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328
3부 446화
– 8 –
분명히 말해두지만, 지금 전국에 내린 금주령은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니 곡식이나 저류(藷類) – 감자(담저)와 고구마(감저)를 가리키는 통칭 ? 로 술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다. 식량이 아닌 당밀이나 과일로 만든 술, 해외에서 들어오는 술은 합법이다. 주세가 붙을 뿐.
고로 너무 떠들썩하게 마시지만 않는다면 친한 이들과 마주 앉아 간단하게 술잔을 나누는 정도는 나쁠 게 없다. 그래서 잠시 외출을 나왔다.
“그대가 내 곁을 떠나고 없으니 그 빈자리가 허전하기 짝이 없다. 자, 내가 주는 술이라도 한잔 받으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정호찬이 두 손을 내밀어 공손하게 내가 따라주는 성모주를 받았다. 이번 생에서 내 곁에 머물던 최고의 충신, 정말 내 반쪽과도 같았던 이가 정호찬이다. 그가 12년 동안 앉아 있던 오군대총관 직책을 내려놓고 물러나서 야인이 된 지도 어느새 1년이 다 되었다.
“폐하, 신은 이제 늙고 쇠약하여 직책에 따른 의무를 더 수행하기 어렵사옵니다. 청하건대 부디 관복을 벗고 물러나 백두(白頭)가 되어 초야에 묻혀 편히 지내게 하소서.”
정호찬은 연이가 죽고 부황이 즉위한 해인 경인년(1650)에 태어났다. 고희가 되었으니까 물러나고 싶다는 건 무리한 소망은 아니었지만, 나는 보내기가 아쉬웠다.
“그대의 나이가 벌써 일흔이라 하나 아직 물러날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 옛날 조나라의 염파는 팔순이 되어서도 한 끼에 밥 한 말과 고기 열 근을 먹었다 하였다. 그대도 지금까지 머리도 빠지지 않고 치아도 튼튼하니, 그대가 계속 내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노라.”
국무총리대신 최석정도 올해로 일흔다섯이 되었는데 아직도 관직에 있지 않으냐는 설득이 덧붙었다. 하지만 정호찬은 침착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국무총리대신이야 문서로 일하는 문관이니 나이가 좀 많더라도 괜찮겠지요. 하지만 신은 무관입니다. 말과 칼을 제대로 다룰 기력조차 없다면 어찌 국록을 먹겠나이까. 신은 기력이 쇠하여 이제 쌀 한 말은커녕 한 되도 먹기 어려우니, 부디 사직을 받아주소서.”
“허허, 그대가 참으로 나를 안타깝게 하는구나.”
“나와 40년을 함께 한 이는 이제 그대뿐이니….”
정호찬은 나와 함께 세계를 돈 견서사 일행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다. 내 스승인 이형준은 10여 년 전에 죽었고, 의관이던 이진원도 죽었다. 통변이던 이홍석도 이진원보다 조금 뒤에 죽었다. 무관 콤비였던 홍상훈, 김종건도 죽었다. 하인들도 셋 다 죽었다.
아라미츠는 아직 살아있다. 자기는 대한에 뼈를 묻겠다며, 마포성당에서 여전히 사목활동 중이다. 하지만 아라미츠는 원래 정식 견서사가 아니라 일종의…객원 멤버였으니까 말이다. 정식으로 8차 견서사에 속했던 내 신하 중에는 이제 정호찬 혼자 남았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과연 선황께서 무슨 의도로 그대를 내게 익위사로 붙여주셨는지 말이다. 그대도 여전히 모르겠는가?”
정호찬은 정말 내 반쪽처럼 살았다. 촉망받는 무관이었는데 난데없이 익위사로 배치되어 ‘내’ 호위를 맡게 되면서 별 고생을 다 했다. 말하기도 싫지만, 진짜 성친왕은 차마 언급도 하기 싫은 망나니였으니 말이다. 지금의 지위가 정호찬에게 과연 충분한 보상이 되려나.
지금 이 질문은 지난 40년 동안 몇 번씩이나 던져봤었다. 하지만 정호찬은 매번 웃어넘길 뿐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신이 하늘에서 온 신선이라도 만나 50년 전으로 돌아가 보지 않는 한에는, 연가제께서 신을 폐하를 모시는 익위사로 발탁하신 이유를 알 수 없을 듯합니다.”
하늘에서 온 신선이라니, 천녀 생각나네. 그 망할 년은 그 문제의 답을 알고 있을까?
