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424
3부 542화(1424화)
3.
3년 전 부친 원준이 사망했으니 이제는 원신이 마주 원씨 집안의 명실상부한 가주(家主)다. 원신은 하인과 토인, 왜인 등이 뒤섞여 있는 가복들을 재촉하며 잔치 준비를 진행했다. 차례를 지내고 이웃들과 함게 식사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신년 행사다.
“다들 서둘러라! 올해도 외숙께서 일족을 데리고 방문하러 오신단 말이다!”
원신의 외숙부는 신욱족의 대추장이다. 미주 원씨 가문이 한인, 토인을 가리지 않고 혼인 상대로 삼는 덕에 인연을 맺었다. 원씨 가문에서 지내는 차례에는 당연히 참석하지 않지만, 설날 같은 명절에는 꼭 사돈댁을 방문했다.
“나리, 그릇 창고 열쇠가 어디 갔는지 안 보입니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보게. 자, 여기 있으니 가져가게.”
잔치 때 쓰는 비싼 놋그릇을 넣어 둔 창고 열쇠는 원신이 늘 직접 가지고 다녔다. 도둑이 들어 놋그릇을 털린 일이 두 번 있어서 조심하느라 그런 것인데, 설날 잔치 준비를 하면서 열쇠를 내준다는 게 깜박 잊고 말았다.
“그게 다 형님이 너무 여색을 밝혀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기억력이 나빠져서 아는 것도 자꾸 깜빡깜빡 하시죠.”
“예끼, 이놈. 그게 오랜만에 본 형한테 한 말버릇이냐?”
올해는 동변에 있는 동생 원호도 설을 맞아서 가족과 함게 본가에 왔다. 원호는 군관으로 계속 복무하면서 순조롭게 승진해 지금은 어엿한 참령 나리다.
“하고 싶은 대로 말이나 타고 돌아다니니 좋으냐?”
“허허, 형님. 이게 다 집안을 위한 겁니다. 가뜩이나 조카들도 많은데 저와 제 자식들까지 여기 있으면 어떻게 그 몫을 다 챙겨주려고 그러십니까?”
“어험, 험.”
원신은 자기가 여색에 환장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건드린 시녀들이 워낙 많다 보니 자녀가 많기는 하다. 본처 소생 자녀가 2남 1녀인데 서얼 소생이 4남 6녀가 되었다. 한 밑천씩 떼어주어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 것도 큰일이다. 원신이 괜히 헛기침했다.
“뭐…..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본가는 진이와 선이에게 물여줄 것다. 나머지 녀석들은 모조리 동쪽으로 보내야지.”
동변에는 개간할 수 있는 황무지가 아직도 잔뜩 있다. 농장과 목장을 만들 수 있는 땅이 얼마든지 있다. 수많은 산줄기 어딘가에는 금맥이 있을 테고, 사냥할 짐승도 있다. 내보내야 하는 이들이 4명이 아니라 40명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보낼 수 있을 정도다.
“동변 땅이 다 차려면 멀었고, 그 땅이 다 차더라도 원미주가 있지 않으냐? 비옥하기로는 우리 북미주보다 더하다는.”
“그쪽은 불랑국 땅이라고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원미주가 얼마나 풍요로운 땅인지는 옛날 폐하께서 이쪽 미주에 계실 때 탐미군을 보내서 직접 확인했다. 끝도 없는 평원과 거대한 강, 논을 만들어 벼를 심기에 정말 딱 좋은 습지 등등이 펼쳐져 있었다.
“녀석들이 월경하다 잡히면 제 손으로 잡아서 은광에 보내 노역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니 괜한 욕심 부리지 말고 동변 안에서 터전을 잡으라 하십쇼.”
“알겠다. 야박한 놈 같으니.”
원신이 투덜거리자 원호가 피식 웃으며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이렇게 야박하게 굴지 못한 것 때문에 우리 집안이 미주에 건너오지 않았습니까?”
부귀영화에 미친 조상, 원균이 아니었다면 원씨 집안 같은 명문에서 미주로 이주할 일은 없었을 거다. 역도 이진의 역모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죽었다면, 그대로 만고의 충신이 되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원균은 욕심과 미련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리! 대추장 어르신께서 오셨습니다!”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형제는 차마 말을 더 꺼내지 못했다. 그때 하인이 급히 뛰어와서 손님이 도착했다고 알렸다. 형제는 서둘러 외숙부를 맞으러 갔다.
“오랜만일세, 조카님들.”
“어서 오십시오, 외숙님. 세배받으셔야지요.”
“자네들도 벌써 오십을 훌쩍 넘었는데 세배는 무슨. 됐네.”
신욱족 대추장의 정장을 갖춘 외숙부 김도연(金跳?), ‘물 위로 뛰어 오르는 금빛 연어’는 말에서 내리며 손을 저었다. 뒤따라 내린 사촌들이 당황해하며 부친을 붙들었다.
