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399
3부 517화(13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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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랑 고령위가 지금쯤이면 이르쿠츠크까지는 왔을 거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할 때가 양력 3월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벌써 국경을 넘었을 수도 있겠네.”
시베리아 횡단에 두 달이면 된다지만, 그건 급한 우편물을 운반하는 파발꾼이 움직이는 속도다. 어린애까지 데리고 있는 일행이 움직일만한 속도는 아니다. 아마 화물을 잔뜩 실은 대상이 움직이는 정도 속도로 오겠지.
“연주는 이번 여행이 무척 재미있었나 봐. 하지야 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유럽식 사교가 신기하기는 했겠지. 바깥에서 외간 남자를 만날 수 있고, 그 사람들이 자기를 마치 공주처럼… 아니, 진짜 공주 맞지. 하여튼 그렇게 떠받드는 상황이 얼마나 놀라웠겠어.”
박문수가 보내는 정기 보고서에는 연주가 따로 보내는 사신(私信)도 동봉되어왔다. 다만 보내는 날짜가 정해진 게 아니고 연주가 쓰고 싶을 때만 썼기 때문에, 매번 오지는 않았다.
연주가 보낸 편지를 보니, 옛날 장조 때 유럽에 간 문성군부인이 이런 기분을 느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광해군에게 소박맞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문성군부인과 달리 연주는 옆에 사랑하는 남편이 함께 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루시아네 예카테리나를 프랑스에 시집보내는 계획은 어떻게 생각해? 네가 옆에 있었으면 찬성했겠어, 반대?겠어? 이걸 계기로 러시아랑 프랑스가 가까워지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겠지만, 영국은 또 두 나라 다 싫어하고 독일과 친해지게 되겠지?”
20세기 초, 독일이 유럽 최강국이 되기 전까지 상황이 그랬다. 영국은 독일을 상대하려면 이들과 협력할 수밖에 없게 될 때까지 계속 두 나라 다 경계했다. 가장 위험한 가상 적국 두 나라가 프랑스와 러시아였다. 해군도 이 두 나라 전력을 합친 것보다 많게 유지했다.
영국과 독일이 한편이 되고, 러시아와 프랑스가 한편이 되어 균형을 유지한다면 나로서는 괜찮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저놈들이 멀리 유럽에서 아웅다웅하는 동안 우리는 육지에서는 러시아하고, 바다에서는 영국하고 접하면서 양쪽 모두와 좋은 사이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러시아는 우리를 자기들이 태평양으로 나가게 해주는 창구로 여길테고, 영국은 우리가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막는 마개 노릇을 해주기를 바랄 테지. 약소국이라면 페르시아처럼 분할점령이라도 당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당하기에는 많이 컸지, 이제.”
이쪽 세계에서도 영국과 러시아가 원래 역사에서처럼 그레이트 게임을 할까? 알 수 없다. 역사는 이제 어긋나기 시작했으니 그 결말을 내가 어떻게 예측하나? 군주만 바뀌고 나머지 사건은 그래도 진행될지, 전부 뒤집힐지 알 수 없는데.
러시아가 우리를 태평양으로 나가는 창구로 여긴다는 말이 꼭 우리랑 전쟁을 벌이려고 할 거라는 소리는 아니다. 발트해는 사실상 막힌 바다고, 흑해도 막힌 바다니까 우리와 우호를 유지하면서 태평양을 이용하고 싶어 할 수 있다는 말이지.
“내가 부추기고 있긴 하지만, 과연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 지중해로 나갈 수 있을까? 우리 쪽 역사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오스만과 러시아가 둘이서만 싸운다면 분명히 러시아가 이겨. 하지만 과연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까.”
원래 역사에서 러시아가 확실하게 오스만을 앞선 건 18세기 중반부터 였다. 하지만 완전히 상대를 쓰러트릴 정도는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우세를 잡은 건 19세기 중반부터였다. 물론 러시아가 유럽에서 벌어지는 여러 전쟁에 한몫 끼느라 발칸으로의 남하가 늦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오스만을 격파하고 동지중해 세계 전역을 차지하도록 두고 볼 만큼 다른 유럽 국가들이 자상할 리가 없다. 분명히 자기들도 오스만을 나눠 먹으려고 들 테고, 크림 전쟁에서처럼 직접 참전할 수도 있다.
“유럽에서 영원한 동맹 따위는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프랑스가 러시아 편에 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이나 7년 전쟁에서도 계속 같은 편일지는 나도 모른다. 10년 뒤에는 상황이 바뀌어 러시아가 프랑스가 서로 으르렁거릴지도 모른다. 역사가 달라졌으니까 말이다.
