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370
3부 488화
– 1 –
봄이다. 향원정 연못에도 봄바람이 분다. 바람에 날린 꽃잎이 수면 위에 떨어져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난간을 잡고 연못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 옆에 빈자리가 한층 더 크게 느껴진다. 따뜻한 봄볕을 받으면서도 내 몸이 추위를 느끼는 건, 정말 기온이 낮아서가 아니라 아직도 상희가 떠난 충격에서 회복되지 않은 내 탓이리라.
“중전, 중전…!”
정말 죽도록 울었다. 다음 생에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이번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쪽 눈물샘은 정말 하수분(河水盆)이라도 되는 듯이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상희를 끌어안은 채 실성이라도 한 듯이 울고 있으니 내 옆에 은이와 준이가 달라붙었다. 그리고 나를 달랬다.
“아바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어마마마께서도 아바마마께서 이리 슬퍼만 하시기를 바라지는 않으실 것이옵니다!”
아들놈들도 울고 있었다. 은이는 우리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아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다. 준이도 형만큼은 아니라도 부모가 무척 가까운 사이였음은 알고 있다. 게다가 가장 손위인 적자들이다. 그러니 다른 동생들이나 후궁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아바마마, 가실 곳으로 가신 어마마마를 그만 보내드려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이승에서 하실 일을 다 하셨다고 하여 하늘이 데려가신 것이니, 애달픈 마음을 그만 푸소서….”
은이가 내 오른팔을 잡으며 통곡했다. 은이도 어머니를 잃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바마마, 이러다가 아바마마께서도 쓰러지신다면 저희는 대체 누구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부디 기운을 차리시고 미욱한 저희의 기둥이 되어주소서….”
이미 서른이 되었다지만 은이도 아직은 어머니를 잃은 아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 이 방을 가득 채운 이 식솔들을 생각해서라도 일어서야지.
“알겠다. 알겠어, 알겠다고….”
품에 꼭 안고 있던 상희의 몸을 조심스레 침대 위에 뉘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상희를 내려다보았다. 잠자듯이 눈을 감은 상희를 보자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눈가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흑, 흐흑….”
“너무 슬퍼하시면 옥체에 해롭사옵니다…상선, 아바마마를 잠시 침전으로 모시도록 하라.”
“예, 태자 전하.”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던 나는 그대로 상선 김진귀가 이끄는 데 따라서 침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황후전 지붕 위에 올라간 내관이 외치는 목소리가 마치 다른 세상의 그것처럼 내 귀에 들려왔다.
“중궁복(中宮復), 중궁복, 중궁복~.”
오늘은 병오년 3월 8일이니 양력으로는 1726년 4월 8일이다. 상희가 떠났던 날이 갑진년 9월 12일, 양력으로 1724년 10월 28일이었으므로 어느새 딱 1년 반이 지났다.
“제삿날은 또 어쩌면 그렇게 기가 막힌 날인지.”
이번 생에서 내 첫 아내였던 인선황후 강씨의 제삿날이 며칠 뒤인 음력 3월 12일이다. 그런데 상희가 내 곁을 떠난 날은 음력 9월 12일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우연인 걸까. 마치 두 사람이 나를 반씩 나눠 갖기로 모의한 것 같지 않은가.
따지자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다. 강씨는 성친왕을 가졌고 상희는 나를 가졌다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성친왕 따위한테 내주기는 강씨가 너무 불쌍하고 아까운 사람인지라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챙기고 있는 거기도 하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강씨의 무덤에는 여전히 매년 네 번씩 꼬박꼬박 찾아가고 있다. 이제 상희가 죽었으니 내가 찾아갈 무덤은 네 개다. 첫 중전인 신씨가 있는 무릉(茂陵), 두 번째 중전이던 김씨가 있는 장릉(莊陵), 강씨가 있는 원릉(元陵), 상희가 묻힌 효릉(孝陵)까지.
