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322
3부 4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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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만찬은 살풍경하게 끝났다. 후작은 고귀한 칼레하 후작가의 핏줄을 받은 계집아이를 술루 같은 야만적인 나라에서 자라게 할 수 없다면서 핏대를 세웠고, 마땅히 주님의 은총이 내린 땅인 마드리드로 데려와 살게 해야 한다고 했다.
도로테아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술루에도 성당과 수도원이 들어섰으며 세부에서 건너온 스페인 이민도 천 명이 넘는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후작은 막무가내였다.
“대공, 서재에 가서 우리끼리 따로 한 잔 어떠시겠습니까?”
다른 가족들이 음식에 입도 안 대는 동안에 혼자 유유히 식사를 마친 펠리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고는 접시만 쳐다보고 있던 디에고에게 자기와 함께 나가자고 제안했다.
“좋소이다.”
후작이 지껄이는 망언에 아무 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있던 디에고가 선뜻 자리에서 일어섰다. 펠리페가 빠져나갈 길을 열어줬으니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디에고가 그동안 침묵했던 건 혹시 입을 열었다가는 후작에게 하느님도 용서하시지 않을 폭언을 퍼붓거나 칼을 뽑고 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빠져나가는 게 훨씬 나았다.
“담배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대공?”
“괜찮습니다. 저는 흡연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혼자 실례하겠습니다.”
하인이 파이프에 불을 붙이자 펠리페가 독한 담배 연기를 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동생인 도로테아와 쌍을 이룰 만큼 잘생긴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언제나 거만하고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을 업신여기던 과거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디에고를 대하는 태도도 깍듯했다.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요즘 제정신이 아니세요.”
후작은 디에고가 도로테아를 데려간 일을 인생 최대의 굴욕으로 여겼다. 딸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사생아 따위’에게 딸을 빼앗긴 사실을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공이 여기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래도 정신줄을 잡고 계셨소만…국왕 폐하의 어전에서 굴욕을 당하는 바람에 결정적으로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이제는 발광까지 하신 모양입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금 대공을 원망하는 건 아니니까.”
후작은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몇 번이나 미쳐 날뛰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에서 나와서는 디에고와 도로테아를 만찬에 초대하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다른 가족들은 마침내 후작이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생각했다. 펠리페 한 사람만 제외하고 말이다.
“내일 당장 하인들을 시켜 아버지를 고향에 있는 수도원에 보낼 생각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머니도 반대하지 않으시겠지요.”
“수도원이라고요?”
“저런 망언을 하시는 걸 보면 노망이 나신 게 분명하니 어떻게든 조치해야지요. 혹시라도 주님의 은총으로 제정신이 돌아온다면 다행이고, 안 된다면 제정신이 돌아오실 때까지 그 안에 계시면서 보살핌을 받으셔야겠지요.”
“후작님이 하신 말씀이 사전에 가족들과 논의한 게 아니란 말입니까?”
디에고가 의심스러운 태도로 묻자 펠리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논의를 하실 상태로 보입니까? 제 맏아들인 페드로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습니다. 머나먼 술루에서 사촌누이를 데려다가 결혼해야 할 만큼 못난 아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펠리페는 부친의 경거망동에 머리를 내저었다. 자기도 옛날에는 누이동생과 디에고 사이 관계를 반대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면서 말이다. 디에고는 동방에서 공을 세워 지금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도로테아를 아내로 맞기에 충분한 사람임을 입증했다. 왜 거부하겠는가.
“저와 어머님은 대공께 호의적입니다. 정신 나간 부친이 마구 토해낸 헛소리 따위는 부디 잊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로, 술루로 돌아가실 때 제 둘째 아들 곤살로를 데려가시지요. 대공처럼 뛰어난 군인은 아니지만, 한 사람 몫은 할 겁니다.”
“고맙소이다. 생각해보지요.”
도로테아의 조카라면 남들보다는 더 믿을 수 있다. 그리고 펠리페는 디에고에게는 거만한 명문가의 후계자였지만 도로테아에게는 무척이나 자상한 오빠였다. 이미 결투 상대들을 몇 명이나 침대에 눕힌 디에고와 결투하려고 했던 것도 그만큼 동생을 아꼈기 때문이었다.
빌리다리아스 후작 저택 ? 지금은 외숙부 안토니오가 후작이므로 ? 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 남편의 눈치를 살피던 도로테아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디에고.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하실 줄은….”
“괜찮소. 그런 분인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디에고가 이 사실을 국왕에게 가서 고한다면, 왕궁이 발칵 뒤집히리라. 자기가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아무리 가족만 있는 사석이라고는 하지만 칼레하 후작이 그따위 소리를 했다면 호세 페르난도 1세도 분격할 게 뻔하다.
후작을 처형하지야 않으리라. 디에고도 들었지만, 호세 페르난도 1세는 칼레하 후작 같은 귀족을 쉽게 처형할 만한 힘은 아직 없다. 하지만 정신이상자로 취급해서 작위를 박탈하고 수도원에 처넣는 정도 처벌은 할 수 있을 거다. 바로 펠리페가 약속한 대로 말이다.
