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407
3부 525화(1407화)
– 1 –
광동에서 가장 큰 도시는 당연히 광주다. 광주는 옛날 한나라 시절에 남해군을 설치하고 외부와의 교역을 시작한 이래, 광동뿐만 아니라 광서까지 포함한 양광 지방 전체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다.
하지만 광서왕은 물론이고 광동왕 조차 자기 왕궁을 광주에다 두지 못했다. 광주는 성도에 있는 황제가 직할하는 곳으로, 광주절도사가 전권을 쥐고 다스리고 있었다.
“저기를 내가 가져야 하는데…..”
탑에 오른 광동왕 장장익이 이를 앙다물었다. 부왕의 죽음으로 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지 벌써 4년째로 접어든다. 하지만 광주를 차지하겠다는 목표는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
“형님 전하. 또 여기 올라와 계십니까.”
“응, 너냐.”
하나뿐인 친동생 장장헌이 탑에 올라왔다. 형이 툭하면 이 탑에 올라와서 겨우 5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광주를 바라보며 갈망에 불타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찌 올라오지 않을 수 있느냐. 내가 그토록 원하는 그 도시가 저기에 있는데.”
불산도 애초에 작은 고을은 아니다. 경덕진과 더불어 중원의 4대 도자기 산지[경덕진(강서), 주선진(하남), 한구(호북), 불산(광동)]이자 철재의 산지로 예로부터 유명했다. 명나라가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이곳도 상당한 쇠퇴를 겪었으나 지금은 옛 영광을 거의 회복했다. 광동왕이 여기를 수도로 삼은 지도 벌써 14년이 흘렀다.
장장익은 그때부터 실질적인 광동왕으로서 광동을 통치하고 있었다. 부왕은 장장익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모든 권한이 있음을 분명히 했고, 아들이 청하지 않는 한 나랏일에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는 그저 삶을 즐기는 데만 신경을 썼다.
부왕의 지원에 힘입어 장장익은 광동을 번영하게 만드는 일에 최선을 대했다. 대외무역과 수출품 생산을 위한 제조업을 장려하고, 농사를 확대했다. 처음 몇 년이야 헤매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주 능숙하게 나라를 다스리게 될 수 있게 됐다.
“그럼요. 다 형님 전하께서 쌓아 올리신 나라가 아닙니까.”
“그래. 그래서 목숨도 걸었지.”
장장익은 후송군이 쳐들어올 때마다 전장에 나가 직접 군을 이끌었다. 세자가 직접 칼을 휘두르며 진두지휘하니 군사들의 사기도 높았다. 몇 차례에 걸친 후송군의 침략을 모조리 막아낸 데는 장장익의 공이 있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애쓴 끝에 성도에 있는 숙부에게 얻어낸 건 고작 칙서 한 장 뿐이었다. ‘광동왕의 장자 장익을 세자로 책봉한다’라고 적힌 종이 한장,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나 더 있기는 하지. 너를 돌려 보내 주었으니.”
숙부인 승평제 장원검은 여섯 번 왕에게 아들 하나씩을 성도에 볼모로 남겨두도록 명했다. 말로는 가족이 완전히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런다고 했지만, 사실은 형과 아우들을 믿지 못해서 볼모를 잡으려고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숙부는 자기가 적자라고 그러는지 서자는 안된다며 적자를 놓고 가라고 했고, 부황에게는 적자가 이들 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둘째인 장장헌이 성도에 남아 10여 년을 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기약 없이 이어질 듯했던 볼모 생활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형 장장익이 동생을 데려가고 싶다고 하자 조정에서는 보내줄 수는 잇으나 그 자리를 대신할 새 볼모가 올라와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리고 장장익은 이를 받아들여 자기 셋째아들을 성도에 보냇다.
“세견이 그놈이 성도에서 잘 버틸 지 모르겠습니다.”
“너도 한 일인데 그놈이 못 버틸 이유가 있느냐.”