“종두법 때문에 다텄던 일 기억해? 그때 나는 되도록 역사가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아서, 타국에 종두법을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었지. 하지만 너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알려주자고 했고.”
나는 원래 역사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모두 일어날 이유가 있어서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게 직접 관련만 없다면 그냥 손대지 않고 지나가려고 했다. 예측 불가능한 사태를 줄이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하지만 상희는 나와 달랐다. 우리 두 사람의 존재로 인해 이미 역사가 잔뜩 바뀌었다며, 이쪽 세상에 속하는 존재로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 했다. 그리고 역사의 ‘진보’를 느리게 만들더라도 좀 더 부드럽고 온건하게 서건이 전개되기를 바랐다.
결국 종두법은 전해졌고, 수많은 죽었을 사람들이 살아났다. 다만 조선이 드렇듯이, 다른 나라들도 획기적으로 인구가 늘지는 않았다. 천연두 말고도 사람 잡는 질병은 한둘이 아닌 데다가, 토지 면적과 농업 기술에서 나오는 인구 부양력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확실히 달라진 부분도 있어. 영국 왕실은 그대로지만 프랑스 왕실은 종두 덕분에 혈통이 완전히 바뀌었지. 그래서 예카테리나를 그쪽에 시집보낼 궁리도 하게 됐고.”
이쪽 세상에서의 앙주 공작, 원래 역사에서 루이 15세는 폴란드 공주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쪽 세상에서는 그 자신이 폴란드 국왕 자리에 도전하게 됐다. 인간적으로는 호인이었을지 몰라도 국왕으로는 형편없었던 그 작자가 사라진 프랑스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굴러갈까.
“그런 놈을 사위로 추천해서 알렉세이한테 미안하지 않냐고? 당연히 미안하지. 하지만 봐. 너무 잘나고 유능한 녀석이 그 자리에 앉으면 도리어 러시아를 먹으려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것보다는 적당히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사위 쪽이 차라리 나아.”
원래 역사에서 루이 15세가 프랑스 국왕 자리에서 한 짓을 생각해보면, 폴란드에서라고 제대로 국왕 노릇을 할 리가 없다. 그러면 그 놈대신 실제로 폴란드를 다스리게 될 사람은 왕비 예카테리나다. 내 외손녀가 실질적인 폴란드 여왕이 되는 셈이다.
“폴란드만 달라질 게 아니지. 이제 프랑스는 완전히 바뀌었어. 원래 역사에서는 사라졌던 애가 왕좌에 앉았어. 그 애는 어떤 프랑스를 만들까. 과연 프랑스 혁명은 어떻게 될까.”
프랑스 혁명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먼 미래의 사건이다. 원래 역사와 같은 해에 터진다고 가정해도 아직 61년 뒤다. 그래서 나와 상희 모두 그 사건을 심각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어떤 고민을 해도 우리 예상과 다르게 일어날 가능성이 크니까.
나는 프랑스 혁명이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미친 영향이 워낙 크다보니 원래 역사에서 본 것처럼 그냥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상희는 좀 생각이 달랐다.
“의미가 있는 사건인 줄은 알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서 피가 조금 덜 흘렀으면 좋겠다고 했었지. 좀 더 온건한 혁명이 되면 좋겠다고. 뭐, 나도 그러면 좋을 것 같기는 해. 과연 어떻게 될지 지금 알 수는 없지만.”
프랑스 혁명은 루이 14세 이후 쌓인 프랑스 사회의 온갖 모순과 부담이 쌓인 끝에 터진 사건이다. 이쪽 세계의 프랑스 국왕들이 해나가기에 따라 어쩌면 안 터질 수도 있을 거다.
“과연 프랑스 혁명이 안 터진다면 나폴레옹은 어떠헥 될까. 시골 출신 촌뜨기 군인으로 평생 한직이나 맴돌게 될까.”
나폴레옹의 고향, 코르시카섬은 지금 제노바 공화국 영토다. 그 남쪽에 있는 사르데냐는 스페인령이지만 코르시카는 수백 년째 제노바가 통치하고 있다. 원래 역사에서 제노바가 이 섬을 언제 프랑스에 넘겼더라. 조만간 넘어가기는 할 텐데.
“역사가 바귀었다고 설마 나폴레옹이 안 아타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나타나더라도 제때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못 얻는다면 그것도 아깝겠지.”