“폐하, 서운합니다. 어찌 폐하의 곁에서 청춘을 불태운 신하로 폐하 곁에 남은 사람이 정 대감 하나뿐입니까? 신이 비록 제물포에서부터 폐하를 모시지는 못하였으나, 제 발로 멀리 바다를 건너 폐하 밑에서 봉직하였으니 어찌 폐하와의 인연이 가볍겠습니까.”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으니, 대한북병사가 된 권훤이 옆에 앉아서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권훤도 나를 모신 기간이 꽤 길다. 정호찬처럼 40년은 아니어도 30년은 거의 된다. 미주에서 처음 연을 맺었으니까.
“그리 따지면 여기 백위영장을 비롯한 루스인 6형제가 그대보다 10년쯤 선임 아닌가?”
“누가 아니라 하였습니까. 신도 일찍이 폐하를 따랐음을 잊지 말아 주십사 할 뿐이지요.”
무과를 거쳐서 정석대로 정승의 반열에 오르려면 30년은 걸린다고 했었던가. 전란이 있는 곳에 뛰어들어서 조상인 권율처럼 단박에 출세하겠다던 그 청년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권훤은 나보다 여섯 살 아래다. 견서사 일행이 모두 나보다 한참 연상이었던 걸 생각하면 동생 같은 존재다. 성친왕은 막내라 동생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동안 내가 권훤을 동생처럼 생각하고 은근히 예뻐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세월이 흐르긴 흘렀사옵니다. 아파치를 토벌하러 간다고 말을 달리던 때가 어제 같은데 말이옵니다.”
“그때 북병사 대감은 천둥벌거숭이 같은 애송이셨습지요.”
보리스가 옆에서 변죽을 올렸다. 권훤도 부정할 생각은 없는지 싱글거리며 웃기만 했다.
“그 천둥벌거숭이가 이제 막내며느리를 볼 예정이니 어찌 시간이 화살같이 빠르다고 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축하할 일이지.”
권훤과 부인 이씨는 2남 2녀를 키워냈다. 권훤이 공적 세우러 다닌다고 집을 비우는 날이 허다했지만, 그래도 ‘할 건 다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에 혼인하는 늦둥이 막내아들은 갑신년(1704)생으로, 부친과 기질이 좀 비슷하다.
“사실 신은 아직도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대답지 않구먼. 내 그대와의 인연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주선한 혼처인데, 설마 지금에 와서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 아니옵니다. 폐하. 다만 주변의 구설수가 좀….”
“배 아픈 놈들의 헛소리 따위를 신경 쓰다니. 그것도 자네답지 않구먼.”
권훤의 막내며느릿감은…사실 디에고의 딸 이사벨라다. 내가 신뢰할 수 있고, 술루 왕실을 붙들어둘 수 있으며, 충분한 격을 갖춘 집안으로 고려하다가 결정했다.
다만 권훤은 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였다. 도로테아가 처음 대한에 와서 기댈 곳이 없을 때, 자기 처가에서 돌봐줬기 때문이다. 즉, 도로테아는 처가인 이씨 집안의 수양딸 같은 존재였다. 이를테면 일종의 피가 안 섞인 유사 근친관계라고나 할까.
이씨 집안 호적에 들인 건 아니니까 법적으로는 분명히 남이다. 그래도 ‘수양딸로 며느리 삼는다’라는 부정적인 속담이 있을 정도니, 구설수가 돌 만은 한 일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수군대는 놈들, 태반은 부러워서 시샘하는 걸 텐데.
그리고 상대편인 디에고나 도로테아는 도리어 이 혼사를 환영했다. 둘 다 유럽 출신이다 보니 진짜로 피가 섞인 사촌이라고 해도 혼인에 별 거부감이 없을뿐더러, 기왕 여기서 딸의 혼처를 찾을 거라면 잘 아는 사이인 권훤의 집안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네 막내아들이 천주교도이기도 했고.”
“그야 자식 중 하나는 신자로 키우기로 처와 약조했으니까요.”
본래 천주교도는 천주교도끼리만 결혼하고 자기 자식도 천주교도로 키워야 한다. 하지만 비신자 사대부들은 천주교도 아내를 맞더라도 개종 따위 거의 하지 않는다. 자식들도 딸은 몰라도 아들은 거의 비신자로 키운다. 제사도 지내야 하고 관직 생활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훤은 혼인할 때 아내 이씨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 장남은 안되지만 둘째 이하 아들 중 하나는 꼭 모친의 신앙에 따라 신자로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그것도 다 안사람하고 사이가 좋으니까 하는 약속이지만 말이다.
“폐하, 저는 다른 점에서 세월이 흘렀다는 게 느껴집니다.”
갑자기 정호찬이 한숨을 푹 쉬었다. 호기심이 생겨서 반문했다.
