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358
3부 4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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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안남(베트남) 전체가 그렇게 잘 지내는 게 아니라 내가 광남국주로 봉한 완씨 정권이 지배하는 안남 남부 지역만이다.
「상국의 황실에서는 천자의 명이 제대로 서지 않고, 이로 인해 번왕들이 멋대로 군사를 움직여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세상이 평안하다 하겠습니까.」
광남국주 완복주가 내게 보낸 친서를 보면 지금 상황을 광남국 측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빤히 보인다. 한마디로 현 종주국인 서나라의 권위가 떨어진 기회를 이용해서 아주 신나게 독자성을 강화하고 있다.
「상국의 번왕들이 어찌나 무도하게 구는지, 본국에서는 심려가 큽니다. 저희 광남에서는 그래도 국경을 직접 맞대지 않은지라 피해가 없지만, 북쪽에 있는 북하에서는 수시로 산을 넘어 쳐들어오는 운남과 광서의 군사들 때문에 혹독한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북하(北河)는 하노이를 중심으로 베트남 북부를 지배하는 정씨 세력을 뜻한다.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은 교지국(交趾國)인데, 완복주가 이들을 지칭하면서 중국식이 아니라 베트남식 호칭을 굳이 사용한 걸 보면 중국과 따로 움직이는 독자성을 드러내고 싶은 듯하다.
「저희 폐하께서는 몇 번이나 성도에 서한을 보내서 황제께 제발 번왕들의 난폭한 행동을 억제해 달라고 청하셨으나, 저들은 도무지 억제할 줄을 모릅니다. 하는 행동을 보면 상국의 번왕이 아니라 적괴(賊魁)나 마찬가지이니 이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지금은 양력으로 1723년 2월이니까…후송이 서나라를 쳐서 형주를 빼앗은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그동안 몇 차례 있었던 반격 시도도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
형주를 상실한 탓에 서나라 황제 장원검의 권위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권위만 잃은 게 아니다. 휘하 번왕들을 견제할 군사력도 잃었다.
형주가 건재할 때, 형주 방면으로 들어오는 후송의 위협을 막는 건 형주왕의 역할이었다. 게다가 형주왕 장원정은 장원검의 친아우였으므로 장원검은 형주를 경계하는 일에 중앙군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중앙군은 예비대 노릇을 하면서 번왕들을 견제하면 족했다.
그런데 그 형주가 어처구니없이 무너져버렸다. 장원검은 하나뿐인 친동생을 차마 벌하지 못하고, 형주왕 대신 파주왕에 봉하고 백제성으로 보내 후송군을 막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정도로 장원검, 장원정 형제의 권위와 명성이 올라갈 리는 없었다.
게다가 형주군이 소멸했을 뿐 아니라 그 세력이 이제 적이 되었다. 이를 막으려면 백제성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형주 방면에서 가해지는 위협을 막으려면 중앙군을 붙박이로 투입해 놓아야 한다.
자연히 남쪽에 있는 네 번왕에 대한 통제가 약해졌다. 장원검은 번왕들이 왕위를 세습할 수 있도록 원하는 대로 세자를 책봉해주며 비위를 맞췄지만, 황제가 자기네 눈치를 본다는 사실을 깨달은 번왕들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사천 바로 남쪽에 붙었고, 형제 중 가장 막내인 귀주왕 장원락은 그래도 황제인 장원검의 눈치를 조금 살폈다. 하지만 장원검보다 손위인 운남왕이나 광동왕은 정말로 자기들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성도에 보내야 할 세공이 줄었다. 상도에 주재하는 우리 익문사 관원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운남왕과 광동왕, 광서왕은 기존에 보내던 것보다 절반 이하의 세공만 바쳤다.
두 번째로 군대를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번국인 노과(라오스)와 면전(미얀마), 안남 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직할령을 넓히고 약탈로 재물을 모으기 위한 의도적인 군사행동이다. 여기에는 운남왕 장원교와 광서왕 장원호가 주로 나섰다.
공격받은 번국들이 성도에 사자를 보내 항의할 수도 없다. 그 길도 두 번왕이 막았으니까 말이다. 성도에 있는 장원검도 소식은 들었으나 선뜻 손을 내밀지는 못하는 판국이다.