“후작께서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신 듯하오. 당신 오빠가 말하기를 후작님을 수도원에 보내서 주님의 힘으로 치유되기를 빌어보겠다고 하니, 그쪽에 맡겨봅시다.”
“고마워요, 디에고.”
처남인 펠리페가 보인 성의를 봐서 칼레하 후작이 오늘 저녁에 내뱉은 망언은 공론화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결과가 같을 거라면, 세상에 파란을 일으키고 모두 망신을 당하기보다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여기서 후작이 한 말을 들은 사람은 칼레하 후작 일가와 디에고, 도로테아뿐이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른다.
“우리 일이 어찌 마무리되었는지 궁금해하실 테니, 폐하께는 본국에 돌아간 뒤에 간단히 말씀드립시다. 후작님은 노망이 들어 제정신이 아니더라고 말이오.”
그 보고를 할 때는 디에고 자신의 감정도 가라앉으리라. 어쩌면 그때 보고를 받을 부황은 ‘외손녀를 스페인으로 보내라’라는 후작의 말을 혈육을 가까이에 두고 싶은 조부의 정으로 단순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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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도사 백작가는 의외로 늦게 디에고를 초대했다. 디에고야 초대해주기만 했다면 그 어떤 초대보다 멘도사 백작의 초대에 먼저 응했겠지만, 백작은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이번 스페인 방문에서 성과를 얻기 위해서 꼭 방문해야 할 유력 귀족과 고관들의 집부터 한 바퀴 죽 돌고 나서야 멘도사 백작의 초대장이 왔다. 디에고는 기꺼운 마음으로 응했다.
“30년 전부터 너를 여기 받아들이고 싶었단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지.”
어머니 이사벨이 현관에서 아들 부부를 맞이했다. 그녀는 이 저녁을 위해 사흘 전에 먼저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습니다, 어머니. 그러실 수 없었던 사정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멘도사 백작도 나와 있었다. 인사를 주고받은 일행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칼레하 후작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시다니, 슬픈 일이로군.”
“갑자기 그렇게 되었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어떡하겠습니까.”
칼레하 후작은 사흘 전에 강제로 마차에 실려 가문의 본향인 부르고스로 보내졌다. 이미 후작의 권위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통하지 않았다. 아들인 펠리페는 ‘제정신이 아닌’ 부친이 뭐라고 떠들건 묵살하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궁정에서는 골치 아픈 존재였던 후작이 사라지자 다들 후련해하는 분위기였다. 어전에서 디에고와 화해했다고는 하지만, 그 괴팍한 성질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니 수도에서 사라지는 편이 나은 거다. 국왕 앞에서 사위와 화해한 그 시점 이후로 후작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주님께서 가엾은 후작에게 은총을 베푸시기를.”
멘도사 백작이 가볍게 성호를 그었다. 후작과 딱히 깊은 친분을 쌓지는 않았지만, 불우한 일이 생겼다는데 인간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품는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불쾌한 화제를 계속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식탁에서의 화제는 곧바로 이부형 디에고를 따라 동방으로 떠날 청년들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이 애가 둘째 프란치스코, 얘가 셋째 루이스요. 조카들은 차례대로 미구엘, 라파엘, 호세, 로드리고고.”
집에 남게 될 맏이 이냐시오는 동생들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장남이 집에 남는 건 당연한 일이기에 다들 당연하게 여겼지만, 본인은 어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백작을 통해서 들었겠지만, 술루 공국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힘들 수 있네. 적인 모로족은 완강하고 날씨는 덥고 습하지. 그래도 다들 나와 함께 동방으로 건너갈 생각이 있나?”
“물론입니다, 대공 전하.”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살에 걸친 여섯 청년은 입을 모아 동방으로 떠날 의사를 표했다. 이교도와 싸워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디에고가 보인 선례에 따라 지위와 부를 손에 넣고 싶어 했다. 본국에서는 이제 그런 기회가 없다. 국가에 이교도와 싸울 여력이 없다.
“저희도 충분한 공을 세운다면 대공 전하처럼 조선 임금으로부터 작위와 영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전하처럼 대공이야 당연히 안 되겠지만, 남작이나 자작 정도라면…?”
“조선에서는 백작이 가장 낮은 작위라네. 하지만 작위를 받는 건 매우 힘든 일이고, 혹시 받더라도 세습이 안 되지. 게다가 본질적으로 명예직이라 작위에 붙는 영지도 따로 없다네.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난 아주 특별한 사례야. 낮은 작위라면 내가 줄 수도 있네만.”
젊은이들이 잠시 웅성거렸다. 그래서 디에고가 대한의 포상 제도에 관한 추가적인 설명을 했다. 작위에 영지가 따라오지는 않지만, 공적에 따라 승진하면 훈장과 함께 급여가 오르고, 특별한 포상이 더해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다만 그 포상은 영지가 아니라 조선 정부가 평생 지급하는 연금일 수도 있네. 자네들이 직접 토지를 관리하는 것보다는 연금 쪽이 훨씬 편한 게 장점이지.”