프랑스 혁명으로 기존 프랑스군 수뇌부가 소멸해서 윗자리가 왕창 비지 않았다면, 그리고 프랑스 혁명정부가 전 유럽을 상대로 혼자 싸워야 하는 상황으로 몰려 공적을 세울 기회가 밀려오지 않았으면 나폴레옹이 출세할 수 있었을까? 전혀 안 그랬겠지?
“프랑스 혁명이 있었기에 나폴레옹이 있었고, 나폴레옹이 있었기에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전 유럽으로 퍼졌고…. 과연 어떤 변화가 쌓여 혁명의 양상을 바꿔놓을지 무척 궁금하긴 해. 하지만 직접 볼 수는 없겟지. 너무 먼 미래니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대두까지 보려면 내가 130살까지는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건 너무 큰 소망이다. 현대에서도 수명이 130살이 안 되었는데 지금 시대에 어떠헥 130살을 살겠나.
“차라리 죽어서 나폴레옹 시대에 4회차를 시작하는 게 빠를 거야. 그렇지?”
나도 경험했고 상희도 경험했지만, 한번 죽으면 다음번에 각성할때까지 사실상 한순간에 건너뛴다. 오죽했으면 내가 처음 경성군으로 눈을 떴을 때, 종성순한테 칼 맞은 것 때문에 며칠 혼절해 있다가 금방 일어난 줄 알았겠는가. 실은 76년 만이었다.
상희도 마찬가지였다. 의식을 잃었다가 천녀를 만나고, 두 번째 인생에서 눈을 B을 때는 그동안 수십년이 흘렀다는 실감을 전혀 못 했다고 했다. 지나간 두 번이 다 그랬으니 이번 세 번재도 똑같을 게 분명하다.
다음번, 네 번째 생이 몇 년 후일지는 모르겠다. 이제껏 그랬듯이 70년 내외일 수도 있고-핼리 혜성인가-갑자기 천녀가 변덕을 부려서 그 주기가 확 짧아지거나 확 길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재회할 날이 얼마나 먼 미래든, 상희는 이미 거기 도착해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번 생을 마친 뒤라야 거기에 갈 수 있다. 그 시간을 앞당기는 방법은 오로지 자살밖에 없지만, 나는 저질렀을 때 그 뒷감당을 도저히 해낼 수가 없다.
분명히 천녀는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중도 포기할 권리까지 주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대로 임금 노릇을 하지 않고 게임을 관두면, 그 성질머리를 보건대 다음 판을 시작하면서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될지 모른다.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내가 만약 빨리 상희 곁에 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자살한다면, 내 후계자가 되어야 할 은이에게 엄청난 부담을 준다. 과연 세간에서 은이를 두고 뭐라고들 떠들겠는가.
어쩌면 은이의 즉위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제위가 욕심이 나서 역심을 품고 부황을 해쳤다는 의혹이라도 사게 되면 끝장이다. 즉위하더라도 권위에 엄청난 손상을 입을 테고, 누가 역당을 토발하겠다면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을 살게 된다.
“우리 쪽 역사에서 영조가 그랬잖아. 알지? 게장 사건. 아니 게장과감 사건. 그놈의 소문 탓에 영조는 재위 기간 내내 골머리를 앓았어.”
영조는 몸이 안 좋은 형 경종에게 서로 상극인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먹여서 살해했다는 의혹을 샀다. 호기심이 생겨서 나도 몸 상태가 좋을 때 시험 삼아 그렇게 한번 먹어봤는데, 보다시피 죽지 않았다. 아예 아무 일도 없지는 않고 설사를 좀 하긴 했다.
“죽는 게 딱히 겁나지는 않지만, 그런 사태가 벌어질 걸 뻔히 알면서 우리 아들을 힘들게 할 수는 없지. 사는 동안은 열심히 살아야 해. 그렇지?”
초상화 속 상희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이 맞는다고, 그렇다고 답하는 듯했다.
“그래, 열심히 살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우리 자식들 팽개치지 않았다고, 내가 만들고 다스리던 나라 포기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게.”
설마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네 번째 상희가 나타나지는 않겠지? 상희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물론 굴둑 같지만, 그래도 그건 싫은데. 나는 침상에 누워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저승사자를 기다리는데 상희는 꽃다운 처녀라면 얼마나 황당한 기분일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늙은 내가 죽은 뒤에 상희가 또 얼마나 긴 세월을 홀로 지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이제 4년 동안 혼자 지낸 것만으로도 외로워 죽겠는데, 상희한테 2회차에 이어 또 그렇게 긴 시간을 기다리게 한다면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과연 우리 4회차가 어느 시대일지, 어떤 환경에서 시작할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상희라고 예전에 농담으로 주고받은 것처럼 어디 남태평양 섬나라 추장으로 눈을 뜰지도 모른다.