“육군대신. 혹시 서나라 승평제가 정녕 번왕들을 제압할 능력이 없는가?”
“광동왕은 좀 부담스럽겠으나, 운남이나 광서한테까지 질 정도로 서나라 관군이 약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군을 빼내 남으로 돌리는 상황이 부담일 뿐이지요.”
운남, 광서, 귀주 세 번국의 인구를 전부 합쳐도 사천 인구보다 적다. 장원검이 작정하고 밀어붙이면 셋 다 망할 수밖에 없다. 즉, 심재길이 말한 것처럼 지금 장원검은 참고 있는 거다. 내란을 벌였다가 그 틈을 노린 후송이 쳐들어오면 더 크게 망할지도 모르니까.
이런 서나라 상황 덕분에 가장 크게 콧노래를 부르는 자가 바로 광남국의 군주 완복주다. 내게 보낸 친서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티 나게 두드러진다.
「북쪽에 있는 북하국도 우리 형제인데, 형제가 도적을 맞아 고난을 겪는 모습을 보려니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우리 광남국은 소국이라 형제국의 고난을 보면서도 군사를 내어 도울 수도 없으니 그저 마음만 아파할 뿐입니다.」
캄보디아 땅을 뺏는 전쟁이나 참파가 일으킨 반란 진압에는 잘도 군대를 동원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정씨의 뒤통수를 후려치지 않는 진짜 이유는 그저 지금 정씨가 정말로 망한다면 다음에는 자기가 서나라 번왕들에게 공격받을까 봐 걱정해서일 텐데.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린 끝에 친서 말미에까지 가서 비로소 드러낸 결론은 철재 수출을 좀 늘려달라는 거였다. 중원 삼국은 자기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느라 무기 수요가 늘어 광남에 철재를 거의 내보내지 않는다. 우리도 철도 건설에 쓰느라 철재 수출을 줄였었다.
“광남국주가 이토록 예의를 갖추어 원하니, 공무부에서는 외수사에 할당하는 철재를 조금 더 늘려서 광남에 보내도록 하라. 경인선 공사도 끝났으니, 매년 20만 관 정도는 팔아도 될 것이다.”
20만 관이면 750톤에 해당한다. 내가 즉위한 직후인 신사년(1701)에 대한의 철재 생산량이 1년에 1만 톤가량이었는데, 20여 년이 흐른 지금은 1만 5천 톤으로 늘었다. 계미남변 때문에 무기 생산이 폭증하고, 조선업과 철도 사업 등에서 계속 철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이만한 생산량이면 베트남에 5% 정도 판다고 해도 별문제가 안 된다. 공무대신 이신규도 별 불만을 표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이쯤이면 확실히 안남 ? 중에서도 광남 ? 과 서나라 ? 황제 말고 번왕들 ? 는 다 자기들 마음대로 잘 산다고 할 수 있겠지. 적당히 현상을 유지하면서 후송한테 망하지 않을 만큼만 버텨주면 좋겠군.
– 11 –
올해도 또 가뭄이다. 가뭄이 벌써 4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가뭄이 있는 해마다 매번 일어나는 일이 올해도 또 일어났다.
“곡식을 운송하고 판매하는 일에서 농간을 부리는 장사치는 용서 없이 벌하라! 어찌 이게 근절이 안 된단 말인가?”
일꾼들에게 썩은 쌀로 급료를 주는 악덕 장사꾼을 내 손으로 잡아서 호되게 혼을 냈던 게 무종 때였던가, 장조 초기였던가. 수십 년 세월이 흐르고 보니 내 기억도 모호하다. 기억을 못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일은 아니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정말 말할 수 없이 상황이 좋아졌다. 해외에서 곡식을 들여오게 되었고 그 곡식을 분배하는 체계도 잘 갖춰졌다. 그래서 경신대기근이나 을병대기근 급으로 커다란 재앙이 닥치지 않는 한 굶어 죽는 사람도 거의 나오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분배 및 유통 과정에서 장난질을 치는 자는 잡고 잡고 또 잡아도 계속 나왔다. 역시 인간이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시도할 수 있는 그런 생물이다.
