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308
3부 4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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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사 일행은 베르사유에서처럼 초대에 응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하며 바쁜 사교활동을 했다. 계미남변 당시 영국 함대를 이끌고 대한 수군 ? 당시에는 수군이었다 ? 과 교전을 치른 제독들도 만나서 친교를 나누었고, 장차 더 많은 교역을 진행할 동인도회사 인사들도 만났다.
“술루 공국에도 저희 상관을 설치할 수 있을까요?”
“아마 가능할 거요. 귀국한 뒤에 내 재상과 의논하고 나서 확답을 드리리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이미 술루에 상관을 두고 있다. 그 점을 감안하면 영국 동인도회사라고 해서 상관을 못 둘 이유는 없으리라. 물론 이는 디에고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는 없고 집정인 권기선과 의논해야 할 일이지만, 예상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영국은 완전히 신교도가 득세한 나라지만 그 점이 디에고 일행의 활동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외교 사절일뿐더러, 대한과 스페인이 지금은 영국과 적대관계가 아닌 덕분이다.
이들은 런던 외곽까지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다만 혼자 쏘다닐 수는 없고 영국 정부에서 붙여준 안내인을 대동하고 다녀야 했다. 안내를 빙자한 감시원일 게 분명했지만, 어차피 이곳 지리를 모르는 진위사 일행으로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증기기관이 있는 곳을 보고 싶으시다고요, 각하?”
“그렇소이다.”
프랑스에서도 그랬지만 영국에서도 세 사람의 역할 분담은 명확했다. 고위층과 어울리는 사교적인 역할은 디에고가 맡는다. 깊은 고려가 필요한 정치적인 논의는 이이명이 맡는다. 학문과 기술에 관한 문제는 이익이 맡는다.
왕립학회에 논문을 제출하는 외에 영국에서 이익이 맡은 역할이 증기기관 조사였다. 과연 영국제 증기기관이 어느 수준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런던 시내에 있는 증기기관은 단 한 대뿐입니다. 원하신다면 그리로 모시지요.”
“부탁하겠소.”
런던에 한 대뿐이라는 증기기관은 강가에 있었다. 템스강에서 물을 퍼 올려 거대한 석조 수조에 채우는 양수기 노릇을 하고 있는데, 이익이 방문했을 때는 가동하지 않고 있었다. 스미스라고 하는 관리 책임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건 화재가 일어났을 때 방화수를 퍼 올리기 위한 설비입니다. 그러면 불을 끄려 나선 사람들이 굳이 직접 강가로 달려가 손으로 물을 긷지 않고 수도꼭지를 열어서 물을 받기만 해도 되지요.”
이 기관은 1714년부터 1년 동안 런던 시장을 맡았던 윌리엄 험프리(William Humfreys) 남작이 설치한 거라고 했다. 50년 전과 같은 대화재가 또 발생하더라도 방화수가 부족해서 화재를 진압하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자 도입한 물건이다.
험프리 남작은 본래 철물상 집안 출신이었다. 게다가 시장으로 취임하기 전에 동인도회사 이사로 여러 해 재직하며 대한에서 사용하는 증기기관에 관해 여러 경로로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자신이 런던 시장이 되자 곧바로 증기기관을 사다가 장비했다.
“반대도 많았습니다. 그 뒤로 도시의 소방 체제가 정비되어 그런 대화재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런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큰돈을 들여서 갖출 필요가 있느냐는 거였죠. 탄광에서 갱도 물 뺄 때나 쓰는 거 아니냐면서 말입니다.”
“우리 대한에서도 처음에는 그 용도로만 썼지만, 지금은 여러 분야에서 잘 쓰고 있소.”
“예, 그러시겠지요. 남작님도 그 이야기를 하시며 런던처럼 돈이 있는 도시에서 그 기관을 사 줘야 제조업자들이 그 돈으로 더 좋은 기관을 만들어 조선처럼 다양한 용도에 사용하게 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셨습니다.”
험프리 남작은 자신이 동인도회사에 재직할 때 입수한 자료를 시의원들 앞에 내밀며, 이 ‘연기와 김을 뿜는 쇳덩어리’가 얼마나 유용한 물건인지 설파했다. 그리고 수조에 일단 물을 한번 채워두면 평소에는 가동할 필요가 없으니, 유지비도 많이 들지 않는다고 설득했다.
“폐하께서도 호기심을 보이시자, 시의원들도 결국 동의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증기기관을 만들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장인인 뉴커먼 씨를 다트머스에서 불러다 직접 설치했지요. 불을 때서 가동하면 1분에 120갤런의 물을 강에서 퍼 올릴 수 있습니다.”
영국 단위로 120갤런이면 대한에서 쓰는 단위로는 30말이다. 지금 대한에서는 물 3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1되로 하고 있으니 1말은 30근에 해당한다. 즉 120갤런은 900근이다. 반 톤이 조금 넘는다.
