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364
3부 482화
– 4 –
십여 명이나 되는 신하들이 접견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선두에는 의무대신 송영일, 내의원 도제조 박창흠 두 사람이 나란히 엎드려서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 죽여 주시옵소서!”
“닥쳐라! 중전의 용태가 그토록 나빠진 줄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고? 네놈들이 그러고도 의원이냐!”
이렇게 화를 낸 게 몇십 년 만인지 모르겠다. 무인년에 예왕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도 이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네까짓 것들을 의원이라고! 에라이!”
상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건 이미 반년쯤 전부터였다. 옛날 우리가 군관들을 시켜 눈사람을 만들던 그 들판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소한 ? 올해 소한은 양력 1월 6일이었다 ? 쯤 해서 다녀온 뒤다.
‘백위영장. 그 괴이한 몽둥이는 무언가?’
‘폐하께서 사람을 만들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눈을 뭉쳐서 만든 사람도 엄연히 사내인데, 사내라면 당연히 다리 사이에 몽둥이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보리스는 열 자(3m)짜리 눈사람을 만들더니 이만한 몽둥이는 남자라면 다 붙이고 있는 거 아니냐며 사타구니쯤 되는 위치에다가 석 자쯤 되는 툭 튀어나온 돌출부를 붙여놓았다. 그게 사람의 물건이라고? 말이나 코끼리 거 아니고?
환갑을 진즉에 넘은 녀석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뭐가 잘못됐나요?’라는 표정을 짓는 꼴을 보니 웃음이 나와서 더 길게 따질 수가 없었다. 상희도 폭소를 터트리면서 그냥 놔두라고 해서 그냥 웃고 넘겼다.
그날은 정말 즐거운 하루였지만 그게 상희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그 뒤로 상희는 침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방에서 잠시 일어나 걷는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내전 앞 정원에 나오는 것도 힘겨워했다.
내의원에서는 오래전부터 상희의 병은 체내에 어혈(瘀血)이 생긴 탓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물어봤더니 어혈이 묵으면 덩어리가 생긴다(久瘀成塊)고 설명하면서, 몸을 보하고 피를 잘 돌게 하여 어혈의 사기(邪氣)를 잘 억눌러주면 괜찮을 거라고 했다.
내의원에서는 그 진단에 따라 몸을 보하는 효과가 있는 이런저런 약을 계속 지어 올렸다. 효과가 있는지 상희도 그다지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잘 되어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갑자기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이미 줄어든 체중이 더 줄었다. 여기에 구토를 심하게 하고, 기름기가 잔뜩 낀 회색 변을 보았다. 황달 증세도 나타났다. 내가 의학 지식은 별로 없지만, 이건 절대로 갑자기 진행된 병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오래, 아주 오래 지속적으로 악화된 게 분명했다.
본인이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렇게 상태가 중해질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십여 명이나 되는 태의들이 달라붙어 있으면서 이런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화가 났다.
“이 돌팔이들아!”
도저히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에 잡힌 물건이 뭔지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집어 던졌다. 날아간 물건이 가벼운 수첩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벼루나 연적 따위였으면 송영일의 대가리를 깨놓을 뻔했다.
“주, 죽여 주시옵소서….”
송영일은 자리에 엎드린 채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송영일은 초대 의무대신이던 허인원이 노환으로 퇴임하면서 그 자리에 올라갔는데, 본인은 의사가 아니고 그냥 행정관이었다.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의무대신이 꼭 의사일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이 되니 화가 치밀었다. 허인원이었다면 좀 더 일찍 상희의 증세를 알고 적절한 처치를 하지 않았을까, 상태가 괜찮은 것 같다고 진단한 다른 어의들의 판단을 보고 다시 진단하게 하지 않았을까.
“당장 나가라! 다들 당장 나가서, 어떻게든 중전을 살리고 고통을 덜어줄 처방을 찾으란 말이다!”
송영일을 비롯한 의원들이 허겁지겁 밖으로 물러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 하나도 제대로 고치지 못하는 저따위 무능한 것들에게 그 비싼 봉급을 주면서 태의로 두었다니.
하지만 그 분노의 절반은 사실 나 자신을 향했다. 계속 옆에 있었으면서도 그녀의 고통을 알아채지 못한 무신경함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 방에 아편환을 숨겨 놓고 먹을 지경이었는데도 나는 몰랐다.
매일 침실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알지 못했다. 굳이 나랑 같이 자기를 거부하고 혼자 자겠다는데도 이상한 기색을 선뜻 깨닫지 못했다. 상희는 의사니까, 자기 몸에 이상이 있으면 적절히 처치할 수 있으리라고만 믿었다. 그랬던 내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 5 –
상희의 침실은 번잡하기 그지없다. 시약청과 의약청에서 일하는 의관과 의녀들이 연이어 드나들며 약을 가져오고 용태를 살폈다. 본래 상희 곁을 지키는 상궁과 나인들도 충실하게 주인을 돌보고 있었다.