앞서 말했듯, 처음 형제들에게 볼모를 받을 때만 해도 숙부는 가족들이 자기 옆을 떠나는 게 아쉽다는 핑계를 대면서 아들 하나씩 남겨두라고 했다. 그때는 그래도 숙부에게 인질을 요구할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장장익은 성도에서 오는 대부분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었다. 세금 상납도 최소한으로 줄였고, 병력은 아예 보내지 않았다. 내정도 마음대로 했다. 숙부가 보낸 승상 채원호는 승상 저리에 있기는 하되 아무 실권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인질 교체 요구 따위는 무시하려면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장장익은 군말 없이 아들을 성도로 올려보냈고, 그 대신에 장장헌을 돌려받았다.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냥 해본 요구를 순순히 이앵하자 성도에서 도리어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선제(先帝)는 내가 동생보다 아들을 더 소중이 여길 줄 알았겟지. 하지만 세견이 그놈은 고작 아홉 살이었다. 아무 일도 못 하는 어린아이보다는 다 큰 어른이 된 네가 나한테 훨씬 큰 도움이 될 건 분명하지 않으냐.”
“제가 선제 폐하에게 감화되어 광동을 형님 전하의 손에서 빼앗아 선제 폐하께 바치고자 할 위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장장헌의 싱글거리며 질문했다. 숙부가 볼모를 잡아놓은 데는 단순히 인질을 확보하려는 의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성도에 잡아놓은 볼모를 황실에 충성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이를 이용해 번왕을 언제든 교체할 수 있다고 과시해서 번왕들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 위협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이들의 사촌, 백부인 운남왕 장원교의 셋째아들 장장선이 그런 사례였다. 장장헌보다 한 살 위였던 장장선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거 으뜸가는 가치라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장원검이 의도한 대로였다.
“선제 폐하의 뜻을 받들어, 형님 전하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고 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뜻 세견이를 보내고 저를 데려오시다니, 그때는 솔직히 놀랐습니다.”
“네가 그런 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않았느냐. 네가 장선이 녀석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아마 나도 운남왕처럼 했을 거다.”
운남왕 장장령은 황제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동생을 혐오했다. 그리고 숙부가 장장선을 앞세워서 운남으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했다. 그 혐오와 불안감을 한꺼번에 해소하는 방법으로 장장령은 성도에 자객을 보냈고, 목적을 달성했다. 그게 작년 여름이다.
“선제 폐하께서 쓰러지신 것도 반은 운남왕이 그 지경으로까지 막 나갈 줄은 몰랏던 데서 받은 충격 탓이 아니겠습니까. 운남왕 전하도 참.”
살수는 현장에서 자살했다. 아무 증거도 ㅇ벗다. 하지만 이런 살수까지 동원해서 장장선을 죽이려고 할 사람은 뻔했고, 누구도 범인이 누구인지 의심하지 않았다.
“뭐,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네가 성도에 충성하지 않는 건 이미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한양에 가서도 확실히 증명하지 않았느냐.”
5년 전에 한후가 죽었을 때, 부왕은 장장익의 건의에 따라 성도 조정과 별도로 조문하는 사절을 보내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이는 엄청난 효과를 얻었다.
“그때 네가 활약한 덕분에 한황은 우리 사신을 성도에서 온 칙사와 똑같이 대햇다. 어찌 그게 작은 성과 겠느냐. 그개 다 네 공이다.”
그 일이 선제의 위신에 똥물을 끼얹은 거나 마찬가지 행동이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선제가 자초한 일이었다. 장장익이 이뤄낸 일에 대해 합당하게 평가하고 적절한 보상만 해줬어도 자신이 그렇게까지 숙부를 무시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 광동을 지켜낸 건 순전히 내 공이다. 그런데 선제는 내 공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찌 선제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며 그 영광을 드높이려 노력하겠느냐?”
한의 국상을 맞아 사절을 보내기 2년 전, 후송은 또 광동을 공격했다. 3년 전에 있었던 침공에 비하면 훨씬 대규모였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승리를 거두었으나 성도에서는 어떤 보상도 없었다. 중앙군을 복구해야 한다면 돈과 사람을 요구했을 뿐이다.