“거참 대단하구려. 혹시 기관이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겠소?”
스미스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자기가 맡은 기계의 우수함을 자랑했다. 하지만 이익이 기계를 작동해 보라고 하자 그건 곤란하다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기관은 도시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와 석 달에 한 번 있는 정기 점검일에만 가동하게 되어있습니다. 손님께서 보고 싶다고 하셔도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기관을 구경하는 건 되겠소?”
“그 정도야 얼마든지.”
외국인에게는 절대로 증기기관을 보여주지 않는 대한과 비교하면 관대하다 못해 자부심이 넘치는 태도였다. 봐도 모르리라고 생각해서인지, 대한이 예전부터 자기들보다 더 우수한 증기기관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인지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익은 기관실 안으로 들어가 설치된 증기관을 살펴보았다. 번쩍번쩍 빛이 나도록 잘 관리된 기관은 대한에서 쓰는 것과 구조에서 좀 차이가 있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기통(실린더)이었다. 그 안에 들어간 증기가 밖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는 모습을 봐야 확실히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겠는데….’
하지만 이미 거절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영국인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용을 써서 증기기관을 만들었으며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건 확인했다. 조만간 이들도 대한에서 하듯이 증기선도 건조하고 증기기관으로 공장의 기계도 움직이리라.
“어떻습니까? 우리 기관도 조선제 못지않지요?”
“훌륭하오. 숨기는 것 없이 이리 보여주시니 참으로 고맙소.”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설명하던 스미스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익은 적당히 상대를 추켜세워주면서 기관이 생긴 모양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새겼다. 이만하면 돌아가서 그림으로 다시 그려낼 수 있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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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외에 다른 진위사 일행도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부사 이이명은 조지 1세의 명을 받은 타운센드 자작과 만나 인도와 동인도에 있는 양측 세력권이 어떻게 갈라지는지 재확인했다.
대한은 지난번 조약에 따라서 해사도, 골가타, 탕골라 세 곳에 거점을 유지한다. 서쪽이나 남쪽으로 세력을 더 확장하지 않는다. 대신 대한 선적 선박이 인도 이서나 해사도 이남으로 진출할 때는 영국이나 네덜란드령 항구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그 외에…조선의 봉신국인 조호르 공국이나 술루 공국이 자체적으로 영토를 늘리는 거야 분명 자기 권리겠지요. 하지만 혹 말라카를 비롯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유지를 넘본다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측과 전쟁을 각오하셔야 하리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럽에서는 조홀국과 술루국을 대한에 속한 ‘공국(公國)’으로 간주하고 있다. 두 나라 다 독립적인 왕국이라고 보기에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적당히 자제시키겠습니다.”
윌리엄 3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하지만 양국의 협력관계는 프랑스라는 공동의 적을 매개로 해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것 외에는 두 나라 간에 확인해야 하는 시급한 문제는 현재 없다. 그런데 잠시 한담을 나누던 타운센드 자작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부사께 하나 물어보고 싶습니다만. 정말 루이지애나를 경유하는 프랑스와의 새 교역로가 생겼습니까?”
“아니, 그건 낭설입니다. 선창에 상품을 싣고 대동양을 횡단하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미주에 상륙해서 우마의 등에 짐을 싣고 험난한 산맥을 두 개나 넘고 광활한 황야를 지나서 원미주까지 가는 건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제물포에서 바로 선적하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
“흠, 그럼 조선인 이민 수천 명이 프랑스 서방 회사의 농장에서 일할 예정이라는 건?”
“그것도 낭설입니다. 우리 대한인이 아프리카에서 실어 오는 흑인 노예도 아니건만 어찌 저들이 멋대로 수천 명씩 농장에서 부릴 수 있겠습니까.”
타운센드 자작은 주식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오는 소식 때문에 주가가 폭등하는 상황은 심히 우려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견실하게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대신 투기 따위에 미쳐 돌아가는 모습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뉴턴 경 같은 사람도 주식에 빠져 있으니 심히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아니, 그 양반이야 애초에 납으로 금을 만들겠다고 연금술에 빠져 있던 사람이니 주식으로 한탕을 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말이지요. 자식도 없는 사람이 돈 벌어서 누굴 물려주려고 그러는지 원.”
뉴턴에게는 처자식이 없다. 처자식은커녕 평생 여자와 관계한 적도 없었다. 타운센드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이이명이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유럽인들이 무엇보다 중시하는 성경에서 천주가 말하기를 ‘생육하여 번성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승려도 아니면서 혼인하지 않았다고요? 그걸 나라에서는 해결하지 않고 놓아둔다는 말입니까?”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조선에서는 혼인하지 못한 남녀를 관청에서 나서서 짝을 찾아준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만, 유럽에서는 그러지는 않습니다. 본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놓아두지요.”