뭐, 이젠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상희와 재회해서 행복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그런 변화 정도는 딱히 못 견딜 것도 없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거리며 기울고 있었다. 때마침 문밖에서 내관이 조심스럽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석수라(夕水刺, 저녁 식사) 들이겠사옵니다.”
“오냐.”
오늘 저녁은 내 희망에 따라 부대탕이 들어왔다. 현대에 먹던 부대찌개와는 좀 다르지만, 그대로 장조시절에 먹던 것보다는 한결 맛이 좋아졌다. 역시 육가공 기술이 더 좋아지면서 소시지가 그때보다 맛있어진 덕이 큰 듯하다.
여전한 것도 있다. 화로 위에 얹어 부대탕을 끓이는 솥은 여전히 철제 진가사, 전국시대 일본군 하급병사 투구다. 막부 관군에서도 이제는 진가사를 안 쓴다. 지방 영주들이 거느린 병사들은 아직도 좀 사용하는 모양이지만.
반주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퍼먹다 보니 어느새 숟가락에 바닥이 긁혔다. 왜솥은 바닥이 뾰족하다 보니 금방 바닥이 긁힌다. 곁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수라상궁이 당황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주방에 영을 내려 한 솥 더 올리라고 하겠사옵니다.”
“됐다. 그만큼은 필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한참 끓여서 맛이 푹 우러난 국물 한 숟가락이다. 이제 막 솥에 올린 새 음식이 아니란 말이다.
적당히 먹은 상을 물리고 나니 바깥은 확실히 밤이 되었다. 창밖을 보니 옆구리에 등불을 잔득 달고 나루터 사이를 남북으로 오가는 증기선 나룻배가 보인다. 형황 시절에는 나루터 세 곳에 한 척씩이었지만, 교통향이 늘자 나루터 다섯 군데에 일곱 척을 배치하게 되었다.
예전에 강물 한가운데 자리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내 배 동성 생각이 난다. 하지만 당당한 전열함을 바다가 아닌 여기에다 처박아 놓아서야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다. 항해와 사격을 못 하니 선원들 훈련도 제대로 못 시킨다. 명색이 대한 제일의 전선인데 말이다.
동성은 지금은 다시 바다로 나가, 경기도 수역에서 훈련과 정비에 매진하고 있다. 솔직히 동성이 나설만한 전장은 이제 없지만, 그 배는 존재하는 자체가 가치니까 말이다.
“다음 생에도 대한의 태황과 황후가 된다면, 우리 꼭 동성을 타고 여행을 나가자.”
초상화를 보며 독백하는데 갑자기 웃음이 난다. 아마 신하들이 이 모습을 보면 엄청나게 놀라겠지? 내가 공민황의 전철을 따른다면 걱정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적어도 일은 하면서 남는 시간에 초상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공민왕보다는 낫다고 본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뒤에는 아예 태업을 벌여 국정을 팽개쳤잖은가.
아마 궁인들은 한참 전부터 수군거리고 있으리라. 너희끼리 그러는 거야 뭐 괜찮다만, 궐 바깥에 소문내지는 마라. 혹시 그러다 걸리는 놈이 나오면 치도곤을 맞을 테니까.
– 4 –
오랜만의 열기창 행차다. 경인선 운행에 들어가는 증기기관차 유지와 서북선 공사 준비에 바쁜 열기창이지만, 오늘은 다른 볼거리가 있어서 직접 왕림했다.
“어서 오시옵소서, 폐하.”
열기창 도제조 김필용이 급히 문간으로 뛰어와 고개를 숙였다. 김필용은 몇 대손이더라, 하여간 현제공 김지의 직계 후손이다. 조상을 닮았는지 기계를 다루고 만드는 일에 상당한 재능이 있다.
“그리하여 이번 과업도 해낼 수 있었사옵니다.”
나를 안쪽으로 안내한 김필용은 시험용 철로 위에 놓인 거대한 검은 색 화차를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처음에는 목재인가 했는데, 다시 제대로 살피니 철판 위에 옻을 칠한 것이었다.
“허어, 정말 해내었구나.”
“예, 폐하. 현제공께서 남기신 현제공실기에 따라 만들었는데 정말로 그 성능이 현제공이 상정한 바에 뒤지지 않습니다.”
귀차다. 김지가 만들었던 바로 그 귀차가 지금 내 눈앞에, 선로 위에 덕하니 올라가 있다.
한동안은 만들 수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해서 관심이 없었는데 이렇게 현실화가 되었다. 이거 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생기는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