“소금 장수 놈들을 상대로 우리 혼자 싸우게 내버려 둘 거면 광주라고 달라고 청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지. 그랬으니 내가 화가 안 나겠느냐?”
조정에서는 외국과 공식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 항구를 광주 한 곳으로 제안했다. 그 말은 여기 불산에서 제조한 도자기를 수출하려면 광주로 보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광주를 본거지로 하는 ‘관군’ 수군은 밀수를 단속할 권한도 지니고 있었다.
장장익은 교역으로 버는 수입을 늘릴 생각으로 숙부에게 광주절도사를 해체하여 광주를 돌려주거나, 아니면 광동에 있는 다른 항구에서도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숙부는 들어주지 않았다. 광주에서 거두는 수출세 수입이 줄기 때문이다.
“그따위로 구니까 내가 성도에 충성할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게 아니냐. 너도 그걸 아니까 내 뜻을 따라 한양에서 선제의 사신에게 제대로 골탕을 먹여주지 않았느냐. 그 작은 신발을 신고 성도까지 제대로 걸어 갈 수나 있었겠느냐만.”
작은 신발을 신긴다(穿小鞋)는 문장은 상대를 괴롭힌다는 은유적인 표헌이다. 북송 시대 어느 처녀가 좋은 혼처에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못된 계모가 신블을 작게 잘라서 의붓딸이 시집을 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처녀는 부끄러운 마음에 자살해버렸다고 한다.
“그 뒤로 성도에서 난리를 치긴 했지만, 그러면 뭐 어쩔 거냐. 형주에 있는 송군이 곧바로 사천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부터 걱정해야 할 판에 조정에서 우리한테 군사를 보내겠느냐?”
숙부 승평제는 격분하면서도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다. 자칫 광동이 대놓고 반란을 일으킬까 봐 두려웠기 때무이다. 결국 광도으로 내려온 것은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점잖게 쓴 편지 한 통뿐이었다.
장장익도 대놓고 반기를 드는 행동은 삼갔다. 유감은 많지만 그래도 일단은 한 집안이다. 왠만하면 칼을 뽑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좋다.
“오랫동안 고민했다. 저쪽이 황제니까 어찌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그냥 고개를 숙인 채로 계속 지낼지, 아니면 아예 반기를 들고 광동에 새나라를 세울지, 그 중간 어디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지.”
“그래서 결국 이번처럼 결정하신 겁니까, 형님 전하.”
“그래.”
마침 기회도 좋다. 숙부가 죽었고, 그 자리를 물려받은 태자는 장장익보다 한참 어리다. 옛날에 성도에서 함께 지내던 어린 시절에도 나쁜 사이는 아니었다.
“장현이 그놈도 바보는 아니다. 우리 요구를 들어주고 우리를 계속 신하로 놓아두는 편이 낫다는 것 정도는 알 거야.”
“형님 전하, 아무리 이 탑 위에는 우리 두 사람만 있다지만 호칭을 조심하시지요. 그래도 폐하이십니다.”
장장헌이 웃으면서 형을 다독였다. 오랜 성도 생활 덕분에, 그는 적어도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 쪽에서는 황제에 대한 예의를 절대 잃지 않았다. 장장익도 이를 알기에 동생의 참견을 괘념치 않았다.
“알겠다. 조심하지.”
장장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성도에 있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는 신하로서의 태도를 취해야 했다.
“과연 조정에 있는 북방 출신 중신들이 쉽게 설득이 되겠습니까?”
“우리 대신 그 설득을 해달라고 한 황의 부마에게 그렇게 성대한 환영을 베푼 게 아니냐. 한의 속담에 소금 먹은 놈이 물을 마신다고 했으니, 그놈이 받은 대접에 값을 치를 생각이 있으면 우리 일을 돕겠지.”
장장익이 기대에 찬 눈으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쪽에 수도 성도가 있었다. 아마도 지금쯤은 ‘소금 먹은 놈’이 거기에 도착했을 터였다.