대한에서도 옛날에는 공신전이라고 하여 공신에게는 토지를 주었다. 제도가 몇 번 바뀌어 지금은 토지가 아니라 현금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원주민 반군 토벌에 참여한 장병들에게는 토지를 주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고 있다. 개척을 촉진하기 위해서다.
이미 필리핀에서 종군한 숱한 군사들이 토지와 노비를 받아서 필리핀에 정착했다. 디에고 휘하에서 참전한 다국적 혼성군 장병들도 마찬가지다. 이 청년들도 선택하기에 따라서는 그 길을 걸을 수도 있다. 물론 토지를 선택하면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건 포기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젊습니다. 여정 끝에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벌써 본국에 돌아올 생각부터 하겠습니까? 공적을 세우면 그에 따른 보상이 나온다니, 그거면 충분합니다.”
멘도사 백작가에서 모인 젊은이들은 입을 모아 동방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홍희동전 속에 나오는 디에고의 부친, 알바레스 후작 로드리고처럼 아름다운 조선 아가씨를 맞이하여 가족을 이루겠다는 꿈을 꾸는 이들도 있었다.
“선례가 많이 있으니 어렵지는 않네. 내가 조선에서 데려온 장교 중에 일부도 펠리페 2세 시절에 조선에 건너간 군인들의 후손이고, 대공비가 조선에서 양녀로 들어간 가문도 스페인 혼혈 혈통이거든.”
심지어 디에고가 출발하던 시점에 삼군부 도총사, 즉 전 대한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직에 있던 무관도 스페인계 혼혈인 장희재였다. 부계가 아니라 모계만 스페인계지만 말이다.
멘도사 가문 청년들에게서 쏟아지는 질문을 받으며, 디에고는 아무래도 귀로에는 배가 좀 비좁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섯 명이 제각기 하인을 서너 명씩 데려가겠다고 하는 데다, 말라가에 있는 외숙부들이 모아주겠다는 인원도 있기 때문이다.
양쪽 인원을 합치면 적어도 수십 명은 되리라. 과연 그 많은 숫자를 변재천에 다 태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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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는 겨울이 전혀 겨울 같지 않은 도시다. 물론 그건 대한에서 온 디에고 일행에게 그렇다는 이야기다. 스페인인들에게는 겨울은 겨울이다.
어쨌든 겨울은 겨울인지라, 항해에 나서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디에고는 1720년의 봄이 올 때까지는 마드리드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2월까지 마드리드에 있다가 3월에 출발, 4월에 말라가를 떠나 귀로에 오른다.
“아직 두 달은 더 네 얼굴을 볼 수 있겠구나, 디에고.”
“물론이죠, 어머니.”
크리스마스 미사도 빌라다리아스 후작가와 멘도사 백작가가 함께 보러 갔다. 어차피 양쪽 집안은 혼인으로 맺어진 사이였으니까.
칼레하 후작가에도 자주 왕래했다. 후작이 시골로 쫓겨나 수도원에 감금되었으니 이제 두 사람을 보고 눈알을 부라리거나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옛날 도로테아가 쓰던 모습 그대로 보존된 도로테아의 방에서 하룻밤 자고 오기도 했다.
옛날 이덕형의 첩이었던 정부인 희씨도 그랬다지만, 디에고 부부도 갈 수 있는 곳, 볼 수 있는 것이라면 한 군데라도 더 가고 하나라도 더 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스페인과 이별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랜만일세, 돈 하이메.”
“다 나은지 오래라네, 돈 디에고. 23년 만에 한 번 더 붙어 볼까?”
“됐어, 그만두세. 피차 처자식도 있는데 필요도 없는 객기를 부리면 되겠나.”
옛날에 결투장에서 칼을 맞댄 적이 있는 상대들도 몇 만났다. 디에고 때문에 왼팔을 아예 못 쓰게 된 후안은 디에고와 대면하려 하지 않았지만, 다른 상대들은 별 반감 없이 선선히 디에고를 만나 호의를 표했다.
“돈 디에고, 자네에게 험하게 굴어서 미안하네. 그때는 우리도 어렸지. 그래서 자네 진짜 실력을 못 알아보았네.”
“그래도 자네가 지금처럼 출세한 것도 다 우리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자네한테 험하게 굴지 않았으면 동방으로 떠나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아이고, 참으로 고맙기도 하네.”
주변에서 사생아라고 줄기차게 모욕받지 않았으면 스페인을 떠나지 않았으리라. 그 점을 고려하면 친구들의 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기에 디에고는 슬그머니 웃어넘겼다. 그리고 이제 친구로 바뀐 옛 원수들과 술잔을 나누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마드리드에서 추억을 쌓고 있는 디에고에게 편지가 한 통 왔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보낸 편지 안에는 디에고가 내년에 귀국할 때, 프랑스 측에서 배를 한 척 딸려 보내고 싶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