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3
1부 0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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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제비가 날아올 때가 되었구나.”
조선에 온지 세 번째 보는 제비다. 다소 철이 이르지 않나 싶었지만 길게 뻗은 까만 꼬리털이 맵시 있게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높은 하늘을 돌다가 연달아 낮은 바닥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벌레라도 한 마리씩 물었을까.
“예로부터 제비가 많으면 풍년이 든다 했습니다. 봄 들어서 처음 나온 바깥나들이에서 제비를 보다니, 앞으로 펼쳐질 전하의 치세가 태평성대임을 뜻하는 징조가 아닐까 합니다.”
수행하던 특진관(경연에 참석해서 왕의 자문에 응하는 관직) 유자광이 슬쩍 비위를 맞췄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랬으면 좋겠소.”
올해는 1497년, 정사년이다. 팔자에 없었던 왕 노릇이 벌써 3년째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조선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나름 익혔고 자신감도 생겼다.
지난 2년 동안 내 삶은 치이고 치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첫 해는 정말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내 한 몸 적응하기도 바빴다. 국사도 대부분 신하들이 하자는 대로 동의하고 넘어갔다.
두 번째 해는 그나마 좀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충돌도 늘어났다. 대간들은 뭐 하나 수틀리는 일만 있으면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했고, 내가 반려하면 다시 제출했다. 무슨 핑퐁 게임도 아니고 이게 무슨 고구마 바구니여.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던 일 하나는 작년 초겨울에 지시한 활쏘기 권장 교지였다. 매년 6월, 12월 두 번씩 모든 문무관들에게 활쏘기를 시켜서 잘 쏘는 이는 인사고과에 가산점을 주고 가장 잘 쏘는 이들은 가자, 즉 품계를 올려주기로 했다. 물론 못 쏘면 감점, 감자다.
헌데 여기에 대해 사간원에서 태클을 걸었다.
“벼슬을 내림은 임금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니, 원래 경솔히 더하거나 빼앗을 수 없습니다. 비록 전하께서 ‘권장하고 격려하는 의미에서 시행한다’고 하셨으나, 본래 벼슬이란 그 재주가 쓸 만하고 덕이 성숙함으로써 비로소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어찌 화살 하나로 올리고 내리겠습니까? 이는 권위를 남발하고 더럽히는 일입니다.
또한 무신들은 이미 봄가을에 무예 시험을 보고 있으니 굳이 새 시험을 볼 필요가 없고, 문신들에게는 잘 쏘는 이들에게 활이나 말, 또는 곡식과 포목으로 상을 주시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벼슬을 걸고 쏘게 하시어 권위를 떨어트리려 하시나이까?”
야 이 책만 보는 방구석 폐인들아, 활 좀 쏘라니까 그게 그렇게 싫더냐? 내가 문관들에게도 활쏘기 시험을 보겠다고 한 건, 늘 방구석에서 책만 보는 너희 같은 놈들한테 운동 좀 시키려고 한 거라고! 젠장, 네놈들은 건강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운동도 안 하겠다는 거냐?!
활쏘기는 조선 사대부들이 그나마 체면 상하지 않고,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운동이다. 이 시대에 테니스가 있나, 골프가 있나? 아니면 평민들처럼 돼지 오줌보를 차거나 석전을 하겠나?
그리고 문관들이 활을 좀 쏴야 하는 이유는 이 조선이 가진 빌어먹을 관직 체계에도 있다. 조선에서는 지방관이 각 고을에서 동원한 군사의 지휘권을 갖는데, 문관 출신 지방관이라 해도 이는 마찬가지다.
물론 야인(여진족)이나 왜구가 자주 쳐들어오는 고을에는 무관 출신자를 보임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문관이 가는 고을이라고 군사를 이끌 일이 없는 게 아니다. 한참 훗날 이야기지만, 임진왜란 때 관군을 이끌었던 권율, 송상현 같은 장수들이 죄다 문관 출신이다.
내가 군인 입장이라도 소총 사격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중대장 밑에서 구르고 싶지 않다. 문관이라도 언제 군대를 지휘하게 될 수도 있는데, 활 정도는 능숙하게 다뤄야 할 것 아닌가?
아 물론 대간들이 주장하는 대로 물질적인 보상만 주고, 인사고과는 적용하지 않을 수도 있지. 문제는 그래도 활쏘기가 귀찮은 사람은 활터에서 비웃음을 한번 당할 각오만 하면 그만이라는 거다. 불이익이 없으니까.