“대총관은 뭐를 보고 세월을 느끼기에 그리 탄식하는가?”
“북병사네 이사벨라 말고 저희 집 이사벨라 때문에 말입니다.”
정호찬이 손을 들어 문밖을 가리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호찬의 본처가 11년 전에 죽은 탓에, 지금은 미주에서 들인 첩인 이사벨라가 이 집 안주인인 셈이다.
“버들가지 같던 허리는 통나무가 되었고 꾀꼬리 같던 목소리는 당나귀가 되었으며, 갓 딴 대추를 만지듯 매끈하던 얼굴은 말린 대추처럼 주름졌으니 어찌 지나간 긴 세월이 무상하지 않겠습니까? 아, 세월이 흘렀다는 소리지 저 사람이 못나졌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이 사람, 싱겁기는.”
둘러앉아 있던 이들 모두 폭소를 터트렸다. 미인 아내와 혼인했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보며 인생이 무상함을 느끼는 건 넷 다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이사벨라만이 아니다. 장안 제일가는 미녀였던 보리스의 처 장옥정도, 권훤의 처 이씨도, 상희도 모두 50이 되어간다. 이씨-상희-장옥정 순서로 1살씩 나이가 어리다.
나이 얘기가 나왔으니 짚자면, 대궐에서 제일 어른은 올해 만으로 64세인 내 형수 태후 양씨다. 4년 전에 환갑을 치를 때는 마침 그 해에 영이가 태어난데다가 풍년이 들기도 해서 정말로 성대한 잔치가 열렸었다. 큰마음 먹고 대해우, 즉 스텔러바다소도 잡았을 정도니까.
“솔직히 말씀해보십시오. 폐하께서 그 고기를 드시고 싶으셨던 건 아니었습니까?”
“어허, 아닐세. 어디까지나 효를 바치기 위함이었다네.”
임금이 직접 기우제를 지낼 때나 대해우를 잡을 수 있다지만, 내가 기우제 지내다가 죽은 뒤로 직접 기우제를 지낸 임금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경신대기근 때 부황조차 환구단에 가서 친행기우를 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잡지 말라는 거나 같은 소리다.
하지만 그 고기 맛이 정말 궁금하기는 했다. 그래서 태후의 환갑잔치에 쓴다는 명분으로 딱 한 마리만 잡아 오게 했다. 먹어봤더니 맛은…정말 좋기는 했다. 그런데 무슨 천상의 맛 같은 건 아니었다. 그냥 소금에 잘 절인 기름진 쇠고기와 비슷했다.
잔칫상에 앉은 준이가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놈, 혹시 말로 형용하기 힘든 무슨 신기한 맛이라도 날 줄 알았나? 고기가 결국 다 고기지.
어쨌든, 굳이 그 먼 데서 일부러 구해다 먹어야 할 만한 맛은 아니었다. 거기서 그거만큼 맛있는 고기가 없으니까 그 무인도에서는 맛있게 느껴질 뿐이겠지.
내가 환갑, 아니 더 늙어서 고희(古稀, 70세), 아니 상수(上壽, 100세)까지 맞이하더라도 굳이 대해우를 잡아다 먹을 필요는 없겠다. 앞으로도 대해우 사냥은 절대 허용하지 않도록 놓아두어야겠다.
“그보다, 순비께서는 요즘 좀 어떠신지요.”
정호찬이 웃음기 가신 얼굴로 조용하게 물었다. 정호찬에게는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데다 무척 오래 함께 지냈던 올렝카가 상희보다 훨씬 친근했고, 예전부터 꽤 정성껏 챙기곤 했다. 그 태도를 알기에 나도 진지하게 답했다.
“자리에 누운 지 벌써 2년이지 않은가. 그냥저냥 괜찮네. 중전이 하는 말에 따르면 크게 아픈 건 아닌데 몸이 많이 허해졌다고 하더군.”
올렝카는 나보다 한 살 아래다. 만으로 55세…내명부에서 황태후 다음으로 나이가 많다. 큰 병이 있는 건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몸이 안 좋아지는 게 무리는 아니다.
아무래도 헤어질 날이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 훨씬 나이가 많은 태후도 건강하고 칠순이 다 된 현왕도 건강체 그 자체인데 왜 올렝카만 몸이 아픈 걸까.
골골거리면서라도 오래 같이 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까 봐 걱정이다. 정호찬이 조용히 술병을 내밀어 내 잔에 술을 부었다. 나도 말없이 그대로 들이켰다.