“아바마마….”
내가 들어가자 상희의 침대 옆에 앉아서 상희의 손을 잡고 있던 연주가 일어섰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옆에 있던 태자비 한씨와 바실공주 이사벨라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함께 허리를 숙였다.
“너희가 참 고생이 많다. 태후께서 오전에 다녀가셨다고?”
“예, 아바마마. 어마마마를 위로하며 무척 걱정해주셨어요.”
겨울을 경희궁에서 우리와 함께 보낸 태후는 봄이 되자 예정대로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자기가 떠난 뒤에 상희가 용태가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소 문병하러 경희궁에 찾아와주었다. 벌써 세 번이나 말이다.
상희와 태후는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태후는 한때 상희를 죽은 효장태자와 인연을 맺게 해서 태자비로 들이려고 했을 정도였다. 만약 그랬다면 상희는 이번 생에서 내 아내가 아니라 조카며느리가 되었으리라.
상희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상희와 꼭 닮은 조카며느리에게 과연 내가 ‘연산군을 아느냐?’고 물어보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 안다고 했을 때, 과연 나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숙부와 조카며느리, 이 대한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듯 태자가 요절하고 상희가 생과부가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종 때 과부의 개가를 허용한 이래로 과부의 개가는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일반 사대부 중에는 간혹 개가한 사례가 있어도, 봉작을 받은 황족(왕족) 부인이 과부가 된 후에 개가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 황실의 법도와 체면 때문이다. 이혼조차 안 한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과부가 되어서 평생을 외롭고 쓸쓸히 지내는 상희를 보고만 있거나, 동현을 타고 함께 유럽으로 떠나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유럽 고위층이라면 그런 관계가 그다지 신기하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유럽 왕족이나 귀족들은 육촌, 오촌, 사촌, 심지어 친조카와 결혼하기도 한다. 그런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조카며느리 따위와의 관계가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그런 관계도 허용 안 해주는 한국 사회가 비웃음이나 사고 끝났으리라.
‘소설 하나 제대로 나왔겠지.’
만약 이번 생에 내 인생이 그런 쪽으로 굴러갔어도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이 대한이라는 나라는 이제 굳이 내가 보위에 앉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굴러갈 만큼 궤도에 올랐기 때문이다. 나 대신 예왕이나 현왕 쪽 조카들이 즉위해도 그럭저럭 잘해나갔겠지.
얀 소비에스키가 준 돈은 거의 다 써버렸지만 어떻게든 살아갈 길은 있었으리라. 동현을 타고 해적이나 교역상으로 나서든지, 유럽에서 용병대장으로 취업을 하든지…선대 오를레앙 공작만 해도 나한테 프랑스에 눌러앉으라고 은근히 유혹하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니 폴란드에서도 그런 말을 들었었다. 하지만 올렝카와 둘이서 건너가는 것도 아니고 상희와 함께였다면 폴란드는 좀 곤란했으리라. 역시 프랑스가 좋았겠구나.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가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내가 임금 자리에 오르지 않고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생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가능성을 따지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 상희가 중태인데 이런 상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셨사옵니까, 폐하.”
눈을 뜬 상희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알렉산드라가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아서 뼈와 가죽밖에 없는 손을 잡았다.
“오늘은 좀 어떻소, 중전?”
“괜찮사옵니다. 이리 자주 찾아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자꾸 그러면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고 중전의 침소를 떠나지 않는 수가 있소.”
내 말을 들은 상희가 살짝 웃었다. 기운 있는 웃음은 아니었지만, 내 말을 듣고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오늘은 상태가 무척 좋아 보였다.
“중전과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다들 자리를 비켜라.”
의관과 의녀, 상궁과 나인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태자비 한씨와 이사벨라도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연주만은 선뜻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저는 집안사람이잖아요. 어마마마 곁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요. 저도 함께 있으면 안 될까요?”
연주는 어릴 때부터 우리가 향원정에서 정담(情談)을 나누고 있으면 혜련이의 손을 잡고 수시로 쳐들어왔었다. 지금도 같은 셈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연주의 행동에는 청개구리 이야기가 떠오르는 부분이 하나 있다. 원래 연주는 상희가 아무리 권해도 바이올린에 손을 대지 않았었는데, 요즘 갑자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픈 상희 대신 조카인 이사벨라에게 말이다.
지금도 병실 구석에 바이올린이 놓여 있었다. 유럽에서 날아온 네 개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중 끝까지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던 네 번째 바이올린이다. 그게 연주에게 갔다.