이렇게 다 생각해서 내린 조치인데, 사간원에서 올린 반대 건의안은 내게 짜증만 더해주었다. 몽땅 거부하고 지난달에 마침내 시험을 실시했다. 공언한대로 잘 쏜 이들에게는 상을, 못 쏜 이에게는 벌칙을 주었다. 어디 내가 굽히나 봐라.
“대간들의 잔소리가 좀 줄어들면 좋겠소. 뭐만 하면 붙들고 늘어지니 속이 터져서 살 수가 있어야지.”
“전하, 저들 나름대로는 전하를 명군으로 만들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행동의 도가 지나친 점은 많습니다만.”
무관 출신이라서인지, 유자광은 60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도 말과 활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게다가 내 비위도 잘 맞추어 주었으므로 승마나 사냥을 할 때면 꼭 유자광을 동반했다.
물론 유자광이 역사에 어떤 사람으로 남았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희대의 간신. 남이를 배반하고, 고발을 남용하고, 사화를 주도하고, 자기를 총애하던 연산군마저 몰아낸 배반의 아이콘 같은 이.
하지만 유자광이 그런 인간이 된 원인은 뭔가? 그게 다 서자라는 이유로 유자광을 차별하고 있던 조선 양반사회가 만들어낸 결과 아닌가? 서자(양첩 소생), 얼자(천첩 소생)라서 차별할 거면 아예 서얼을 만들지를 말란 말이다, 이 씨발놈들아!
아닌 말로, 행세하는 양반 놈이 첩 하나를 덜 들이면 그보다 아래 계급에 있는 남자 하나가 아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생산에 종사하고 국력을 증진시키는 인구가 는다. 하지만 양반이 첩을 들여 서자를 싸지르면 무슨 효용이 있나?
까놓고 말하자면, 관직에 진출한 일부를 제외하면 나머지 양반 인구는 잉여들일 뿐이다. 물론 사회지도층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는 있지. 하지만 농업사회인 조선에서, 상공업에도 종사하지 않는 양반들은 사회적인 부담이다. 과거도 못 보는 서얼들은 더하다.
그나마 내가 연산군인 게 다행이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유자광처럼, 연산군 시기까지는 그래도 서얼들이 어느 정도는 출세할 수 있다.
사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서얼금고법 자체를 아예 폐지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이 법이 창업군주나 다름없는 태종 이방원이 만든 법이기 때문이다. 왕조사회에서 선대의 유산을 부정한다는 건 정통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너무 부담이 크다.
선왕인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에서는 서얼 차별에다 여자의 재혼 금지까지 명문화했다. 이걸 다 뒤엎으려면 얼마나 골머리를 썩여야 할까? 개가 금지법만 해도 수많은 논란 끝에 성립되었다고 알고 있다. ‘아버지’인 성종의 강력한 드라이브가 있었다던가.
개가 금지법은 어떻게 눈 딱 감고 넘어간다고 쳐도 서얼 차별은 없애야만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공을 세우게 하는 것, 그것도 군공을 세우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유자광이 이시애의 난에서 스타로 떠오르면서 출세를 시작하지 않았나 말이다.
내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군대 규모가 상당히 확장된다. 여기에 농민들로 충원하는 일반 사병들 외에 서얼이나 중인 계층에 속한 무관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자. 하급 장교나 부사관으로 종군한 이들이 군공을 세우면 벼슬을 올려주면서 서얼금고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봉책이다. 양반들이 첩을 들이는 한 서얼은 끝없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서얼금고법을 폐지해야만 한다. 축첩제를 폐지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사회통념상 그건 도저히 힘들 것 같으니까. 그리고 위반자를 단속할 방법도 없고.
“전하, 전하!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어느새 고삐가 늦추어졌는지, 밤색 종마가 길을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 지지난달에 사복시에서 넘겨받은 명마인데, 가끔 이런 짓을 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내 뒤를 따라오던 유자광이 어느새 앞에서 내 말이 들판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서고 있었다.
“소신의 무엄한 행동을 용서하소서. 다만 전하께서 생각에 잠기신 듯한데, 혹여 길이 아닌 곳에서 고삐를 놓쳐 낙마라도 하실까 염려되어….”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
저기 따라오고 있는 사관이 적어서 기록에 남기긴 하겠지만, 백성들 앞에서 한 행동도 아니고 시위내관 몇 명밖에는 보지 않았으니 크게 따질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풀밭으로 들어갔다가 말이 뭘 잘못 밟는 바람에 말 등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내 망신인 것도 맞고.
