 직행하는 쪽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 뒤에 영국, 로마, 스페인 순으로 들렀다가 본국으로 돌아온다.
처음 디에고를 보내려고 생각했을 때하고 다르게 프랑스부터 들르게 하려는 건 이번 사절 파견의 주된 목적이 루이 14세를 조문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엄연히 공식적인 일정이 있으면 그것부터 수행해야지, 고향에 자랑하러 가는 일부터 하겠는가.
“공적인 임무를 다 마친 뒤에, 일정에 쫓기지 않고 자유롭게 외조부를 방문하라는 거요. 그래야 편안히 일가붙이들을 만날 수 있지 않겠소. 다만 서반아 궁정에서는 애 좀 탈 거요. 안 그렇소, 좌상?”
“물론입니다, 폐하.”
모국에서 박대받던 끝에 야반도주한 스페인계 사생아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대공의 지위에 올랐다. 게다가 그 대공령은 회교도들을 직접 쳐부수고 얻은 땅이며, 주민들은 스페인인과 천주교를 믿는 한인들을 모아놓았다. 스페인 궁정이 혹하고도 남을 이야기다.
저들로서야 술루국이 통째로 스페인 쪽으로 전향하게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좋겠지. 그게 어렵다면 선교할 권리라도 얻고 싶을 거고. 그러니 우리 진위사가 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빨리 접촉하지 못해 안달을 내리라. 다른 나라부터 가는 동안 약 좀 오르라지.
음, 그러고 보니 아무리 스페인에는 별 용무가 없다고 해도 호세 페르난도 1세에게 안부 묻는 친서 하나쯤은 써서 디에고 편에 보내야겠다. 지금 디에고 신분이면 스페인에 들르는 이상 국왕 얼굴 한 번쯤은 보기는 해야 할 테니까. 디에고 체면은 세워줘야지.
– 21 –
미주에서 돌아온 카자크 2세들에게도 약속대로 연회를 베풀었다. 모처럼의 기회이고 해서 보리스부터 국내에 있던 다른 2세대들까지 다 불렀다. 아내들, 딸들, 며느리들도 데려오라고 했다. 당연히 은이도 안나와 함께 나와서 한몫 끼었다. 상희와 올렝카도 동석했다.
“모스크바에서 그대들과 처음 만난 지도 벌써 33년이로다. 그동안 쌓은 인연을 생각하면 그대들 여섯은 진실로 피로 맺은 내 의형제나 다름이 없으니, 실로 고맙기 그지없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르라!”
환호성과 함께 아버지 세대의 여섯 카자크가 먼저 일어서서 술잔을 들었다. 이들이 나와 함께 술잔을 비우자 아들 세대 열한 명이 일제히 일어섰다. 아니, 은이까지 열두 명이 잔을 들었다.
“태황 폐하 만세! 만수무강하소서!”
“오냐, 고맙다.”
웃으며 술잔을 받아 비운 뒤 세묜을 불렀다. 세묜이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네가 미주에서 태자의 목숨을 구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흘렀구나. 그때 소식을 받고 네 아비 탈라스에게 대신 서훈하고 포상하기는 하였으나, 네게 직접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내, 오늘이라도 네게 고맙다는 뜻을 표하려 한다.”
세묜을 내 손으로 잡아 일으켜 세운 뒤 어깨를 감싸 안으며 고맙다고 사례하자 사방에서 환호와 박수가 일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세묜의 손을 잡아 내 옆자리로 데려와 앉힌 다음에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폐하, 제가 곰을 더 많이 잡았는데 제게 먼저 술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반의 아들 미하일이 웃으며 불평을 했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인 줄 뻔히 알겠기에 나도 웃으며 받았다.
“네가 잡은 곰들은 태자를 덮치지 않았잖느냐. 술은 짐보다는 예쁜 네 처에게 받거라.”
미하일의 처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장옥정의 딸이다. 형황이 눈감아준 예왕의 서녀 말이다. 본래의 귀한 혈통과 그 아이의 미모를 생각하면 대한 제일의 명문가들이 앞다투어 모셔갈 색싯감이었지만, 19년 전의 그 사건이 이 아이의 혼삿길을 막았다.
‘내가 무서웠는지, 카자크 따위와 혼맥을 잇고 싶지 않았는지….’
어느 쪽이 원인이든 번듯한 집안에서 들어온 혼담은 없었다. 그러던 참에 미하일이 그만 이 아이에게 반했다. 옛날에 농담처럼 혼담이 오가던 바실리의 딸 올가는 그새 드미트리와 눈이 맞아서 이쪽과 결혼한다고 선언해버린 상태였다.
“마음이 바뀌었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드미트리가 미하일의 연인을 데려간 대신에 자기 누이동생을 보상으로 내준 셈이 되었습지요, 하하.”
벌써 여러 해 전 일이라 그런지, 보리스는 그저 농담처럼 이야기하며 크게 웃었다. 사건 관련자들도 다들 웃었다. 미하일 본인도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세묜은 아직도 혼인하지 않았다. 혹 미주에서 좋은 현지 한인이나 원주민 처녀를 만나 혼인하지 않을까 하는 내 예상도 완전히 빗나가, 미주에 있는 동안 딱히 정인(情人)을 만들지도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소개해준다면 어떨까?’
연인을 데려간 대신에 누이를 소개한다…드미트리가 한 일을 은이에게 대입하면, 안나를 빼앗은 대신에 혜련이를 세묜에게 소개하는 것으로 해도 되지 않나? 물론 혜련이가 싫다고 하면 억지로 연결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다만 이건 내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혜련이 문제에서는 상희가 확실히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 나중에 상희한테 세묜이랑 혜련이를 짝지어주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야겠다. 혜련이한테도 나보다는 상희가 물어보는 게 더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