다행히 산릉도감 도제조를 맡은 당시의 좌상 김성권은 상희의 무덤을 어디에 조성할지에 관한 내 뜻을 아주 잘 이해했다. 덕분에 효릉은 내가 상희와 함께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던 바로 그 자리에 들어섰다.
언젠가 내가 죽으면 당연히 효릉에 합장할 생각이다. 그래서 무덤이 들어설 자리는 나와 상희에게 모두 의미가 있는 장소여야 했다.
“국상은 내 뜻을 참 귀신같이 알아듣는단 말이지….”
역시 ‘미주 20년’이 준 충격이 강했던 걸까. 김성권은 내 의도가 정확히 뭔지 파악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달성하려고 기를 쓴다. 덕분에 내가 조정을 이끌기 매우 편하다.
그렇다고 김성권이 무능하거나 아첨꾼, 간신배는 아니다. 유능한 신하이면서 임금의 뜻을 실행하려는 열의에 불타는 그런 부류일 뿐이다.
물론 신하들이 죄다 김성권처럼 행동한다면 임금이 암군이 되고 나라가 망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조정 내 요직에 무조건적인 예스맨이 아니라 악마의 변호사, 잔소리꾼 노릇을 할 사람을 몇 명씩은 남겨두려고 노력한다.
상희가 죽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 역할은 국상 송재원이 주로 맡았었다. 지금은 송재원이 퇴임한 탓에 당시에 학무대신이었던 우참정대신 이신경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폐하, 이만 조회에 드실 시간이옵니다.”
“알겠다.”
시중을 드는 내관이 내게 다가와 신하들을 만날 시간이 되었다고 알렸다. 그 말에 따라 순순히 근정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상희가 죽기 전, 내가 살아있는 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다시 만났을 때 서로에게 떳떳하기 위해서 말이다.
– 2 –
“모두 평안하였소.”
“예, 폐하.”
사정전에서 업무를 보는 건 내게 매우 익숙한 일이다. 내가 경복궁에서 몇 년을 살았나. 눈 감고 돌아다녀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곳이 여기다.
처음 경복궁에 돌아온 건 상희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국상을 치르는 기존 예법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일을 치르는 데 맞춰져 있었고, 건물 구조가 전혀 다르고 아직 틀도 다 잡히지 않은 경희궁에서 이런 큰일을 치르기는 좀 힘들었다. 신하들 말로는 그랬다.
경복궁으로 돌아가서 국상을 치르는 게 좋겠다는 진언을 듣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 청을 응낙했다. 그 문제를 두고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다툴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아니, 정사 자체를 한 달 정도 손을 놓았다. 처음 열흘 정도는 그냥 관심을 끊었고, 일이 밀린다는 주청이 들어오자 은이에게 대리청정을 명해서 편전으로 보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상주는 남편이 맡는 게 법도에 맞으니까 그렇게 못할 것도 없었다.
한 달 동안 빈전(殯殿)에 있지 않으면 향원정에 나가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병하러 온 주변국 사신들이 조문하러 왔을 때도 건성으로 맞았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을 때쯤 은이를 앞세운 조정 중신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바닥에 넙죽 엎드려 내게 편전으로 복귀해 달라고 청했다.
“무슨 일로 그렇게들 몰려왔는가?”
며칠을 밤새워 마신 술로 두 눈이 벌겋게 핏발이 선 상태로 신하들을 맞았다. 크게 취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제정신이라고 하기도 좀 그랬다. 하지만 술이라도 마셔서 잊지 않으면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백 년이 넘는 내 인생에서 이런 충격은 처음이었으니까.
국상 송재원도 지금 내 상태를 알았다. 그래서 내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최대한 강경하게 내게 국정에 복귀하라고 청했다.
“폐하! 먼저 떠나신 중전마마를 그리워하시는 마음은 신들도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그 슬픔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 군주의 일이옵니다. 만백성이 어버이를 찾고 있사오니, 이제는 부디 편전으로 돌아오시어 국사를 돌보아 주소서.”