“아버님, 그래도 날이 날인데 예는 갖추셔야지요.”
“형님들, 이해하십시오. 아버님이 아무래도 옛날 분이셔서…….”
사촌들은 향교를 드나들며 나름 예와 도리를 귀동냥이라도 했다. 그래서 자기네 마을에서 자기네 방식으로 신년 제례를 올릴 때는 당연히 신욱족 옷을 입었지만, 여기에 찾아올 때는 갓을 쓰고 도포를 걸쳤다. 하지만 외숙인 김도연은 마이동풍 이었다.
“천지신명이 나와 너희가 품은 뜻을 모두 알고 있는데 절 한번 하고 마는 행동에 그렇게 집착할 이유가 무엇이냐. 그저 옛날식으로 둘러앉아 담배나 함께 피우자꾸나.”
“알겠습니다, 외숙부님.”
원씨 형제가 고개를 숙였다. 뭐, 외숙부가 이런 어른인 줄은 익히 아는 바 이니었던가. 인사를 나누고 그동안 쌓인 소식을 교환하는 사이 식사가 나왔다. 아랫사람들과는 별도로 상을 놓았지만, 밥상 위에 차려진 식사는 같았다. 한인들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신년 음식, 떡국이다.
“사냥에서 잡은 오리로 낸 국물에 곰고기로 빚은 만두를 넣어서 끓였습니다. 모두 기름이 아주 잘 올라 있더군요. 입에 맞으시면 좋겠습니다.”
“가을에 잡은 짐승치고 맛이 없는 게 어디 있던가?”
짐승은 겨울을 나려고 살이 오르고 사람은 그 짐승을 먹으며 힘을 낸가. 미주에는 어디든 사냥감이 품부해서 원씨 집안에서도 가축만 잡아먹는 게 아니라 사냥으로 고기를 구할 때가 많다.
“바다 건너 큰아버지께서 열심히 보살피시니 이 평화와 풍요가 유지되는 거지. 자, 그분께 술을 올리세나.”
김도연이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건배를 제안했다. 밥상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원씨 일족과 신욱족들이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폐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그분의 후손이 강물을 채운 연어처럼 풍족하시고, 그분의 통나무처럼 굵고 바위처럼 힘센 팔이 세상 끝까지 뻗어 모든 이를 봅듬어 안으시기를!”
한인이건 토인이건, 미주 백성들은 임금을 자신들의 어버이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기 미주가 대한의 땅이 된 지도 어언 백 수십 년, 그동안 미주에서 십 년을 지내고 자식까지 여기서 낳은 임금은 금상뿐이었다. 금상은 미주인들의 빛이자 영광이었다.
4.
도성 안팎이 시끄럽다. 사방에 붉은 장식이 휘날리고 악귀를 쫓는 폭죽이 터지며 악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듣다 보니 저것도 익숙해지는군요.”
조홀국 동부승지 정경신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 조홀국에 와서 저 시끄러운 폭죽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전쟁이 나서 누가 총을 소아대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저 폭죽 소리였다. 그의 형인 선전관 정희신이 미소를 지었다.
“익숙해져야지.”
조홀국에는 중국인이 생각보다 많다. 조정에는 한인과 일본인, 중국인이 비슷한 비중으로 섞여 있으니 민간에는 중원에서 흘러들어온 중국인이 상당수다. 특히 도시에 사는 상인들은 8할 이상이 중국인이다. 현재 조홀국 인구는 대략 40만. 그중 절반은 조홀국 토인인 말레이인이다. 나머지 중에서 절반은 이런저런 경로로 유입된 중국인이며 나머지 절반이 한인과 일인이다. 한인도 대개는 이들 형제처럼 대남도에서 건너온 이들이다. 본국 출신은 별로 없다.
조홀국왕 정명완은 되도록 자기 나라에 한인과 일인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장 많이 흘러들어온 이민은 중국인이었다. 아무래도 중국이 더 가깝고, 스스로 찾아오는 자들을 쫓아낼 정도로 여유가 있는 형편은 아닌 탓이다.
“때놈들은 붉은색이 길하다면서 좋아하지. 시끄럽기 짝이 없지만, 거슬려도 좀 참아라.”
“예, 형님.”
대한에서 남방과 가장 인연이 깊은 집안을 고르라면 역시 정씨 일족이다. 옛날 장조께서 내리신 명에 따라 대남도를 개척한 정일한 이래, 언제나 선봉에서 새 땅을 획득하던 집안이 바로 대남도 정씨 가문이었다. 정씨 종가는 백여 년에 걸쳐 대남도 제일 호족으로서 위명을 떨쳤다. 여러 분가 중에는 정지룡으로 개명하고 정가군을 세워 바다를 지배한 정종훈의 집안이 가장 유명했다. 본국에 신종하는 번국이라고는 하나 마침내 그 후손이 왕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제는 정씨 본가에서도 젊은이들이 자기 야망을 이루러 조홀국에 건너와 신하와 장수로 일한다. 국왕 정명완은 기존에 거느리던 신하들과 새로 들어온 친족들 사이를 잘 조율하며 그 위헤서 자기 권좌를 다지고 있었다.