“허허, 그런 대학자의 후손이 끊어지게 된다니. 참으로 아까운 일이로고….”
이이명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안타까운지 머리에 쓴 사모가 부르르 떨리고 수염이 천천히 흔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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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는 베르사유에서 그랬듯이 영국 귀족이나 관료들과 만나며 친분을 다졌다. 가끔은 사냥도 나갔다. 다만 영국식 여우사냥은 사냥 같지도 않은 것이 영 재미가 없었다.
이렇듯 별다른 문제 없이 체류하고 있었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프랑스에서처럼 자유롭게 성당을 찾아 미사를 드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영국에서 가톨릭은 법으로 철저히 금지되어 런던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성당도, 미사를 주관할 성직자도 없었다.
진위사 일행에는 디에고와 도로테아 말고도 스페인인과 한인을 합쳐 약 스무 명에 달하는 천주교도가 있었다. 두 달로 예정한 영국 체류 중에 미사를 한 번도 보지 않을 수는 없으니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이들은 디에고가 술루에서 데려온 고해신부가 주관해서 매일 아침 숙소 거실에서 간단히 미사를 거행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영국인들도 외교사절인 디에고가 숙소인 저택 안에서 드리는 미사에 관해서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사가 평화롭게 진행되는 중에 사건이 생겼다. 어느 날 저녁, 방문하겠다고 미리 약속하지도 않은 불청객이 문을 두드렸다. 시종이 나가보니 왠 낯선 사내가 면회를 청했다. 딱히 바쁜 일이 없던 디에고는 호기심에 면회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대는 누군데 내게 만나달라고 청했는가?”
디에고의 질문을 받은 그 사내는 질문에 답하기는커녕 대뜸 깜짝 놀랄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고해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고해신부를 데려오셨겠지요? 요즘 영국에서는 가톨릭이 금지된데다 성직자도 모두 추방되어 고해성사를 드리고 싶어도 제대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야 당연히 데려왔지만….”
디에고가 잠시 당황했다. 자신은 개인적으로 여행하느라 영국에 온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황을 대신해서 외교 사절로 찾아온 처지다. 반쯤은 반역자 취급을 받는 가톨릭 신자들과 연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부탁입니다, 대공 전하. 부디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보게 해주십시오! 사악한 신교도 놈들이 모든 교회를 파괴하고 성직자를 추방했던 탓에 지난 18년 동안 단 한 번도 신부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고해하지 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그 기회를 주십시오.”
“허허, 이거 참….”
디에고가 갈등에 빠졌다. 눈앞에 무릎을 꿇은 가엾은 사내에게 같은 교우로써 동정심이 솟았다.
사내는 18년 만에 정식으로 고해성사를 하고 성찬식까지 치른 뒤 기쁨에 차서 돌아갔다. 그건 좋았다. 문제는 그 사건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제 아내와 딸입니다. 딸애는 태어났을 때 세례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제발 신부님의 손으로 정식으로 영세를 주십시오.”
사내는 가톨릭 의례를 정식으로 치르지 못했다면서 자기 가족까지 데려왔다. 일단 열어준 문을 다시 닫기는 쉽지 않았고, 사내가 데려오는 사람 숫자는 조금씩 늘어났다.
디에고는 지금이라도 중단해야 하는 게 아닐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도로테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들을 동정해달라고 호소했다.
“저분들에게는 일생에 마지막으로 신부님을 뵙는 기회일 수도 있어요. 설사 영국 정부가 적발한다고 해도 우리를 투옥하거나 처형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디에고, 그분들을 조금만 더 받아주세요. 조금만 더….”
고해신부인 후안 마르틴 신부에 이르러서야 두말할 것도 없다. 아예 영국인으로 변복하고 몰래 빠져나가 임종을 앞둔 신자의 집을 찾아가서 종부성사를 해주고 오는 지경이다. 차마 디에고로서도 그 열의를 막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법을 어기는 일들이 끝까지 마음대로 될 리 없다. 진위사 일행이 런던에 도착한 지 정확히 한 달이 되던 날, 영국 정부에서 디에고에게 공식적으로 경고장을 보냈다.
『술루 대공께서 최근 접촉하시는 이들 중에 우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반역자들이 섞여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들은 신의 뜻으로 정당하게 즉위하신 국왕 폐하의 권위를 부정하고 참칭자에게 동조하는 이들로, 절대로 동조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에 정중하게 부탁드리니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자를 저택에 들이지 말아주십시오. 또한 대동하신 가톨릭 사제가 우리 왕국 국민들에게 행하는 성사도 중단하여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는 우리 국법을 어기는 행위로, 위반 시 추방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영국 정부의 통보에 따르면 처음 디에고를 찾아와서 고해성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던 그 사내가 바로 자코바이트였다. 그리고 그가 나중에 데려온 사내들도 대부분 자코바이트였다. 디에고로서는 한동안 영국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열어주었던 문을 다시 닫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