그 앞에 엎드린 은이도 마찬가지였다. 은이도 내게 그만 국정에 복귀하라고 청했다.
“아바마마. 부디 편전에 납시어 국사를 돌보소서. 소자는 아직 어리석어서 이 무거운 짐을 도저히 질 수가 없나이다. 부디 이 무거운 짐을 거두어주소서.”
이게 자기도 국사 따위 집어던지고 빈전에 와서 상주 노릇을 하고 싶어서였는지, 정말로 자기가 지금 대리청정으로 국사를 돌보는 게 힘들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임금이 처리해야 할 일이 많기는 하다. 지금 대한의 강역은 어림잡아 동서로 3만 리, 남북으로 2만 리에 달한다. 임금이 처리하는 정무의 양은 장조 시절과 비교가 안 된다.
허나 은이가 대리청정을 해본 경험은 이미 다섯 번을 넘어갔다. 내가 불가피하게 자리를 비웠을 때, 그리고 그저 쉬고 싶었을 때 등등 여러 번에 걸쳐서 대리청정을 수행한 경험이 있다. 그런 녀석이 정말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어서 이런 소리를 할 리는 없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아무려면 짐이 슬픈 나머지 네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나기라도 할까 봐 그러느냐?”
들고 있던 술잔을 땅바닥에 팽개쳤다. 마포에 있는 유리공방에서 제조한 최고급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엎드려 있던 은이와 신하들이 움찔했다.
“혹시 태자가 아니라 그대들이 바라는가? 짐이 상황으로 물러나 승려가 되기를? 일황들이 종종 그러듯이?”
안 그래도 울분이 치솟는 판이다. 여기에 술기운이 겹쳐서 떠오르는 대로 마구 내갈겼다. 그러자 신하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연신 애걸했다.
“토, 통촉하시옵소서! 어찌 그런 불충한 생각을 신들이 하겠나이까!”
그러고 보니 이거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광경 같은데. 아, 장조 때였던가? 그때 내가 조정 분위기 한번 다잡겠다고 양위 소동을 한번 벌였었지. 쉰두 살에.
그때 나는 연이은 전쟁과 가뭄으로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내 존재감을 느끼고 싶고, 내가 권력을 쥐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하들을 상대로 지금 양위를 고려하고 있다는 낚시질을 했다. 당연히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나는 만족을 얻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맹세코 일부러 소동을 벌인 건 아니었다. 슬픔과 피로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술까지 퍼마셨고, 그 상태로 아무 말이나 뱉어냈을 뿐이다.
“폐하께서는 천명을 받아 이 땅을 다스리시는 임금이십니다. 어찌 폐하 이외에 다른 이가 그 자리에 앉겠습니까? 신들의 불충한 언사를 부디 용서하시고 편전으로 복귀하시어 정사를 돌보소서. 신들이 이렇게 비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수십 명이나 되는 중신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옷에 흙이 묻건, 돌이 이마를 치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입을 모아 내게 정무에 복귀해 달라고 애걸했다.
“폐하께서는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모두를 위한 정치를 펼치셔야 합니다. 대한의 만백성은 이미 국모를 잃었사온데, 국부이신 폐하께서도 저들을 돌보지 않고 방치하시면 나라가 어찌 되겠습니까?”
“알겠다. 국상의 말이 옳다.”
열심히 살겠다고 상희와 약속했다. 정무에 복귀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심이 서지 않아 바로 움직이지 못했을 뿐이다.
“오늘까지는 태자와 논의하여 급한 일을 처리하라. 짐은 내일부터 다시 정사를 돌보도록 하겠노라.”