“전하께서 그러실 수 있는 것도 오랜 고난 덕분이지. 본국에 계시는 폐하와 마찬가지야. 그저 귀공자로 태어나 고생 한 번 안 해보고 어느날 갑자기 보위에 오르면 누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겠느냐.”
“당연한 일이지요.”
귀한 자손일수록 고생을 시키라는 게 정씨 집안의 가풍이다. 본가의 대를 이을 종손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배를 타고 교역을 하건, 싸움터에 나가건 뭐든 험한 일을 맡아 제대로 한 뒤에야 가주 지위를 이을 수 있다. 그래서 종손인 정희신이 여기 와 있는 게 아닌가.
“전하게서 부르십니다! 어서 모이시랍니다!”
“알겠다.”
친위영에 속한 일본인 병사가 뛰어와서 두 사람을 찾았다. 이들은 국왕의 가까운 신하고 인척으로서 온갖 행사에서 빠질 수 없는 지위에 있었다. 오늘 열리는 신년례 같으면 더더욱 꼭 참석해야 하고 말이다. 신년례는 한양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행사를 다 마친 조홀국왕 정명완은 신하들과 함께 새해 첫 음식을 들었다.
“자, 조촐한 상이지만 맛있게들 드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조홀국은 큰 나라는 아니다. 아직은 인구도 적다. 동서양을 잇는 중계점으로서의 가치도 기존에 터를 잡은 말라카와 새롭게 부상하는 해사도 사이에 끼어서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조홀국에는 풍부한 주석광상이 있고, 광대한 숲이 있다. 더운 기후 덕에 농사도 일년내내 지을 수 있다. 그래서 정명완에게는 자기 궁궐도 짓고, 왕비에게 호젓하고 시원한 별국도 지어주고, 이렇게 신하들에게 잔치 정도는 얼마든지 베풀 여유가 있었다.
“박 상군, 오늘 떡국은 어떻게 끓인 떡국인가?”
조홀국 궁궐에 있는 궁인들은 대부분 한인이다. 왕비가 본국에서 시집오면서 함께 데려온 내관과 궁녀들이 궁궐 안을 꽉 잡고 있다. 물론 안인만 있는 건 아니다. 정명완은 백성들의 충성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왕비 외에도 일본인, 중국인, 조홀 출신 후궁을 각각 한 사람씩 두고 있다. 이들도 각자 자기가 데려온 궁인들을 따로 데리고 있다. 당연히 자기와 같은 핏줄들이다.
“수라간에서 말하기를, 닭으로 국물을 냈다 하였습니다. 만두는 물소 고기라고 했습니다.”
“모두 먹게 하느라 공을 들였군.”
중국인 신하들은 돼지고기를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조호르 토인 출신 신하들은 회교도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한인들은 고기라면 다 가리지 않고, 일본인들은 생선과 말고기를 좋아한다. 이런저런 사정을 다 살펴서 모두가 무난하게 먹을 음식을 만든 모양이다.
“앞으로도 모두가 인정하고 살아 갈 나라가 되어야 할 텐데……”
7년 전, 당숙부 정경완과 대화를 나누던 그 날이 생각났다. 아직도 새로운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정신없이 바쁘고, 바빠서 줄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던 시절이다. 그래도 이제는 기반도 좀 더 단단해지고 여유도 생겼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더 단단해지리라. 이제 일곱 살 난 원자 정주신이 물러받을 나라는 지금보다는 지금보다 훨씬 튼튼한 기반을 갖추었을 것이다. 과연 그때의 떡국은 무엇으로 국물을 내었을까.
5.
왕궁 부속 성당에서 종이 쳤다. 술루국왕 디에고 1세는 손에 든 펜을 내려놓고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업무를 잠시 멈추겠다고 선언했다.
“집정, 점심 식사부터 합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전하.”
산더미 같은 서류를 들고 와 결재를 받던 집정 이두명은 별다른 말 없이 물러났다. 비록 술루국의 내정이 거의 집정의 주관으로 이뤄진다지만, 왕에게 결재는 받아야 한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디에고가 출정하고 없으니, 그동안 쌓인 서류를 몇 달째 들이미는 거다. 밀린 서류에다 사인만 하고 끝내는 거라면야 디에고도 그다지 힘들게 여기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두명은 본국에서 보낸 어떤 지시에 따라 자기가 현지 사정을 살핀 뒤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상세하게 설명한 뒤에야 결재서류를 내밀었다.