“가뭄이 든 것을 기화로 곡식에 겨와 모래를 섞은 자, 양을 재는 되를 속인 자, 섬을 물에 적셔 무게를 늘린 자, 창고에 곡식을 쌓아두면서도 장에 풀지 않은 자 등등은 모두 중벌을 가할 것이다. 조홀국에 전가사변하여 땀으로 죄를 갚게 함이 좋겠다.”
불법적인 상행위로 축적한 재산을 몽땅 몰수하는 거야 기본이다. 돈은 정직하게 벌어야지 어디 남을 속이고 해쳐서 돈을 벌려고 하는가. 겸사겸사 조홀국에서 필요한 인력도 조달할 수 있고 말이다.
지금 조홀국은 사람이라면 출신을 가리지 않고 받고 있다. 정글을 개간해 농토를 만들고 땅에서 주석을 캐며 일할 일손이 끝도 없이 필요한 까닭이다. 이주민 대부분은 대남도에서 정씨 집안이 모집한 사람들이지만, 본국과 일본에서도 조금씩은 건너간다.
조홀국왕 정명완과 내 양녀 의원공주는 그럭저럭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 따로 보내준 의원 덕분인지, 큰 병도 앓지 않았다. 앞으로도 건강해야 할 텐데.
“법무대신은 송방에도 경고하도록 하라. 송방 각 상단과 계약한 말단 상인 중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를 미연에 단속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연대책임을 묻겠다고 말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아무리 처벌을 강하게 해도 범죄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해야 범죄를 더 ‘줄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려니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온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겸 고개를 돌리고 내 뒤를 따라오는 백면나인 알렉산드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안 상궁. 중전은 오늘 몸이 좀 어떤가?”
표트르가 선물한 이 백면나인들이 궁궐에 들어온 것도 벌써 19년 전이다. 궁궐에 들어온 나인이 15년을 근무하면 상궁이 될 자격을 얻으므로, 25세가 되었을 때 방출된 사람 10여 명을 뺀 나머지는 모두 상궁이 되었다.
나인으로 지낼 때야 굳이 성이 필요하지 않지만, 상궁이 될 정도면 그래도 성은 있어야 한다. 러시아에서 쓰던 본래 성은 다른 궁인들이 발음하기 힘들다 보니 다들 적당한 한국식 성을 쓴다. 그래도 본래 성이나 이름과 되도록 비슷한 것을 고른다.
“괜찮으시옵니다, 폐하. 혹시 중궁전에 드실 생각이라면 바로 전갈을 보내 폐하를 맞이할 준비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한국식 궁정 예법에 따라 고개를 조아리는 알렉산드라를 보려니 지나간 세월이 새삼 아쉬워진다. 그 가녀린 미녀가 이렇게 건장한 중년 부인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역시 러시아 여자는 젊어서는 엘프, 나이가 들면 오○인 것인가.
“음, 그렇게 하여라.”
알렉산드라를 먼저 보내고 천천히 중궁전에 가면서 상희와 함께 즐길 이벤트를 생각했다. 올해까지 4년째 가뭄이라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동안 벼르고 별러왔던 숙원사업 한 가지는 드디어 끝냈기 때문이다. 이 통쾌한 기분을 마땅히 상희와 함께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 12 –
상희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내 얼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가 죽기 전에 완공하기는 했네?”
“내가 해낼 거라고 했잖아.”
용산 별궁, 남궐, 경희궁. 갖가지 이름으로 불리던 이 양식 궁전이 드디어 완성된 자태를 드러냈다. 옛날 상식대로라면 흉년에는 궁전 건축을 멈춰야겠지만, 백성들에게 일과 식량을 주는 취로사업으로서의 성격이 있었기에 계속 공사를 진행했다.
정말 오래 걸렸다. 여기 터를 마련한 때부터 따지면 거의 120년, 이번 생에서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한 시점부터 계산해도 20년 이상 걸렸다. 그나마도 작업이 너무 늦어졌던 탓에 궁궐 부지에 한동안 백위영 주둔지와 연병장을 두었을 정도다.
그래도 경희궁 건축이 같이 시작한 원각사 대탑보다는 빨리 끝났다. 그 탑은 지금도 한참 돌을 올리고 있고. 설계대로 완공하려면 한 10년은 더 걸리리라고 한다. 그놈의 탑, 영이가 장가갈 때쯤에나 완성되겠구나.