“내가 중전과 편하게 옛날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다. 미안하지만 좀 비켜다오. 우리 두 사람이 정담을 나누는 자리에 함께 있으면 아무래도 너도 불편하지 않겠느냐?”
한참을 뭉그적거리던 연주를 겨우 내보냈다. 그리고 비로소 둘만 남을 수 있었다.
– 6 –
깃털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상희의 손은 무척 차가웠다. 몸이 좋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온이 떨어진 티가 났다.
익선관을 벗어놓고 옆자리에 나란히 누워서 상희를 꼭 안았다. 얼마나 말랐는지 상희를 끌어안은 내 두 손이 팔꿈치에 닿을 정도였다.
“내가 너 충치 뽑아준 날 기억해?”
“물론 기억하지.”
상희의 ‘의술’에 내가 처음 신세를 진 날이다. 진통 효과가 있는 버드나무 삶은 물만 먹고 한참 동안 버티다가, 남쪽으로 순행을 나가기 직전에야 상희에게 부탁해서 충치를 뽑았다. 그때는 아직 상희를 사당패 출신 미소년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도련님, 나중에 아무리 아프셔도 양귀비는 절대 함부로 쓰시면 안 돼요. 아셨죠? 아픔을 정 참기 힘드시면 저한테 오세요. 습관적으로 찾는 버릇이 생기지 않도록, 적절한 양으로 제가 처방해 드릴게요.”
마취용으로 마신 양귀비 삶은 물 때문에 내가 아편 중독이 될까 봐 상희가 했던 말이다. 2백 년 만에, 아니 70여 년 만에 그 말을 다시 들으니까 왠지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상희가 볼까 봐 눈을 감고 상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중독 안 되도록 잘 조절하면서 먹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혹시 아편 맛을 잊지 못해서 다음 생에 눈을 뜨자마자 약 찾을 정도로 습관이 되지는 않았으니까.”
“바보 같은…지금 그런 거 걱정해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
상희가 아편쟁이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아편쟁이가 되어도 좋으니까 제발 살아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잃어본 적이 없는 상희를 이제 처음으로 잃게 된다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상희도 내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아마 자기 병은 췌장암일 가능성이 크다고. 위암이었으면 토혈이나 혈변이 나타났을 확률이 높은데, 그런 증세는 전혀 없었다면서 말이다.
“처음 증세 나타났을 때부터 생각하면, 발병한 지 대략 5년은 된 것 같아. 올해 초까지만 해도 통증이 전혀 없었으니까 정말 운이 좋았어.”
“왜 이야기 안 했어?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웃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울어야 하는 게 사랑이잖아. 힘든 일이 있으면 당연히 함께 견뎌야 하는 거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낫는 것도 아니고, 너를 힘들게만 할 게 싫었어.”
이미 한의학에서 할 수 있는 처방은 다 받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한의학에서 말하는 ‘어혈이 뭉쳐서 된 덩어리’가 바로 종양이다. 한방에서는 직접 종양을 제거할 수가 없으므로, 몸을 보해서 암에 저항하게 돕는 쪽으로 치료법이 발전한 거다.
그렇게 가능한 치료를 다 받는 도중에 통증이 시작됐다. 이 단계에서 상희는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확신했고, 사실을 밝힌다고 해서 더 나은 치료를 시도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고 쓸쓸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막상 상희에게 고백을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상희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떠올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그래서 머뭇거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침실에만 있으면서 아편환은 어떻게 구했어? 역시 혜련이야?”
“응.”
혜련이는 상희가 아편을 수면제로 쓰려는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러니 이 일로 공연히 혜련이에게 책임을 묻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내 병을 숨긴 건 온전히 내 책임이야. 다 내가 시킨 거니까 걔한테는 책임 없어.”
“알았어. 혜련이한테는 절대 화내지 않을게.”
한참을 안고 있으니 차갑던 상희의 몸에서 다시 따스함이 살아나는 듯했다. 잠시 상희의 체온을 느끼다가 상희에게 물어보았다. …얼마나 남았느냐고.
“나도 몰라. 몇 년을 갈 수도 있고, 몇 주 안에 눈 감을지도 모르고…그러면 눈 뜨자마자 다시 만나겠지만 말이야.”
상희가 웃었다.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는 듯한 미소였다.
“지난번엔 내가 25년 동안 기다렸어. 이번에는 네가 기다릴 차례야. 기다릴 수 있지?”
“그럼. 물론이지. 25년이 세 번 지나가더라도 기다릴게.”
“그건 싫은데. 나보고 90살 먹은 할아버지랑 같이 살라고?”
상희와 함께 잠시 쿡쿡거리며 웃었다. 웃으면서 결심했다. 이번 생에서 상희가 누릴 삶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지만, 아직 남은 기간은 이렇게 즐겁게 웃으면서 지내게 해주겠다고. 절대 상희 앞에서 울지 않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