– 2 –
성도에 있는 주서사가 주재하는 숙소는 청학관(靑鶴館)이라고 불렀다. 청학관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주서사 이인좌는 귀한 손님을 맞아 쩔쩔매며 접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고령위 나리.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어허, 왜 이러십니까. 말을 낮추십시오.”
본래 후금, 청, 일본, 유구에 나가있는 주재 공사는 정3품이다. 영감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분이다. 하지만 주서사만은 종3품으로, 다른 공사들보다 한 단계가 낮다. 그래도 이제 겨우 서른다섯이 된 이인좌가 주서사 자리에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진위사로 온 고령위 박문수는 종4품 부령이므로 이인좌보다 한참 급이 낮다. 나이도 여섯 살이나 어리다. 그러니까 이인좌에게 자기한테 고개를 숙이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닙니다. 고령위께서는 폐하의 주마이시고 또 진위사 정사라는 중책을 맡아서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마땅히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신하 된 자의 도리입니다.”
“허허, 이러지 마시라니까 참.”
결국 박문수가 포기하고 말았다. 이인좌가 올리는 인사를 받은 뒤에 부사 이형직까지 세 사람이 탁자에 마주 앉자 사천인 하인이 차를 가져왔다.
“황궁에 전갈을 넣어 조속히 신임 황제를 알현하는 일정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시는 길은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비교적 편했습니다. 강으로 움직일 수 있는 동안에는 배를 타고, 그 뒤에는 수레를 타고 산길을 넘었습니다.”
일차 경유지였던 광주는 주강(株江) 하구에 자리 잡고 있다. 진위사 일행은 하선하자마자 일단 광주절도사에게 불려가 거나하게 대접을 받았고, 광주절도사가 제공한 배를 타고 주강 상류로 올라가려는 참에 광동왕의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또 호화찬란한 접대를 받았다.
“아니, 국상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랬다고요?”
이인좌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박문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서 긍정을 표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여기 부사께서 이건 예가 아니지 않냐고 하니, 괜찮다고 하더군요. 황제께서 돌아가신 지 이미 반년이 다 되어 국상은 끝났다면서 말입니다.”
이건 진위사 일행이 늦게 도착한 탓이 좀 있다. 큰 배를 타고 움직이면 겨울 바다라 해서 크게 위험할 일도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일뿐더러 그렇게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는 일이라 하여 2월 초하루까지 출발을 미뤘다. 양력으로는 2월 28일이다.
“폐하께서 굳이 서두르지 말라고 언질을 주시긴 하였습니다. 우리가 좀 천천히 도착해야 서국인들이 더 애달아하리라고 하셨지요. 광주에서 배를 내렸을 때 광주절도사와 광동왕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 일행을 접대한 것을 보면 그 분부가 맞기는 하였습니다.”
다만 박문수가 생각하기에는 주상이 진위사의 출발을 늦추려고 한 진짜 이유에는 공주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공주는 정말로 박문수가 출발할 때까지는 자기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발을 늦춰준 게 아닐까. 딸을 위해서.
“그럼 성도로 오는 여비도…..”
“그렇습니다. 광동왕이 배도, 수레도, 도중에 필요한 경비도 모두 대었습니다. 참으로 그 성의가 놀라웠지요.”
성의를 보인다는 말은 뇌물을 먹인다는 말을 돌려서 할 때 쓰인다. 전부터도 있던 말이긴 하지만, 그 쓰임새가 갑자기 늘어난 건 중전의 상을 치를 때 찾아온 후송 사절단이 천하를 채울 만큼 선물을 뿌리면서 ‘그저 성의를 보일 뿐’이라고 포장한 이후였다.
“광동황은 허술한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히 나리께 바라는 게 있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황제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더군요.”
박문수가 종이 한 장을 펼쳤다. 이들과 함께 성도까지 올라온 광동왕의 사자가 황제에게 내놓을 요구사항의 사본이었다. 광동왕이 새 황제에게 요구하는 바를, 그 자리에서 동의해 달라는 게 광동왕의 요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