술도 덜 깬 상태로 정무를 보러 나간들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래서 하루 유예를 두었고, 신하들도 받아들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렇게 해서 정무에 복귀했다. 한 달 동안 국사에서 아예 손을 뗐었지만 작심하고 자리에 앉으니 또 물 흐르듯 처리가 됐다. 은이가 그동안 나 대신에 웬만한 일은 다 처리해놓았고, 수십 년 동안 하던 가닥이 있으니 어려울 게 없었다.
국상 기간은 아직 4개월이나 더 남아있었다. 그동안은 은이를 빈전에 보내두고 나는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술 대신에 일로 슬픔을 잊고 싶었다.
가끔 일을 멈출 때는 창덕궁에 있는 태후전에 문안을 드리러 갈 때나, 외국에서 온 조문 사절을 접견할 때뿐이었다. 청, 후금, 후송, 서, 유구, 일본 등 주변국에서 사절이 올 때마다 근정전에서 접견을 시행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어 장례를 치렀다. 함께 즐기던 추억이 서린 들판에다 능을 조성하고, 계속 뒤를 돌아보며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경복궁에 계속 머물렀다.
기껏 지은 경희궁으로 돌아가지 않은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도성 북서쪽에 조성한 효릉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궁전이 경복궁일뿐더러, 상희와 보낸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은 거의 경복궁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향원정과 교태전에서, 경회루에서, 그리고 내가 옛날에 심은 목련 나무 밑에서 나누던 그 많은 이야기에 서린 추억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경희궁은 상희가 숨을 거둔 곳, 병마로 괴로워하던 곳이다. 즐겁게 돌아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여기 경복궁에서 당분간 더 지내기로 했다. 그게 어느새 1년, 생각보다 긴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 홀로 추억을 되새기며 상실감을 치유하는 데는 효력이 있었다.
사실 후궁들이나 궁인들은 익숙한 공간인 경복궁에서 지내는 걸 더 편하게 여겼다. 근무 때문에 출근하는 중신들도 경복궁을 경희궁보다 더 좋아한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재무대신 김여홍이 솔직히 털어놓았었다.
‘경희궁에서는 높은 곳은 3층까지도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연로한 중신들이 어찌 경희궁을 좋아하겠습니까.’
김여홍 본인이 아직 만으로 57세다. 하지만 그보다 나이가 많은 중신이 한두 명이 아니니 계단 탓에 경희궁이 싫다는 사람이 나와도 무리가 아니다. 경복궁은 연회장이라서 평소에는 갈 일이 없는 경회루만 빼고 모든 건물이 단층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중신들은 내가 다시 경희궁으로 옮기지 않고 계속 경복궁에 머무르기를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다. 나도 아직은 내 거취에 관해 특별히 공언하지 않은 상태다.
“그래, 올해도 가뭄은 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겨울에 눈이 넉넉히 내린데다 봄에도 비가 충분히 오는 것이, 올해도 풍년이 들 전망이라 하옵니다.”
상희가 죽던 해, 갑진년(1724)에는 비가 넉넉히 왔다. 4년에 걸친 가뭄 끝에 풍년이 들자 백성들은 그해에 내린 비를 통틀어서 ‘황후우(皇后雨)’라고 불렀다. 이런 이름이 붙었으니 당연히 관련된 전설이 생겨났다.
이런 전설이 생긴 것을 알고 쓴웃음이 절로 났다. 나는 장조우 전설을 만들었는데 상희는 황후우 전설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나중에 상희를 다시 만나면 꼭 전해줘야지. 너도 전설의 주인공이 됐다고.
그 외에 이런저런 사안들을 다 정리하고, 대충 회의를 마치려고 했다. 그런데 예무대신 조진경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폐하. 인현황후께서 떠나시어 국모의 자리가 빈 지도 이미 2년이 되어갑니다. 인제 그만 중궁전에 새 주인을 들이시어 백성들이 평안함을 누리도록 하여주시면 어떠할는지요.”
…저 영감이 일흔도 안 됐는데 벌써 노망이 들었나. 날 보고 무슨 새장가 타령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