“그보다 무령군에게 묻고자 하는 바가 있노라.”
무령군은 유자광이 받은 봉작이다. 예종이 즉위할 때 받았으니, 벌써 30년이 다 되어 간다.
“하명하시오소서.”
유자광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준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도 북방의 야인들과 남방의 왜인들은 우리 국경을 넘나들면서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 있다. 세종대왕께서 4군, 6진을 개척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면서 저들을 평정하셨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저들이 다시 방자해지고 있다. 이제 또 한 번 혼을 내줄 때가 왔다고 생각하노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오나 적은 수의 군사로는 충분한 전과를 올릴 수 없고, 대군을 일으키자면 막대한 비용이 듭니다. 물자를 준비하고 조련도 충분히 해야 합니다.”
역시 유자광이다. 왕의 뜻에 ‘반대’는 절대 하지 않았다. 수행하기 위해서 얼마나 준비가 필요한지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기해년에 대마도를 치셨을 때, 태종대왕께서는 군사 1만 7천명과 치중을 나르기 위해 병선 227척을 투입하셨습니다. 그 정도라면 특별한 준비 없이도 동원할 수 있습니다만, 전하께서 바라시는 원정이 태종대왕께서 벌이셨던 정도이십니까?”
나는 잠시 대답을 늦추고 생각을 정리했다. 허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아니. 과인은 왜인들에게 단지 겁을 주고자 군사를 일으키려는 게 아니니라. 태종대왕께서 파견하신 군사들이 거둔 적의 수급이라야 고작 1백여 급이 아닌가? 과인은 놈들을 완전히 짓부숴서 다시는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로다.”
더 이상을 원하지만 지금 미리 다 말할 필요는 없다. 점진적으로, 한 단계씩 이루어 나가면 된다. 처음부터 세상을 정복하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유자광이 아무리 임금의 딸랑이라고 해도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는 일)까지 따르지는 않을 게다.
“그러하시다면 준비할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병선을 새로 건조할 시간도 필요하니만큼, 기해동정 때만큼 짧은 시간 내에 군비를 갖출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서너 해는 걸리리라고 보입니다. 순조롭게 준비가 진행된다면 말입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역시 빠른 시간 안에 그 준비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수군은 전함을 추가로 건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조선 수군은 판옥선조차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 판옥선을 비롯한 여러 무기가 필요하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격렬히 반발하리라. 부국강병을 중시하는 훈구 대신들은 그나마 좀 낫지만 명분과 도덕을 강조하는 사림파는 절대 반대할 게 뻔하다.
“그 준비를 진행하려면 어떤 정지작업이 필요한지 그대도, 과인도 안다. 그렇지 않은가?”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유자광을 쏘아보았다. 내 눈빛을 보고 잠시 멈칫하던 유자광은 곧 이를 악물더니 고개를 숙였다.
“전하, 소신이 어찌 그 뜻을 모르겠습니까. 맡겨만 주시옵소서. 기필코 조정에서 전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장애를 없애겠습니다.”
“믿겠다.”
이심전심, 마음으로 통한다면 굳이 입 밖에 낼 필요가 없다. 아무리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이 시위하는 내관과 사관뿐이라지만, 그 귀에 지금 내가 유자광과 나눈 메시지가 들어가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로써 독대를 겸한 오늘 승마의 목적은 다 이루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마쳤으니 이제 정말 거침없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달리면 동대문이다. 요즘은 궁전 안에서만 말을 타지 않고 도성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코스도 다양하고, 말이 지칠 때까지 한껏 달리기 좋았기 때문이다.
신나게 말을 달리려니 딱 한 해 전에 있었던 유인홍의 딸 사건 생각이 났다. 사건 해결을 핑계로 탐정 노릇까지 하면서 돌아다닌 건 즐거웠고, 덕분에 사당패에서 상희를 만난 것도 좋았지만 마무리가 좋지 못했던 그 사건 말이다.
하필이면 범인이 임산부일 건 또 뭐냐. 게다가 취조 중에 고문치사(…)를 당해버릴 건 또 뭐고? 분명히 그년이 나쁜 년인데도 내가 찝찝해지지 않았냐 말이다. 게다가 상희 녀석까지 패거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고.
상희네 패는 언제쯤 도성으로 다시 돌아올까? 그 연산군 영화에서 광대가 연산군에게 위로를 주듯, 어쩌면 상희가 내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난 동성애자가 아니니 애정을 원하는 게 아니다. 상희가 편하게 이야기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