“지겨워하시면 안 됩니다. 전하게서 술루국왕의 인을 받으신 이상, 이 나라가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여는 하지 않더라도 알고는 계셔야 합니다.”
“알고 있소, 집정.”
전임자 권기선은 자기가 만사를 알아서 처리하고 디에고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두명은 달랐다. 임기응변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내무대신 출신인 권기선과는 다르게 법무대신 출신이라 그런지 철두철미하게 규정에 따라 일했다.
“혹시 함게 들겠소?”
“아닙니다. 소인은 관식(官食)으로 먹겠습니다.”
왕궁 안에는 관리들이 밥을 먹는 식당이 있다. 집정쯤 되면 바깥에서 따로 음식을 가져다 먹어도 상관없건만, 이두명은 늘 관용식당에서 하급 관리들 옆에 앉아 밥을 먹었다.
“그럼 2시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럽시다.”
이두명은 시에스타(siesta) 따위에는 신경도 안 쓰는 원칙주의자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꼬박꼬박 낮잠을 즐기던 권기선이 그리워진 디에고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어서 오세요, 전하.”
식당에서 기다리던 도로테아가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프란치스코, 알레한드로 두 왕자와 세자빈 이씨가 나란히 서서 국왕을 맞이했다.
“오늘은 본국 달력으로 새해 첫날이니 함께 식사해야 할 것 같아 모두 불렀습니다.”
“고맙소, 왕비. 너희도 잘 왔다. 모두 앉거라.”
술루국의 공식 달력은 유럽식 그레고리우스력이다. 그래서 오늘은 사실 술루국에서는 1월1일이 아니다. 2월 5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본국 풍속으로는 오늘이 1월 1일이지. 그러니까 새해 음식을 먹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 새해 음식이 세자빈의 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작년에도 맛있었습니다, 전하.”
세자빈 이씨는 올해가 술루국에서 맞는 두 번째 설이다. 사실 세자빈에게 설날 음식보다 더 어색한 건 시부모와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술루 왕실 사람이 된 지도 벌써 3년째지만, 아직도 약간의 어색함은 가시지 않았다. 물론 디에고와 도로테아가 세자빈을 괴롭히거나 하는 건 아니다. 부모와 떨어져 멀리까지 온 며느리를 위해서 배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이씨도 시부모와의 식사가 두렵지는 않았다. 그저 시부모 및 시동생과 겸상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도 좀 어색할 뿐이다.
“볼내공, 너도 내년이면 열여섯이니 무예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마라. 네 형처럼 나를 따라서 원정을 나가야 하니까.”
“아바마마, 저는 아직 혼인도 안 했는데 굳이 싸움터에 보내셔야겠습니까?”
동생이 투덜거리자 세자인 비수공 프란치스코가 살짝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그럼 오늘 떡국을 안 먹으면 되겠군. 그러면 나이를 안 먹을 거 아니냐.”
“형님 저하, 임금 폐하 같은 농담은 하지 마십시오.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이들 형제는 부모가 유럽에 다녀오는 동안 한양에서 지냈다. 그동안 조부인 임금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들을 듣고 보고 배웠다. 하지만 알레한드로가 도저히 동감할 수 없었던 것 하나가 도저히 어느 지점에서 웃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임금의 농담이었다.
“자, 그만들 하고 떡국을 먹도록 할까.”
디에고가 웃으면서 두 아들의 말다툼을 말렸다. 시녀들이 쟁반에 담아 가져온 놋그릇들이 차례로 식탁위에 놓이고, 그 구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냄새가 좋은데? 무슨 국물인가?”
“소뼈로 국물을 내고 훈제한 돼기 고기를 설어 위에 고명으로 얹었사옵니다.”
술루 왕실에서 떡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디에고와 도로테아는 한양에서 오래 지내는 동안에 맛을 들였고, 두 왕자도 지난 몇 년 동안 한양에 머무르면서 떡국을 즐기게 되었다. 세자빈 이씨야 굳이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많이 먹어라. 그래야 원손도 건강하게 자랄 게 아니냐.”
“송구하옵니다.”
세자빈 이씨는 반년 전에 첫아들 후안을 낳았다. 디에고는 첫손자를 무척 귀여워하며 그 소식을 기쁘게 한양에 알리고, 스페인에 있는 어머니에게도 알렸다.
“어서 둘째 손자도 안겨주면 좋겠구나. 음, 알레한드로 이 녀석한테도 이제 슬슬 짝지어줄 신붓감을 찾아주기는 해야겠는데…. 과연 이 축구밖에 모르는 개구쟁이 녀석과 평생을 함께해 줄 아가씨가 있을지 모르겠단 말이지.”
“아바마마!”
얼굴이 빨개진 알레한드로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식당은 왕실 가족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