– 9 –
임금은 즉위한 뒤에 가뭄 대책과 남궐 건축에 드는 비용 탓에 기존 궁궐에서는 새 전각을 거의 짓지 않았다. 유일하게 새로 지은 전각이 순비 소씨의 처소인 연수당(戀秀堂)이었다.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에 기와를 얹은 연수당은 경복궁 안에서 유일하게 유럽식으로 꾸며진 전각이다. 도성에 있는 궁궐 전체로 대상을 넓히면 창경궁에 있는 양화당에 이어 두 번째로 들어선 유럽식 건물이다.
“사실 그래서 제게는 여기가 가장 편한 공간입니다. 조용히 기도도 드릴 수 있고요.”
“공주께 편안함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침대에 누운 올렝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병문안을 온 이사벨라는 그녀에게는 손녀뻘이라, 무척 반가운 손님이었다. 그런데 그저 항렬 때문에 손녀뻘인 건 아니다.
과거 디에고가 대한에 막 건너와서 기댈 곳이 없을 때, 아들이 없어 허전하던 올렝카가 디에고를 수양아들로 받아들여 여러모로 돌보아 주었다.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사벨라도 올렝카를 할머니로 여기고 있다. 물론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는 건 안다.
“대궐 안에서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지요. 그래서 신앙을 가진 궁녀와 내관들은 모두 여기 와서 기도하곤 한답니다. 미사도 보고, 고해성사도 하지요.”
여기까지 드나들 수 있는 신부는 딱 한 사람뿐이다. 아라미츠가 매주 일요일에 찾아와서 침대에 누운 올렝카 앞에서 미사를 거행해준다. 올렝카가 데리고 있는 폴란드 출신 궁녀들, 그리고 십여 명쯤 되는 한인 궁녀들도 함께 이 미사에 참례한다.
“공주께서는 가을에 권씨 집안 자제와 혼인하신다지요?”
“네. 아직 직접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요.”
얼굴은 본 적이 있다. 도성에 와서 지내는 곳이 권훤의 처가인 이종근의 집이다 보니 안 마주칠 수가 없었다. 집에서도, 미사를 보러 간 마포성당에서도 몇 차례 마주쳤다. 하지만 차마 말은 걸지 못했다.
“어때요, 신랑감이 마음에 드시나요? 그분 아버지는 저도 좀 알아요. 훌륭한 군인이죠.”
“잘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외할아버지 격인 이종근은 이사벨라의 신랑이 될 친외손자 ? 요한이라고 했다 ? 가 어떤 성품인지 알려주기를 무척 힘들어했다. 무척 용감하고 모험심이 투철한 청년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성실한 학자 유형인 그 형과는 다르다고 했다.
“그래도 약간…위험할 것 같은 냄새가 풍기긴 했어요. 나쁜 사람이라서 위험한 게 아니라, 아…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이사벨라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허둥댔다. 그 모습을 보던 올렝카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냄새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이 나네요. 공주께서 처음 도성에 오셨을 때, 스페인 남자들은 몸에서 진한 고기와 향료 냄새가 나는데 한인 남자들은 마늘 냄새가 풍긴다고 하셨었지요. 그때 너무 웃어서 미안했어요.”
“그걸 기억하시다니요!”
두 여자는 얼굴을 붉히면서 웃었다. 뒤이어 혼인한 뒤에 어디서 살고 싶으냐는 이야기가 나오자 이사벨라는 서슴없이 한양에 살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과 떨어지는 건 아쉽지만, 술루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요. 스페인인들끼리 하는 사교활동 정도는 있지만, 한양에서처럼 연극이나 음악을 즐기기는 힘들어요.”
그녀도 열일곱 살이다. 이쯤 나이가 들면 부모와 떨어져서 자기 인생을 사는 게 두렵지는 않은 법이다. 어머니 도로테아도 열여섯 살에 아버지와 함께 새 인생을 찾아서 부모를 떠나 동방으로 오지 않았던가. 올렝카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그 이야기를 나누는데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내의원에서 나온 여의가 보조를 맡은 의녀 한 사람을 데리고 검진을 하러 왔다. 낯익은 얼굴이 나타나자 두 사람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순비께 인사 올립니다. 바실공주께서도 와 계셨군요.”
“어서 와요, 민 의원.”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혜련이 올렝카의 맥을 짚고 이마에 손을 얹어 체온을 쟀다. 오늘 올렝카의 상태는 무척 좋은 편이었기에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이대로 정양하시면 되겠습니다. 참, 중전께서 오늘은 조금 늦으신다고 미안하다고 순비께 전해달라시더군요.”
“그렇게 매일 찾아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참….”
한때는 참 밉고 원망스러웠던 사람이다. 하지만 중전 민씨는 긴 세월에 걸쳐 참으로 진한 호의만 보여주었다. 올렝카도 무척 감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런 사람이 임금의 본처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