“혹시 이 궁궐도 홍제궁처럼 요새로 쓸 거야?”
“내가 건물마다 요새로 만드는 줄 알아. 이건 그냥 궁전이야. 3백 년쯤 뒤에는 박물관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걸 고려해서 설계하도록 은근슬쩍 압력은 넣었지만.”
새 궁궐, 경희궁은 유럽식으로 지었다. 거대한 장방형 석조건물에 중정(中庭)을 두었고, 본채 정면으로 부속건물이 여럿 늘어섰다. 지붕에는 한식 기와를 얹었다. 주변에 두른 담이 경복궁 수준이라 보기에 따라 성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요새화한 건 아니다.
베르사유나 루브르 같은 조경을 갖춘 정원은 없다. 대신 판석(板石)을 깔아 포장한 넓은 광장이 있어서 개선식을 포함한 온갖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했다. 광장 가로 길이가 250보(300m), 세로 길이가 200보(240m)니까 면적은 7만 2천㎡, 2만 2천 평 정도 된다.
이만하면 내가 있던 원래 세계 서울광장보다는 넓지만 여의도공원보다는 한참 작다. 음, 사실 생각 같아서는 한 10만 평짜리 광장을 만들고 싶었지만…지금은 황무지라도 장래에는 서울의 핵심이 될 땅에 너무 큰 광장으로 알박기를 하는 것도 망설여졌다.
“그래서 이 정도로 타협하기로 했지.”
“그 타협을 누구랑 했다는 건지 몰라도 다행이긴 하네.”
지금은 건물만 완성됐고, 외부 조경 ? 베르사유처럼 광대한 정원은 없지만, 그렇다고 풀과 꽃과 나무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 과 내부 장식은 아직 한창 설치하고 있다. 상희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일꾼들이 일을 멈추고 바닥에 엎드렸다.
“내전 쪽은 네가 원했던 대로 다 꾸밀 거야. 그림도, 장식도, 가구도.”
“고마워.”
생활공간인 내전과 업무 공간인 내각은 확실하게 나눈다. 그리고 전자는 철저하게 상희의 취향에 따라 만들었다. 백 년 동안 기다린 궁전인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그동안은 탕춘대에 있는 홍제궁에 보관하던 내 온갖 수집품들도 적당한 자리에 들어간다. 그림과 조각, 무기 등등 말이다. 빈 전투 때 입었고 무인지변 때 입었던 내 갑옷, 올렝카의 부친인 얀 소비에스키가 선물해준 그 판금갑옷도 검과 함께 여기 전시할 예정이다.
한참 내 이야기를 듣던 상희가 무척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히데요시랑 원균 모가지도 여기다 둘 거야?”
“여기는 우리 집이야. 그런 흉측한 물건을 왜 우리 집에다 둬? 지금처럼 강무관 수장고에 박아두면 돼. 그건 어디다 대놓고 전시할 수도 없는 물건이잖아? 군사박물관을 건립해도 그 모가지들은 진열장에 못 넣어.”
그놈들 잡힐 때 입고 있던 갑주와 칼, 말안장 정도는 전시할 수도 있겠지. 가만, 그렇게 된다면 내 갑옷도 그쪽으로 가려나? 에라, 그거야 박물관을 세울 놈들이 결정할 사안이지 지금 내가 고민할 부분은 아니겠다.
궁궐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궁전은 나와 상희가 임금과 중전으로서 지내는 곳으로는 처음 갖는 새집이니까 말이다.
경복궁이 나쁘지는 않다. 다만 이미 수백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이 살던 낡은 집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상희를 위해서 새로 지은 집에서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즐겁다. 이게 대체 얼마만의 새집인가. 미주 별궁 이후 처음 아닌가. 궁궐로는 정말 처음이고.
“석 달 정도 지나면 마무리가 다 될 것입니다.”
“오늘이 5월 닷새니, 중추절 즈음이 되겠구나.”
석 달 뒤로 다가온 입주를 생각하며 우리 두 사람은 즐겁게 경복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새로 들어온 배편으로 유럽에서 깜짝 놀랄 소식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